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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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京城府
Keijō Pref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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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청 소재지
중구 태평통1정목 경성부청[1]
,中區 太平通一丁目 京城府廳,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하위 행정구역
8구
면적
135.36km²[2]
인구
394,525명[3]
인구밀도
2,914.64/km²
존속기간
1910년 10월 1일[4] ~ 1946년 2월 9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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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1925년[6]
1925년 - 1945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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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청의 사진.
오늘날의 서울시청 구청사, 서울도서관이다.


1931년, 일제강점기 중기의 경성부의 모습.[8]
1. 개요
2. 명칭 유래
3. 상세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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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けい(じょう(
경성부()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부터 8.15 광복 이후 1946년까지 존속한 경기도의 옛 행정구역이다. 현재의 서울특별시의 전신이며, 1946년 2월 9일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면서 폐지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도 대한제국의 수도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가 발표됨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 소속으로 편입되었으며, 경기도청 직할로 관할받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동서북이 고양군에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시흥군과 경계하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옛 한성부 성저십리 상당지역이 고양군에 편입되었고 1936년에는 다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김포군, 시흥군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고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용산, 동대문구 등이 신설되었다. 경성은 비록 1910년부터 1946년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독립할 때까지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기는 하였지만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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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9]의 역명판
한글 표기는 1933년 맞춤법 통일안 이전이라 '경'이고, 가나 표기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따라 'けいじやう'이다.
공식적인 영문 명칭은 일본어 '게이조'(실제 발음은 게-조)의 헵번식 표기인 Keijo였지만, 일제는 조선어에서 유래한 Seoul이라는 명칭도 대외적으로 사용하였다.

2. 명칭 유래


'경성'이란 표현은 수도(京)+성곽(城)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쓰였다. 그러나 이는 지명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수도(서울)'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10] 그래서 '경성(게이조)'이란 이름이 일본이 만든 신조어는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끊임없이 행정 구역을 확장한 끝에 매우 비대해진 지금의 서울특별시와는 달리, 당대의 서울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만큼 '京+城'이라는 명칭은 어찌보면 당연하게 여길만한 것이었다.

3. 상세


공식 명칭 한성부(漢城府)[11]로서 경기도에 소속된 도시가 아닌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처럼) 독립된 도시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과 함께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한 도시로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5서(署)가 다시 5부(部)로 개편되고, 각 방(坊)은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는 대대적인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는데 이 때 옛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옛 도성 안쪽(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 및 용산,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만을 경성부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12]
1914년 4월 1일 고양군에 편입된 경성부 8면 (옛 한성부 성저십리 8방) 지역
*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서강면 (현 서울시 마포구 서강, 공덕 일대) : 고양군 용강면(용산의 '용'과 서강의 '강'을 따와 명명)
*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13] (현 서울시 용산구 동부, 성동구 일부) : 고양군 한지면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인창면 (현 서울시 성북구, 강북구, 동대문구 일대) : 고양군 숭인면(숭신의 '숭'과 인창의 '인'을 따와 명명)
* 경기도 경성부 연희면 (현 서울시 서대문구 일부, 마포구 일부, 여의도) : 고양군 연희면
* 경기도 경성부 은평면[14] (현 서울시 은평구 일대, 종로구 구기동, 부암동 등) : 고양군 은평면
* 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현 서울시 성동구 일대, 중구 신당동, 황학동, 광진구 일부): 고양군 한지면 및 뚝도면에 분할 편입
경성부가 성벽을 벗어나 동서로 크게 확장된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의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에 따른 것이었다.[15] 이로써 경성은 인구 60만을 돌파하여 일본 제국(만주국, 대만 등 해외 영토를 포함)의 7대 도시의 말엽으로 올라섰다. 1943년 최초로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중구[16], 종로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의 7개 구가 설치되었고, 1944년에는 서대문구, 용산구 각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8구)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행정 편입지역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경성부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 현 마포구 동부(공덕동, 아현동, 용강동 등), 여의도
*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 현 용산구 동부(한남동, 서빙고동, 이태원동 등), 성동구 중 중랑천 이서지역(왕십리 일대, 옥수동 등), 중구 신당동)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일부 : 현 성북구 남부[17](동소문동, 성북동, 돈암동, 삼선동, 안암동, 종암동, 보문동), 동대문구 대부분
*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일부 : 현 서대문구 대부분(신촌 등), 마포구 홍대 일원[18]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일부 : 현 서대문구 홍제동, 종로구 홍지동, 부암동, 신영동
*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북면, 동면 일부 : 현 영등포구 대부분, 동작구 대부분(상도동, 노량진, 흑석동, 대방동 등)[19]
*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 : 현 영등포구 양화동[20]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 유지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가볍게 씹었다(...). 당시 일본인 유지들은 경성부 편입이 아닌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총독부가 영등포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반론을 씹은 데는 경성부 추가 편입을 살짝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라는 지역 여론이 강했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사태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유지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은 서울 주변의 (사실상의) 위성도시가 서울에 병합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등포구/역사 참조.
경성은 피지배국의 고도(古都)임에도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데, 식민지의 중심은 철도망의 핵심이 되는, 새로 건설된 항구도시로 선정되는 것이 구미 식민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경성은 근린 식민지로써 조선을 경영한 일본의 식민지 경영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비록 경성부는 경기도의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조선 경영에서 경성부는 언제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서울이 곧 조선이었고, 일제시대에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경성부의 일본인 거주지로는 남촌과 용산을 꼽을 수 있다. 남촌은 남산 북면의 구릉으로써 조선 후기 이미 상인들의 거주지였으나,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들이 경성에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다. 당시 한성의 중심지는 북촌인 정동이었는데 청나라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이권을 쥔 청국인들이 정동을 선점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남촌, 그것도 끝자락에 거주하였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남촌을 장악하였다. 용산은 크게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강변 모래톱이었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지대를 간척하여 거주지로 삼았고,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여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20년대 이전 경성부는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촌+용산의 일본인 거주지의 이중 도시적 모습을 띄었으며, 식민 행정부 당국은 기반 인프라 건설에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조선 총독부 신축, 경성부청 신축, 경성역 신축, 조선신사 신축 등 경성 및 식민지 조선의 행정중심이 남대문통의 북촌으로 이전하면서 경성의 이중 도시적 측면은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특히 기존 북촌의 동(洞) 행정체계, 남촌의 정(町) 행정체계로 이원화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이 정(町)으로 일원화된 것은 식민지 당국이 조선 경영의 중심축을 이화(異化)가 아닌 동화(同化)에 두었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행정중심의 북상은 1925년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로 용산 등 한강변의 일본인 거주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조선의 유적이 상당부분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조선총독부 건축으로 인한 경복궁의 훼손은 당대 양식있는 일본인들에게도 지나친 행위라 비판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행정부가 피지배민의 반응을 도시계획에서 전적으로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총독부에서 혜화로 나가는 직선로(오늘날 율곡로)를 부설함에 있어서, 이 도로가 창덕궁종묘를 가로지르며 완전히 분리하였기에 일본은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이 사망하기 전에는 도로의 부설이 경성의 격자도로망을 구성하는 데 핵심이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부하였고, 사망 후에도 전주 이씨 종친의 압박에 의해 창덕궁-종묘간 구름다리를 설치하여야 하였다. 총독부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3.1 운동의 경험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조선 경영은 더욱 가혹해졌고, 경성부에서도 그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 제국의 향락을 담당하기도 했다. 본토에서는 각종 유흥 문화가 정부의 통제로 거의 씨가 말라 즐길 거리가 없어졌던 데 비해 식민지 조선과 그 중심인 경성에서는 유흥 문화가 전쟁 전과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 게다가 한반도에는 연합군의 공습이 거의 없었던 것이 컸다. ― 본토에서 누가 출장을 오면 한번 질펀하게 즐기고 귀국하고는 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현 중구 태평로1가 서울도서관[2] 1936년 기준.[3] 1934년 기준.[4]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5] 미군정에 의해 서울특별자유시로 개칭[6] 이 휘장은 도성 주의에 경계선을 두르듯 원을 그렸다. 선에서 튀어나온 모양은 도성 주변이 산에 둘러싸였음을 뜻한다. 그 안에 경성부의 '京(경)'자를 넣었다. 이 모양은 1996년 이전의 서울시 휘장에도 반영되었다.[7] 도성에 경계를 두어 둘러 막은 것이 발전하는 경성부의 모습을 상징하기에 부족하고 미적인 효과도 떨어진다하여 개정하였었다. 전체적으로는 경성부의 한자 '京(경)'자를 도안화한 것으로 위에 있는 山(산)은 북한산을, 아래의 山은 남산을 뜻하며 가운데의 작은 원은 경성부의 시가지를 의미한다.[8] 이 영상은 미국의 '세계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World)'라는 프로그램의 '시암(태국)에서 한국으로'편에서 한국 부분만 잘라낸 것이다. 1912년에서 불과 20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조선신궁이나 일본어 간판, 기모노 등 많은 일제의 문화요소들이 경성 사람들의 생활 속에 침투해있음을 볼 수 있다.[9] 현재 '문화역서울 284'로 불리는 전 서울역 역사이자 현 경의선 서울역 역사[10] 사실 '서울'이라는 고유어 역시도 원래는 도읍을 뜻하는 의미였으니 이상할건 없다.[11]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는 한성부 직할 한성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년만에 도로 원상복구.[12]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경성부 관할로 남게된 곳은 동대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서대문과 서소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무악동, 천연동, 만리동 등, 그리고 마포나루가 있던 마포동과 도화동 등이 있다.[13] 옛 한강방(漢江坊)의 '한'과 둔지방(屯芝坊)의 '지'에서 따온 것.[14] 옛 연은방(延恩坊)의 '은'과 상평방(常平坊)의 '평'에서 따온 것.[15]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 이전까지 경성부 시가지였던 곳은 동네 이름에 '~가'가 붙는 경우가 많다. (보문동1가, 한강로2가, 문래동3가 등)[16] 당시 일본인들이 현재의 중구 지역에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울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대신 이 지역을 '중구'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7] 즉, 정릉천 이남[18] 연희면의 나머지 영역은 은평면에 편입되었다.[19] 북면의 나머지 영역은 동면에 편입되었다.[20] 현재의 인공폭포와 선유도 일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