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추

 


1. 개요
2. 생애
2.1. 망명
2.2. 음악가로서의 삶
2.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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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윤이상


1. 개요


'''조국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음악가''' 정추는 월북 후 소련에 유학하여 활동한 음악가이다.

2. 생애


1923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령 전라남도 광주부(현 양림동)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광주서중 재학 중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양정 26회) 1942년 니혼대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다가,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친구들과 탈영을 도모하고 있을 때 일본이 패망하여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던 조국은 바로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맞이하였으며, 이후 정추는 북한으로 넘어가 음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2.1. 망명


정추는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그 당시 소련 모스크바 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추는 러시아로 1952년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 도중 1956년 북한에서 소환 명령을 받고도 되돌아가지 않고, 소련 정부에 망명을 신청하여 자발적 망명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북한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윤이상 음악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라고 볼 수 있다.[1]북한은 당시 정추를 북송하라고 요구했지만 소련 당국은 이를 수용하는 대신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정추를 추방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나라로 분리되면서 정추는 카자흐스탄의 시민권자가 되었다.

2.2. 음악가로서의 삶


우선 외가가 호남의 만석꾼 집안이였기에 그당시 금수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외할아버지와 독일에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다닌 외삼촌 정석호[2]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일본 유학 이후 북한에 가서[3] 음악활동도 꾸준히 하였으며, 소련 망명 및 카자흐스탄 거주에서도 열성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그의 교향곡 ‘조국’과 ‘1937년 9월 11일 스탈린’, 그리고 그가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등이 존재한다.

2.3. 사망


그가 바래왔던 조국의 통일을 결국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체 2013년 6월 13일에 90세라는 나이로 타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타계하였다.
그나마 최승희와는 다르게 카자흐스탄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가서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google.com/amp/s/www.voakorea.com/korea/korea-life/1681316%3famp
[1] 윤이상은 1956년 유럽으로 유학 갔다가 1995년 망명지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다.[2] 베를린 유학 당시 같은 학교에 벌교 출신 음악가 채동선이 있었다.[3] 당시 친형인 정준채 영화감독의 권유에 의해 평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