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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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image]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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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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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연합국[2]
'''수도'''
워싱턴 D.C.
리치먼드[3]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제퍼슨 데이비스
'''인구 (1860)'''
22,100,000[4]
9,103,332[5]
'''인구 (1864)'''
28,800,000[6]
5,600,000[7]
'''참전 병력 합계[8]'''
2,100,000
1,064,000
'''철도 총연장 (1860)'''
21,800마일
8,800마일
'''철도 총연장 (1864)'''
29,100마일
-
'''공업 생산력 (1860)'''
90%
10%
'''공업 생산력 (1864)'''
98%
-
'''수출 (1860)'''
30%
70%
'''수출 (1864)'''
98%
-
1. 개요
2. 명칭
3. 배경
3.1. 노예제
3.2. 기타 부수적 요인들
3.3. Lost Cause
4.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4.1. 서막
4.2. 미주리 협정(1820)
4.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
4.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
4.5.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
5. 전개
5.3. 동부전역 초기 - 남부의 우세
5.4. 서부전역 - 북부의 반격
5.5. 전쟁의 종결
5.6. 전후 재건시대
6. 분석
6.1. 북부
6.2. 남부
7. 결과와 의의
7.1. 정치적 의의
7.2. 외교적 의의
7.3. 전술적 의의
8. 무장
8.1. 육군
8.2. 해군
9. 주요 편제
9.1. 북부
9.2. 남부
10. 주요 인물
10.1. 북부
10.2. 남부
11. 주요 전투
12. 대중문화 속의 남북전쟁
13. 여담
14. 같이 보기

'''남북전쟁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비싼 전쟁이었다.'''

제임스 러셀 로웰

'''남북전쟁은 이 나라에서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인 국가적 의식을 만들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제28대 대통령, 1915년 현충일 기념사 中


1. 개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13일까지 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내전이다.[9]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앵글로 아메리카 최후의 전쟁. 그리고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미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 미국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2번째이자 마지막 반란이며, 최후의 근대전이자 최초의 현대전이다. 양 군의 군복 색상에서 착안해 푸른 외투(북군) 대 회색 외투(남군)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10]

2. 명칭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 또는 그냥 The Civil War(내전)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미국에서 주로 쓴다. The는 종종 생략하기도 할 정도. 그러나 영국에서는 찰스 1세와 의회가 싸웠던 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남부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주(州) 간 전쟁 War between the States. 좀 더 노골적으로 친남부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들은 War of Northern Aggression(북부 도발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건 적반하장 식이라 보수적인 레드넥들을 제외하고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주로 '남북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렇다. '미국 내전'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남군과 북군이 싸우니 그러한 원리로 지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미국 연방정부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The War of the Rebellion, 즉 '반란 전쟁'.

3. 배경



YTN.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3.1. 노예제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로, 나머지 절반은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영속할 수 없음을 믿는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상원의원 후보직 수락연설을 하며(1858년 6월 16일). #출처

전문가들 (미국 남북전쟁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노예제가 전쟁 전의 남부, 남부 노예주들의 분리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더이상 이론이나 반론이 있지 않습니다.

휴스턴 대학교 에릭 발터 역사학 교수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은 노예제이다. 다른 요인도 있지만 부수적일 뿐이고, 노예제가 없었으면 저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노예제는 연방 시작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인식이 나빠지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예제와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였다. 이 때문에 독립하자마자, 노예제의 수익성이 덜 좋았던[11]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들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이른다. 하지만 노예제의 수익성이 더 좋았던 남부주는 상황이 달랐고 이 때문에 '3/5 협정', '20년간 국제 노예무역 허용'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는 꾸준하게 노예제 폐지로 가고 있었고, 한편으로 담배 등 상품작물의 수익성이 떨어져가던 버지니아 등 북쪽의 남부 주들도 슬슬 노예제 폐지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이 상황이 바뀌게 된다. 면화는 수요는 많았으나 씨앗 때문에 수확을 해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는데 조면기의 발명으로 이 과정이 수월하게 변함으로써 엄청난 수익율을 보장하게 된다. 그러나 조면기 덕에 면화 수요는 빠르게 늘었고 면 수확은 여전히 노예가 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게 되어 노예제가 존속된다.[12]
하지만 기후조건 때문에 면화 농장은 점점 남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13]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당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고. 때문에 노예제하의 남부에서도 서쪽으로의 노예제 확장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면화 경작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예제도 역시 그를 따라서 확장되어줘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력은 남부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농장들이 서쪽으로 이전해가더라도 역사가 오래된 남부 주(버지니아 등)들에서는 노예를 '생산'하는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기 때문에 노예제 폐지 이야기가 쏙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는 노예 가격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유럽 등 소위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고,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이는 '''노예 수입이 대부분 끊겼다'''는 것이다. 이런 공급의 급격한 감소와 면화 산업의 발달[14]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이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졌다가 면화 농업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이후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비싼 노예 가격 때문에 전쟁 직전까지도 남부에서 노예를 거느리던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상위 5% 미만의 대부호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백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 농민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으나, '''오히려 이 하위계층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끝까지 저항한 부류였다.'''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가치관적 문제가 더 중요했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초기에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시선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15],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인 부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나온 것을 보고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도덕과 신앙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모범생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부랑아인 핀이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도덕관이었다.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앤드루 잭슨처럼 가난한 백인 남성이 돈 벌어서 플렌테이션을 사고,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이 당시 남부의 '아메리칸 드림'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남부를 지배하던 대농장 소유주들과 이들과 밀착한 남부교회들은 노예를 부릴 꿈도 못 꾸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에게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백인은 깜둥이보다 훨씬 우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백인자영농, 빈민들의 분노가 대부호들을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득세하자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적, 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던 남부의 자영농들, 하류층들은 정작 자신들은 지킬 노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의 막바지까지 가장 격렬하게 싸우는데,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더라도, '그래도 나는 저 깜둥이 노예보단 우월하고 고귀한 백인'이라는 자부심에 기대서 살아왔는데, 노예제가 폐지되면 그게 무너지는 것이다. 자신이나 깜둥이나 매한가지 대농장주들한테 시달리는 동급의 가난뱅이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사회를 단순히 노예가 있는 사회(Society with slaves)가 아닌, 노예제 자체가 사회 구조의 핵심에 있으며 노예제 없이는 그 사회 자체도 유지될수 없는 '노예 사회(Slave Society)'라고 정의한다.

3.2. 기타 부수적 요인들


정치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휘그당의 대립 구도도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백인 남성이라면 1인 1표라는 규칙이 노예주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었다. 노예 1명당 3/5표로 계산이 되었고,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부는 이를 통해 북부를 견제해나갈 수 있었는데 공화당이 노예제를 폐지하여 해방 노예 중 남성에 대한 투표권이 부여되면 공화당 지지 세력이 남부에서 강해지며 민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존재했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 후, 해방 노예들의 지지와 표는 공화당으로 향했다.
미국의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이다. 건국 초부터, 코네티컷 타협을 통해 상원, 하원의원 배정 등 국가의 기틀이 정해졌다. 건국 직후부터 노예 인구의 3/5를 하원의원 배정에 반영하여 남부의 발언권이 보장되었고, 미국의 확장 과정에서도 미주리 협정, 1850년 타협 등 갈등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노예제로 인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문제를 빠르게 봉합하려는 정치적 타협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근본적으로 노예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예제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3.3. Lost Cause


남북전쟁 종결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16] 남북전쟁에 노예제는 구실일 뿐이고 다른 배경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주로 나타나는 주장은 남부에 불리한 관세 문제나 연방정부의 주의 권리 침해 등이 있다. 이를 Lost Cause라 한다. 이를 직역하면 '잃어버린 이상'이란 뜻이 된다. 즉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부는 고유의 이상, 명분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쟁 바로 전 당시 미국 관세는 1830년대 이후로 가장 낮았으며, the Morrill tariff조차도 노예주 민주당원들이 의원직을 사임해서 통과된 것뿐이다. 만약 저 민주당원들이 그대로 남았으면 그대로 통과 못했고 타협안이 나왔을 확률이 높으며, 민주당원들조차도 연방정부가 지속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저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어느정도 조정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1830년대 관세분쟁이 증명한 것처럼 사우스 캐롤라이나같은 매우 소수주들을 빼고 분리독립을 추구할 정도로 큰 불만은 아니었다. 남부연맹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테펜은 관세는 메사추세츠와 타협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주 정부의 권리'나 '남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라는 것도 'Lost Cause' 미신이다. 일단 남부 노예주들은 1850년 도망노예법을 밀어붙일 때 저항하는 북부 주들의 '주 정부의 권리'에 별 신경 안 썼고, 결국 이들이 '주 정부의 권리'를 따질 때는 거의 주에서 노예주를 마음대로 하는 권리를 의미했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제였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노예제 때문이었다.
후대 컬럼비아 대학을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막상 전쟁 이전과 당시, 직후에서 남부 동맹측 주요 정치인, 언론인, 장군들의 발언들을 조합해 보면 남부 동맹의 대의는 명백하게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사수'''였지, 주의 자주권 따위 거창하고 세련된 명분이 아니었다.[17] 노예제와 상관없이 주의 자주권이 문제였다면 앤드루 잭슨 시절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 드립을 쳤을 때 같은 남부 주들이 전부 다 이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 특히 영국과의 교역에 깊게 의존하던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들도 미영전쟁 당시 주의 자주권 드립을 치며 연방의 전쟁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뉴잉글랜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관에 비판적인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관이 노예제 문제를 희석해 남부동맹을 미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제퍼슨 데이비스 같은 남부 인사들의 사후 변명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에드워드 폴러드, 더글러스 프리먼 등 친남부적 역사학자들이 확립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국가의 탄생 같은 프로파간다성 대중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관점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과 반박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연합국 문서에서 더 자세히 읽어볼 수 있다.

4.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4.1. 서막


노예제로 인한 남북갈등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우 심해졌다. 노예제의 도덕적 취약성 때문에 노예주 의원들은 당을 가리지 않고, 노예제 대한 국민들의 청원을 미국 국회에서 토론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는 횡포를 부렸고("Gag rule"), 노예제 반대/폐지론이 담긴 신문들을 배포하는 것을 남부에서 근본적으로 막았으며(언론의 탄압),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 이후로는 노예 관련 법들을 더 잔혹하게 강화했고, 노예제와 노예제를 찬성하는 의원을 비꼬며 비판한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을 '''국회의사당 내에서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지팡이로 거의 죽도록 패는''' 민주주의와 정면 대치되는 정신나간 짓을 했으며[18], 북부 주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1850년 탈주노예법 같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탈주 노예를 잡기 위해 온 노예 사냥꾼들에게 협력할 것을 강제하는 등[19] 북부 자유주들에 대한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다. 한편 남부 주들은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같은 노예들의 저항[20] 때문에 항상 노예반란을 매우 두려워했고, 북부 노예 반대론자/폐지론자들이 이런 노예반란을 부채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부 자유주들을 매우 증오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 같은 도주 노예출신 흑인 노예 폐지론자들의 대두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같은 반노예제 문학작품들의 인기[21] 등으로 노예 폐지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간다.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숫자였다. 미국은 웬만하면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의 숫자를 맞춰서 정치적 밸런스를 유지해 왔다. 이 때문에 미주리 협정이 채결됐는데 한마디로 미주리 주는 노예주로 하되 미주리 북쪽은 자유주, 남쪽은 노예주로 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자유주들이나 노예주들이나 불만이 대단했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넘어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등 서부주들의 가입으로 저울이 급속도로 자유주들에게 기울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몇 년 뒤 남부 노예주들과 북부 민주당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을 통과시킨다. 한마디로 미주리 북쪽은 자유주로 하기로 해놓고, 캔자스[22]는 투표로 자유주가 될 것인지 노예주가 될 것인지 결정하자는 것이었는데, 북부 주들은 이것을 남부 노예주들의 배신으로 여겨 매우 분개하였다. 그럼에도 캔자스에서는 노예제가 별로 인기가 없었고, 그 때문에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적극적으로 캔자스에 이민을 가서 노예제 회의론자/폐지론자/반대론자들을 공격한다. 이 때문에 로렌스 학살(Lawrence Massacre) 등 노예제 찬성론자들로 인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자유론자들이 반격을 하는 등 노예제 때문에 캔자스는 사실상 내전상태에 돌입한다. 이것이 'Bleeding Kansas'다.
게다가 원래는 평화로운 노예제 폐지론자였으나, Bleeding Kansas,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의 피습사태 등을 지켜보고 유혈혁명만이 노예해방의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존 브라운(John Brown)이라는 사람이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연방정부의 무장창을 습격해서 흑인노예들을 무장시키려고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자극해서 인종 대전쟁을 일으켜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라는 의심병이 더 심해지고, 북부 자유주들은 '중앙정부도 노예제 편이다. 정부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간다.
이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을 내리는데, 판결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 내에서 흑인은 남의 자산은 될 수 있어도 시민이 될 수가 없고, 미국은 헌법적으로 노예를 인정하니, 미국 연방정부가 연방영토에 노예제를 금지할 수 없다. 노예주들은 노예를 노예주든 자유주든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 이 판결은 일부 북부 주에서 흑인을 주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걸 무시한 처사였으며, 미국 연방이 노예제를 일부 연방영토 및 해상에서 금지한 사례도 무시했고, 미국은 그냥 노예 국가라는 걸 연방대법원이 인증한 꼴이 되어 버렸으므로 자유주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이런 불만을 근거로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 역시 노예제에 대해서 중앙정부에 굽힐 의사가 없다는 걸 확신한다.
이렇게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이 반목하면서 대망의 1860년 대선이 열린다.
사실상 공화당 vs 민주당이었는데 젊은 공화당은 사실상 북부 지역당이었다. 정확하게는 '당'이라기 보다는 망한 휘그당, 반이민자 성향의 Know Nothing, 반 노예제 Free-Soiler 등 서로 성향이 다른 정치집단들이 단지 '반 노예제,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 타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연합정당(Coalition)에 가까웠다. 공화당은 미 헌법이 중앙정부가 노예제가 현재 이미 존재하는 지역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되, The Northeast Ordinance 등 사례를 들면서 연방정부가 아직 주 정부가 성립되지 않은 연방정부의 땅들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반 노예제 당으로써 현재 연방정부 땅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겠다라는 것을 공약으로 삼았다. 즉, 공화당의 목적은 노예주들이 정치적으로 앞으로 우위에 설 수 없게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림과 동시에 장기적으로 노예주들을 자유주들로 둘러싸서 노예주들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노예제를 포기하도록('put it in course of ultimate extinction')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 간에 의견 통일이 안 됐다. 북부 민주당은 노동자 당이자, 아일랜드 이민자들 및 해외 이민자들 당이었다. 이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소극적 지지 혹은 현상유지에 가까웠고, 관심은 대륙횡단 열차 등 경제적인 곳에 더 많았다. 그러나 노예제를 선거에 써먹지 않은 건 아니라서 공화당을 '흑인 공화당'이라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북부 백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에게는 이것조차 부족했다. 남부 민주당, 실질적으로 강경 노예제 찬성론자들이자 남부주 분리독립론자들('Fire-Eaters')은 북부 민주당의 소극적 지지가 아니라 완전하고 적극적인 노예제 지지를 원했다. 그런데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아무리 보수주의라고 하더라도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북부에서는 적극적인 노예주 지지는 인기가 없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다.
이렇게 공화당의 링컨이 남부주에서 선거인단 단 1명도 얻지 못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선을 이기자 남부주들은 권력의 추가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갔음을 느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화당 같은 북부의 공세에 노예제가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느꼈다.
이에 남부주들은 링컨이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연방정부의 조폐국에 있던 금을 훔치고, 연방정부의 항구와 요새들을 점령하고, 친 연방정부 성향의 정치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내는 동시에 군대를 모집하는 등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이에 링컨은 첫 번째 취임식 연설에서 남부 노예주들의 명백한 반란활동들은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진압할 것을 경고하면서도, 헌법적으로 본인은 남부 내의 노예제에 대해서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 연방으로 돌아오라고 남부 노예주들을 설득하려 시도하나, 결국 같은 취임식 연설에서 링컨이 연방 영토 내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타협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남부 노예주들이 원하는 건 최소한 연방영토에서 노예제가 허용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들처럼 북부도 스스로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 언론 통제하는 걸 원했다.
이 두 포지션은 양립이 불가하였고, 남부 연맹측이 '''연방정부의 영토였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된다.'''[23]

4.2. 미주리 협정(1820)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1819년 매사추세츠 주의 분할, 자유주로서 메인 주의 독립, 1820년 '미주리 협정'을 통해 위도 36도 30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주로, 북쪽은 자유주로 결정하면서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주 등의 새로운 주가 편입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4.3. "위대한 양보" 협정의 실패, 남/북부 간 갈등의 심화


새로운 주는 남측에 위치했으나 노예제가 금지된 자유주였고 이들의 미국연방 가입으로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소위 대타협(Great Compromise, 1850)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주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 지위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36도 30분 이북 텍사스의 영역을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자유주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북부 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줘 시간을 끌 수 있게 하는 주법을 만들어 반항한다.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측의 갈등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안하게 되며 다시 불거진다. 미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인민주권의 논리에 따라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이 법안에 넣었다. 각 주의 주민들이 인민주권에 따라 스스로 투표를 하여 노예제의 존폐여부를 결정하게 해서 골치아픈 노예제 문제에서 손을 뗀다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 때문에 더글러스는 북부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북부는 이제 아예 노예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또 만약 투표로 캔자스가 노예제가 될 경우 대타협의 36도 30분 이북에 노예주가 떡하니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1850년의 협정이 무효화되고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개중엔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급진 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과 그 아들들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농부 5명의 손을 자르고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사건이 터졌고 사실상 캔자스는 피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 칭하는 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때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이 판례의 당사자였던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흑인 노예로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다. 본래 그를 소유하고 있던 피터 블로(Peter Blow) 가문은 후에 앨라바마 주로 이주했으나 농사에 실패해서 다시 미주리 주로 이주했고 스콧은 그곳에서 미군에서 복무중이던 의사 존 에머슨(John Emerson)에게 팔렸다. 에머슨은 군 복무중이었으므로 자주 거주지를 바꿨고,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위스콘신 준주(현재의 미네소타 주)에서 장기간 거주했기 때문에 자유를 달라는 청원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에머슨이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로, 그 다음에는 루이지애나 주로 전출되었고, 이때 스콧은 결혼했다. 에머슨도 아이린 샌드포드(Irene Sanford)와 결혼했는데 에머슨이 1843년에 사망하면서 아내였던 아이린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스콧과 그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처음에 스콧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면 현 시가로 7,000달러인 3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1846년, 지역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세인트루이스 순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7년에 진행된 재판에서는 스콧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으나 전문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재심이 결정되었다. 1850년, 미주리 주 법원에서는 스콧과 그 부인이 자유주인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준주에서 오랫동안 거주 중인 때 불법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판시하였으며, 아이린은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여 미주리 주 대법원에서는 1852년 한 번 자유면 언제나 자유(once free always free)가 아니라고 하여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28년간의 판례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주리 주의 법에 따라 에머슨 농장의 권리는 아이린의 남자형제였던 존 J.A. 샌드포드(John F. A. Sanford)에게 있었고, 샌드포드는 뉴욕시민이었다. 따라서 스콧의 변호사들은 관할권이 다르다는 근거로[24]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하여 스콧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자 다시 상소를 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갔으며 이것이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고소할 권리조차 없으며, 비록 북부주가 자유주라고 하나 이것은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권리이므로 무효이며 미주리 협정 자체가 무효라고 7-2로 스콧의 패소를 판결했다. 이 판결은 존 마셜 대법관이 마버리 vs 매디슨 사건에서 최초의 위헌법률심판을 내린 이후 대법원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의회의 권한을 무시한다는 문제가 불거져서 무려 50년 동안 위헌 법률심판이 벌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엄청났으며, 연방 대법원의 판결 중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도 손꼽힌다. 스콧과 부인은 판결에 따라 아이린에게 돌아가야만 했다.[25] 대법원장과 다수의견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들은 이 판결이 지긋지긋한 노예제 논쟁을 종료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했지만, 남부는 이 판결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북부를 공격했고, 북부는 애초에 시민이 아닌걸로 판결을 냈으면 거기서 끝이니 다른 결론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북부와 남부의 노예 폐지론자와 존속론자 간의 갈등을 가속화시켜 전쟁 직전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전까지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치인들마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상원의회에서 일어난 찰스 섬너 의원의 구타 사건으로, 남부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가 상원으로 난입하여 자신의 친척인 앤드류 버틀러 상원의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북부인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 의원인 섬너를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주위를 둘러싼 채 서로 희희낙낙거리며 구경했으며, 브룩스와 함께 입장한 동료 하원의원들은 권총으로 다른 의원들을 위협하는 등 의회마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섬너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약 3년 동안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브룩스는 이후 섬너의 동료 앤슨 벌링게임의 도발에 넘어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갑자기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투를 거부하여 망신당하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곧 죽는다. 섬너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급진 공화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4.4.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개막


상원의장 각하,[26]

저는 미시시피 주의 주민들이 모여 내린 엄숙한 결단에 의거해,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였음을, 의회에 공표하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I rise, Mr. President, for the purpose of announcing to the Senate that I have '''satisfactory evidence''' that the State of Mississippi, by a solemn ordinance of her people in convention assembled, has declared her separation from the United States.)

제퍼슨 데이비스, 미국 의회에서 미시시피 주의 연합 탈퇴를 선언하며(1861년 1월 21일). #출처

이 시기 주요 양당이었던 미국 민주당과 미국 휘그당에서도 남부계와 북부계의 분열이 극심했으나, 민주당이 스티븐 더글러스가 어정쩡하고 어중간하게나마 중도 노선을 취할 수 있었던데 반해 휘그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탈당하여 신생 공화당에 입당하는 등 당 자체가 와해 위기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5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휘그당, 공화당의 3파전이 벌어졌다.
그 뒤인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휘그당은 완전히 몰락하고, 스티븐 더글러스가 끝까지 어정쩡한 위치에서 어물적대자 폭발한 남부계 민주당이 존 C. 브레킨리지(John C. Breckinridge)[27]를 따로 후보로 내놓는 등 대분열이 일어났다. 구 휘그당 세력 중 남부에 동정적이고 연방의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입헌연합당(Constitutional Union Party)의 존 벨(John Bell)이 남부에서 브레킨리지와 대결하고,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북부에서 북부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의 링컨이 북부지역의 표만 가지고 3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라는 단일 어젠다를 갖고 있던 당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에서도 온건파였던 링컨은 바로 노예제 폐지를 공약하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신념은 노예제 폐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링컨 및 공화당의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헌법적으로 이미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노예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부로 노예제의 확장을 막는 건 연방정부가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유주들에게 둘러싸인 노예주들은 노예제라는 시스템의 약점 때문에 차례대로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28]
그리고 이에 따라 남부에서는 링컨의 인형을 불태우면서 연방 탈퇴의 여론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미 의석수도 북부 공화당에게 뺏긴 상황에서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통령직까지 공화당에 넘어가게 되자 불안을 느낀 남부 주들에서는 연방 탈퇴론이 득세하여 1860년 12월 전부터 툭하면 연방탈퇴한다고 징징대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결국엔 가장 먼저 연방을 탈퇴하였고 뒤이어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29]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 4일,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월 8일, 기존의 미 헌법에서 본을 딴 헌법을 제정하여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수도로(후에 버지니아 주리치먼드로 이전)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30]의 건립을 선언하였다. 남부연맹의 초기 7개 주는 모두 대선에서 브레킨리지와 남부민주당을 지지한 주들, 그 중에서도 미국 동남부에 치우치고 농업과 노예제에 의존적인 경제를 가진 주들이었다.
이에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며 강력한 연방 유지파임을 천명했던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탈퇴를 취소할 것이며 불응시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우리 깃발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난 죽어버리고 말 테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31]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점령한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 철수를 거부하자 남군은 요새를 공격하였고 이를 계기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이때 섬터 요새는 이미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에 갓 대통령이 된 링컨은 섬터 요새에 식량을 공급하겠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하였다.
그리고 미국 부통령이었던 존 C. 브레킨리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대통령 앞에 사표를 제출하여 부통령 직에서 사퇴하고 남부에 가담하였다.'''[32]
이때 섬터 요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섬터 요새는 남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요새가 튼튼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요새도 크게 파손당하자 연방군 지휘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새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요새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군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남군에게 허락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깃대에서 성조기를 회수하며 연방군 포대가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때 폭발 사고가 나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등 연방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 이 때문에 남북전쟁의 최초 사망자는 교전이 아닌 폭발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요새와의 교전에서 남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참고로 교전으로 인한 최초의 사망자도 연방군이다.

4.5. 아메리카 연합국(CSA)의 탄생


전쟁이 시작되자 버지니아 주,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33][34]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 남부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 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웨스트 버지니아), 델라웨어 주,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이렇게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부른다. 마침 이들 경계 주는 정치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실제 지리적으로도 기존 연방과 남부연합의 경계에 속했다.
  • 버지니아 주의 서부와 동부는 차이가 극심했다. 산악지대인 서부는 산업이 발달하고 대농장과 노예가 별로 없었던 반면, 동부는 남부의 다른 주에 노예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다. 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동부 쪽이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서부쪽에서 연방에 잔류하고 따로 주를 만들자는 분리 움직임이 일어나 1862년 12월 31일자로 링컨 대통령이 웨스트 버지니아 주 창설에 서명하게 되었다. 완전히 공인된 것은 전쟁 후. 버지니아는 전쟁 기간 남부의 중심지인 동시에 주 자체로 봐도 서부 지역이 북부에 떨어지고 남은 지역이었으니 그야말로 순도 100% 알짜배기 노예주였던 셈이다. 이런 연고로 버지니아는 1960년대까지 인종차별이 극심했고, 현재까지도 보수적인 기풍이 강하다. 그런데 왠걸,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광공업은 점차 쇠락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깡촌, 버지니아가 상대적인 도시지역이 되어버리면서 상황이 뒤바뀌어버렸다. 그런데 마침 공화당도 보수정당으로, 민주당도 진보정당으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지지정당은 유지되었다. 단, 연방 선거가 아닌 주정부 선거 단위로 가면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민주당이 강세다. 버지니아는 주정부 단위에서 Swing State다.
  • 메릴랜드 주에서는 남부를 지지하는 이들이 연방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다리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는데, 남부 정부에서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링컨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을 파견하여 메릴랜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를 장악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재판없이 구금시켰다. 구금된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당시 메릴랜드 주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이긴 했으나 주 인구는 노예제 지지론자들이 많아서 실질적으로 노예가 인정되고 있었다. 즉 중도 성향의 주였다. 문제는 메릴랜드가 워싱턴 D.C.를 둘러싼 주라는 것. 여기가 남부로 넘어갔으면 북부는 전쟁 초반에 그대로 나가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경우 최소한 수도를 이전한 상태로 전쟁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연방군으로 메릴랜드 주를 "점령"하거나.
  • 켄터키 주는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표방하다가, 이후 남군의 침입을 받자 바로 연방측으로 가담했다. 정작 이 침입은 남부 장군 레오니다스 포크가 테네시 주에서 방어선 구축 중 남부 정부의 명령도 없이 멋대로 들어간 삽질이었다(...). 전쟁 초반 서부전선에서 북군의 선전은 대부분 이 장군의 오판에 기인한 바가 컸다.
  • 미주리 주에서도 분리 움직임이 있었으나 연방군에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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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이 북부, 붉은색이 남부. 연보라색은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인데 이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한다. 흰색은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영토(Territory)로써, 인구가 많지 않고[35] 산업기반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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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정확한 지도. 정확히는 1863년 웨스트 버지니아가 분리되고 1864년 네바다 주가 승격된 최종 국면의 지도다.

5. 전개


북군과 남군의 상황은 웃기게도 제2차 포에니 전쟁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자원 등에서 일방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반대편은 지휘부 역량 딱 하나가 유리해서 붙어보겠다고 덤볐고, 전술적인 승리도 많았으며, 실제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보이는 시점도 있었지만, 결국은 물량이 앞서는 쪽이 지휘부 역량마저 성장하자 결국 밀렸다는 점 등이 그렇다.

5.1.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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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of America
북부 연방은 정부조직이 이미 잘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때문에 물자 동원도 훨씬 수월했다. 국력도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에서 우세했는데 당시 총기생산량의 97%가 북부에서 나왔다. 여기에 힘입어 북군은 미니에 탄 등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많이 도입하여 더 우월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남군은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갖추는 데에 애로점이 있었다.
여기다 전쟁 중에 4000km 이상의 철도를 가설했고, 기존의 철도망도 계엄령을 통해서 국유화를 실행한 결과 잘 갖추어진 철도망과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인구의 측면에서도 압도적이라 농업이 주 산업인 남부보다 식량 생산량이 많았고 인구는 4배나 차이가 났다. 당시 북부의 농장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콤바인이 도입되었으며 덕분에 주요 노동 인구였던 남성들이 군대로 빠져나갔어도 남은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활동이 가능하여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아 전시 중에도 영국에 식량을 수출할 정도였다. 반면에 남부는 농업 비중이 높았음에도 대부분이 목화, 담배와 같은 상품 작물이고 식량 작물 도입도 늦어서 전쟁 말에 가면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물론 남부 정부도 사안의 심각성을 알고 감자, 사탕무, 콩 등의 작물 재배를 독려하였으나 워낙 고집 세고 독립 기질이 강한 농장주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북부 연방 정부가 식량줄을 줄기차게 공격해서 식량난이 더욱 심해졌다.
자유민 인구만 따져도 4:1로 연방이 우세했는데, 당시 미국의 주요 항구가 모조리 북부 손에 있었고 제해권도 북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은 전부 다 북부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미합중국 정부는 전쟁중에도 지속적으로 이민을 받았고 도착한 이민자들은 돈받고 정착하는 대가로 북군에 입대해 싸웠기에 병력 차가 더 벌어지게 된다. 다만 이 때문에 북군의 병사의 질은 남군보다 낮았으며 이는 초반의 남군의 선전과 양측 전사자 비율 격차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거기에 도망 노예들이 북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자 안 그래도 우위였던 수적인 우세가 더 강화되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편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가 대표적인 흑인 부대였다. 이들을 다룬 영화로 1989년에 개봉한 영광(Glory, 국내개봉명은 영광의 깃발)이 있다.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54연대의 선전으로 이후 흑인들의 모병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고 18만명의 흑인들이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54연대는 프레드릭 더글러스[36]와 같은 당시 노예제 폐지운동계에 활동하던 유명인사들이 징집운동을 하기 위해 자원하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부사관이자 역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월리엄 H. 카니 상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의회 명예 훈장은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1900년에 수여되었다. 상사는 국기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적의 진지에서 저항하다 퇴각 과정에서 4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다른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군대는 전쟁 시작 때 육군 1만 6천 명, 해군은 7천 6백 명, 42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영토를 지키기에는 군대의 규모가 너무 적었는데, 이는 민병대 전통이 강했던 미국에서 연방 중심의 상비군은 소수로 유지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으로 주변에서 미국에 대결할만한 강국 자체가 사라진 것도 있어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무기 역시 미국 독립전쟁 때 쓰던 구식조차 더러 섞여있었다. 때문에 얼마 전에 해외 원정까지 한 국가라고 하기에는 매우 적은 군대만 존재했고 전반적으로 병력의 질이나 경험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장교단의 질도 사관학교가 있는 버지니아 주가 남부에 가담하면서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는 전쟁 초반 남군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남부보다 국력이 우세했지만 연방도 전쟁 준비가 안 되었고 그 우세를 전쟁에서 실제로 가용하게 동원하려면 시간이 걸렸기에 전쟁 발발 시점에선 남부에 비해서 딱히 우세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북부의 목표는 연방의 재통일과 반란군인 남부의 진압이었다. 전략목표는 명확하게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였다. 북부의 대전략은 전쟁 시작 당시의 북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37]이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입안한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 중심이었다.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론적으로 매우 타당한 계획이지만 남부를 포위하기 위해 장기간의 봉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이에 빠르게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남부연맹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의 주공 방향에서 단기결전 형태의 육상 작전들이 입안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방어용 화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을 도외시한 공세 작전들이 입안된 탓에 전쟁을 초기단계에 해결할 희망이 불 런 전투에서의 패배로 막혀버리고 점점 더 지지부진하게 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은 나중에 스콧의 뒤를 이은 조지 B. 매클레런(George B. McClellan)[38]이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의 수출/수입량의 95%가 막혔다. 정리하면 동부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남군의 주력을 붙들어 매면서 수도인 리치먼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방어하고, 서부는 대전략의 핵심으로 서부 남부주들의 물자가 동부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한편 서부의 주를 탈환해서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 자체를 감소시키는 데 있었다.
수도인 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다보니 남군이 약간만 북진하는 것으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위기에 처한다는 게 전략적으로 약점이었다.

5.2.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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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보통 사람들은 주로 X자 모양 안에 13개의 별이 박혀있는 깃발이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한 군기(Confederate Battle Flag)이고 위와 같이 적, 백, 적색 순서의 문양 및 좌측 위의 푸른 바탕에 13개의 별이 원을 만드는 깃발이 정식적인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이다(참고).[39][40]
남부의 아메리카 연합국은 근본적으로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 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한 지방자치제 국가였다. 이로 인해 새로 구성된 정부조직은 주 정부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고 아예 주 정부들이 중앙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애틀랜타가 포위당했을 당시에 애틀랜타를 포기 못하고, 그때까지 잘 먹히고 있던 상대방을 자신들이 구축한 진지로 끌여들여 조금씩 피해를 주던 방식을 버린 다음 전면적인 역공을 강행해야 했다.[41] 또 북부는 철도를 효율성을 위해서 국유화했지만 남부는 민간에게 맡겼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를 조정하고 남부 정부의 지침을 확정하느라 고생 좀 해야 했다. 허나 그렇다고 이 사람이 일을 잘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일부 장군들만 편애하고, 일부 장군들은 싫어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전쟁을 말아먹었다.
그리고 남부는 인구 면에서 북부에 밀리고 농업 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경제력도 빈약해 전쟁 물자 생산도 어려웠다. 한 예로 미국의 남부 지역 주들 상당수가 면화 재배 및 가공업이 사장되면서, 해외 자동차 메이커들이 미국내 공장을 설립하기 전까지 빈곤 주로 전락했다.[42]
농업도 대부분이 목화를 중심으로 한 상품 작물 재배가 목적이어서 식량 생산조차 북부에 밀렸다. 북군 병사들이 커피, 베이컨밖에 없는 단조로운 군대 식단을 두고 배부른 불평하고 있을 때,[43] 남군 병사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셔츠를 물어뜯고 있어야 했다. 농업국가 주제에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한심한 상황. 덕분에 남군은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을 해야 했고 무기의 질도 북군보다 훨씬 떨어졌다. 물자 수송에 필요한 철도도 남부는 600km를 추가 가설하는 데 그쳤다.
군대도 이미 군대가 조직된 북부와 달리 새롭게 구성해야 했으며 기병의 경우 말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참전하는 등 민병대적인 성향도 강했다. 여기에 상기했듯이 생산력 차이로 군화도 지급 못받아 자비로 마련해야하거나 맨발로 가야할 지경이었다. 보급이 이러니 군복도 통일이 될 리가 없었다. 남군 하면 흔히 떠올리는 회색 군복은 대부분 지급품이 아니라 병사 개개인이 스스로 마련한 것들이었고 아예 군복이 아닌 민간인 복장에 계급장만 부착하고 참전한 군인도 있을 정도였다. 무기의 질 역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특히 남부 사회는 ‘민병(Militia)’의 전통이 강했으며 민병이 아니더라도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다보니 초반에 징집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죽을 위험이 적은 부대를 택하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한 사람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했다. 물론 상황이 절박해서 의원들도 할 수 없이 대통령의 법안에 동의하여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만 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노예제를 지켜야 한다"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북군보다 훨씬 높았다.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북군의 사기도 추상적인 목표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당시 북부인들은 교육 수준과 문자 해독율도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지금 관점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연방)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따라서 미 연방과 미국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기는 고향을 수호하는 남군의 전투의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44]
또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낙후된 국가로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가 부족했으므로 남부 측이 고향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지형지물을 이해하는 수준도 높았다. 그리고 북부의 장교단에는 교육자나 정치가, 사업가 등이 비교적 많았다. 중간에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매클레런은 철도 기술자 경력이 있고 제20 메인연대를 이끌었던 조슈아 체임벌린은 대학교수였다.
남부는 북부에 비해 노예제와 대농장 등이 발달되어 귀족 사회에 가까운 면이 있었고, 이들은 미국 초기 장교단의 산실과도 같았다. 또한 뉴욕의 웨스트포인트 같은 국립 사관학교는 아니지만, 나름 전통있는 군사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하였고 따라서 각 사관학교 출신들이[45] 고향을 지킨다는 이유로 돌아갔을 때 남부가 더 장교단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북측이나 남측이나 모두 장교진들은 대부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이 북부(연방)측에 가담하였고, 장교의 질이나 장교의 숫자나 북부가 훨씬 우세했다'''. 예로 최고참 장성급들 중에서 7명 중 5명이 북부편이었고, 2명만 남부편이었다. 다만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46] 실질적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1~2명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죄다 남북전쟁 도중에 죽거나 은퇴한다.
그러나 참모진들은 10명에 8명이 북부편이었고, 그 중에서 2명만 남부편이었다. 남부연맹 측의 이 2명 중에서 남부 팬덤측에서 졌다고 로버트 E. 리에 비해서 평가절하당하는 조지프 E. 존스턴[47]이 있다. 또 다른 장교[48]는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활약한 로버트 E. 리였다. 그렇다면 기타 장교들 숫자를 살펴보자. 웨스트포인트, 버지니아 밀리터리 아카데미 등을 포함한 군사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남부측에는 약 280명, 그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184명이 가담했고, '''북부측에는 809명''',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640명이 가담했다. 즉, 고위 영관급 사관급 장교진만 보더라도 북부측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신 사관급, 부사관급 하급장교들은 버지니아 밀리터리 아카데미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들의 대다수가 남부 측에 붙었다. 그러나 북측에서도 버몬트에 위치한 노르위치 군사 아카데미[49]가 존재했으며 600명 이상의 하급장교들을 배출했다. 즉, 개전시점에서 종전까지 장교단조차 질적으로든 숫적으로든 북부가 남부보다 밀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 자체의 체급이나 물리적 힘의 단순비교에서는 남부가 크게 열세에 있었지만, 개전 초기 전략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남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북부의 목표는 반란의 완전 진압인 반면 남부의 목표는 연방에서 독립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북부 입장에서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는 물론, 반란을 지속하는 다른 주들까지 하나 하나 다 진압하고 평정해야 할 막중한 부담이 있었지만, 남부의 경우 북부 여론과 엘리트들이 지쳐서 남부의 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버티면서 북부를 물먹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대전략이나 전략목표 설정은 부실했는데, 전반적으로 "고향에 쳐들어 온 양키"를[50] 각 주, 각 지방에서 격퇴하고 고향을 지키는 형태의 작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북진의 경우 각 주의 자주권을 내세우며 독립한 남부의 정치적 성향상 북부의 다른 주를 침략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도 있었고 다른 주의 주권을 침탈하는 점에서 남부연맹 성립의 명분과도 어긋났다. 게다가 남부의 주들은 전쟁 이전에 북부의 주들과 교류가 있었다. 심지어 전쟁 도중에도 남부와 북부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북부에 넘겨준 형태였으며 리가 감행한 북진을 위한 두 차례의 전략 기동이 앤티텀 전투게티스버그 전투에서 각각 막힌 뒤로 전략적으로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다.
상대적으로 형태를 갖춘 남부의 대전략이라면 역시 북진하여 북부 본토에서 연방군 주력을 격파, 전쟁 수행 의지를 끊겠다는 리 장군의 전략인데, 결과론적이지만 지나치게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리는 홈그라운드인 포토맥 남쪽에서 싸울 때는 북군에게 훨씬 나쁜 교환비를 강요했지만, 북진했을 때는 훨씬 수월한 정보 및 보급 조건에서 싸우는 북군에 고전을 면치 못해 안 그래도 보충이 쉽지 않은 피같은 병력을 소모했다. 리와 북버지니아군의 북진은 국가적 차원의 대전략이 되지 못해 다른 남군 장군이나 군단급 이상 제대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서부전선에서 남군이 연전연패, 각개격파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남부의 외교술은 전쟁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북부에게 뒤쳐지게 된다. 남부의 외교 전략은 바로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를 끌어들여 영국을 치게 만들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유럽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꽤나 타당성이 있는 전략이었는데, 유럽의 강대국들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미국을 둘로 갈라 놓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고, 게다가 남부 측은 전쟁 시작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면화 공급원으로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는 중이기에 산업혁명으로 원자재 수요가 막대했던 유럽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유럽의 각 나라들은 남부를 응원할지, 북부를 지지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부는 이 점들을 이용해 유럽 열강들, 특히 당시 세계 최대의 면 수요국인 영국을 압박,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아 북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을 목적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먹혀드는 것 같았던 이 전략은 북부가 제해권을 잡고 아나콘다 작전을 통해 해상을 봉쇄해버리자 면화를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게 되어버리며 실패한다. 게다가 마침 면화 산업에 뛰어든 이집트가 남부의 면화 공급이 끊긴 틈을 타 어부지리로 대박을 치며 유럽의 면화 수요 물량을 공급해주자 영국을 위시한 유럽 열강들이 남부를 지지할 이유가 줄어들게 되어버리고 만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는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를 폐지 한지 오래고, 이미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노예 제도가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유럽에게 실용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된 남부의 지지 요청에 대한 대답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차가워졌고, 결국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세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자 남부를 아예 못본 것 마냥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외 유럽 열강들, 특히 엘리트 귀족사회였던 프로이센조차도 북부를 지지했다. 아일랜드인들 다음으로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병사들이 바로 독일 이민자 출신 병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유럽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열렬하게 노예 해방을 지지했다. 모든 북부 병사들이 노예해방을 찬성하는 건 아니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여겼다. 북부(연방)측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As He died to make men holy, let us die to make men free."(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사 죄를 대속하여 우리 죄를 사해 주셨듯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희생해 인류를 자유롭게 만드리라.)라는 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남부 출신이지만 북군편을 든 연방주의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존슨 미국 대통령이나 남군 출신이었다가 탈영해서 미시시피주에서 존스 자유주를 만든 뉴턴 나이트의 사례가 있다.[51]

5.3. 동부전역 초기 - 남부의 우세


전쟁 초반 동부 전역의 남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과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 등으로 대표되는[52]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 등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는데 사실이 아니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이탈을 막지 못했으며, 잭슨의 계곡 전역의 성과는 눈부시기는 했지만, 결국 북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그쳤고[53] 워싱턴 D.C.를 위협하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반도 전역은 로버트 E. 리의 전략적 승리임이 분명하나 이 와중에 매클레런을 상대로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도 2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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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다 충격을 준 전투. 전쟁 초기 남군은 1차 불 런(매너새스) 전투에서 버지니아 주를 침공한 북군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데 실패했다. 이때는 양쪽 군인들이 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상태였다. 여기서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인은 유능한 사단장이었던 토머스 잭슨이 북군의 맹공을 끝까지 버텨낸 것이었다. 토머스 잭슨은 이 덕분에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잭슨은 부상을 입었으며, 그의 사단은 50%가 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웨스트 버지니아 전역의 성공 때문에 전투 직전까지도 전쟁이 앞으로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 내다볼 정도로 전황에 낙관적이었던 연방 수뇌부는 큰 충격에 빠진다. 남부는 전투에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이긴 것 치고는 비교적 조용했다. 북부, 남부 모두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길고 잔혹해질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병력을 더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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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1862년 북군의 동부 전역 주력인 포토맥군의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은 북군의 압도적인 해상 우세를 활용, 체서피크 만 건너편의 포트 먼로에 북군을 상륙시켜 남부 수도 리치먼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려 했다. 링컨은 워싱턴이 노출된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했으나,[54] 결국 수용하게 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성향의 남군 사령관이었던 조 존스턴은 방어하기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지속적으로 후퇴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없이 남군은 리치먼드 코 앞까지 몰리게 됐다. 이렇게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존스턴의 부상을 핑계로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는 실패했지만 더 공격적인 로버트 E. 리를 사령관으로 삼는다. 그리고 남군 주력 북버지니아군은 7일 전투로 대표되는 숱한 전투에서 매클레런을 상대로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리치먼드에서 어느정도 북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압도적으로 연방군에게 유리했고, 남군은 지속적으로 매클레런이 잘 만들어놓은 방어적인 진형에 저돌적인 공격을 계속 감행해서 피해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매클레런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오판하고, 적이 적어도 2배는 더 많다고 생각하여 링컨에게 지속적으로 추가 병력을 요청했다. 매클레런의 지지부진한 진격에 화가 많이 난 링컨은 매클레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55]
포토맥군은 다시 포토맥 강 북부로 후퇴하지만 리는 북군의 후퇴 과정에서 생긴 병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2차 불 런(매너새스) 전투에서 포토맥군의 빈자리를 지키던 존 포프 휘하 북군을 격파하고 이어 북부의 메릴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사실 초기 매클레런이 없고 스톤웰 잭슨이 두 배의 병력으로 포위공격을 하여 적을 거의 다 포로로 잡은 하퍼스 페리 전투(Battle of Harper's Ferry)를 제외하고 매클레런과 리가 제대로 붙은 사우스 마운틴 전투(Battle of South Mountain)에서 매클레런이 승리하고 리가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며 패배함으로써 사실상 리의 침공은 끝이 난다.[56] 그럼에도 리는 포기하지 않고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에서 2배가 넘는 북군을 상대로 전략 기동을 보여줬지만,[57] 그럼에도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링컨은 이에 맞추어 노예 해방 선언(9월 22일)을 선포했다. 그러나 매클레런은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도 앤티텀 전투에서 리의 군대를 박살내는데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더 많은 피해를 봄으로써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부 정부는 외교적인 오판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는데 실패했다. 당시 남부에서 수출하는 목화는 전세계 생산량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를 빗대 킹 코튼(King Cotton)이라고 불렀으며, 남부의 외교술은 이 목화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전인 1861년에 남부에서는 목화를 많이 수입하는 영국의 개입을 노리고 목화를 수출하지 않았는데,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북부의 해상봉쇄로 인해 수출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남부의 경제력을 크게 깎아먹은 것은 물론 영국의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해버렸다. 영국은 남부의 목화를 수입하지 못하자 이집트[58]와 인도에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해 일시적인 목화 부족사태를 넘겼다. 또 당시 영국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식량의 상당량을 북부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만약 영국이 남부 편을 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질 판이었다. 프랑스는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멕시코 원정을 하다가 실패한 탓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는데, 사실 영국 정계는 실제로 남부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미국이 분열되는게 유리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부를 거의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의 반노예제적 국민여론 때문에 노예 해방 선언 이후 승인이 좌절되었다. 프랑스도 당시 나폴레옹 3세 치세에서 보수화되던 시대였고, 따라서 귀족적인 남부에 더욱 우호적이었다. 다만 프랑스 혼자서는 개입이 부담스러웠고, 따라서 영국이 개입할 경우 함께 개입할 작정이었다. 결국 영국이 노예해방선언으로 개입을 포기하면서 프랑스도 개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영국이 개입하면 영국과 라이벌인 프랑스가 북부 편 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역사상 거의 유일할 정도로 친밀했다. 참고로 프랑스는 미국 내전 타이밍을 노리고 멕시코에 개입하지만 별소득 없이 물러나게 된다.
또한 북부의 외교전술도 주효했는데,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의 북진을 저지하자마자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해 이 전쟁을 부당한 노예제에 맞서는 성전으로 만들어 영국, 프랑스가 끼어들 명분을 없애버렸다. 유럽에서는 이때 이미 천부인권 사상이 널리 퍼져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농노제, 노예제를 폐지한 상태였다. 참고로 제정 러시아의 농노 해방이 1861년.
링컨 대통령은 앤티텀 이후 남부에 대한 반격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레런에게 공격을 종용했지만 매클레런은 반도 전역의 실패 때문인지 피해에 민감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862년 11월 매클레런은 앰브로즈 번사이드로 교체되지만 그는 프레드릭스버그에서 리에게 패배하며 대군의 지휘에는 소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1863년 1월에는 '파이팅' 조 후커가 신임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는데 리는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후커를 패퇴시켰지만, 리 자신의 군대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사실 이긴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문제는 이겨도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리는 다시 한 번 북부로 진군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버지니아 농장들이 봄-여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북부로 진격한다. 하지만 챈슬러스빌에서 스톤월 잭슨 장군이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어이없이 전사하면서 리는 가장 유능한 수하를 잃는다.
리는 챈슬러스빌의 승리 이후 워싱턴 D.C.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북상했고, 새로운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미드가 리를 추격한다. 리는 메릴랜드를 넘어 펜실베이니아까지 북상하는데 이는 남북전쟁을 통틀어 남군이 가장 멀리 북상한 것이었다. 이 와중에 리의 군대는 자유민 흑인들을 마구 잡아 노예로 팔아넘기고, 방화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상이랍시고 남부연맹 돈을 주는 등 전쟁범죄들을 저지른다(이를 기억한 북군은 나중에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휩쓸 때 고대로 갚아준다). 하지만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리의 남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남쪽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5.4. 서부전역 - 북부의 반격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콘다 계획에 따른 서부 대전략이 충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부연맹의 서부는 북부의 손에 넘어간다. 서부전역을 통틀어서 남군은 의미있을 만한 승리는 단 한 번(치카무가 전투) 밖에 거두지 못했고, 전쟁의 승패는 서부에서 결정되었다는 견해도 많다.
서부전역에서의 남군은 출발부터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남군의 레오니다스 포크 장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켄터키 주의 콜럼버스를 점령하면서 오히려 켄터키 주가 연방에 가담해 버린 것이다.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은 1862년 초에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을 함락시키며 컴벌랜드 강과 테네시 강을 장악했고, 포크는 1862년 초에 이미 콜럼버스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862년 4월에는 북군 해군에 의해 남부 최대의 도시 뉴올리언스가 함락되고, 곧 빅스버그 주변을 제외한 미시시피 강 전체를 북군이 통제하게 된다. 1863년 초에는 윌리엄 로즈크랜스 휘하의 북군이 중부 테네시에서 남군을 쫓아내고 조지아까지 밀어붙였다.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였던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텍사스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7월 5일 동부전역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도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빅스버그 함락, 게티스버그 전투 패배 직후에는 오히려 서부전역의 남군이 일시적으로 강화되었는데, 빅스버그가 함락되면서 빅스버그로 보내졌던 남군 지원군이 귀환하고 게티스버그 전투 패배 이후 제임스 롱스트리트 휘하 부대가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군에서 서부전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1863년 9월 치카무가 전투에서 증강된 남군은 행운의 도움과 롱스트리트의 활약으로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상대로 승리하지만 '치카무가의 바위' 조지 토머스 장군의 끈질긴 방어로 전과를 확대하는 데는 실패한다. 11월, 남군은 로즈크랜스를 추격하여 채터누가에서 포위하지만 그랜트와 셔먼의 지원군이 도착, 포위가 풀리고 남군이 물러나며 지금까지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딥 사우스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64년 봄, 북군 총사령관으로 그랜트가 임명되었고, 서부전역 사령관에는 그 후임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임명되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을 시행에 옮겼다. 그랜트는 동부전역으로 이동, 조지 미드의 포토맥군을 직접 통제하며 끊임없이 리에게 싸움을 걸었고, 셔먼은 채터누가에서 조지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남군의 존스턴 장군은 지연전을 펼치며 셔먼의 보급과 진격을 방해했지만 셔먼이 애틀랜타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곧 젊고 공격적인 존 후드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드의 공격은 압도적인 셔먼의 병력을 막지 못했고, 결국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하면서 애틀랜타 전역은 셔먼의 승리로 끝난다. 이 때 셔먼은 도시 시민들을 소개시키고 도시의 관공서와 군사시설을 완전히 파괴한다. 한편 후드가 끊임없이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기회가 된다면 북쪽으로 진군할 것처럼 보이자 셔먼은 보급선을 포기하고 물자를 현지조달하며 진군 경로의 전쟁수행능력, 의지를 꺾고자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바다로의 진군(March to the Sea)이다. 이때 셔먼의 북군은 애틀랜타에서 출발해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Savannah)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생지옥을 만들었다. 후드는 셔먼을 추격하는 대신 테네시로 북진하여 전쟁의 일발 역전을 노리지만,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서 토머스와 스코필드에게 대패하고 안 그래도 부족한 남군 병력을 크게 깎아먹는다.
몇몇 남부측 역사학자들은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은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한 시점에서 서부전역의 남군은 사실상 박살났으며,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바로 그 바다로의 진군의 프리퀄격인 전장이 애틀랜타였고,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부의 후방을 들쑤셔놔서 급해진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에서 불리한 병력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 남부측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의미가 없다고 하기 매우 힘들다.[59] 그리고 남군이 북군의 보급을 방해하려고 우월한 기병대를 동원해서 북군의 물자를 끊임없이 약탈하고 파괴했는데, 이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셔먼 입장에서는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 보급로를 사수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되돌아가 철도 및 보급로를 보호하면서 후드와 지루한 숨바꼭질을 하던가,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진격하면서 중간중간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면서 남군의 방해 없이 보급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항구로 갈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당연히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이라는 논리적인 선택을 했다.
남군은 남부의 교통의 허브이자 주요 보급도시였던 애틀랜타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게 전쟁을 사실상 결정지은 결정적인 패배였다는 시각이 있다. 이 패배가 없었으면 후방이 털리지 않은 남군은 어느정도 전역유지가 가능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링컨이 대선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실제로는 셔먼의 북군에게 애틀랜타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사실상 전쟁지속능력을 잃어버렸으며 남은 전력도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후드의 남군이 토마스 장군과 스코필드 장군의 북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상실하게 된다. 애틀랜타 전투가 전세를 기울어지게 한 전투였다면, 이 전투는 남군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눈꼽만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날려버린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군의 후방을 휘젓고 있긴 했으나 북군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남군 역시 무주공산이 된 북군의 후방을 휘저을 수 있게 되므로 전쟁이 장기화되어 남부 정부가 원하는 대로 북부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가능성도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애틀랜타 전역에서 큰 패배를 당하여 전력이 많이 줄어든 시점에서 남군의 패배는 필연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이 때의 패배로 후드는 woodenhead란 별명을 얻었다. 본래 뜻은 공세를 펼치는 모습이 마치 통나무로 밀어붙이는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으나, 이 패배 이후엔 머리가 나무로 가득 찬, 즉 돌대가리와 같다는 모욕어린 뜻으로 바뀌었다.[60] 결국 남군은 이런 서부전역에서 열세로 말미암아 서부의 물자와 인력이 동부를 지원하기는커녕 동부의 주전력으로 서부를 지원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5.5. 전쟁의 종결


동부전역에서는 그랜트의 지휘 아래 북군의 대병력이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다방면에서 공격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야전에서 의 남군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를 바로 뒤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더 용이했으며, 대부분 축성전, 방어전[61]에 치중함으로써 그랜트를 상대로 전술적 승리를 몇 번 거두기는 하나, 그랜트는 지속적으로 리를 도망못가게 묶어놓는 한편, 제임스 강을 건넘으로써 리가 어쩔 수 없이 피터스버그에서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결정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데, 전술적인 승리로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던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많은 인구와 물자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소모전으로 바뀌자 리가 계속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연방의 주력인 포토맥군을 완전히 '증발'시키는, 그러면서 자신의 북버지니아군은 온존하는 수준의 대승리가 없이는 북군을 내쫓을 수 없게 된다. 전쟁터가 남부 한가운데가 되었고 그랜트가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회하면서 끈질기게 리치먼드로 진격하자 리는 더이상 기동전을 할 수 없게 되고 야전 축성을 해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동시에 셔먼도 사우스 캐롤라이나노스 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 주 쪽으로 진격해 리를 남북에서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1864년 7월에는 리의 명령을 받은 주발 얼리(Jubal A. Early)가 상황을 뒤집어보려고 1만 5천의 군대로 포토맥 강을 건너 워싱턴을 기습 공격해보려 했으나 그랜트의 신속한 증원군에 가로막혀 실패하였으며,[62] 이후 쉐리던이 이끄는 추격군과의 전투에서 얼리는 패배하고 셰넌도어 계곡이 초토화된다. 1865년 4월 1일에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으며, 리는 전술적으로나 병참 상황으로나 계속해서 싸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같은 해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이 버지니아 주 '''애퍼매톡스(Appomattox)'''에서 그랜트가 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남북전쟁은 완전히 종전됐다.

5.6. 전후 재건시대


북부의 승리로 남부 연합은 해체되어 북부로 통합되었다. 연방과 남부의 조화를 바란 북부 정치인들이 관대한 조건을 제시해서 남부 정치인들이나 군인들이 크게 처벌받지는 않았으나 연방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참정권이 제한되고 남부 출신들은 연방공직에서 쫒겨났으며 군정이 실시되어 북군이 남부 주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다.
이후 전후재건과 노예해방 정책이 이어젔으나 남부인들의 심적 반발과 저항으로 KKK 등이 흑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링컨이 암살되고 대통령을 계승한 남부 출신 앤드루 존슨이 남부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뿌리깊은 인종 차별의 씨앗은 해결되지 않았다.
또 노예경제가 해체되면서 대농장 플랜테이션들은 크게 타격을 받아 경제적 격변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재산을 잃고 몰락한 백인 농장주들의 북부에 대한 증오는 미국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와 민주당이 러더퍼드 B. 헤이스의 석연치 않은 당선을 인정하는 대가로 남부의 연방 주둔군이 모두 물러나고 남부 주들의 '자치'가 보장되는 1877년의 타협이 일어나 재건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참정권을 인정받아 투표와 주정부, 연방정부에 참가하기 시작했던 흑인들은 조직적, 폭력적으로 다시 참정권이 배제되었고 남부 주정부는 다시 민주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남부의 시대착오적 행보는 약 1세기가 흘러 충분히 성장한 흑인들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통해서야 막을 내렸다.

6. 분석



6.1. 북부


'그리고 비록 그대가 가난할 지라도'

'그대는 절대 노예가 되지 않으리!'

당시 연방 지지자였던 조지 프레더릭 루트가 작사, 작곡한 연방군의 군가, '자유의 함성 (Battle Cry of Freedom)'[63]

[64]

북부는 전쟁 초반에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야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초반에 남부에 계속 패배하여 포토맥 강 근처까지 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우위 덕분에 몇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고 장비나 보급에 있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북군은 전쟁 내내 남군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무기로 싸울 수 있었으며 언제나 전력상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북부는 정치적 혼란과 인기없는 전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연방 대통합을 위해서 남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를 우선 확인하게 했고 그를 위해서 장기적으로는 아나콘다 계획으로 서부와 동부를 분리한 후 수출입을 막아 고사시켰으며, 단기적으로는 동부의 포토맥군이 리치먼드 함락 혹은 동부전역 남군의 주력인 의 북버지니아군 섬멸을 목표로 끊임없이 공세를 지속했다. 그 결과 남부를 고사시키면서 전쟁 수행 능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며 결국 셔먼에 의해 서부가 완전히 박살나는 동안 동부에서 그랜트의 소모전에 말린 남군은 남부 한가운데서 결전을 강요받고 패배했다.
하지만 북부는 비단 초반뿐 아니라 그랜트 취임 이전까지 지휘관들의 역량이 남부에 처지는 것에 더해서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우세한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전술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능력이 있고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있던[65] 매클레런은 소극적인 지휘로 하마터면 가 북부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할 뻔 했다. 심지어 게티스버그 전투 당시 지휘관인 미드마저도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의 추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나서서 의 남군을 끝장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소극적이고 고전적인 지휘로 북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군에게 계속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그랜트의 부임으로 비로소 반전되었다.

6.2. 남부


남부는 북부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된데다가 기본적인 국력이 북부에 한참 미달하였지만 북부도 당장은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남부는 각 주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자발적인 병력이 근간이어서 '침략군'인 북부를 몰아내자는 병사 개개인의 목표 의식이 강했고 전투의지도 높았다. 북군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끝까지 전투를 치른 남군의 감투정신은 이런 기반에서 나왔으며 그 결과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하면서도 전술 단위의 전투력에서는 항상 뛰어난 전과를 보여주었다. 장교단도 미국-멕시코 전쟁을 경험한 인재들이 많았고 특히 리와 잭슨 등 남군의 명장들이 뛰어난 병력과 합쳐진 덕분에 초반에는 강력한 북군을 말 그대로 관광태우고 다녔다. 그래서 전쟁 초기 북군의 연이은 패배는 연방에 충격을 주곤 했다. 압도적인 국력으로 남부는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
사실 그 뛰어난 장교단도, 전쟁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실력의 간극이 좁혀진다. 율리시스 그랜트나 윌리엄 셔먼 등 북군에서 유능한 장군들이 계속 등장한 반면, 남군의 장교단은 스톤월 잭슨이 죽는 등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었다. 북군의 고급 장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장교들도 경험이 쌓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사실 애초에 장교단의 수준 차이도 크지 않았는데, 북측에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가담하였고, 상급 장교들의 수도 북측이 더 많았다. 가령 최고위 장성급들은 앨버트 존슨 및 3명 정도만 빼면 죄다 북측에 붙었다. 그나마 점점 전쟁이 불리해지니 남측은 정치적인 이유 등 여러가지 빌미로 유능한 장교들을 해임시키고, 위관급 장교 출신에게 별을 달아주는 등 아주 개판이었다.
초기의 사기높던 의용병들도 점점 숫자가 줄어들자 징병제를 통과시켜 18~35세까지의 백인 남성들을 징병했다. 20명의 노예를 제공하면 면제가 되고 장남과 차남은 면제가 되고 각종 기술자들은 면제가 됐고 돈을 주고 대리인을 보내면 면제가 가능했다.
외교전에서도 남부는 패배했다. 남부는 연방에서 벗어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외교적으로 승인을 얻는 전략은 독립전쟁 당시와 비슷한 방법이었는데, 영국이 이집트에서 대체 목화 수입로를 확보하면서 미국 남부산 목화의 경제적 가치가 줄었고, 앤티텀 전투 후에 노예 해방 선언으로 유럽 국가들의 개입 명분까지 상실하면서 실패했다. 오히려 북부의 봉쇄로 목화 수출이 중단되어서 경제적 어려움만 커졌다.
전술적 승리를 외교적으로나 국가 전략으로나 써먹지 못하게 되자 남부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부보다 훨씬 모자라는 전력을 가진 남부가 방어전을 펼쳐야 이길 수 있다고 보았고 북진 공세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남부가 전쟁에서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대부분 전장이 남부였고, 남부는 공세가 아니라 주로 방어하는 측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전술적으로 아무리 승리해도 전략적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니 북부는 계속 병력을 모아서 밀어붙이고 남부는 이걸 겨우 저지하는 형태가 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북부로 넘어갔다. 그나마 로버트 E. 리가 이끌던 동부전선은 전선유지라도 했지, 서부전선은 빅스버그 전투 이후로 상태가 개판이었다. 아무리 장교단이 좋아도 병력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한데,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정치질하기 바쁘고, 주 정부들은 서로 따로 노는데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방어전 위주의 전략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준비없는 방어전략은 결국은 소모전만 강요하게 될 뿐이었다. 반전여론을 지피기 위해서라도 북부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부에 있는 북군 주력인 포토맥군을 전멸시키는 수준의 승리가 필요했다. 사실 애틀랜타를 점령하기 이전에 선거에서 링컨의 실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덜컥 셔먼이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애틀랜타를 점령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확 오르고, 북부의 전쟁 의지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전쟁 초반에 그런 기회도 간간히 왔지만 제대로 된 마무리가 부족해서 북군의 주력은 끝까지 건재했다. 게다가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흑인 노예들을 끝까지 멸시하여 군사력으로 활용 안하다보니 군사력의 열세는 면할 수가 없었다. 이때도 몇몇 주들은 흑인 노예 인구가 주 인구의 절반가량이었다. 흑인 노예들을 군재로 동원하려면 해방을 시켜주어야 하고, 그러면 남부연맹의 결성과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66] 여러모로 태생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남부의 명분은 이렇게 취약했다. 사실 북부와 같이 흑인들의 대규모 입대는 없었어도 남군에 흑인 병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사진을 살펴보면 남군 출신의 흑인 병사가 찍힌 사진들도 꽤 나온다. 다만 오해를 하면 안 되는게, 전쟁 최후반까지 흑인 노예들의 입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흑인 병사''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남군의 1/3이 노예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전술적으로 승리해도 상대방은 좀 쉬면 금방 다시 공세에 나서고 이를 지난번 전투로 피해를 입은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막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처럼 전술적으로 아우스터리츠에 비견될 정도가 아닌 이상 소모전에서 남부가 우세를 점할 가능성은 없었다.
군수품과 물자가 딸리자 남군은 최후의 발악으로 닥치는대로 민간에서 물자를 징발해갔는데 이는 남부 농장주들의 많은 반발을 사 남부에 대한 지지를 더 떨어트리게 되는 원인이 됐다.
한니발제갈량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히려 막강한 전력의 북군이 남부에 쏟아지지 않고 남부가 전장에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북부로 진격해서 북군을 붙들어매고 북부 영토를 휘젓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67][68] 만약 리가 제대로 북진했으면 북부의 수도권이 전부 남부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링컨은 어쩔 수 없이 종전 협상에 나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여 실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냥 전선유지만 해도 어차피 미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돈 많이 들어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링컨을 재선시켜주지 않으면 남부가 이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그렇게 될 뻔 했다. 그러나 오히려 북부가 고착된 동부전선은 유지하면서, 빅스버그 전투 이후에 미시시피 강이 확보되어 진격이 훨씬 더 쉬워진 서부전선을 통해 승부를 보려고 했고,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는 오히려 남부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남부의 전쟁의지를 완벽하게 꺾어버렸다. 이에 두 차례의 북진이 하필이면 명령서 분실로 말아먹은 앤티텀 전투와, 장군들의 삽질로 패한 게티스버그 전투로 왕창 꼬인 로버트 리의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정작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에게 중요한 지휘를 맡기고, 정확한 전술 지시는 명확하게 하지 못한 건 리 본인이다. 스톤웰 잭슨 같은 경우 이 방식이 '''운이 좋아서''' 맞아 떨어진 거지, 다른 장교들도 통할거라고 생각해 똑같이 지시를 내린 건 리 본인 책임이다. 정말로 큰 마음 먹고 감행한 북진인데 북군이 남부에 공세를 가할 때 겪던 지리적 정보의 부족 문제와 주민의 비협조 등을 역으로 겪으면서 결국 실패했다. 북부주에 가까웠던 동네 사람들이 보면 남군들이 침략자 레벨(Rebel)[69]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명분인 각 주의 주권 운운도 '''모두에게 먹힌 것도 아니었다.''' 남부연맹에 가담한 주는 총 11개인데 중요한 점은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는 그보다 더 많았다.''' 앞서 보았듯 이른바 '경계 주'라고 불리던 지역들은 '''노예제는 옹호하나 각자의 사정으로 가담하지 않은 주'''들로 한 마디로 노예제 사수를 외치는 주들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70] 게다가 이 남부의 주들 중 대표적인 주 중 하나인 버지니아 주의 경우에는 아예 '''둘로 쪼개졌다.''' 버지니아가 웨스트 버지니아와 버지니아로 쪼개져 서쪽은 북부, 동쪽은 남부에 가담했던 것. 안 그래도 남부는 북진하기 어려운 조건인데 이렇게 북쪽에 있는 노예제 옹호 주들이 외면하니 따블로 손해일 수 밖에 없었다.

7. 결과와 의의


이제 그만하게. 반란군(Rebel)[71]

들은 다시 우리 동포가 되었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북군의 일부 병사들과 장교들이 승전을 축하할 때 남군 패잔병들을 폭행하려는 것을 제지하며


나는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다. 전쟁의 영광이란 것은 다 헛소리다. 적들의 피를 요구하고 복수와 파괴를 외치는 놈들은 모조리 총 한번 쏘아본 일도 없거나 부상자들의 절규와 신음을 들어본 일도 없는 작자들이다. 전쟁은 지옥일 뿐이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


7.1. 정치적 의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국민이 사망한 전쟁[72][73]이었으나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국가로서의 대외적인 '간판'을 세울 수 있었고, 이전과 달리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통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 열강 국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명목이었던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졌으며 흑인의 지위가 마침내 백인과 동등해지고 공직에 진출하는 등 장밋빛 전망이 펼쳐졌으나, 흑인 지위 상승과 함께 남부의 '옛 반란군'을 박살내려던 전쟁장관 스탠턴 등의 공화당 급진파[74]가 몰락하고 공화당이 보수화되면서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덮기 위해 민주당과 타협한 끝에 결국 '''흑인의 지위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뒤늦게 남부에서도 전쟁 말기에는 '독립을 위해서라면 영국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예 해방도 가능하다'란 주장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전세를 뒤집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여기 문서에서 잘 언급이 안 되는게 있는데, 남북전쟁은 남부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전쟁으로 인해서 늘어난 연방정부의 지출, 전쟁을 통한 기술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금융시장의 팽창으로 북부는 엄청난 경제적 황금기를 맞게 된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 J. P. 모건이 죄다 이 시기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과는 별도로 전후 미국 민주당은 내전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받아 미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아 공화당의 독주 체제가 공고화되어 전후에 치뤄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매번 낙선하였다. 그래서 FDR이 장기집권 하기 이전까지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1872년 대선에서는 아예 민주당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공화당에서 분당한 자유공화당(남부에 대한 '''탄압'''이 주 레퍼토리)의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하는 촌극까지 벌인다. 공화당이 장기집권한 약 70년의 기간 동안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그로버 클리블랜드우드로 윌슨 밖에 없으며, 그 마저도 클리블랜드의 경우에는 연임이 아니라 당선 된 후 한 번 낙선한 뒤 재당선되었으며, 우드로 윌슨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진보당을 따로 창당해서 출마하여 공화당의 표를 갉아먹어 어부지리로 당선된 경우이다.
게다가 '''남부 지역 전체가''' 군부의 지배를 받는 등[75] 그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독립 이후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때가 유일하며, 이 조치는 편법을 써서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이조차 헤이스 대통령이 득표는 지고 선거인은 이기는 뭔가 찜찜한 대통령이 된지라, 남부의 지지라도 받을 필요가 있었기에 이뤄진 조치였다. 항목 참조.
남북전쟁 이후에도 남부 해군기는 반항과 저항의 상징(...)으로는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데, 현재에는 남부기를 들고 다닐 경우 '''인종차별주의자 + 꼴통'''으로 찍히지만 한편으로는 '''병신같지만 멋있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Deep South라고 불리는 지역에서는 이런 반응이 현저히 적다. 미국 전체가 이런 반응은 아니다.
실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중에는 오키나와의 중심지 '슈리 성'에서 대공식별용 성조기가 없자 해병들 중 한 명이 휴대하고 다니던 남부기를 게양해 당시 미군 지휘부가 황당해한 에피소드[76]가 있으며, 심지어 6.25 때도 남부기를 달고 다니는 미군 전차부대를 본 한국군 포병대가 '헐 어디 군임? 저거 적군임 아군임?'하고 발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 미군 군사 고문단 장교가 말려서 아군인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트남전 때는 남부 출신 백인 미군들이 남부기를 달고 다니다가 흑인 및 북부출신 미군들과 패싸움이 터지는 일도 잦았다. 이 때문인지 게임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국민장기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연방도 남부기 사용(...).
미국 남부주 흑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남부 주청사에 게양된 남부기의 영구폐기를 강력히 주장해 성공한 일도 있지만 이에 반해 계속 게양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다. 2015년 딜런 루프에 의한 총격 사건으로 남부기는 잠재 테러집단인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상태. 아마존, 이베이, 월마트 등의 기업들은 남부기가 찍힌 상품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국의 국기 제조 회사들도 더 이상 남부기는 생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 깃발을 두고 찬반 논란이 팽팽했던 구도인데, 퍼거슨 사태, 에릭 가너 폭행 치사 사건, 딜런 루프의 테러 사건 등으로 근 몇년 사이 인종 문제가 미국 사회의 주요 담론으로 다시 재부상하면서 혐오, 증오 상징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커지고 있다. 하여튼 외부인이 뭣도 모르고 "멋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남부연맹 짱짱맨"하면 험악한 눈초리가 쏟아지는 분위기이니 주의해야 한다.
현재도 미국은 연방 탈퇴에 관한 성문화된 법이나 성문 헌법의 조항이 없는데, 남북전쟁은 어떤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할 시 연방정부가 전면전을 불사하고 무력으로 진압/토벌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연방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선례로 남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연방 탈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77]

7.2. 외교적 의의


대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 능력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어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에는 쿠로후네 사건 이후 미국의 영향이 적어져 메이지 유신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78]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남북전쟁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에 서술된 부분까지 파악하게 되면 "참 뜬금없는 전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미국의 건국에서부터 서부개척, 남북전쟁, 미국의 제국주의화까지 전부 연관되어 지속된 역사인데 그 일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몰라도 근현대사 시험치는 데는 지장없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로, 남북전쟁을 겪은 미국이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 당시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은 궤멸당했으며,[79] 그 상태로 한성이 함락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7.3. 전술적 의의


미국 내에서만 벌어진 전쟁이라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상 '''최초의 현대적인 총력전'''이다.[80]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서 싸우는 총력전은 이미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선보인 바 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현대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남북전쟁의 군사학적 최대 의의는 기존과는 판이한 '전술의 변화'일 것이다. 당장 이전의 크림 전쟁만 해도 전열보병이 주축이 돼서 싸웠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론 더이상 전열보병이 주축이 된 전투가 없었다. 당장 그 뒤에 벌어진 보오전쟁과 보불전쟁만 봐도 그렇다. 또한 기병 역시 전통적인 충격력을 이용한 돌격전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계화보병처럼 활용되어 하마상태로 싸우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전의 모습들이 비행기[81]와 전차의 존재만 빼고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총기 기술과 정밀도의 발전으로 보병 전술이 이전과는 달라짐과 동시에 최초로 샤프슈터라는 병과가 탄생해 전장에 투입되고[82][83] 수동식 기관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미 미니에 탄이 사용되고 있어서 총기의 명중률과 연사력이 높아진 데다, 전쟁 말기의 연방 서부군에선 스펜서 연사 소총(Spencer repeating rifle) 같은 연사화기가 주력으로 보급되었기에 나폴레옹 시대와 같이 개활지에서 대오를 갖춰 일제사격을 노리는 전투는 상대측에게 사격 연습 타겟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엄폐의 개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가장 극적인 사례로는 이전 시대라면 한방 맞아주고 착검돌격 와중에 넘어갈 수 있었던 돌담 하나의 차이로 1대 30의 교환율을 찍은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및 피켓의 돌격과 같은 사례도 있으며, 양쪽 군대는 대부분 산능선이나 나무 등의 엄폐물이라도 끼고 싸우는 걸 선호했다. 더 나아가 빅스버그 포위전과 피터스버그 전투의 경우 아예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 및 터널 전쟁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북전쟁을 참관했던 유럽 군인들은 하나같이 "역시, 촌놈들은 전쟁을 무식하게 하는구만ㅋ."이라고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보병들이 전열도 갖추지 않고, 총소리만 들리면 죄다 흩어져서 여기저기 숨기 바쁘고, 땅만 파놓고 적이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투 양상은 50년 후에 유럽에도 똑같이 재림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가 발전했음에도, 보병들끼리의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열보병식 전투로 이루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남북전쟁 이전의 몇몇 군사이론가들은 이론상 미니에 탄과 강선식 머스킷 총이 기존의 활강식 머스킷 총보다 사거리가 늘어나고 정확해졌다는 이유로 보병 전술의 혁명을 예언했고 전투가 더 빨리 시작되고 더 넓은 지역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84] 하지만 정확도를 수백미터 단위로 늘렸는데도, 상당수의 남북전쟁의 보병전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경우가 많았다. 113개 전투를 표본으로 하면 이 중 62%의 교전이 100야드(91m)내에서 이루어졌다.[85][86] 아마도 시야가 불분명한 경우도 꽤 많았을 뿐더러 병사들이 사격을 잘 못하거나 실수를 할 가능성 등 여러가지 요소 때문에 그 당시 지휘관들은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하였다. 미니에 탄을 쏘는 총도 전장식 머스킷이었고, 한 발 쏘면 재장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신중히 쏴야 했다.[87]
물론 결과는 막대한 사상자의 발생이었지만, '''철도의 존재로 기계화된 보급 수송수단'''을 가진 관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병력을 전투에 투입 가능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총력전'''의 개념이 처음으로 서기도 했고,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목표로 삼아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양상도 이때 생겨났다. 이 '바다로의 진군'을 수행한 셔먼 장군을 최초의 현대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평가하는 문서는 유럽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는 최초의 철갑선끼리의 포격에 잠수함(!)까지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 시기 미국을 방문하여, 최초의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가고 있음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이끈 프랑스는 비슷한 행동과 비슷한 대응들이 이어졌다.

8. 무장



8.1. 육군


  • 강선 머스킷 - 이 시기엔 미니에 탄퍼커션 캡의 활용을 위해 대부분의 구형 활강 머스킷이 강선 머스킷으로 개조되거나 도태된 상황이었다.
    • 스프링필드 M1861 -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이 쓰인 화기.영문 위키리뷰 영상
    • 패턴 1853 엔필드 - 영국제 소총이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안돼있던 남군과 북군 양쪽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남군은 병력의 70%가 엔필드 라이플로 무장했을 정도.영문 위키리뷰 영상
    • 위트워스 소총 - 남군에서 활용된 저격 소총으로, 육각형 총열과 전용 육각형 탄환을 사용하여 유효 사거리가 무려 800~1000야드(약 730~910미터)에 달한다.[88] 북군 장교인 존 F. 레이놀즈와 존 세지윅[89]을 저격한 소총이기도 하다.영문 위키리뷰 영상
  • 후장식 페이퍼 카트리지 소총: 완전한 탄피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머스킷을 분명히 압도했다. 하지만 비싸서 높으신 분들에겐 불편한 존재였다.
  • 후장식 금속 탄피 소총 - 보급비용으로 인해 주류가 되지 못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의외로 광범위하게 보급된 화기. 연방군에 비해 구리 등의 물자가 부족했던 연맹군은 줏어도 못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 리볼버
  • 개틀링 기관총
  • 케첨 수류탄영문 위키
  • 로드먼 대포영문 위키

8.2. 해군



9. 주요 편제



9.1. 북부


연방군은 주로 강 등 자연지물을 기준으로 야전군 이름을 정했다.
  • 포토맥군: 동부전선의 주력부대. 동부전선의 거의 모든 전투에 참전했으며 중요한 전투만 하더라도 반도 전역과 7일 전투, 앤티텀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챈슬러스빌 전투, 게티스버그 전투, 오버랜드 전역, 피터스버그 전투, 애퍼매톡스에서의 로버트 리의 항복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끊임없이 남군의 북버지니아군과 격돌하여 자주 패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으며 결국 북버지니아군을 항복시키고 전쟁을 끝냈다. 주요 사령관은 조지 매클레런, 앰브로즈 번사이드, 조 후커, 조지 미드. 전쟁 후반기에는 연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직접 포토맥군을 통제했다.
  • 테네시군: 서부전선의 주력부대. 빅스버그 포위전 등 그랜트의 여러 성공적인 작전에서 주력을 맡았고 애틀랜타 전투와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에도 참여했다. 주요 사령관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윌리엄 T. 셔먼, 제임스 B. 맥퍼슨 등.
  • 컴벌랜드군: 테네시군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서부전선의 주력부대. 치카무가와 채터누가, 애틀랜타 전투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 참전했다. 주요 사령관은 윌리엄 S. 로즈크랜스와 '치카무가의 바위' 조지 H. 토마스가 있다.
  • 오하이오군: 서부전선의 세 번째 야전군으로 테네시군, 컴벌랜드군보다는 작았다. 애틀랜타 전투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 참전했다. 사령관은 존 M. 스코필드로 계급이 같지만 상관이었던 조지 H. 토마스와는 대립관계였다.
  • 버지니아군: 반도 전역 당시 포토맥강 남쪽에 상륙한 포토맥군을 대신하여 워싱턴을 지키고 리치먼드 북쪽을 압박할 목적으로 편성된 야전군. 사령관은 존 포프. 제2차 불 런(매너새스) 전투에서 포토맥군이 철수하는 타이밍을 노려 공격한 로버트 리에게 완패하고 이후 포토맥군과 통합되어 사라졌다.
  • 섀넌도어군: 남군의 보급기지이자 북침 통로 역할을 하던 섀넌도어 계곡 지역을 초토화시킬 목적으로 전쟁 말기에 편성된 야전군이다. 사령관은 남북전쟁 최고의 기병대장으로 알려진 필립 셰리든으로 후에 그랜트, 셔먼에 이어 미 육군 총사령관에까지 올랐다.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보다도 먼저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 섀넌도어 계곡을 폐허로 만들고 남군에게의 전략적 가치를 상실시켰다.

9.2. 남부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하고 분권적인 특성상 북부군에 비해 훨씬 지휘가 파편화되어 있어 각 주별로 부대가 따로 존재하고 연계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 부대 이름에 주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 북버지니아군: 동부전역의 주력부대이자 남군 최대부대. 1차 불 런(매너새스) 전투 이후 남군 섀넌도어군과 포토맥군 2개 야전군의 융합으로 창설되었다. 사실상 남부군 그 자체로 여겨질 정도로 중요성과 상징성이 컸으며 북버지니아군 예하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은 다른 야전군의 사령관보다도 네임밸류가 높다. 사령관은 조지프 E. 존스턴, 로버트 E. 리. 예하 부대 지휘관들로 스톤월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A. P. 힐, 젭 스튜어트 등이 유명하다. 동부전역의 모든 주요 전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으며 로버트 리는 1865년 정식으로 남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기 한참 전부터 실질적인 총사령관 취급을 받았다.
  • 테네시군: 서부전역의 주력부대이자 남군에서 두 번째로 큰 야전군. 연방측 테네시군과는 달리 강 이름이 아니라 주 이름을 딴 것이다. 주요 사령관은 브랙스턴 브래그, 조지프 E. 존스턴, 존 벨 후드. 원래 이름은 미시시피군이었으며 이 당시 샤일로와 코린트에서 연방군에 패했다가 테네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중부 테네시에서 로즈크랜스의 컴벌랜드군에게 쭉 밀리다가 치카무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까지 다시 쭉 밀려났다. 이후 전쟁의 일발 역전을 위해 테네시로 진격했으나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서 괴멸되다시피 하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했다.
  • 빅스버그군: 정식 명칭은 미시시피군으로 사령관은 존 C. 펨버튼. 빅스버그를 사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결국 그랜트에게 패해 항복하고 빅스버그를 내주었다.

10. 주요 인물



10.1. 북부


  • 에이브러햄 링컨 연방 제16대 대통령
  • 에드윈 스탠튼 전쟁장관
  • 조지 매클레런 포토맥군 사령관, 연방군 총사령관
  • 헨리 할렉 연방군 총사령관, 참모총장
  • 율리시스 S. 그랜트 연방군 총사령관
  • 윌리엄 테쿰세 셔먼 테네시군 사령관, 서부전선 총사령관[90]
  • 조지 고든 미드 포토맥군 사령관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기병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0.2. 남부



11. 주요 전투



12. 대중문화 속의 남북전쟁


현대 미국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 가장 큰 사건으로서 미국인들의 관심사도 대단하다.
  • 영화 게티즈버그를 통해서 드러난다.
  • 켄 번즈가 제작한 미국 공영방송 PBS의 9부작 다큐가 유명하다.
  •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그리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TV 드라마 남과 북은 이들 사건이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1980년대 중반에 한국 KBS에서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만 봐도 남북전쟁의 배경이나 전개 양상을 잘 알 수 있다.
  • 서부극의 수많은 구도 중 대표적인 연방보안관 vs 무법자 갱단의 대립구도는 사실 남북전쟁 때문에 발생했는데, 서부개척기의 유명한 무법자(대표적인 예로 제시 제임스)들은 대부분 남부 패잔병들이 주류였고, 그들을 체포하러 다니는 연방보안관은 대부분 북군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서부개척기를 남북전쟁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 콜 오브 후아레즈 : 바운드 인 블러드의 프롤로그는 남북전쟁 말기에서 시작하는데, 주인공인 레이 맥콜과 토마스 맥콜은 남군으로 복무했다가 가족이 위험해지자 탈영하여 무법자가 된다. 하지만, 맥콜 형제가 탈영한 탓에 원래 지켜야 할 곳이 함락되고, 그렇게 남부의 패배가 더욱 빨라졌다고...
  • 미국 드라마 파이어플라이에 보면 인간끼리 내전을 겪은 뒤 패한 측의 군인 출신들이 중앙 정부에 의해 자주권을 빼앗겼다는 불만을 갖는 설정이 있는데, 이 때문에 그 배경 설정이 미국 남북전쟁과 유사하다고 보는 평가가 있다.
  •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행된 대규모 장기전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역사 인식에 아주 커다랗게 남아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남북전쟁을 연방의 수호를 천명한 북부와 주의 자주성을 주장한 남부의 '선과 선의 대결'이라고 보는 시각이 꽤 있는데, 이 때문에 양편 모두 매력적인 면모가 필요한 미국산 서브컬쳐 계열에 많이 투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블 코믹스의 시빌 워도 있고, 트랜스포머에서도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기나긴 대결을 Civil War라고 칭한다. 스타워즈의 클론전쟁 또한 은하 공화국과 분리독립하려는 자들의 대결인데, 여기서는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전술 개념마저 실제의 남북전쟁 수준으로 퇴화되어 드로이드 군단은 일단 밀집 대형을 형성해서 회전을 시도한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테란 연합의 경우 아예 깃발을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기로 쓰고 있다.
  •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남북전쟁을 주제로 총 2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애퍼매톡스. 그만큼 남북전쟁은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큰 역사적 화두인 것.
  • 퍼시 잭슨 시리즈의 후속작인 《올림푸스 영웅전》에서는 남북전쟁이 그리스 반신과 로마 반신들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그 때의 위대한 장군들은 반신들이었으며, 그 전쟁 때문에 신들이 이중인격자가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여 전쟁 종결 후에 서로의 존재를 감추었다는 설정이 붙었다.
  • 1989년에는 인포그램에서 남북전쟁을 게임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 현재는 도산한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소프트(TalonSoft)에서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를 배경으로 한 워게임 타이틀을 여러 개 발매했다. 대표적인 게 배틀그라운드 시리즈. 현재는 판권을 이어받은 매트릭스 게임즈(Matrix Games)에서 존 틸러의 배틀그라운드: 시빌 워라는 패키지로 관련 5작품(게티스버그, 샤일로, 앤티텀, 불 런, 치카무가)들을 묶어 판매하는 중이다. 그 외 2005년 3D 그래픽으로 제작한 턴제 게임인 American Civil War: Gettysburg도 존재. 또다른 턴제 전술 게임으로 1996년 임프레션 게임즈(Impressions Games)에서 개발하고 시에라 엔터테인먼트(Sierra Entertainment)에서 유통한 로버트 E. 리: 시빌 워 제너럴과 이듬해 발매된 후속작 그랜트-리-셔먼: 시빌 워 제너럴 2도 존재.
  • 2017년 7월 15일에는 Game-Labs LLC라는 회사에서 Ultimate General: Civil War라는 남북전쟁 배경의 RTT 게임을 스팀 및 앱스토어에 발매했다. 개발진 중 한 명이 토탈 워의 다스모드 개발자로 유명하며 한글화도 되어 있다. 남북전쟁의 전투들을 실시간 전술게임에서 거의 온전한 규모로 구현했다는 의의가 있는 게임이지만 매우 불친절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도 남북전쟁을 다룬 전략 게임이 워낙 희소한데다가 그나마 2010년대에 들어선 아예 명맥이 끊긴 형편이라 이 계열의 팬들은 그저 감지덕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스팀 등의 평가는 꽤나 좋은 편.
  • 한국만화 웨스턴 샷건이 남북전쟁 직후의 시기를 모티브로 했다. 해당 작품에선 노우스 군, 사우스 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해당 전쟁을 겪은 인물들의 후계자들이 주인공. 단 전쟁 자체는 그저 배경 소재이며 내용은 서부극 액션만화.
  • 미국의 대표적 좌파 방송인 빌 마허(Bill Maher)는 보수세력이 공고한 남부를 근거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지자 그냥 나가겠다고 할 때 보내지, 왜 죽어가면서 쟤네들을 불러들였냐?고 말했다.
  • 2016년 개봉한 프리스테이트 오브 존스는 사실적인 남북전쟁 묘사로 큰 화제를 모았다.

13. 여담


  • 남북전쟁의 연금수령자가 2020년까지 생존해 있어 화제가 되었다. Moses Triplett이라는 이름의 1846년생 남자가 남북전쟁에 참전해서 연금수령 자격을 얻었고 1920년 그의 첫번째 아내가 죽자 1924년 50세 연하의 Elida Hall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1930년 83세의 나이로 Irene Triplett이라는 딸을 낳았다. Irene Triplett은 부모 사후 Moses의 자녀 자격으로 연금수령자가 되었는데 미국 보훈부는 Irene Triplett에게 2020년 사망시까지 매달 73.13달러의 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언론 기사 참고로 Moses Triplett은 남군에 참여도 했지만, 전쟁 후반에 탈영해서 연방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연방군 군인으로써 연방정부의 연금을 받은 것이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의 배 이름인 제너럴 셔먼은 남북전쟁의 북군의 육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성인 셔먼에서 따온 것이다.

14. 같이 보기


  • 네이버 캐스트 남북 전쟁: 남북전쟁의 주요 원인인 노예제 갈등부터 시작해서 종전까지를 잘 정리해놓은 네이버캐스트 전쟁사 시리즈 중 하나.
[1] United States of America[2]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3] 1861년 5월 29일까지는 앨러배마의 몽고메리였다.[4] 노예는 약 40만 명이었다. 노예주 중 일부가 북부 연방에 참여했기 때문. 본문 참조.[5] 이중 노예가 3,521,110명에 달했다.[6] 노예해방으로 전원 자유인.[7] 노예는 1,900,000명.[8] 연인원이 아니다. 1863년 최대 병력을 기준으로도 북부는 60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9] 남부에 대한 군정이 해제된 1877년까지로 잡는 시각도 있다.[10] 각 진영이 입은 군복의 색상을 따와서 'Blue and Gray War'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11] 그래도 북부에서도 노예무역은 수익이 괜찮게 나오는 사업이였다. 물론 다른 돈나오는 사업도 많은데 굳이 욕을 먹으면서, 혹은 양심을 속여가면서까지 노예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쇠퇴해가는 중이었긴 하지만. [12] 흑인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인 목화 따는 모습이 이때 가장 흔한 노예의 작업이었다.[13] 기아자동차 미국 현지 공장이 있는 조지아 주의 웨스트 포인트가 한 예로 주력 산업이 방직업이었다가 사장된 지역이다.[14] 면화 생산은 본격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10년마다 2배씩 증가하였다.[15] 이 시기 남부에서는 수많은 인종학자들이 '''흑인 열등론'''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들의 기준에서 흑인은 인류에서 가장 저급한 부류이자 퇴화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을 구제할 방법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16] 지금도 미국 남부의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친남부적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전문사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다. 남북전쟁과 관련해서 권위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등의 남부 대학들에서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노예제가 전쟁의 주 원인이라는 것에 확고하게 동의하고 있다.[17] 게다가 노예제 폐지 토론 자체를 금지하는 개그 룰(gag rule)이나 북부로 도망친 노예를 잡아서 남부로 환송하라면서 거꾸로 남부가 북부의 주권과 자치권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었다.[18] 남부 주들은 이 습격에 열광했다. 당시 캔자스-네브래스카 노예주/자유주 지정 문제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다.[19] 남부 주들이 노예제 보호에만 관심이 있었지, 각 주의 권리에는 별 관심 없었다는 대표적인 사례다.[20] 토마스 제퍼슨도 언급했을 정도로 꽤나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아이티에서 흑인 혁명이 일어나서 소수 백인 지배자들이 남녀노소할거 없이 몰살을 당했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 같은 주들은 흑인 노예 비율이 50%에 근접하여 이런 대규모 인종 전쟁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인구 대비 노예 비율이 높을수록, 인구 대비 노예를 소유한 가구가 많을 수록 연방에서 더 빨리 탈퇴하는 현상을 보여준다.[21] 미국 국내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였다. 남부연맹 대표가 영국 가서 본국에다가 대놓고 영국(잉글랜드) 시민들은 노예제 때문에 독립전쟁(반란)을 일으킨 남부연맹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보고한 바 있다.[22] 네브래스카는 사실상 자유주였기 때문에 투표가 의미 없었다.[23] 섬터 요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정부가 1836년 '''공식적'''으로 연방정부에게 양도한 땅이다. 정확히는 연방정부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정부의 요청에 따라서 모래뻘에 요새를 세웠는데,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자기 땅이라고 틱틱거렸고, 연방정부가 연방정부 땅도 아닌데 왜 연방정부 자금으로 요새를 세우냐고 건설을 중단하니까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공식적으로 연방정부 땅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요새 자체가 연방정부 자금으로 세워진 것이다.[24] Diversity jurisdiction, 민사소송의 당사자가 서로 다른 주의 주민이거나 미국 시민이 아닌 경우, 연방 법원에서 이를 재판할 수 있게 한 개념.[25] 참고로 아이린 샌드포드는 1850년에 칼빈 C. 채피(Calvin C. Chaffee)라는 노예 폐지론자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새 부인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에 어찌할 틈도 없이 노예 소유주와 결혼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채피는 스콧 가족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자며 부인을 설득했고, 결국 스콧 가족은 피터 블로 가족에게 돌아갔다. 피터 블로 가족은 미주리 주로 이주한 상태였고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해방시켜 주어 스콧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짐꾼으로 일하다가 1858년에 사망했다.[26] 존 C. 브레킨리지[27] 당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밑의 미국 부통령이었다. 미국 역대 최연소 부통령. 나중에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남군에 장성으로 입대한다.[28] James Oakes (2012). Freedom National: The Destruction of Slavery in the United States, 1861–1865. W. W. Norton. p. 12.[29] 거의 전부 연방정부와 북부주들의 노예제에 대한 적의와 반감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탈퇴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중 문단 최상단에 인용된 미시시피 주의 탈퇴선언문이 특히 유명한데, 이유는 다름아닌 훗날 남부연맹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제퍼슨 데이비스가 미 의회에서 직접 낭독한 선언문이었기 때문.[30]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 미연맹국, 남부연맹, 남부동맹, 남부맹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31] 미국 깃발에서 별은 연방의 주 숫자만큼 있기 때문에, 별이 줄어든다는 것은 주의 연방 탈퇴를 의미한다.[32] 하지만 대통령이 브레킨리지의 사직서를 반려하는 바람에 공식적인 사퇴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레킨리지는 이미 남부연합에 가담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브레킨리지의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았음에도 브레킨리지는 백악관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브레킨리지의 부통령 임기는 정상적인 만료일인 1861년 3월 4일까지로 되어 있다. 브레킨리지가 남부연합에 가담하여 부통령직을 태업한 기간에는 국무장관인 제러마이아 S. 블랙(Jeremiah S. Black)이 부통령직을 대행했다.[33] 버지니아와 테네시는 1860년 선거에서 분리주의를 반대하는 존 벨을 지지하는 등 앞서 연방을 탈퇴한 주들에 비해 유보적인 성향을 보였다.[34] 특히 앞의 세 주는 기존 남부연맹 주들보다 인구가 많은 편이어서 남부연맹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정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해당 주들은 전쟁 발발 이후 남부연맹의 동원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35] 영토가 하나의 주로 승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현재 있는 주들중 가장 적은 인구수를 가진 주보다 더 인구수가 많을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는 와이오밍 인구가 기준이고, 저 당시에는 보통 인구 5만 ~ 6만 명을 기준으로 했다.[36] 그의 아들도 입대하였다.[37]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으로 당시에 이미 74세(...)였다. 이 사람도 버지니아 주 출신이지만 연방군에 계속 남았다.[38] 자칭 나폴레옹(...)이었는데 군사적 재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막상 전선에 나서면 리에게 끌려다니는 게 일상이어서 결국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매클레런은 이 일에 앙심을 품었는지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여기서 패배하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39] 사실상 성조기를 축소한 거라고 보면 된다.[40] 욱일기일장기와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41] 지구전을 펼치던 존스턴 장군이 여론에 떠밀려 물러나고 젊고 저돌적인 후드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정작 후드도 역공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 북군은 애틀란타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후드는 이후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지휘로 북군의 전쟁 승리에 혁혁히 기여한다.[42] 당장 기아자동차가 현지 공장을 구축한 조지아 주가 그 한 예다.[43] 실제로 이 식단은 '''유럽 중산층''' 수준의 식단이었다.[44] 일개 병사가 고향에 '우리 군대는 우리 선조들보다 좀 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싸웠지만 우리는 다른 인종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같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45] 로버트 E. 리, 스톤월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등의 장군들은 모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이다.[46] 1780년대생, 즉 18세기 사람도 섞여 있었다.[47] 장교단에서 극히 드문 19세기, 즉 1800년대생이었으며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성이었다. 실질적으로 고위급 장성들에서 유일하게 현장지휘가 가능한 나이였고, 실제로 남부로 붙자마자 남부측 장교단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장성으로 곧바로 진급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현역이었다.[48] 연방군에서 로버트 E. 리는 장성이 아니었다. 말년 대령이었지...[49]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군사 대학이다. 미국 ROTC 제도의 산실.[50] 본디 이 '양키'란 말은 남부 사람들이 북부인들을 경멸하여 부르던 멸칭이었다.[51] 이는 2016년 영화 프리스테이트 오브 존스로 묘사된다.[52] 의외지만 리는 초창기에는 패전을 경험했고 한동안 참모장 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는다는 면에서 발탁된 반도 전역부터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남군의 뷰리가드, 잭슨, 롱스트리트 같은 지휘관들은 대체로 북군 지휘관들보다 우수했다.[53] 이것만 해도 3배가 넘는 군대를 상대로 대단한 업적이기는 하다.[54] 전략적으로는 사실 매클레런이 옳았고 링컨이 틀렸다. 지형적으로 버지니아를 관통하는 루트는 매우 위험하고, 방어하는 측에게 지리적으로 딱 좋은 반면 해상에서 돌입하는 상륙작전은 더 안전하고 더 적은 피해로 리치먼드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후임인 미드나 그랜트도 이쪽을 선호했으나, 이미 실패한 마당에 링컨이 까라면 까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버랜드 캠페인을 시작하게 된다.[55] 사실 매클레런이 조금만 용기가 있었거나, 링컨이 조금만 참을성이 있었어도 전쟁은 여기서 끝이었다. 리치먼드-피터스버그 열차로는 북군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며, 몇 마일을 더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북군은 리치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거기다 제해권을 장악한 북부 해군 덕택에 매클레런은 보급에 지장이 크게 없었으며, 남군의 보급 항구들은 하나둘씩 북부 해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매클레런이 슬금슬금 다시 리치먼드-피터스버그를 포위하고 그냥 거기서 죽치고 있었을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계속해서 북군을 몰아내기 위해 잘 짜여진 진형에 돌격하여 2:1 교환비를 강요당하던 남군 입장에서는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56] 엄청나게 중요한 전투였고, 동부전역에서 더 많은 피해를 주었을지언정 어쨌든 '패배'를 거듭하고 있던 북군의 동부전역에서의 오랜간만의 승리였다.[57] 사실 사우스 마운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리의 이 이후 기동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특히, 앤티텀은 매클레런의 해임, 그리고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의 발판이 되었다는 걸 상기하면 더더욱.[58] 이때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집트는 전쟁 덕분에 목화가격 폭등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남부의 목화가 수출시장에 쏟아져나오자 가격폭락에 직격탄을 맞아 경제위기에 빠져 후일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59] 후드가 셔먼을 쫓는 대신 셔먼의 보급선을 노리고 북쪽으로 진군한 것이 셔먼의 진군을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60] 직역하면 나무로 된 머리. 적당히 로컬라이징하면 '''돌대가리'''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단, 이 별명 자체가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61] 원래 이게 리의 장기였다.[62] 사실 얼리의 공격은 그야말로 백악관 문 앞까지 도달한 것으로 얼리가 하루만 빨랐다면 워싱턴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랜트 본인이 직접 언급했을 정도.[63] 원문: And although he may be poor, he shall never be a slave.[64] 이 노래는 남군 병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물론 가사는 자신들 입맛에 맞게 개사했다.[65] 본인 기록이나 후대의 평가를 보면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에 심리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함부로 돌격 앞으로! 를 하지 않아서 사병들은 장군을 좋아했지만 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정치인들은 싫어했다고 한다.[66] 이 점에서 남부연맹이 각 주를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는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된다. 정말 각 주의 주권을 지키고 싶었다면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군입대를 시키는 수를 써야 정상이기 때문. 상식적으로 인구고 뭐고 상대가 안되는 처지에서 병력이 한명이라도 아쉬울텐데 그 상황에서도 각 주의 주권 타령하면서 흑인을 병사로 쓸 생각을 안 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다. 아무리 백인우월주의가 판을 치고 흑인은 백인 이하로 보던 시대였다 치더라도 영국이 구르카 용병을 사용하고 인도에서 세포이를 조직한걸 보면 남부의 행위는 각 주의 주권 타령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다.[67] 실제로, 명장을 믿고 싸웠다가 체급 차이 때문에 졌다는 점에서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의 행적은 오히려 한니발, 제갈량과 유사하다.[68]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애시당초 이들의 목적은 공세를 통한 방어로 한마디로 적인 위와 로마가 촉한과 카르타고를 칠 여유를 주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전략 자체는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에서 파탄이 난 게 문제지. 한니발의 경우 한니발 본인을 제외하면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전부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스키피오라는 걸출한 로마 장군이 스페인을 거쳐 카르타고를 칠 여유를 주었고 제갈량 역시 마속이 뻘짓을 하는 바람에 중간이 짤리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모든 성과를 뒤로 두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성공했다면 제갈량은 옹, 양주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훨씬 여유있는 상태가 되어 위를 칠 교두보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불가능해지면서 위의 방어선을 도저히 뚫을 수 없게 되면서 서서히 말라죽어간 것이다.[69] 반란군이란 뜻으로, 남북전쟁 당시 북부에서 남부를 비하할 때 쓰던 멸칭이다.[70] 대다수는 분리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방에서 사전에 제압해버렸지만 켄터키처럼 침략당해서 그 반동으로 연방에 남은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남부가 북진공세에 소극적이었던 것에 영향을 줬을지도.[71] 북군에서 남군을 흔히 비하할 때 구사한 호칭으로 연방정부가 남부연맹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집단으로 규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군 스스로는 딕시(Dixie)라고 불렀다.[72] 당시 인구 약 3000만 명 중에 60만 명 이상이 죽었으며 '''이는 2차 세계대전 사망자수의 약 2배이다.''' 남성 전투원만으로 전체 인구의 2%가 죽었으니... 이는 현대 한국에서 현역군이 100% 사상당한 수준의 피해였다. 세세한 건 다르지만 대충 인구 5천만-현역군 60만이니까.[73] 전쟁 이외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많다.[74] 다만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인해 이들 급진파들의 관점에 힘이 크게 실렸고 한동안은 남부지역의 통치가 이들의 뜻대로 영향을 받는다. 밑에 후술하듯이 10년이 넘는 군정과 남부인들의 권리제한 등.[75] 연방 공직 임명시 남부인은 무조건 배제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을 시 참정권 등의 시민권 행사 불가는 덤.[76] 사단장이 새 국기를 보내줘서 이틀만에 성조기로 교체했다.[77] 미국의 옆나라인 캐나다퀘벡 주와 앨버타 주, 서스캐처원 주 등지에서 연방 탈퇴와 분리독립에 대한 주장이 한때 나왔거나 나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 심지어 캐나다는 자국 헌법에 연방 탈퇴에 관해서 주와 준주 지역의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주민투표 시행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의 헌법조항까지 있다.[78] 이 공백기간 대정봉환무진전쟁이 일어났다.[79] 강화도에서 조선군은 상대에게 극소수의 피해를 입혔을 뿐, 지휘관이 전사하고 군기까지 빼앗기며 패했다. 이때 전리품이 된 어재연 수자기는 136년 만에 겨우 돌아왔다.[80] 다만 전열보병 위주의 근대적인 전투에서 처음 탈피한 전쟁이 남북전쟁인 것은 맞다. 그러나 현대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대전이란 보통 베트남 전쟁이나 그 이후 전쟁을 말한다. 물론 남북전쟁이 최초의 '''현대적인''' 총력전인 것은 맞는다.[81] 비행기는 없지만 열기구를 통해서 정찰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82] 그도 그럴게 샤프슈터라는 단어 자체가 당시 산병 및 기병총으로 보급된 샵스 소총에서 유래해서 나온 단어다.[83] 물론 저격수 자체는 미국 혁명 전쟁 시대에도 켄터키 라이플을 들고 산병전을 벌이던 미닛맨들이 있었던 만큼 예전부터 있었고, 이후 영국이 아예 라이플 연대를 창설하며 별도 경보병 편제를 해왔지만, 샤프슈터처럼 일반부대에 섞여 저격을 하는 개념과는 달랐고, 당시 전열보병 교리상 허용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84] 아마도 그들은 20세기 방식의 을 예측한 것 같다.[85] 출처: 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스 저[86] 개인화기가 극도로 발전한 현대전에서도 보병들끼리의 교전은 의외로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사례가 많다. KCTC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보병 교전을 분석한 결과 주간 전투 평균 교전거리 50m 이내 70%, 100m 이내 30%, 공격자 평균 48m, 방어자 평균 51m에서 교전이 벌어졌다.[87]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부족할 경우, 최대한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롱 웨이 홈(Long Way Home)란 이라크전 배경의 실화 드라마에서 분대장이분대원들이 고립되어 탄약이 고갈될 위험에 처하자 150m 밖의 적은 쏘지 말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있다.[88] 문제는 육각형 탄환이 육각형 총열에 정확하게 밀착되기 때문에 장전할 때마다 망치를 이용해 꽂을대를 때려가며 장전해야해서 퍼커션 캡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전속도가 최소 1분에 달하는 소총이었다.[89] 저격을 두려워하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이 거리라면 코끼리도 맞추지 못할 거라며 몸을 훤히 드러내다 900야드(약 822미터) 밖에 있는 샤프슈터에게 머리를 맞아 전사했다.[90] 정식 명칭은 미시시피 군관구 사령관. 서부전선의 모든 야전군을 총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