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
'''명칭'''
영어: Battle of Gettysburg
프랑스어: Bataille de Gettysburg
독일어: Schlacht von Gettysburg
'''날짜'''
1863년 7월 1일 ~ 1863년 7월 3일
'''장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애덤스 카운티 게티즈버그
'''결과'''
'''북군의 승리''', 남군의 공세종말점이자, 북군의 반격 시작.
'''교전국'''
[image] 아메리카합중국
[image] 아메리카 연합국
'''지휘관'''
포토맥군 사령관 소장 조지 미드
1군단장 소장 존 레이놀즈→애브너 더블데이
2군단장 소장 윈필드 핸콕
3군단장 소장 대니얼 시클스
5군단장 소장 조지 사이크스
6군단장 소장 존 세지웍
11군단장 소장 올리버 하워드
12군단장 소장 헨리 슬로컴
기병군단장 소장 앨프레드 플레선튼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대장 로버트 리'''
1군단장 중장 제임스 롱스트리트
2군단장 중장 리처드 이월
3군단장 중장 A.P. 힐
'''전력'''
병력 83,289명
병력 75,054명
'''피해규모'''
3,155명 전사
14,529명 부상
5,365명 포로 및 실종
'''총합 23,049명'''
3,500명 전사
18,000명 부상
6,500명 포로 및 실종
'''총합 28,000명'''
1. 배경
2. 전투의 전개과정
2.1. 전초전
2.2. 7월 1일
2.3. 7월 2일
2.4. 7월 3일
3. 결과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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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image]
미국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 1863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졌다.
남부 육군은 1863년 5월의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연방 육군의 포토맥군을 격파하여 기세가 올라있었다. 로버트 리 장군은 이를 활용하여 북부로 진격하고자 결정한다. 리가 북부로 진격하고자 한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우선은 북부 육군의 여름 전쟁계획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빅스버그에 포위된 남부 육군 수비대를 구원하고자 했으며, 잇단 전쟁으로 피폐해진 버지니아 주를 위해 북부의 농장들에서 물자를 탈취하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리의 궁극적 목적은 북부의 주력군을 격파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종전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여 남부에게 유리하게 종전협상을 이끌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남부의 형편상 북부와 전쟁을 길게 끌고가면 갈수록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리는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
당초 빅스버그의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사단을 파병하는 안이 추진되었지만 리 장군은 이번 기회에 아예 북부 육군 주력을 격파하자는 생각으로 이 안을 반대하고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사단뿐만 아니라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위협하는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군단을 보내는 사이에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빅스버그가 함락될 수도 있기 때문에[3]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북부의 주력군을 격파한다면 자연스럽게 빅스버그의 포위가 풀리고 그때까지 남부연합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데 미적거리는 유럽 각국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북군의 잇단 패배로 북부에선 전쟁을 그만두자는 평화운동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북군을 격파한다면 이런 추세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에 따라 리는 롱스트리트의 2개 군단과 가용가능한 육군 병력을 모두 모아 7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는 북군의 포토맥군은 조지프 후커 장군의 지휘 아래 약 9만 5천의 육군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후커를 소환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한다. 후커가 챈슬러스빌 전투의 패배후 포토맥 진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미드로 교체한 것이다. 게다가 챈슬러스빌 전투 항목에서도 서술된 바이지만 후커는 이미 허풍으로 악명높았던 인물이라 애진작에 링컨 대통령의 눈 밖에 난 후였다[4].

2. 전투의 전개과정



2.1. 전초전


[image]
게티즈버그의 전쟁터들
양측은 전면전보다는 탐색전 성격의 전투로 6월 한달여를 보냈다. 최초의 충돌은 6월 3일에 벌어진 버지니아 쿨피퍼 근처의 브랜디 역에서의 기병대 전투였다. 북군 기병대가 남군 기병대를 기습하여 벌어진 이 전투에서 초반 북군 기병대에 밀리던 남군 기병대가 결국 승리하긴 했으나, 이 습격으로 남군 기병대를 지휘하던 젭 스튜어트는 꼭지가 돌아(...) 북군 후방 깊숙히 들어가 보복전에 매달렸다. 본래 기병대의 역할이 적정 탐색과 보병대 엄호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스튜어트의 이런 행동은 게티즈버그 전투 초장부터 남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실제로 리는 북군 포토맥군의 동향에 대해 전혀 정보를 얻지 못했다. 반면 북군의 미드는 충실하게 남군의 동향을 보고받고 있었다.
더욱이 리는 스튜어트가 날뛰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병대 지휘를 맡기고 북군을 견제하게 했다. 스튜어트는 결국 게티즈버그 전투의 중요한 첫째날과 둘째날에 그 자리에 없어서 패배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어떻든 간에 스튜어트를 제어하지 못한 리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스튜어트가 보복전에 날밤새는 가운데, 리의 본대인 북버지니아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 주로 진격할 채비를 갖췄다. 후커가 지휘하는 북군의 포토맥군도 6월 25일에서 6월 27일 사이에 남군을 추격하며 포토맥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6월 29일, 남군은 게티즈버그 북서쪽과 북쪽 20~30km 지점에 반원형으로 길게 산개하여 전개했다.
그러는 사이 북군은 링컨 대통령과 포토맥군의 후커 소장간에 갈등이 일어나 후커는 사표를 제출했고 이를 기회로 링컨은 후커의 사표를 수리하고 6월 28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5군단장 조지 미드를 기용했다.
조지 미드가 포토맥군의 사령관이 된 다음날인 6월 29일, 리는 북군이 포토맥 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리는 전군에게 게티즈버그 서쪽 13km에 있는 캐시타운이라는 마을로 집합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 리도 미드도 게티즈버그가 아닌 다른 결전장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게티즈버그에 양군 통틀어 가장 먼저 도착한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는 게티즈버그와 그 주변이 구릉지대를 먼저 장악한 쪽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기병대를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여 전투 준비를 하는 한편 1군단장 레이놀즈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뷰퍼드의 빠른 판단이 북군 승리에 기여한 셈이다.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없는 탓에 전혀 상황을 파악 못한 남군은 6월 30일, 힐 중장이 지휘하는 3군단 휘하의 존스턴 페티그루가 이끄는 노스 캐롤라이나 여단이 게티즈버그에 접근하여 북군 존 뷰퍼드의 기병대가 게티즈버그 서쪽의 언덕에 주둔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5]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남군은 게티즈버그에 북군의 대병력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펜실베이니아 민병대 정도일 것이라 생각한 힐 중장은 다음날 상당한 규모의 정찰병력을 게티즈버그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2.2. 7월 1일


[image]
7월 1일 오전 5시, 남군의 보병대가 북군의 기병대에 발포하면서 게티즈버그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군측 힐의 제3군단 소속의 헨리 히스 사단 휘하 2개 여단이 북군측 존 뷰퍼드 기병대에 저지당하는 사이, 레이놀즈가 지휘하는 북군 제1군단이 지원병력으로 가세했다. 이로인해 남군은 챔버스버그 파이크로의 진군은 저지당했으나 남군 저격병에게 1군단장 레이놀즈가 전사했다.
전투는 남군과 북군의 대규모 지원병력들이 가세하면서 점점 가열찬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오후에 북군 제11군단이 도착했고, 남군은 이월(Ewell)의 제2군단이 도착하여 남군은 북쪽에서 대공세를 취하고, 북군은 막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남군측 로버트 로즈의 사단과 히스 사단이 오크 힐과 세미너리 릿지(신학교 능선, 루터교의 신학교가 있었다)에 맹렬한 공세를 퍼붓자 북군 제11군단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11군단이 밀리자 우측이 비게 된 1군단도 후퇴하게 되어 세메터리 힐(묘지 언덕)까지 밀리게 되었다.
리는 2군단장 이월에게 "가능하다면" 세메터리 힐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월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사실 "반드시"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리의 잘못이겠지만(...). 리는 후에 "챈슬러스빌에서 사망한 '스톤월(Stonewall)' 잭슨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하고 통탄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월은 세메터리 힐을 공략하지 않았고 북군은 덕분에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리의 애매한 명령이 게티즈버그 전투의 패전 원인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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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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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의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하게 되자 리는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하기로 결심한다. 리는 자신의 휘하인 북버지니아군을 북군 포토맥군의 양 날개를 상대로 다방면으로 투입했다. 남군 측의 롱스트리트가 지휘하는 1군단이 이 날 도착하여 북군의 좌익에 공세를 취했고, 존 벨 후드[6]의 사단이 리틀 라운드 탑과 데블스 덴(악마의 소굴)으로 공세를 가했다.
당초 늦게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롱스트리트는 형세를 살피고서는 구릉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북군을 공격하는게 쉽지는 않겠다는 판단을 하여 리에게 방어적인 전략으로, 즉 후퇴해서 워싱턴과 포토맥군 사이로 위치를 잡고 워싱턴을 위협해 미드가 공격하게 만들게 하자는 전략을 밀었다. 그러나 평소 빠른 공격적 전략을 선호하는 리는 이에 반대했다. 리는 빨리 공세로 나가고자 했으나 롱스트리트는 후드 사단 소속 러(Law) 여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공세를 취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여 결국 아침에 공세가 취해지지 않게 되었다.
리의 계획은 일단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이월의 2군단이 컬프스 힐을 향해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북군 우익을 붙들어두면, 묘지 능선(세메터리 릿지)을 우회한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북군 좌익 배후를 겨냥하여 주공격을 퍼붓고 결정적일 때 이월의 2군단도 가세하여 북군을 몰아붙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리가 북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리는 북군 좌익이 묘지 능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북군측 제3군단장 시클스의 단독적인 판단이 리의 구상을 흐트려버렸다. 미드는 시클스에게 세메터리 릿지에 포진할 것을 명했다. 시클스는 처음에는 이 명령에 따랐지만 세메터리 릿지가 방어상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세메터리 릿지 정면 1.12km에 있던 고지대인 셔파이 집안 소유의 복숭아 과수원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시클스의 단독적인 행동은 위험스러워 보였다. 시클스의 군단이 적을 향해 돌출되어 버린 형국이 되어버린데다가 2개 군단이 지키기에는 방어선이 너무 길어졌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드는 이런 시클스의 단독적 판단을 나중에야 알고 격노했지만, 이미 남군의 공격이 임박해져버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롱스트리트의 오판이 시클스의 단독적 판단과 결합하여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버렸다. 롱스트리트는 리틀 라운드 탑의 북군 통신부대 관측소에 관찰되지 않으려고 멀리 우회하다가 공격지점으로 오다보니 공세가 한나절 가까이 지체되어 버렸고 그 틈에 북군 제3군단의 병력이 에미츠버그 로드에 배치되어 롱스트리트의 1군단 정면에 있는 형국이 돼버렸다. 이 상황에 롱스트리트의 부관들은 깜짝 놀랐다.
후드는 상황이 달라지자 롱스트리트에게 라운드 탑을 우회하여 북군의 후미를 치기 위해 리틀 라운드 탑 고지를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롱스트리트는 리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며 이를 묵살했다. 이미 이날 오전에 리와 작전진행에 관한 이견으로 인해 격론을 벌였던 롱스트리트로서는, 리의 계획을 자신이 수정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틀 라운드 탑에는 그때까지 북군이 없었기 때문에 남군으로선 승리의 실마리를 걷어차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시클스의 단독 판단과 결합하여 롱스트리트는 시클스의 위치를 놓친채로 당초 계획과는 달리 에미츠버그 로드의 왼쪽으로 선회하여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날의 전투는 대단히 치열하고 거친 전투였다. 후드는 전투중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팔을 절단해야 했고 애매한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7][8] 그의 부대는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은채로 북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북군 전선 최좌익에 포진한 북군 제20 메인 의용보병연대[9] 지휘관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은 남군 2개 연대의 맹렬한 공격을 수 차례 격퇴한 끝에 탄약이 다 떨어지자 허를 찌르는 착검돌격을 감행[10], 일대를 무아지경으로 내달리며 남군 우익을 완전히 밀어내고 리틀 라운드 탑 고지 점령 시도를 끝장내버린다.[11][12]
다른 곳에서도 남군이 의도한대로의 전투가 진행되지 못했다. 남군은 세메터리 릿지의 정상에 도달하긴 했지만 북군의 지원병력에 밀려 철수해야 했다. 양측은 상당한 병력의 피해를 보았지만 북군은 현재의 방어선을 고수했고, 남군은 상당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북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한데에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드는 리가 북군의 좌우 날개를 공략하는데 실패하여 다음날 북군의 중앙으로 돌격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북군의 좌우익이 이미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했다고 판단한 리는 중앙 돌파를 선택했고 이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돼버린다.

2.4.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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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전날과 같은 계획으로 전투에 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가 미처 전투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북군 제12군단이 전날 남군에게 빼앗긴 컬프스 힐을 탈환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남군 포병대는 보병대의 진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게 남북전쟁중 최대 규모인 150여 문의 포를 동원해 포격을 북군 방어선에 퍼부었다. 그러나 남군은 포탄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저질 퓨즈가 장착된 작열탄이 사용되어 예상지점보다 더 뒤쪽에서 포탄이 터지는 상황이 벌어져 북군 방어선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오후 3시가 되자, 포격은 멈췄고 그 사이에 롱스트리트가 지휘하게 된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과 트림블이 이끄는 펜더 사단,[13] 그리고 페티그루가 이끄는 히스 사단[14]으로 구성된 1만 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세메터리 릿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것이 유명한 "피켓의 돌격"[15]이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남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학익진의 형국과 비슷하게 3면으로 포진하고 있던 북군이었다.[16] 게다가 그곳은 탁 트인 평원으로 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남군은 3면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돌격을 멈추지 않아 한때 북군이 동요하기도 했다. 그 여파로 북군이 방어선으로 삼던 낮은 돌담이 뚫리기도 했으나 지원병력의 가세로 남군의 공세는 차단되었다.
돌격으로 인해 남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1만 2500명의 남군 병사 중 6,55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실종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돌격에 가담한 병력의 절반 이상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것이다. 남군의 사상자 중 적어도 1,123명은 전장에서 즉사했으며, 4,019명은 부상당했다. 부상자 중에는 다리를 잃어버린 사단장 트림블과, 팔 부상을 입은 사단장 페티그루[17]가 포함됐다. 남은 한 명의 사단장 피켓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 휘하 여단장 3명 중에 두 명이 전사했고,[18] 남은 한명 역시 중상을 입었으며 결국 후퇴 중에 포로로 잡혔다. 북군 보고서에 의하면 남군 3,750명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남군이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는 동안 북군의 피해는 사상자 합계 1,500여 명에 불과했다.

3. 결과


'''"전우들, 나의 책임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Friends, it is all my fault. It is entirely my fault.") - 로버트 E. 리

그 다음날인 7월 4일, 율리시스 S. 그랜트에 포위되어 있던 빅스버그의 남군 수비대는 항복하게 된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남군은 퇴각을 결정하고 리는 방어형으로 부대를 재편했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인 미드는 리를 추격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형식적으로 남군 잔존병력을 추격했고 이 때문에 나중에 미드는 비판을 받았다. 남군은 포토맥 강의 범람으로 퇴각이 지체되었지만 7월 13일 버지니아로 철수하여 게티즈버그 전투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남부는 오하이오 강에서 서부 주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로 통하는 교통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남부는 빅스버그를 탈환하기 위해 게티즈버그에서 비교적 피해를 덜입은 롱스트리트의 군단에 리의 휘하인 북버지니아군의 병력 일부를 차출하여 서부전선으로 파병했다. 이 때문에 리는 더이상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리가 북부에 대한 공세를 택했던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면 공세만을 선호하고 느슨한 지휘방식을 고수한 리 본인의 실책으로 인하여 이기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티즈버그에선 북군과 남군을 모두 합쳐 5만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 중에서 7천 명의 병사들은 전투에서 즉사한데다 5천 마리의 들도 죽어 게티즈버그는 더운 여름에 악취가 진동하여 마을 주민들은 고통스러워 했다. 숨진 병사들이 묻힌 곳은 국립 묘지로 봉헌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 묘지 봉헌식에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남기게 된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결정적 전환점이었는가에 대해서 오해를 할 수는 있다. 게티즈버그 전투로 인해 남북전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예로 들더라도 미드웨이 전투 이후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미드웨이 전투를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는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 게티즈버그 전투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 전투 전에는 북군이 전력 우세에도 사령관의 무능으로 참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제2차 불 런 전투에서는 6.2만 대 5만의 싸움에서 북군이 패했고, 챈슬러즈빌 전투에서는 13.3만 대 6만의 싸움에서 북군이 패했다.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는 11.4만 대 7.2만이었는데 또 북군이 패했다. 셰넌도어 계곡 전역에서는 아주 큰 전투는 없었지만 스톤월 잭슨이 북군을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농락당했다. 앤티텀 전투에서는 성공적으로 남군의 공세를 막아내긴 했지만 8.7만 대 4.5만의 싸움의 결과라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그러니 북부는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있더라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고, 반대로 남부는 부족한 병력에도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게티즈버그는 8.3만 대 7.5만의 유례없는 호각세였음에도 북군이 무너지지 않았고, 특히 피켓 사단의 돌격 여파 때문에 사상자 수도 남군이 더 컸는데 이는 병력 동원 능력이 떨어지는 남부에게는 뼈아픈 결과였다. 따라서 수도 워싱턴을 점령하여 북부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협상으로 남부연합을 인정받겠다는 전략은 게티즈버그 전투로 동력을 상실하고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북부와 남부의 전쟁 수행 능력 차이로 시간이 지나면 남부의 패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수세전략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전투의 결과와 영향을 보면 게티즈버그의 전투를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19][20]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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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당시 호화 캐스팅에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며 인기를 끈 미국 드라마 시리즈 남과 북에서도 꽤 나온다. 티브이 드라마이니 아주 상세하지 않지만 반대로 드라마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고증을 들이고 전투씬도 나온다. 80년대 중순에 KBS-1를 통해 국내에서도 심야 드라마로 방영해 인기를 얻어 재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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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나온 론 맥스웰이 감독한 영화 《게티즈버그》는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포스터의 왼쪽은 남군의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이고 오른쪽은 북군의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이다. 둘 다 양군의 주인공격으로 등장하지만 주요인물 중에서도 유독 조명받은 것 뿐 등장하는 장군 및 고급 장교들은 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있다. 절친한 친구사이였지만 전장에서 적으로 만난 북군의 핸콕 장군과 남군의 아미스테드 장군이라든지.
'''고증이 매우 뛰어나''' 역덕들에게 평가가 높다. IMDB 평점 7.5 로튼지수 88%로 평점도 꽤 높은 편. 영화의 스토리라인도 역사적 사실을 덤덤하게 따라가고 있지만, 특히 '''전투장면의 재현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전쟁영화 사상 최고의 퀄리티 중 하나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영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제작진들은 미국 전역의 리인액터들에게 영화촬영의 개요와 일정을 소개하고, 촬영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는 연락을 대량으로 뿌렸다. 사실 당시 제작자들도 흥행이 어둡다고 투자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제작비 2500만 달러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 엄청난 블럭버스터들이 7~8천만 달러는 들이고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국내 영화월간지인 스크린이나 로드쇼 기사를 봐도 감독이나 제작진은 제작비 부족에 옳지! 그들을 쓰면 되겠다! 라고 라인액터들에게 이 영화를 소개하며 자발적인 촬영을 권유하도록 했던 거였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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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리인액터들로 채워진(?) 이런 물건이 만들어져 버렸다. 참고로 이만한 인구밀도(?)가 넓은 들판을 동시에 꽉꽉 채운다(...). 특히, 실제 전투에서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남부연맹군 병사들의 마지막 "피켓의 돌격" 장면은 그야말로 전율이 흐를 정도다.
대부분의 리인액터들은 사전에 촬영기간 중의 숙식과 턱없이 낮은 일당을 공지받았지만,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하긴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는 취미가 스크린에 뜨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야말로 '''양덕후의 위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엑스트라들을 리인액터로 충당하다보니, 스케일 크게 찍은 장면은 좋은데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죄다 배나온 미국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뒤뚱뒤뚱 움직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는 점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나이였는데, 괴리감이 엄청나다. 게다가 당시 남군은 물자 사정이 극도로 안좋아서 비쩍 마른 몰골들이 대부분이어서 영화상의 배나온 아저씨들과는 차이가 많았다. 이게 이 영화 최대의 고증오류라는 평론가도 있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마추어들이다보니 백병전 장면 등에서의 액션이 실감나지 않고 힘없이 허우적대는 모습이 영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다만 상대와 근접한 상황에서 총검술을 재현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므로 어쩔 수 없었을 듯 하다. 실제로 둘째날 리틀 라운드 탑 장면 촬영중에 이들 중 한 명이 실수로 개머리판에 맞아 뇌진탕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닝타임 '''4시간 14분(감독판 4시간 31분)'''이라는 흠좀무한 상영시간을 자랑하는데다가,[21]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제작비로 2500만$를 들였는데 극장 흥행성적은 1100만$에도 못미치는 수준. 영화 내용이 내용인지라 해외 시장에서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도 흥행은 부정적이었고 극장 흥행만은 에누리없이 들어맞았다.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들도 시대착오적인 영화라고 배급을 꺼려 중소업체이던 뉴라인 시네마가 배급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배급하고 2000년 초반만 해도 마이너 업체에서 잘나가던 뉴라인 시네마지만 이때만 해도 뉴라인 시네마라면 프레디 크루거로 유명한 나이트메어 시리즈 배급사로나 알려졌을 뿐이었다.
결국 극장 흥행은 망했으나 2차 시장에서 뜻밖의 대박을 쳤다. 비디오(90년대 당시인만큼), DVD 등 2차 판권시장에서 터진 것이다. 내용이 역사적, 교훈적이어서 교육용으로 딱인데다가, 집이나 학교에서 쉬엄쉬엄 끊어 보면 긴 런닝타임도 별로 부담될 것이 없어, 미국의 어지간한 가정/학교/마을회관/교회 등에서 구매하여 비치해 두고 상영하는 용도로 많이 팔렸다. 덕분에 제작비는 뽑고 수익도 거둬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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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흥행 속에 론 맥스웰 감독은 2003년에는 프리퀄에 해당하는 신의 영웅들(원제: Gods and Generals)[22]이 제작될 수 있었다. 다만 이 작품은 지나치게 친남부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받았고 57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1200만 달러 남짓 벌며 흥행도 쫄딱 망해버렸다.[23][24] 적어도 게티즈버그는 중립적으로 대하며 교육용으로 볼 가치라도 있었지만 이건 남부를 엄청 미화한 탓에 교육적으로도 부적격이라는 평을 듣어 2차 매체 흥행도 참혹했다! 덕분에 속편 제작은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다. 하지만 최근작인만큼 전투장면의 퀄리티는 엑스트라의 움직임이 어설픈 감이 있고 피 한방울 나오지 않는 <게티즈버그>를 훨씬 능가한다. 적어도 영화 스케일로 남북전쟁의 대규모 전투들을 보여주는 작품들 중에는 이걸 능가할 작품이 아직까지는 없다. 다만, 3시간 40분이 넘는 상영시간도 긴데 감독판은 무려 4시간 40분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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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2013년 론 맥스웰은 코퍼헤드(Copperhead)라는 남북전쟁 영화를 감독해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10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가 무색하게 북미 흥행이 꼴랑 17만 달러로 철저하게 망했고 평도 차라리 신의 영웅들이 볼만하다라는 지적 속에 참패했으며 감독도 이게 마지막 감독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발언하여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론 맥스웰은 1980년에 리틀 달링스라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는 등, 70~80년대 만들던 영화들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90년대 이후로 남북전쟁 관련 영화 3편씩을 이렇게 10년에 1편씩 만들어 개봉했는데 2023년에 4편을 만들 것이냐는 질문에 어렵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자막은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데, 사실 국내 정발된 DVD판부터 자막이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반말, 존댓말이 기준이 없이 왔다갔다한다. 당시 장교들끼리는 서로 'Sir'를 붙여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상급자의 입장에서 하급자에게도 sir를 붙여주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긴 듯하다. 일개 포병 대령이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반말을 써대지 않나 롱스트리트 장군이 리 장군에게 반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전투지역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는데 'Cemetery Ridge'를 죽음의 능선이나 그냥 전투지역으로 부른다든지 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묘지 능선' 정도가 적합하다.
이 영화의 엉터리 번역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전투 둘째날에 롱스트리트가 후드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자, 후드가 한참을 반대하다가 어쩔 수 없자 "General, I do this under protest"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거를 "장군, 난 하지 않겠네"라고 번역해버렸다. 원문에 명확히 '하겠다(I do)라고 되어있음에도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명령이니까 하긴 하는데, 저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실패해도 제 책임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단장인 후드가 직속상관인 군단장 롱스트리트에게 보란듯이 반말을 하는 번역은 덤이다.
초기 대체역사물인 《Bring the Jubilee》에서는 게티즈버그가 역사를 바꾸는 주요한 분기다.
지금은 도산한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 소프트(TalonSoft)에서 게티즈버그 전투를 배경으로 한 턴제 전략게임을 두차례 발매하기도 하였다. 먼저 나온 것은 1995년에 출시된 배틀그라운드 2: 게티즈버그(Battleground 2: Gettysburg)로, 탤론 소프트의 대표 프랜차이즈였던 배틀그라운드 시리즈의 2번째 타이틀이었다.[25] 두번째 게임은 2005년에 발매한 American Civil War: Gettysburg로 턴제 전략 형태로 진행되는 것은 이전과 유사하나 배틀그라운드 시절에 비해 게임 진행이 비교적 간소화되고 3D 그래픽을 채용한 것이 차이점.
또한, 토탈 워 시리즈의 유명모드 시리즈인 다스모드의 제작자가 만든 Ultimate General: Gettysburg란 게임도 있는데, 토탈 워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되지만 (다스모드 제작자답게) AI가 더 다이나믹하고, 캠페인도 게티스버그만 한정되지만, 그 대신 디테일하게 몇번에 나눠서 진행한다. 예를 들어 첫 전투에서 오크힐을 연방이 지키지 못했으면 그 다음 전투에선 오크힐 재점령을 시도하던가 아니면 오크릿지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다한다던가등으로 분기도 나뉜다. 즉, 저번 전투중 한 연대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으면 그 다음 전투에선 그 연대는 남은 전력을 그대로 쓸 수 밖에 없다. 그외 연대 이름들이나 지형들이 역사 고증에 철저히 맞게 되어 있고(위에 있는 지도와 똑같다), 토탈 워: 쇼군2 때부터 지속적으로 간략화된 토탈 워 시스템에 비해 군의 사기, 엄폐물, 지형, 체력 등이 꽤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그래도 UI가 꽤 직관적인 편이라 접근성이 낮진 않다. 전투 또한 전멸에 중점을 두는 토탈 워와는 다르게 실제 전투처럼 적을 후퇴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대신 그러면서 라인을 전진시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여 포인트를 쌓는 식으로 진행된다. 해외 워게임 웹진 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스케일을 키워서 남북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후속작 Ultimate General: Civil War도 발매되었다.

[1] 사실상 남부로서는 이게 북부를 상대로 결전을 시도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원래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전쟁에 임할 준비도 되지 않았고, 공업화되어 있던 북부와 달리 남부는 면화나 생산하던 곳이었다. 또, 남부는 북부와 달리 중앙화되고 체계화된 정부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아서 남부의 각 주는 거의 따로 놀았고 이들은 자기 주 를 지키기 위해 수비에만 몰두했을 뿐 전쟁 전체를 이기기 위한 전략 면에서는 크게 미흡했다. 따라서 남부로서는 그야말로 천운으로 북부의 수도 워싱턴과 에이브러험 링컨을 사정거리에 둘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2] 이후로는 비록 남군이 아무리 북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북부는 그 압도적인 생산력과 인구를 가지고 계속 새로운 병력과 장비를 철도를 통해 보낼 수 있었고 빈약한 남부의 생산력으로는 이를 만회하기가 불가능했다.[3] 하지만 항목에서도 서술됐다시피 그랜트는 빅스버그 함락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초기 구성안대로 롱스트리트의 2개 군단을 파병했다면 오히려 남군에게 더 유리했을 가능성도 높았다.[4] 링컨이 후커의 허풍에 "나는 암탉이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놈은 알을 낳기 전에는 안 울거든요"라고 후커의 허풍을 우회로 비꼴 정도였다.[5] 페티그루 여단이 왜 게티즈버그에 갔는지는 의문이다. 일각에선 신발찾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6] 미국내의 최대 육군기지인 텍사스의 포트 후드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7] 그는 전투를 개시하면서 "착검하라! 용감한 텍사스인들이여! 전진하라, 그리고 저 고지를 빼앗아라!"라고 외쳤다. 그가 의도한 고지가 어딘지도 불분명하다.[8] 후드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이 때 겨우 30대 초반이었고 일개 중대장이면 모를까 그 이상 그릇은 솔직히 아니었다. 실제로 나중에 서부전선가서 야전군 사령관을 하다가 무모한 공세로 서부전역의 남군 병력 대다수를 까먹는다.[9] 연대장이었던 체임벌린 대령부터 연대의 휘하 장병들이 메인 주 출신이며 정규군 경력을 가진 장병들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체임벌린 대령 자신도 본래 직업은 대학 교수였고 전쟁으로 본인이 군 입대를 자원했지만 남북전쟁이 개전되고 병력이 급팽창하면서 장교가 극심히 부족했던 현상에서 생긴 고육지책의 장교 임용이었다. 또한 1900년대 초 미국 내의 민병대, 비정규군의 정규군화가 진행되기까지 미국이 벌인 전쟁에서 이런 형식의 의용병과 부대들이 많았다. 체임벌린 대령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틀 라운드 탑 고지의 공적으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시계급으로 소장까지 진급하고 퇴역했다.[10] 계속되는 공세로 북군은 물론이었지만 남군 역시 지쳤을 것이란 체임벌린 대령의 자체적인 판단에서였다.[11] 이 부분은 영화 《게티즈버그》에서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참고[12] 위의 전투 상황도에서도 묘사됐듯이 만약 체임벌린의 연대가 리틀 라운드 탑을 사수하지 못하고 함락됐다면 미드의 북군이 그대로 남군에게 등 뒤를 드러내는 위험한 상황이 되버린다. 앞의 각주에 링크된 동영상에서도 체임벌린 대령이 설명하지만 고지의 사수는 북군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임무였다. 체임벌린의 메인 의용대가 뚫려버리면 북군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이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어서라도 고지의 사수는 절대적이었다.[13] 원 지휘관인 펜더는 전날 중상을 입어 지휘가 불가능했고, 결국 2주 후 사망했다.[14] 역시 히스가 지휘하고 있었지만, 전투 첫날 머리에 총상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였다.[15] 하지만 전체적인 책임은 리 장군에게 있었고, 피켓은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리 장군을 증오하였다.[16] 특히 좌우의 두 지역은 전날 남군이 점령하지 못했거나 도로 빼앗긴 곳이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던 것.[17] 열흘 후 버지니아로 퇴각하는 작전 중에 전사.[18] 한 명은 전장에서 즉사, 다른 한명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으나, 이틀 후 사망.[19] 한마디로 게티즈버그 전투의 패배로 남군은 공세적인 전략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이미 국력은 넘사벽으로 북부가 우세했기 때문에 남부가 수세만 취할 경우 서서히 무너지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이 점에서 미드웨이 전투와 비슷한데 일본군이 미드웨이에서 미군을 섬멸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더이상 공세적으로 나갈 동력을 상실했고(가장 핵심적인 항공모함들이 상당수 파손되었다. 물론 전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긴 했지만) 미국이 쇼미더머니를 시전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20] 만약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했다면 워싱턴까지 진군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설령 남군을 격퇴하더라도 북군으로서는 정치적으로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라 링컨은 재선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21] 너무 길어 중간에 인터미션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고작(?) 3시간 2분이었다.[22] 게티스버그에선 엉뚱한데서 헤매다 와서 질책만 들은 젭 스튜어트와 이미 고인이 되어 대사로만 언급되는 스톤월 잭슨의 활약을 볼 수 있다.[23] 이러한 부분은 게티즈버그 역시 비판을 받았지만 솔직히 타당치 않은 비판이었다. 맥스웰 감독은 원작 책인 "킬러 앤잴스"를 그대로 영화로 반영시킨거고 남부의 입장을 설명하되 노예제도는 철저히 비판했다. 예를 들자면 남군 장교인 롱스트리트가 "차라리 노예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선포할걸..."이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 그러나 문제는 이런 대사가 노예제도라는 아킬레스건에서 남부 인물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예를 해방시켰다면 전쟁을 선포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게티스버그는 대놓고 구남부를 미화하는 신과 장군들에 비하면 그나마 객관적으로 양측을 다루고 있다.[24] 부연하면, 간혹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을 연방 권리와 주 권리 사이의 충돌로 설명하는 시각을 볼 수 있는데... 전쟁의 원인은 노예 문제가 백만배는 컸다. 왜냐하면, 온건파인 링컨은 개인적으로는 노예 해방론자였지만 정치가로서는 노예 문제은 각 주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태도를 철저히 유지했고, 따라서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링컨 화형식을 하고 연방을 탈퇴하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부는 링컨이 노예 해방과 관련된 어떤 조치를 강요해서 연방을 탈퇴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탈퇴했는데 이는 링컨이 개인적으로 노예 해방론자였기 때문, 즉 주 권리 문제가 아니라 노예 문제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경제적으로도 노예의 생산성과는 별개로 노예의 가치가 폭등해서 자유주의 자유 흑인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먹는 인신매매가 횡행할 정도였으니 노예 폐지는 곧 남부인들의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고 연방을 탈퇴할 이유로 충분했다. 게다가 남부연합은 징집제를 도입하면서 노예 20명 이상 소유한 사람은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등 스스로 노예 제도를 문제의 중심에 계속 두었을 뿐 아니라, 노예 해방이 아닌 흑인 노예에게 군 입대 기회를 주고 복무가 끝나면 자유를 주는 방안도 남부연합이 망해가는 상황에서나 마지못해 통과시켰기 때문에, 롱스트리트의 "차라리 노예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선포할걸..." 발언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25] 배틀그라운드 시리즈는 주로 남북전쟁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게티즈버그 전투 외에 앤티텀 전투, 불 런 전투(1, 2차 전투를 한 패키지에 같이 수록), 서부전역의 샤일로 전투와 치카무가 전투 등도 게임으로 발매되었다. 단 시리즈 첫 작품은 2차대전아르덴 공세가 배경. 현재 남북전쟁 시리즈와 나폴레옹 전쟁 시리즈는 매트릭스 게임즈에서 판권을 이어받아 묶음으로 판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