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롱스트리트

 

[image]
1. 개요
2. 생애


1. 개요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육군의 장군이다.

2. 생애


롱스트리트는 로버트 E. 리 장군의 오른팔이자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의 부사령관이었다. 그는 182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지필트 카운티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청년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관후보생 시절의 롱스트리트는 나쁜 성적과 문제많은 규율에 인해 웨스트포인트 56명의 사관후보생 순위에서 54번째였다. 허나 동급생들 중에서 인기가 매우 많아 조지 피켓, 존 벨 후드, 존 포프, 토마스 잭슨, 율리시스 그랜트와 같은 남북전쟁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의 추천으로 인해 장교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롱스트리트는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의 명예소위로 임명되어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크게 활약했다.
이후 그는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인 남부로 귀환했고 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의 최고선두 부대인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에 배치된다. 이 전쟁에서 그는 제2차 불 런 전투,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치카무가 전투, 앤티텀 전투 등 수십번의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특히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당시 중요거점인 마을 프레데릭스버그를 북군이 일단 점령하게 놔두고 마을 후방에 있는 고지인 '마리의 고지(Marye's Heights)'에 있는 돌장벽을 북버지니아군의 엄폐물로 사용하여 북군의 번사이드 장군과 후커가 지휘하는 포토맥군의 진격로를 완벽히 차단하는데에 큰 공을 세우는 등 당시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됐던 장군이기도 하다. 허나 롱스트리트는 전쟁 초반부터 습관이었던 "지각"(late) 때문에 일부 몇몇 전투에선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고 너무 과감히 공격하여 아군에 손실만 보는 등 좋지 않은 습관이 항상 전투를 불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1863년 7월 3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이 크게 패할 때 그는 리가 명령한 돌격에 반대했고, 패배 이후 서부전선으로의 이동을 신청한다. 1863년 8월 중순 서부전선에 배치된 롱스트리트는 치카무가 전투에서 북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의 실수를 정확하게 찌르며 승전에 크게 공헌한다. 허나 얼마 안 가 서부전역의 남군 테네시군 사령관인 브랙스턴 브래그와의 갈등으로 독자적으로 병력을 지휘하게 되며, 브래그에게 빠르게 합류하는 데 실패해 채터누가에서의 남군 패배에 지분이 있다고 평가된다.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북버지니아군에 합류한 롱스트리트는 1864년 5월 윌더니스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지만 전투 중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게 된다. 1864년 가을 롱스트리트는 전선에 재배치되지만 얼마 안 가 애퍼매톡스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은 율리시즈 그랜트의 북군에 항복하게 되고 리 장군과 코트하우스에서 항복조약을 함께하게 된다.
전쟁 후 그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이사하였고 그레이트 사우저 & 웨스턴 손해보험회사의 사장이 된다. 허나 결국 이 사업은 실패하였고 이후 여러 사업에도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대부분이 실패하고 만다. 전쟁 이후 그는 공화당 지지자이자 남부 재건(reconstruction)의 옹호자가 되었는데, 그의 옛 친구였던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며 승승장구한 것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부의 공화당 옹호자를 가리키는 멸칭인 스캘러와그(scalawag)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남군의 옛 동료들로부터 변절자로 비난받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리가 남군의 명예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남부에서는 더욱 평가절하되었다. 심지어 1873년에서는 뉴올리언스 경찰과 흑인 민병대를 이끌고 인종차별주의 백인 반군과 대처하기도 했다. 이후의 공화당 정권에서 롱스트리트는 여러 직책에 지원했고, 주 오스만 제국 대사, 철도위원 등 여러 공직을 거치게 된다. 노년의 롱스트리트는 다른 퇴역 장군들처럼 회고록을 남기고 1904년 2월 1일 조지아 주 개인스빌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