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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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윤이상 (尹伊桑, Isang Yun[1])
출생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2]
사망
1995년 11월 4일
국적
독일 [image][3]
직업
작곡가
가족
배우자 이수자, 자녀 딸 2명
학력
베를린국립음악대학
경력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
1990년 북한 조국통일상
1995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선정 올해 최우수예술인 공로부문
1995년 독일문화원 주최 괴테메달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생애
2.1. 한국에서
2.2. 유럽에서
2.3.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납치와 투옥
2.4. 서독 망명 이후
2.5. 타계와 유해 송환
3. 창작 성향
4. 사생활
5. 친북 행적 논란
5.1. 오길남 논란
6. 작품 목록
6.1. 대규모 교향곡
6.2. 실내 교향곡
6.3. 관현악
6.4. 현악합주, 대/소규모 앙상블
6.5. 협주곡
6.6. 실내악
6.6.1. 2중주
6.6.2. 3중주
6.6.3. 4중주
6.6.4. 5중주
6.6.5. 7중주~10중주
6.7. 독주
6.7.1. 피아노/하프시코드/오르간
6.7.2. 무반주 악기
6.7.2.1. 현악
6.7.2.2. 목관
6.8. 가곡
6.9. 합창
6.10. 오페라
6.11. 그 외
7. 수상 경력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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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태생의 독일에서 활동한 작곡가. 국악을 서양 악기로 연주하기 위해서, 서양 현대음악 작곡법에 불협화음[4]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세계적인 작곡가.

2. 생애



2.1.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흔히 통영이 윤이상의 고향으로 언급되지만, 호적 기록에 따르면 산청으로 되어 있다. 단 당시에는 여성이 출산 전후에 친정에 머무르는 관습이 있었으며, 산청은 윤이상 모친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생후 3년 뒤 가족들과 함께 충무로 이주했고,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윤이상은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충무(통영)라 했다.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실에 비치된 풍금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서양 음악의 기초 이론을 배우는 한편 남사당패판소리 명창의 공연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가가 배고프고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금지했고[5], 상업학교로 아들을 진학시켰다.
하지만 입학 후 2년 뒤에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경성으로 갔고, 옛 대한제국 소속의 군악대였다가 방송국 일을 맡고 있던 시위연대 출신의 연주가 겸 작곡가 최호영으로부터 화성학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상업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오사카로 유학했고, 첼로작곡, 음악이론 등을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배웠다.
귀국 후 잠시 민족 교육을 목표로 세워진 사립 학교인 화양학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다시 도쿄유학했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킬 틈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6]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옮겨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했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 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이듬해 프랑스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다.

2.2. 유럽에서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서독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7] 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 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 형편은 늘 좋지 않았고, 프라이부르크쾰른을 거쳐 1964년에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시 서베를린에 이주했다. 쾰른 정주 시절 1963년 같은 통영 출신이자 죽마고우였던 작곡가 최상한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떡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윤이상은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친구를 만났지만, 이념과 사상으로 인한 서로 간의 입장 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6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 이 초연되었고,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2.3.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납치와 투옥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8]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9]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동백림 사건). 그러나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나고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동조죄 및 탈출죄)으로 징역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수감 중 동백림 사건의 불법적인 체포 과정과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 등으로 인해 1969년 3월29일 한국 정부가 형 집행 정지를 결정, 서독으로 돌아갔고 1970년 815 특사로 잔형이 면제되었다.[10]
상세한 내용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 보고서 동백림 사건 진실규명 자료를 참조;[11]
투옥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을 완성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국제 여론이 확산되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슈톡하우젠, 리게티 죄르지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며, 이는 박정희 정권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12] 이후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투병 중에도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강석희 같은 젊은 작곡학도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1969년 석방되어 서독으로 돌아간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13]

2.4. 서독 망명 이후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 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14]
1982년부터 남북한 양측에서 윤이상 음악의 공연이 개최되기 시작했고,[15] 1983년부터 87년까지는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했다. 1987년에는 70회 생일 기념으로 서독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개최되었으나,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휴전선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공동으로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남북 양측에 제의했으나, 양측 이견이 너무 커 무산되었다. 그 대신 1990년에 남북의 예술인들이 예술단을 구성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공연했고, 분단 이후 개최된 남북 간의 첫 교환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폐렴 등의 추가 질환이 발생했고, 산소호흡기와 휠체어 없이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 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 또한 과격 운동권 인사들이 베를린에서 벌인 행각[16]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마지막 작품이 된 '화염 속의 천사' 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초연했다.

2.5. 타계와 유해 송환


그러나 병세 악화는 계속 진행됐고, 폐렴이 재발하여 1995년 11월 4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대한민국이 낳은 가장 천재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박정희 군부때 동백림사건 조작으로 박정희 군부에 환멸을 느끼고 독일로 출국 후 사망때까지 한번도 대한민국에 오지 않았다. 장례는 유언에 따라 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가토우 지방 묘역(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안장되었다.[17] 이후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고인이 평소 원했던 통영으로 이장을 추진하던 중,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김정숙 여사가 베를린 묘소에 동백나무를 헌화한 것을 기화로 드디어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 2018년 3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18] 다만 보수단체 등의 반발을 우려하여 행사는 조촐하게 진행했다.

3. 창작 성향


유년기 때부터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골고루 들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인지, 이후 독일로 옮겨가서도 이러한 양상을 계속 유지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민요나 전통음악 풍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 동시에 쇤베르크버르토크의 현대적인 기법을 절충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독일에서 발표한 첫 작품들은 12음 기법 등 서구 현대음악 기법의 강한 영향력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동양의 전통 음악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음의 떨림이나 호흡이 길고 음의 움직임이 적은 선율, 이를 표현하기 위한 특수 연주법 등을 가미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작품은 너무 연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종종 연주자들로부터 불만을 듣거나 심지어 공연을 거부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교착적 음향'의 경우, 초연 연습 때 단원들이 윤이상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온갖 욕을 했을 정도였다. 지휘자가 나서서 달래보았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는데, 결국 윤이상이 무대 위로 올라가 첼로 파트의 어려운 대목을 직접 연주해 보이자 잠잠해졌다. 가까스로 공연이 개최되기는 했지만, 청중석에서도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나올 정도로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이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 문제가 아니었고, 실제로 윤이상은 여타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가, 지휘자들과 여러 차례 토론하면서 작곡을 진행했다. 윤이상과 친분을 맺었던 음악인들 중에는 각기 해당 악기의 본좌로 손꼽히는 하인츠 홀리거(오보에), 오렐 니콜레(플루트), 에두아르트 브루너(클라리넷), 지크프리트 팔름(첼로),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바이올린), 우어줄라 홀리거(하프) 등이 있었다. 이런 대가들을 위한 곡이다 보니, 기교적으로 넘사벽에 가까운 난이도가 될 수밖에.
그리고 초연 후에는 기악과나 성악과 학생들의 수업을 함께 지도하면서 '결코 연주 불가능한 곡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는 꾸준한 연습과 교육의 결과 학생들도 연주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음대 관현악단도 윤이상 관현악곡을 연주하고 있을 정도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고, 작품의 메시지가 강해지는 대신 음악의 어려움이 경감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가사가 들어가는 곡의 경우, 노자의 도덕경이나 성경 등 동서양 종교/철학서의 인용 외에 넬리 작스나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같이 나치에 의해 탄압 당한 유대인/반체제 인사의 시를 사용해 그러한 메시지를 강화했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의 경우 독일 유학 후 최초로 한국어 가사를 택했는데, 이 곡에서는 백기완이나 고은, 문병란, 박봉우, 박두진, 양성우, 김남주 등의 재야/민족계 문학가들의 시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부터는 신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듯 작품이 더 유순해지고 받아들이기 한결 편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렇다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령 마지막 작품인 '화염 속의 천사' 의 경우, 1980년대에 분신 자살한 학생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곡이라고 분명히 발표했다. 표제에 반영되던 아니건 간에, 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인종차별, 인권유린, 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부터는 실험성이나 전위적인 면이 줄고 작품의 구조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등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시대 별로, 그리고 작품 별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받아들여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창조한 업적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지금도 독일에서 활동한 동양인 현대 작곡가들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고,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호소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도 그의 어법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독일을 거점으로 하는 '국제윤이상협회' 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윤이상 작품의 보급과 연구, 연주, 녹음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4. 사생활


윤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다섯 달 전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이수자였다. 중매가 아닌 연애 결혼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처음에는 윤이상이 결핵 환자였다고 해서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결혼 직후 딸인 윤정이 태어났고[19], 아들인 윤우경은 1954년에 태어났다.
한국에서는 상당한 애처가였고 가정적인 인물이었지만, 독일로 옮겨간 후 서구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었는지 아내와 아이들이 1961년과 1964년에 각각 독일에 와서 합류한 후에는 종종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가 회복되자마자 터진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에게 지울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인 상처를 남겼고, 이 때를 전후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성격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엄격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작곡할 때는 절대 정숙을 요했기 때문에 번잡한 주택가에서 살 때는 자주 짜증을 냈다고 한다. 교육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제자들도 '엄한 서당 훈장만큼 무서웠다' 고 회고할 정도. 하지만 사제 관계를 떠나 학생들에게 유학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고 하고, 특히 동양인 유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항구 도시에서 살았던 것 때문인지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식욕도 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는 결핵과 당뇨병으로 인해 거의 손대지 않았고, 감자를 싫어해 독일 유학 초기에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구황 작물로서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섭취했는데, 처럼 매일 식탁에 감자가 올랐을테니 꽤나 곤욕을 치렀을 듯...

5. 친북 행적 논란


한편, 윤이상이 독일로 건너간 이후 사회 활동을 두고 국내에서 논란이 있다.
초기 윤이상은 반일 활동을 벌일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진행된 체제 대립은 그리 깊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20]
윤이상도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가 된 부산에서 반공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만든 바 있었고, 종전 후에는 육군 장교들과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한 위문품이나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로 활동 거점을 옮긴 뒤의 행적이었다. 특히 동백림 사건 이전부터 북한과 자주 접촉하고 금품을 수수하기도 하였는데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나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고 이에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해 관심이 더 생긴 걸로 보인다.
먼저, 생전에 김일성한테 쓴 편지들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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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김일성을 찬양한 이러한 내용을 보았을 때 그의 친북 행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위 기사를 쓴 조선일보에서는 그 외 사례도 다음처럼 제시하고 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서거1돐을 맞이하여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 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1963년에 북한을 방문한 것도 쟁점 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윤이상의 북한행은 동백림 사건 당시 그를 납치하려고 독일에 간 중앙정보부 요원들조차 몰랐고,[22]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에 퍼진 것은 재판 과정의 보도 때였다. 가시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처와 냉전으로 인한 반공주의가 강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무슨 목적이었건 북한에 갔다는 사실은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각종 국제법을 무시한 중앙정보부의 활동은 되레 외국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고,[23] 윤이상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는 심지어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거물 인사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 서명 운동에 참가한 다른 음악계 명사들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한스 베르너 헨체, 볼프강 포르트너, 보리스 블라허 등 약 15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여론은 대부분 사전 검열로 인해 한국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윤이상이 독일로 돌아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동백림 사건 수사 종결 후, 윤이상의 음악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장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거나,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단편적인 소식 정도는 간혹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특히 반 윤이상 조류가 극에 달했는데, 지휘자 임원식이 독일에 초청 받았을 때 '무악' 을 지휘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모 음악 잡지에서 유명 필진들을 대거 동원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임원식은 한국 음악계에서 급작스럽게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사상 검증' 논란에 휘말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여론을 주도한 잡지의 발행인이 윤이상과 부산사범학교 시절 음악교사로 함께 일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임원식은 동백림 사건 때도 윤이상의 무고를 주장한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했기 때문에, 이미 예전부터 적정한 때를 노리는 반대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82년에 대한민국 음악제를 통해 윤이상 작품만으로 꾸며진 연주회가 두 차례 열리면서 해금 기회를 맞았지만, 여전히 윤이상 작품이 수록된 음반과 악보는 수입 금지 혹은 제한 품목으로 묶여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오히려 윤이상 음악의 평가와 연주, 연구에 열을 올린 쪽은 북한이었고,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는 평양에서 초연되었다. 김일성은 윤이상을 '민족의 재간둥이'라 부르며 특별히 아꼈고, 그를 위한 윤이상 연구소를 설립, 평양에 8층 건물을 통째로 내주었으며 '윤이상관현악단'을 설립하고 윤이상과 가족을 위한 집까지 하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음악 사조를 '부르주아 반동적' 이라고 규정한 북한 정권이 유독 윤이상에게만 호의적이었다는 것에 대해 숨겨진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팽배하다. 김일성 사후에도 유훈 정치를 떠 받드는 북한에서는 이러한 김일성의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받은 연유로 윤이상에 대해 극진히 대우하고 관련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윤이상은 1990년 남/북/해외 민간통일운동 연대체를 목표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이 출범하자 해외본부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범민련은 범민족대회를 둘러싼 갈등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견제 대상이 되었고, 이후 범민련 내부에서도 단체의 성격, 통일 운동 방향을 둘러싸고 치열한 내부 논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범민련 남측본부 창립을 주도했던 문익환 목사가 1994년경 북한이 범민련을 대남공작기구로만 이용한다며 범민련 해산과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건설을 주장하면서 논쟁이 격화되었고, 상당수 인원이 이탈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윤이상은 이런 과정에서 해외본부 의장이긴 했지만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1990년대 말이 되면 범민련 해외본부는 광범위한 진보쪽 사회운동 세력이 참여한 연대체로써의 성격은 사라지고 NL 소수가 유지하는 조직이 되었다.[24][25] 1995년에는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26]
다음은 범민련과 관련된 발췌 내용이다.
내 남편 윤이상 - 169페이지 [이수자, 윤이상]
북한의 대남 전략 해부 이도형 남북 문제 연구소, 1996 - 335페이지
실제로 북한에서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에 대한 업적보다는, 정권 친화적 통일운동가로서의 행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매년 가을마다 윤이상 음악회를 열고 있고,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연구소 부속 관현악단윤이상관현악단까지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지원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실지로 북한은 유명한 현대사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윤석민이라는 가명으로 두 번에 걸쳐서 영화화 할 정도로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27]
윤이상은 작품 활동 외에도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계의 거물들과 만나 한국의 민주화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고, 한민통이나 범민련 등 재야 운동가들의 조직에서도 의장을 맡는 등 민주화/통일 운동에 참가한 경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을 '반국가/친북한 활동' 으로 규정하고 있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러한 행적만으로 가루가 되도록 깔 수 있는 떡밥을 보유한 셈이었다. 아울러 재독 유학생들에 대한 포섭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정치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이런 사실과 별도로, 1980년대 후반에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의 해금과 함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해금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와 함께 거부 일변도였던 국내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평가도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고, 윤이상에게 직접 배웠던 강석희와 백병동, 김정길 등이 한국 작곡계의 거물 인사가 되면서 간접적으로도 공적이 언급되는 등 많이 호의적인 쪽으로 선회했다. 한국 출신으로서 가장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지휘자인 정명훈도 교향곡 제3번의 세계 초연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예술계의 평가와 다르게 여전히 윤이상의 친북 행적은 논란이 되고 있다. '문민정부' 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에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윤이상은 정부로부터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이라 했던 것을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이를 거부했다. 거기다가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윤이상의 한국행을 '정권에 대한 굴복'으로 멋대로 해석하고 베를린 윤이상 자택까지 찾아가 "선생께서 한국에 가신다면 우리는 분신자살하겠습니다."라고 부적절한 태도를 보였다.[28]
하여간 윤이상 개인으로도 김영삼 정권 당시 귀국에 대한 논쟁은 자신이 믿고 지원했던 재야 인사들까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이는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낳았고, 결국 정치 활동 포기 선언을 하고 고향 땅도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윤이상 사후 11년이 된 2006년 노무현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은 부정 선거로 악화된 국민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확대되고 과장되었다'고 발표했고, 이듬해 2007년에는 이수자가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을 방문,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다.
통영시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고, 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 음악콩쿠르나 작곡 경연도 열리는 등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거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윤이상의 행적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다.

5.1. 오길남 논란


이 사건 이후로 윤이상이나 몇몇 인사들에 대한 비판 기사가 월간조선에 실리기도 했다. 윤이상의 친북행위나 발언에 대한 비판은 별도로 하더라도 '오길남 사건'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 오길남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1985년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 유학생활을 하던 중 가족을 데리고 월북, 북한 공작원으로 일하다 1992년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이다. 오길남 박사가 공개한 수필에서 윤이상과 송두율[29]이 오길남을 포섭하고 독일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공작을 수행하며 오길남의 가족[30]을 수용소에 보내는데 앞장 선 것으로 나왔다.[31] 특히 오길남의 수기에서 묘사하는 윤이상은 천하의 개쌍놈이자. 희대의 인간쓰레기로 나온다. 2011년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데 참조.반면 윤이상의 오길남에 관한 글 '오길남 사건과 나'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펴고 있다.#
[image]
위 사진은 1974년에 찍힌 사진으로, 윤이상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오길남의 부인 신숙자다. 우파 단체에서는 이 사진을 근거로 윤이상이 오길남을 1977년에 만났다는 발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거나 인사를 하는 등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앞뒤로 서 있는 사진이다.
오길남 사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데 일각에선 윤이상 유가족들의 행보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길남이 자신의 가족을 돌아오게 힘써줄 수 있느냐는 말에 윤이상 딸이 미쳤다라고 했다라는가 하면[32] 윤이상의 아내는 김정일이 사준 집에서 살면서 "김일성이 죽자 비통해 했다" 라는 것.
윤이상의 유족들은 앞서 언급한 '오길남 사건과 나'의 연장선 상에서 오길남 측 증언과는 반대로 증언을 펴고 있는데, 윤이상과 오길남은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오길남이 탈출한 뒤 자신들은 북한 인맥을 이용해서 북에 남은 가족들의 사진을 얻어다 주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오길남 본인이 가족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분노해서 내쫓았다고 증언하고 있다.[33]
다른 쪽에서는 오길남에게 정녕 아무 문제도 없는가 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길남의 부인이 북한행을 반대했음에도 본인이 강행해 놓고 이제와서 윤이상 탓을 하는게 우습다는 지적이 있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가족을 구하겠냐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2012년 신숙자씨는 요덕 수용소에서 간 질환으로 사망했으며, 두 딸은 살아있으나 아버지를 만나기를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류승완 감독의 다큐멘터리 "간첩"에 출연해서는 자신이 간첩에 대해서 잘 안다는 식으로 류승완 감독과 주진우 기자를 낚았다는 비난도 있다. 심지어 같은 보수쪽에서도 "종북짓을 하던 인간이 가족 구해달라고 할 자격이나 있나" 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저 글 말미에 대한민국이 구해주면 감사해서 충성할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충 의견은 오길남이 괘씸하지만 윤이상을 죽이려면 오길남을 이용해야 한다라고 하니 판단은 알아서.
2011년에 통영에서 위에 언급된 오길남 박사의 가족들을 북한에서 구출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주장 중에 통영국제음악제 등 윤이상 기념사업들의 즉각 철폐가 있다. 하지만 이미 세계적 작곡가가 된 인물의 기념사업을 철폐한다는 것은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운 문제라서, 실현될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2년 유족들에 대해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한 공격이 거세지자 유족들은 오길남과 극우단체에 대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여 결국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윤이상이 이미 사망한 데다가 증거, 증인 부족으로 인하여 진실 규명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로부터 5년 동안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가, 2016년 기사에서는 윤이상이 월북을 권유하고 탈북 이후에도 돌아오라고 했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족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길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를 영화화 한 출국[34]박근혜 정부의 비리 중 하나인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의혹을 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출국 문서와 이 기사를 참고하자.

6. 작품 목록



6.1. 대규모 교향곡


  • 교향곡 1번 (1983)
  • 교향곡 2번 (1984)
  • 교향곡 3번 (1985)
  • 교향곡 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 (1986)
  • 교향곡 5번 (1987)(바리톤 독창 포함)

6.2. 실내 교향곡


  • 실내교향곡 1번 (1987)
  •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 바침' (1989)

6.3. 관현악


  • 바라 (1960)
  • 교향적 정경 (1960)
  • 유동 (1964)
  • 예악 (1966)
  • 차원 (1971)(오르간 포함)
  • 협주적 음형들 (1972)
  • 서곡 (1973, 1974 개정)
  • 무악 (1978)
  • 서주와 추상 (1979)(중간에 하프의 긴 독주가 있음)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1981)
  • 인상 (1986)
  • 윤곽 (1990)
  • 신라 (1992)
  •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 (1994. 뒤이어 소규모 기악 합주와 여성 합창, 소프라노 독창으로 연주되는 '에필로그' 가 따라 나오도록 되어 있다.)

6.4. 현악합주, 대/소규모 앙상블


  •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 (1961)
  • 실내 합주를 위한 '낙양' (1962, 1964 개정)
  • 관악 합주, 하프와 타악기를 위한 '조화' (1974)
  • 실내 합주를 위한 '협주적 단편' (1976)
  • 관악 합주, 타악기와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기원 '무궁동' (1986)
  • 실내협주곡 1번 (1990)
  • 실내협주곡 2번 (1990)

6.5. 협주곡


  • 첼로 협주곡 (1975~76)
  • 플루트 협주곡 (1977)
  •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 (1977)
  • 클라리넷 협주곡 (1981)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981)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1983/86)
  •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 (1984)
  • 오보에, 첼로와 현악 합주를 위한 2중 협주곡 (1987)
  • 오보에 협주곡 (1990)
  •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992)

6.6. 실내악



6.6.1. 2중주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1963)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 (1964) - 박정희의 서독 순방 축하 공연을 위해 하룻 밤 동안 급하게 쓴 곡. 윤이상 자신은 흑역사로 여겨 출판을 꺼렸지만, 윤이상이 한국에 납치되어 있는 동안 전속 출판사에서 무단으로 출판해 버렸다(...).
  •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 (1968)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1976)
  • 플루트, 하프(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노벨레테' (1980)
  • 두 대의 오보에를 위한 '인벤션' (1983) - 1984년에 두 대의 오보에를 위한 편곡판도 나왔다.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나 (1983)
  • 첼로와 하프를 위한 2중주 (1984)
  • 두 대의 비올라를 위한 '내성' (1988)
  • 두 종류의 악기(와 저음악기)를 위한 '환상적 단편' (1988)
  • 첼로와 아코디언을 위한 간주곡 (1988)
  •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투게더' (1989)
  •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외침' (1989)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91)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공간 I' (1992)
  • 첼로와 하프(, 오보에)를 위한 '공간 II' (1993)
  •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1994)

6.6.2. 3중주


  • 피아노 3중주 (1954)
  • 플루트, 오보에와 바이올린을 위한 3중주 (1972-73)
  • 피아노 3중주 (1972/75)
  • 오보에,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론델' (1975)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979)
  • 클라리넷, 하프와 첼로를 위한 '재회' (1986)
  • 클라리넷, 바순과 호른을 위한 3중주 (1992)

6.6.3. 4중주


  • 현악 4중주 1번 (1955)
  • 현악 4중주 3번 (1959)
  •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 (1968)
  • 네 대의 플루트를 위한 4중주 (1986)
  • 현악 4중주 4번 (1988)
  • 플루트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4중주 (1988)
  • 현악 4중주 5번 (1990)
  • 현악 4중주 6번 (1992)
  • 호른, 트럼펫, 트롬본과 피아노를 위한 4중주 (1992)
  • 오보에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1994)

6.6.4. 5중주


  • 아코디언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소협주곡 (1983)
  • 클라리넷 5중주 1번 (1984)
  • 플루트 5중주 (1986)
  • 현악 5중주 (또는 현악 합주)를 위한 '융단' (1987)
  • 목관 5중주를 위한 '축제 무곡' (1988)
  • 목관 5중주 (1991)
  • 클라리넷 5중주 2번 (1994)

6.6.5. 7중주~10중주


  •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1959)
  • 클라리넷, 바순, 호른과 현악 5중주를 위한 '8중주' (1978)
  • 목관 5중주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 (1988)
  • 목관 8중주 (1993)

6.7. 독주



6.7.1. 피아노/하프시코드/오르간


  •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1958)[35]
  •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양음' (1966) - 1996년에 재독 피아니스트 한가야가 피아노를 위한 편곡판을 만들었다.
  •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 (1967)
  • 오르간을 위한 단편 (1975)
  • 피아노를 위한 '간주곡 A' (1982)

6.7.2. 무반주 악기



6.7.2.1. 현악

  • 첼로를 위한 '활주' (1970)
  • 바이올린을 위한 '대왕의 주제' (1976)
  • 바이올린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 '리나가 정원에서' (1984~85)
  • 하프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
  • 바이올린을 위한 '대비' (1987)
  • 첼로를 위한 일곱 개의 연습곡 (1993)

6.7.2.2. 목관

  • 오보에를 위한 '피리' (1971)
  • 플루트를 위한 다섯 개의 연습곡 (1974)
  • 알토플루트를 위한 '솔로몬' (1978) - 1977년 작인 칸타타 '현자' 에서 편곡한 작품.
  • 베이스클라리넷을 위한 '독백' (1983) - 1981년 작인 클라리넷 협주곡에서 중간부 베이스클라리넷의 독주부를 분리시켜 편곡한 작품. 1984년에 바순 독주용 편곡판도 나왔다.
  • 바순을 위한 '독백' (1983/84)
  • 플루트를 위한 '소리' (1988)
  • 리코더(혹은 플루트)를 위한 모음곡 '중국의 그림' (1993)

6.8. 가곡


  • 가곡집 '달무리' (고풍의상, 달무리, 충무가, 그네, 편지, 나그네 여섯 곡. 1941/47/48) - 많은 문헌과 재발매 악보에는 '충무가' 가 빠진 다섯 곡만이 언급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초판본 악보에는 분명히 여섯 곡이 수록되어 있다.
  • 기타, 타악기와 목소리를 위한 '가곡' (1972) - 1985년에 타악기를 빼고 기타 대신 하프를 사용한 편곡판도 나왔다.
  • 소프라노와 실내 합주를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 (1980)

6.9. 합창


  • 소프라노와 바리톤 독창,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64)
  • 혼성합창(과 타악기)을 위한 '나비의 꿈' (1968) - 같은 해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의 합창부를 추려 편곡한 작품.
  •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 (1971)
  • 바리톤 독창, 여성합창, 오르간과 실내 합주를 위한 칸타타 '사선에서' (1975)
  • 바리톤 독창, 합창과 소관현악을 위한 칸타타 '현자' (1977)
  • 혼성합창과 트롬본을 위한 '주는 나의 목자시니' (1981)[36]
  • 혼성합창과 바이올린, 타악기를 위한 '오 빛이여...' (1981)
  • 혼성합창과 오르간, 타악기를 위한 '도(道)에서' (1982) - 1971-72년 작인 오페라 '심청' 의 합창부를 추려 편곡한 작품. 오르간 반주부는 오르가니스트 지그몬트 사트마리가 썼다.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 합창과 대관현악을 위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86~87)

6.10. 오페라


  • 류퉁의 꿈 (1965)
  • 나비의 미망인 (1968)
  • 유령의 사랑 (1969~70)
  • 심청 (1971~72)

6.11. 그 외


부산대신중학교, 경상대학교, 고려대학교, 부산고등학교, 통영고등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배영초등학교, 통영여자중학교, 욕지중학교, 해동중학교, 경주중고등학교, 진해남중학교, 통영초등학교, 진남초등학교, 충렬초등학교 등의 학교 교가, 양정고등학교 제2응원가 등.

7. 수상 경력


서울시 문화상 (1955. 작곡가로서 수상한 최초의 사례다)
눌원문화상 (1960)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 (1968)
킬(Kiel) 시 문화상 (1971)
서베를린 예술원 회원 (1974)
튀빙엔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1985)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8)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2)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 괴테 메달 (1995)

8. 여담


  • 통영시는 윤이상의 출생지이니만큼 관련 사업을 꽤 많이 하고 있다. 2002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그것. 1회 음악제에서는 윤이상이 지은 '통영시민의 노래'가 초연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 2017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수의 추모, 기념 연주가 열렸다. 7월 초에는 위의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 고은의 <만인보> 10권에 그를 다룬 시가 실려 있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윤이상'.

[1] 독일 민증에 적힌 이름이다.[2] 다만 실질적인 고향은 지금의 통영시.[3] 본래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활동을 독일에서 했고 1971년에는 국적도 독일로 변경되었다.[4] 정확히는 무조성(atonality), 불협화음(dissonance), 불규칙적인 리듬(irregular rhythm)[5]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양반이었기에 양반 집안의 장손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고 천박하게 생각했다.[6] 당시 동료들은 사지를 불로 지져지고, 들짐승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얼굴에 두툼한 수건을 얹어지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뿌려지는, 윤이상이 받은 고문보다 더 극심한 물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물고문을 받다가 숨이 막혀 기절한 동료도 있었다고 한다.[7] 작품 출품은 하지 않았지만 1958년에도 참가했는데, 이 때 훗날 전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백남준을 만나기도 했다.[8]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부적절한 방법으로 국내에 압송되었다. 정부기관에서 유학생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상을 주겠다라는 말에 속아서 귀국한 경우도 있고, 억지로 협박해서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 이는 분명 국제법 위반이다.[9] 북한이 만든 윤이상 영화를 보면 고문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고문 내용은 윤이상을 앉혀놓고 흥겨운 팝송을 틀어줘서 자본주의 미국의 팝음악을 못 견디는 윤이상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른다. [10] 무죄가 아니고 형 집행 면제다.[11] 국가보안법 탈출죄 동조죄 적용 - 417페이지, 423페이지[12] 스트라빈스키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으며 영향력이 강했다. 카라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역시나 영향력이 강한 지휘자였고 오토 클렘페러도 원로지휘자들 중에서는 톱급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탄원서를 썼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당장 이 시기에 클라우디오 아바도나 주빈메타와 같은 신예 지휘자들이 탄원서를 썻다면 영향력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13] 독일은 미국과 같은 이민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 외국인, 특히 동양인이 독일인과 결혼도 하지 않고 독일 국적을 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서독 정부가 윤이상의 예술적인 입지와 위상을 인정한 것으로, 한국 정부의 재차 납치 계획 등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14]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 이전에도 같은 재독 작곡가였던 박영희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관현악곡인 '소리' 를 1980년에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바 있다.[15] 엄밀히 하자면, 남한에서는 '재개' 되었다고 해야 한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낙양' 을 비롯한 작품들이 서울에서 이따금 공연되었던 기록도 있다.[16] '정치적 논란' 항목에 따로 기술한다.[17] 윤이상은 슈판다우 지구의 병원에서 타계했고 묘지 소재지는 가토우 지구다. 공원묘역이 여의도 면적 만해서 묘소였던 곳 찾는데 엄청 힘들었다.[18] 통영 도천동에 있는 윤이상기념관도 통영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히길 원했던 고인의 뜻에 맞지만 거긴 현행 장사법 상 묘소를 마련할 수 없다. 300m 내 인가 밀집 지역이 있기 때문. 사실 엄밀히 말해서 거기에선 앞에 아파트에 가려서 통영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19] 독일 네오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Popol Vuh의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 ##[20] 루이제 린저가 구술한 '상처 입은 용' 을 보면, 해방 직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문화예술 쪽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아 실망하고 탈당했다는 내용이 있다.[21] 맨 위의 편지에 써있는 '리수자'는 윤이상의 아내인 리수자이다.[22] 실제로 서울 압송 전,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사전 심문을 하던 요원들이 윤이상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23] 1960년에 홀로코스트 핵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검거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 기관인 모사드가 행한 작전이 비판을 받은 것도, 국제법을 무시한 절차 때문이었다.[24]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같은 시민운동 세력들은 범민련과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면 NL 중에서도 울산연합, 경기동부연합 등은 범민련에 등을 돌렸다. 민주노총도 공식적으로 관계단절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국가보안법 탄압으로 쟁점화될 때를 제외하고는 범민련에 관심을 쏟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으로 범민련 인사가 탄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민주노총이나 범민련에서 손을 뗀 NL 일부 세력은 물론이고 박래군 등 일부 시민운동 활동가들까지 탄압 규탄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 등 관련 행동을 하기 때문에 범민련과 진보쪽 사회운동과 완전히 관계가 끊겼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NL 측에서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8.15통일대축전(약칭 통축)이 범민련계과 비범민련계로 나뉘어서 치루어지기도 했다.[25] 끝까지 범민련을 지키는 인사로는 민주노동당 전 대변인 황선, 북한여행기 출판기념 콘서트 논란으로 보수세력에게 마녀사냥당하다시피 했던 신은미 등이 있다.[26] 하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라고 해서 다 친북단체는 아니며 이적단체 판결이 도덕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정치적·도덕적으로 명백히 잘못된 단체라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1992년 남한국제사회주의자들 사건'을 포함하여 친북성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변혁적 사상을 가진 단체라는 이유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사례들이 여러건 있다. 이적단체 판결에는 명백히 사상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반민주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27] 하나의 시리즈는 앞에서 설명한 동백림 사건 묘사, 다른 하나는 사실은 윤석민에게 남한에 숨겨 놓은 아들이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손써서 북한의 품으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이다. 후자는 사실상 전두환 비난이 주요한 주제이지만.[28] 이 증언은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가 낸 책에 나와 있지만, 운동권 인사들의 이름은 무슨 이유인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29] 소위 김철수 논쟁 및 경계인 논쟁으로 파문이 났던 바로 그 사람 맞다.[30] 부인은 재독 간호사 출신으로 남편이 북한으로 가겠다고 하자. 자기 눈을 찔러서라도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31] 요덕 수용소 출신의 강철환의 증언에 따르면 오길남의 가족은 요덕에서 분신자살까지 기도했다고 한다.[32] 그런데 이 기사는 아무리 읽어봐도 자기 집에 불쑥 나타나서 인터뷰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자에게 욕을 한 것 이상으로는 안 보인다.[33] 사실 이것도 나름대로 모순된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라 월북을 종용한 적이 없다'더니, 오길남의 가족들이 수용소에 가자 갑자기 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고 사진까지 얻어다 줬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평. 다만 자신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해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힘껏 돕겠다고 나서는 일은 실제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인용된 인터뷰에서도 윤이상의 부인은 윤이상이 저런 동기에서 오길남의 가족들을 도와준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34] 처음 제목은 '사선에서'였지만 나중에 '출국'으로 바뀌었다.[35] 윤이상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은 적게 남겼는데(윤이상의 작곡 기법의 특징 상 피아노로 구현하기 힘듦),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나운영은 적지 않은 수의 피아노곡을 남겼다.[36]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운영도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