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
1. 개요
慶州邑城 / Gyeongjueupseong. 경상북도 경주시 중부동에 소재한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읍성이다.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기존 토성으로 축조 하다가 조선 시대가 오면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 동쪽 성벽 50m미터만 남기고 대부분이 헐렸지만 이후 2011년 경주시가 복원공사를 하였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96호다.
2. 역사
2.1. 고려시대
935년 신라 제56대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지금의 경주로 바꾼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경주는 고려시대에도 서경 평양과 함께 3경 중 하나인 동경(東京)으로서 중요한 도시로 나름 대접받긴 했지만 수도였던 신라 때에 비하면 상당히 도시가 축소됐고 지금의 월성동이 중심이었던 신라 시절의 도심은 차츰 황폐화되었다.
고려 현종 1012(현종3년)년에 기존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현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주읍성을 새로 만들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다. 이 때부터 월성동은 현대까지 논밭이 됐고 경주읍성 쪽이 지금도 경주 시가지 중심지다. 어째서 기존 중심지를 포기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학계에서 예측하기로는 경제가 어려워져 더 이상 신라 때처럼 북천의 범람을 제어하는 데 신경을 쓰기 어려워졌고, 예전처럼 경주분지가 시가지로 가득차 있어서는 경주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에 따라 황남동의 고분과 남산(경주)의 북쪽을 피하려고 그랬다는 견해도 있다.[2]
현종은 대신 제방 남고루를 세워서, 경주읍성 부분은 북천의 범람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 후 1378년(우왕4년)때 이르러 토성을 석축으로 개축하고 4개문을 정비하였다.
2.2. 조선시대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경주읍성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문종실록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알다시피 경주읍성연구에 도움될 뿐 만 아니라 조선 초기 경주읍성 모습도 알 수 있다. 1척의 길이가 약 30cm이고, 1촌의 길이가 약 3cm이므로 높이는 약 3.48m이고 둘레는 약 1.2225km이다.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충청도(忠淸道) 각 고을의 성자(城子)는 당초에 법식(法式)에 의하여 쌓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규식(規式)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대로 둘 수 있는 각 고을과 시기에 미치도록 급히 개축(改築)해야 할 각 고을과 추후에 축조할 수 있는 각 고을, 그리고 물려서 쌓을 각 고을들을 마감하여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그대로 둘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주부 읍성(慶州府邑城)은 주위가 4천 75척, 높이가 11척 6촌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1척 4촌이며, 적대(敵臺)가 26개소, 문(門)이 3개소인데 옹성(擁城)이 없고, 여장이 1천 1백 55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83개소이고,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 (후략)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9월 5일 경자 6번째기사 中
그후 임진왜란을 발발하자 당시 경주 판관이던 박의장[3] 이 새벽에 동문으로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자 왜놈들이 놀라서 서생포로 도망갔다고 징비록에도 기록되어 있다.임진왜란이 끝나자 불탄 경주읍성 남문(징례문)[4] 이 1631년에 준공이 되었다. 그후 전식[5] 이 동, 서, 북을 차례로 개축했다고 한다[6] .
그 뒤 영조때 한번더 개축하였다.
2.3.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가 들어서자 전국에 읍성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경주읍성도 철거 대상이었다. 1912년에 경주읍성이 철거되었는데 당시 사연이 있었다.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2년쯤 경주에 방문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하려고 경주를 방문 하였는데 시내에 들어오는데 큰 성벽의 높이 때문에 차량이 통과 할수 없다고 하자 그대로 철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더기로 나온 성의 돌은 모두 경주선으로 투입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동쪽 성벽 조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다. 이후엔 계림초등학교의 담장 비슷한 역할도 하고 주민들의 쉽터 역할도 하다 2014년 쯤 흰 철벽을 치더니 공사를 시작했다. [7]
3. 경주읍성 성곽 복원
[image]
고려시대 이래 경주의 중심이었던 경주읍성 성곽도 복원이 진행중이다.
2018년 현재 경주읍성 성곽 복원이 상당히 진척되었고, 동문인 향일문의 상량식도 거행되었다. 그리하여 2018년 11월 8일 향일문이 복원 되었다.그리고 북문인 공진문도 복원예정이다. 경주읍성의 핵심유적인 집경전[8] 의 복원도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사진자료가 완벽하게 남아있고, 건물 일부가 남아있는 경주객사(동경관)도 복원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지에서는 경주읍성 복원공사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9] 경주역 앞 시장 인근에는 "그런 거 복원할 예산으로 쇼핑센터 하나 더 지어달라"고 현수막까지 내걸었을 정도. 또한 경주읍성 동편 북쪽 성벽 복원 당시에는 성벽 복원에 나설 것이 아니라 먼저 준공된 남쪽 읍성에 관광객들이 찾아오도록 주차장을 확보하고 주변 민가철거 등 정비 사업이 우선인데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경주시가 또다시 북쪽 복원 공사에 나서는 것은 여기 찔금 저기 찔금 판만 벌리는 거꾸로 행정"이라는 비판도 현지에서 있었다. #
4. 여담
이곳이 신라의 처음 왕궁이었던 금성이 있던곳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로 이곳에 예전부터 있던 성곽들을 고려시대에 개축하였다는 기록과 기록상 초기신라 왕궁(금성)지로 추정되는 유력한 위치이기 때문.
[1] 차가 없는 이유는 새벽에 촬영해서이다.[2] 이렇게 경주 시가지의 중심지가 월성동에서 읍성 일대로 옮겨지면서 월성동은 오랜 세월이 흘러 논밭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에서 비켜가 신라시대 유구가 고려 이후 유구와 크게 섞이지 않고 더 잘 보존되었다.[3] 이후 경주부윤이 된다 무려 7년이라는 이는 경주역대부윤중 최장이다.[4] 이때 상량문은 전식의 아들인 전극항(1590~1636)이 지었다 .[5] 자는 사서 본관은 옥천 류성룡 문인이다. 인조때 경주부윤으로 재직하였다. 1631년 12월 ~ 1633년 4월 임기만료 하였다.[6] 이하 내용들은 동경잡기[7] 2014년에서 2015년 사이까지는 북쪽의 벽을 넘어 다닐 수 있었는데 복원공사 한다고 철창으로 막았다.[8] 1960년 쯔음까지도 건물이 남아 있었다.[9] 사실 경주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국적으로 개발 지역에서 문화재가 나오기라도 하면 현지 사투리로는 말 그대로 '''기함을 한다'''. 뭔가 유물이나 유적 비슷한 것이 발견되는 순간부터 공사는 올스톱되고 발굴한다고 공사가 지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사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는 것도 모자라 그 비용을 모두 문화재법에 따라 사비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경주처럼 "땅에 삽만 꽂으면 문화재가 나온다"는 우스개까지 존재하는 동네에서는 유물 발견 소식이라고 났다 하면 뒷목부터 잡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