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정씨

 




[image]
'''延日 鄭氏
연일 정씨
[1]
'''
}}}
'''관향'''
경상북도 포항시
'''시조'''
정종은(鄭宗殷)
'''중시조'''
정습명(鄭襲明), 정극유(鄭克儒)
'''집성촌'''
경상북도 김천시, 봉화군, 의성군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기도 용인시, 평택시
충청북도 영동군
함경남도 고원군
평안남도 룡강군
황해도 평산군
'''인구'''
393,622명[2](2015년)
1. 개요
2. 인구통계
3. 본관과 성씨의 기원
4. 역사
4.1. 시조 묘에 대한 전설
5. 집성촌
5.1. 용인시 집성촌유래비
6. 항렬표
7. 역대 과거 급제자 (조선시대)
8. 양자 입적 문제
9. 주요 인물[3]
10. 관련 사이트
11.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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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의 연일 정씨 시조를 모시는 남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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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의 초상화'''
경상북도 포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연일 정씨는 영일 정씨, 오천 정씨, 포항 정씨로도 표현하고, 전부 같은 가문이다. 포항시의 옛 이름이 연일, 오천, 영일이라 지명이 변천해왔어서 집안마다 달리 부를 뿐이다.[4]

2. 인구통계


2015년 인구통계에서 정(鄭)씨는 5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이다.
정(鄭)씨는 우리나라 총인구 49,705,663명중 2,151,879명인데 그 중 연일정씨의 인구는 393,622명인이다.
동래 정씨 다음으로 많으며, 연일 정씨 밑으로는 경주 정씨가 있다.
연일정씨, 영일정씨, 오천정씨는 모두 연일정씨의 다른 이름이며 각각의 인구는 연일정씨 284,290명, 영일정씨 65,991명, 오천정씨 43,341명이다.
보통 본관인 포항시를 위시로 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영동에 많이 살고 있다.

3. 본관과 성씨의 기원


영일(迎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의 근오지현인데 경덕왕이 임정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연일(延日)로 고쳐서 경주에 속하게 하였다. 이 후, 명칭이나 영역에 큰 변화가 없다가 1914년 일제가 이웃한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을 병합하여 영일군(迎日郡)으로 개칭하였다.
연일 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육부촌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 봄, 유리왕으로 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 정종은이 신라조에서 간관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 약목현에 유배된 후, 후손 정의경이 영일로 이거하여 호장을 지내고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로 시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가 실전되고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조에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와,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있고 있다.

4. 역사


시조는 신라 때 간관 정종은(鄭宗殷)이다. 주요 종파로는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중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현종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정자피(鄭子皮)가 1세조인 '''양숙공파(良肅公派)'''가 있다. 여담으로 지주사공파에서는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감무공파에서는 송강 '''정철(鄭澈)'''이 잘 알려져 있다.
연일 정씨 가문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 5명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고 정유성(鄭維成:현종 때의 우의정)을 비롯한 3인은 정몽주의 후손이고 정홍명(鄭弘溟:인조 때 대제학)·정호(鄭澔:영조 때 영의정)·정우량(鄭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정철의 후손이다.
종파별 출신인물로는 지주사공파에, 상술한 정유성의 손자이자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에는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 등의 인물이 있다.

4.1. 시조 묘에 대한 전설


시조 정습명은, 고려조 의종의 태자적 스승, 즉 국사(國師)로 태자의 교육과 인종조 폐위 논란에서 태자를 지켰던 충신이다.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에 정습명(鄭襲明)을 제향하는 남성재와 신도비가 음성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구 연일현청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 현청에 새로 부임하는 현감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는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이 소문을 들은 담력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하여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임 첫날, 두려움 중에 밤을 새우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 현청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감이 엉겁결에 대답하였다.

“정확한 묘자리가 어디입니까? 알려주시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새벽 일찍 까치 한 마리 날아와서 맨처음 앉는 자리가 그 자리니라.”'''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까치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까치가 날아와 있었다. 훗날 마을의 촌로들에게 까치가 날아와 앉은 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현청부지가 정습명의 묘역임을 알게 되었다. 현감은 서둘러 현청을 고읍리로 옮겼다고 전한다.


5. 집성촌



5.1. 용인시 집성촌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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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 465-3'''
'''설립일'''
'''2016년 11월 6일'''
연일 정씨 왕곡파종중은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인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서 동남쪽으로 9km 떨어진 모현읍 왕산리에 종중회관을 둔 종중이다.
1630년에 들어 포은 선생의 직계후손인 정응선(별좌공), 정명선(판서공), 정종선(포천공) 3형제 중 정종선 포천현감께서는 후손을 번창시키고자 당시 풍수지리에서 금구몰니형(金龜沒泥형,금거북이 알을 낳으러 진흙에 꼬리를 넣은 형세)의 길지로 되어있는 왕구리(旺龜里,모현읍 왕산리의 옛이름)에 장성하신 맏손자 정지한을 보내어 포천현감의 집안을 이어가도록 하였는데 불행히도 정지한은 대를 이을 적자가 없어 1750년 경 황해도 첨추공파의 정련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 세거하던 포천공파 서자 3형제 정연,정윤,정단과 갈등이 있어왔다. 1960년대 들어 한국외대 캠퍼스가 집성촌에 들어와 땅값이 오르게 되자 첨추공파 후손이 차명을 이용하여 종중산을 차지하는 일이 생기고 이어지는 재산싸움으로 종중이 평화롭지 않았다. 2013. 10. 26. 정덕화가 통합회장으로 선출되어 경향각지로 흩어진 종원들을 모아 종중을 정립시키고 집안의 이러한 역사적인 유래를 후손들에게 전승하고자 2016년 11월 6일 파조 정지한의 시제일[6] 종중회장이던 정덕화[7]가 종중의 위토였던 곳에 그 유래를 밝히는 연일 정씨 집성촌유래비를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 집성촌은 많은 후손들이 경향각지로 진출하여 눈에 띌 정도로 거주하는 이가 줄었다.
참고로 용인이 세거지가 된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복권된 정몽주의 묘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517년 종중때 능원리 일대 약 700여 정보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수백 년 동안 자손들이 그 곳에 정착, 번성하였다. 이후 손자인 정보(鄭保)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면서 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숙종 때 단종이 복권되고 사육신이 포상받게 되면서 연일 정씨도 다시 번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의 7대손에 이르러 별좌공파·판서공파·포천공파로 분파되었고 포천공 정종선(鄭從善)의 손자인 정지한(鄭之翰)이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왕산리 왕곡마을 속칭 왕구리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이후 갈담리와 일산리 등으로 퍼졌다.

6. 항렬표


'''해당 항렬표는 임의로 가져온 것이고 출처가 명확치 않음. 각 파에 따라 항렬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니 유의해서 보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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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과거 급제자 (조선시대)


  • 정회(鄭淮)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 정철(鄭澈, 1536 丙申生) : 문과(文科) 명종17년(156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종명(鄭宗溟, 1565 乙丑生) : 문과(文科) 선조25년(159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승명(鄭承明, 1604 甲辰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시대(鄭始大, 1615 乙卯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도성(鄭道成, 1641 辛巳生) : 문과(文科) 현종11년(167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식(鄭○, 1664 甲辰生) : 문과(文科) 숙종25년(169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원달(鄭遠達, 1735 乙卯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3 갑과(甲科) 장원급제
  • 정해관(鄭海觀,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고종27년(1890) 기로응제시 장원급제
  • 정광윤(鄭光胤,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중종18년(1523) 알성시 을과(乙科)

등 모두 42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8]

8. 양자 입적 문제


고려의 문하시중이자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집안에는 양자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
가통(家統)을 중시했던 조선 후기에는 양자법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자를 들이기 위해서는 정실 부인은 물론 부실(副室)도 아들이 없어야 했고, 생가와 양가 부모의 합의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조건이 갖춰져도 왕의 재가를 얻고서야 예조에서 입안(立案)이라는 인준문서를 발급해 주었다.
포은의 자손들이 사회적인 대우는 받았지만 가세는 무척 빈한했던 것인지 12세손이었던 정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인 안동 권씨 집안에 외탁 되는 등 처지가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송시열은 정호에게 벼슬과 식량을 내려 줄 것을 숙종에게 건의한 적도 있었다.[9] 그러나 배려가 무색하게 정호의 가세는 펴지지도 않았고, 어린 아들 하나만 달랑 남겨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 버렸다. 이에 의정부의 최석정, 이정신이 나서 아들의 생계대책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주었지만, 그 아들 역시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결국 포은집안에는 가난과 종통의 단절이라는 이중고가 찾아들었다. 이를 두고 관료사회에서 연민의 시선이 많아, 영의정 오명항은 정호의 조카 정도제를 종손으로 입양하고 예조의 증명서도 단단히 받아 두어 자손을 잇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조카 정도제마저 요절해버렸다. 추후 좌의정 김재로영조의 면전에서 포은 종손의 입양문제를 간청하여 재가를 얻었으니, `건륭원년6월일예조입안`(乾隆元年6月日禮曺立案, 1736)이 바로 그 증명서다. 하지만 이 때에도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궁여지책으로 정도제의 생가 아우 정하제가 양자로 내정되었지만 여기에도 곡절이 있었다. 정하제는 정정석의 외아들이었고, 정하제를 양자로 들이기 위해서는 정도제의 입양사실이 파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은의 `종통잇기`에 골몰했던 신료들은 정도제의 입양 파기와 하제의 입양을 아예 공론으로 정해 버렸고, 포은의 후손이며 양명학의 대가였던 정제두도 이에 동의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사전준비를 마친 신료들은 왕과 대신이 상견하는 자리에서 좌의정이 나서 사안을 매듭지었다.[10]

9. 주요 인물[11]


  • 정과리 - 문학평론가. 본명: 정명교
  • 정광현 - 前 서울대 교수, 근대 법학자
  • 정구영 - 법조인, 정치인
  • 정규식(1920)
  • 정도영 - 정치인
  • 정동윤(정치인)
  • 정몽주 - 고려의 문하시중. 고려의 마지막 충신.
  • 정무식
  • 정문헌 - 정치인
  • 정소영(1932)
  • 정수성 - 정치인
  • 정승화 - 군인
  • 정연주 - 前 KBS 사장
  • 정운갑 - 정치인
  • 정우택[12] - 前 정치인[13], 前 충북지사
  • 정운찬 - 前 국무총리
  • 정의용 - 외교관, 정치인
  • 정의화 - 前 정치인, 前 국회의장
  • 정일영(1926)
  • 정재문 - 정치인
  • 정주일 - 코미디언, 예명은 이주일
  • 정종섭 - 법학자, 정치인
  • 정종택 - 정치인
  • 정지용 - 시인
  • 정지택 - 두산중공업 부회장
  • 정준영 - 前 가수, 前 방송인
  • 정진영 - 아이돌 'B1A4'의 리더 겸 가수
  • 정철 - 조선조 정치인, 문인[14]
  • 정치근 - 전 법무부장관
  • 정치훈 - 군인, 방송인, 국방뉴스 앵커
  • 정태옥 - 정치인
  • 정태원 - 前 대법관
  • 정평화 - 밴드 달 좋은 밤
  • 정필교 - 아이돌 '신화'의 멤버 겸 가수, 예명 신혜성
  • 정한용 - 배우
  • 정해영 - 前 기업인, 정치인
  • 정호용 - 前 육군참모총장
  • 정희수
  • 정희택 - 前 국회의원, 前 감사원장

10. 관련 사이트



11. 관련 문서



[1] 지역에 따라 오천 정씨(烏川 鄭氏),영일 정씨(迎日 鄭氏)라고도 한다.[2] 연일 정씨 284,290명 + 영일 정씨 65,991명 + 오천 정씨 43,341명 =393,622명[3] 가나다 순으로 적어주세요.[4] 이외 다른 명칭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포항시 지명이 시대별로 달랐기 때문일 뿐, 다 같은 조상으로부터 계보를 잇는 동성동본이다.[5] 1973년 7월 1일 봉화군 상운면으로부터 두월리와 함께 편입됨[6] 매년 음력 10월 5일이 속하는 주의 일요일 10시[7] yuniljung.com/ 운영자[8] 문과 111명, 무과 34명, 사마시 277명, 의과 1명,음양과 2명, 율과 1명[9] 정몽주의 열성팬이었던 송시열은 이 문제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자세한 사항은 송시열 문서 참조.[10] www.aks.ac.kr[11] 가나다 순으로 적어주세요.[12] 25세손 'O澤' 항렬[13] 형제 : 정지택, 정윤택[14] 감무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