장표
1. 촉한의 인물
張表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의 인물. 자는 백달(伯達).
촉군 성도 사람으로 양희, 정기, 양태 등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고 장중한 의표와 태도를 갖췄으며, 처음에는 명성과 관위가 양희와 같았고 후에 상서까지 올랐다.
249년에 마충이 사망하자 안남장군이 된 것과 동시에 그의 후임으로 249년부터 253년까지 내항도독이 되었으며, 장표는 당시의 명사로 청렴과 명망이 마충을 뛰어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염우가 되었으며, 258년에 후장군을 지냈고 양희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른데, 익부기구전에서는 장숙의 아들, 화양국지에서는 장송의 아들이라 했기에 배송지는 이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다고 했다.
중국의 연구자인 임내강은 상충되는 기록에 대해서 장표는 본래 장숙의 아들이었다가 장송이 일찍 죽었기에 후사가 없어 양자로 보냈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양희보다 먼저 사망한 점을 고려하면 258년에서 261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 후한의 인물
張表
(? ~ 168)
자는 원이(元異).
기주종사로 행적은 알 수 없고 관직이나 가문은 상세하지 않지만 168년 3월 계사일에 병으로 눕다가 사망했고 요절했다고 한다.
그가 죽자 비석을 세웠고 이 비석의 예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중한 글씨체라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 서예사에서는 거론되는 일이 별로 없고 당읍령비봉비와 문체가 유사하다고 한다. 비석의 예서에 대한 출처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 비석에 대한 기록은 예석에 기록되어 있고 임하필기에 이 비석이 단주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18세기에는 원본 또는 이를 복구한 비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석에서 사군이 독우에게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벼락을 쳤다는 구절이 있는데, 권세가 대단했다는 것으로 이는 매를 인간에 비유한 것이다. 또 반환이정이라는 말이 있어서 대개 한나라 사람들을 질을 중시해서 짐승에 비유하는 걸 꺼리지 않고 畔桓(반환)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 글자는 般桓(반환)으로 의심되고 글자를 간소하게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