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울산병영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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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2년 5월 30일 부터 5월 31일까지 울산 병영성과 일대 평야에서 벌어진 기마전과 수성전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울산 방어선과 경주가 무너졌다.
2. 상세
1592년 5월 30일부터 5월 31일까지 진행된 전투로, 화왕산성 전투와 비슷하게도 수성전과 기마전이 함께 이루어졌던 얼마안되는 전투이다.
2.1. 전개
1592년 5월 30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8,000명은 부산진과 기장을 함락시키고 서생포 만호진을 함락후 울산도호부로 진군하였다. 당시 회야강과 외황강 방어선에 주둔하였던 조선군은 회야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일본군에 의하여 제압당하였고, 이에 관군은 병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병영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은 아예 울산 경상좌도 병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당시 울산 지역의 방어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울산부사 또한 도망감에 따라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그러나 김해성 전투 직후 울산 지역에서도 일부 의병이 일어났고, 울산 지역의 아전과 관군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약사천과 동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목책과 해자를 정비한 후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태화강을 넘어서 5월 30일, 울산병영 평야에 도착하였다.
오전중에 병영성 남쪽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한 차례 기마전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이 패배하여 물러났다. 일본군은 병영성의 동쪽평야에서 또다시 기마전을 벌였고 이 또한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래서 일본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날이 저물자, 동천강을 도하하여 조선군 진영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울산 병영성 내부로 후퇴하였다. 이후 언양지역도 함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92년 5월 31일, 해가 뜨자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병영성을 공격하였고, 이를 버티지 못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무너져내렸고, 이후 북문과 서문으로 도망갔으며, 울산병영과 울산도호부는 일본군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2.2. 결과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조선군은 울산방어선과 경상도 동쪽 지역의 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 회야강 전투에서 어느정도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후 경주읍성이 무너지고, 경상도지역의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울산 지역이 일본군의 주둔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울산읍성과 울산 병영성의 성돌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울산왜성을 쌓았다.
[1] 현재는 주택들과 아파트, 그리고 종합운동장이 들어섰으나, 당시에는 이 일대가 논과 밭으로 된 평야지대였다. 또한 약사천과 동천강이 해자역할을 해주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