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옥(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태옥'''
'''鄭泰玉'''

[image][1]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2월 20일
충청북도 진천군[2]
<color=#fff> '''사망'''
1945년 2월 12일
서대문형무소
<color=#fff> '''이명'''
정동윤(鄭東潤)·이중용(李仲用)·정하산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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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태옥은 1909년 2월 20일 충청북도 진천군의 빈곤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충신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충신동)에 거주하면서 본적을 두었다. 그는 1930년 8월 경성중앙청년동맹, 경성목공조합 등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1년 11월 중순부터 3개월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위원회에 조선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1932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재건방침을 규정한 <조선 공청 청년 제군에게 고함(1월 서신)>이라는 제목의 테제 결정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한 지시를 받은 오기섭(吳淇燮)을 만나 운동방침을 협의, 3월 14일에 서울로 들어와 서울·인천 지역에서 공청재건운동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우선 학생·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청반(共靑班)을 조직하여, 각종 기념일에 격문을 살포토록 하였다. 3월 14일부터 4월 중순경까지 박성화(朴晟華)·진해룡(陳海龍)과 만나 <1월 서신>의 내용을 설명하고, 서울 조선공청재건운동에 함께 참여토록 권유하였다.
1932년 8월 20일경, 정태옥은 전호직(全浩稷)에게 망국기념일(8월 29일), 국제청년데이(9월 첫 번째 일요일)에 투쟁을 독려하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도록 하였다. 8월 23일경, 진해룡·김일경과 협의한 후, <제19회 국제청년데이 전조선농자농민학생청년제군>·<조선노동자농민 모두 피압박대중에게 제23회 일한병합기념일을 기(期)하여 격(檄)한다>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에는 ‘타도 일본제국주의, 제국주의전쟁을 국내계급전쟁으로, 조선노동자농민혁명만세, 조선공청재건만세, 국제공청만세’, ‘일본제국주의의 파괴, 조선노동자농민 반제토지혁명만세, 소비에트동맹, 중국소비에트를 사수하자’는 등의 슬로건을 게재하였다.
한편 서울 외에 인천· 평양·부산 지역의 공청재건운동에도 노력하였다. 인천 지역에서의 공청재건운동은 1932년 6월 15일경, 인천부 도산동에서 이두천(李斗天)·안문식(安文植)·신수복(愼壽福)과 만나 인천적색노동조합과 제휴하여 실시할 것을 협의하면서 비롯되었다.
1932년 7월 15일경 월미도에서 신수복을 만나 인천에서 8월 1일 반전데이 투쟁격문을 작성 살포할 것을 협의, 동월 30일∼ 31일에 신수복의 소개로 평양사범학교 학생 이억근(李億根)·우종식(禹鐘植)과 함께 <노동자 농민 피압박 대중 살륙전 제2차제국주의전쟁 반대, 8.1 투쟁으로 타파하자>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타도, 제국주의전쟁 반대, 소비에트와의 동맹·중국소비에트 사수, 중국공산당·공청·적색노조재건 만세'라는 등의 슬로건을 게재하고 조선 코뮤니스트적색노동조합재건투쟁위원회 명의의 격문 약 100매를 등사·출판하였다.
정태옥은 1932년 3월부터 서울·인천에서 ‘조선공청재건 경성·인천 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평양·부산 지역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건조직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1937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10개월 18일(미결구류 56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7월 24일 수형자 임인용(林仁用)이 간수를 상해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이를 기회삼아 수형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동했다. 이 일로 1941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및 절도,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42년 5월 11일 강제 노동판에 끌려갔을 때 간수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탈출하여 경성부 돈암정(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던 김용환의 집에 숨어 지내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42년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도주·주거침입·건물침입·절도·강도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며, 이어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추가로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했으며, 1943년 11월 19일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image]
1942년 6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후 1945년 2월 12일 옥사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정태옥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35년 11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