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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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의찬은 1913년 4월 16일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쇄운리(현 동해시 쇄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척청년동맹의 간부로서 1930년경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쇄운리에 거주하는 청소년으로 조직된 삼운수성회(三雲修成會)의 교양부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1931년 12월 중순부터 1932년 1월 29일까지 삼운수성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 중인 6개소의 야학에서 학생 1백여 명에게 교과서로 『농민독본』을 가르치고 조국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32년 1월 경 수성회관에서 현 제도를 타파하고 사회개혁에 노력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1932년 2월 6~7일 이틀에 걸쳐 쇄운리 소재 성황당 4개소를 미신타파의 목적으로 파손하였다. 이로 인해 건조물 파괴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동년 5월 7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후 정의찬은 삼척청년동맹이 삼척농민조합으로 바뀌게 되자, 이에 가입하였고 1933년 9월 삼척군 북삼면농민조합(北三面農民組合)에서 활동하던 중 체포된 뒤, 1935년 11월 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쇄운리로 돌아온 그는 즉시 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과 함께 농민조합의 재건을 도모, '북삼면농민조합 재건위원회(北三面農民組合再建委員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쇄운리 책임자로 활동하다 다시 1937년 2월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의찬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7년 4월 30일 함흥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15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8년 5월 31일 출소하였다. 그 후 동해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8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