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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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1042년, 콘스탄티노스 9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이래 정치, 군사적 변화가 시도되었다. 당시 제국의 중앙집권화된 관료들은 군사 귀족들을 불신하였고 전통적으로 스트라테고스가 맡아오던 군대의 운영을 민간 치안관에게 맡기는 등, 이들을 제도적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스 9세도 이러한 관료주의파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군대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감축하고, 평민을 더 많이 등용 등 변화를 추구하자 군부는 불만을 품었고 이러한 내부 갈등은 제국군의 효율성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티노스는 이에 중요한 아나톨리아의 방어선을 담당할 부대들의 규모를 감축하면서 동방전선의 방위를 사라센 용병들과 민병대에 의존하도록 바꾸었다.
2. 전개
2.1. 레오 토르니키오스
콘스탄티노스 9세가 제위하던 시기에 레오 토르니키오스라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출신의 귀족이 있었다. 미하일 프셀로스의 평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지만 야망있고 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하면서 동시에 '마케도니아인 특유의 오만함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그는 황제의 조카로 황제의 누이동생 유레피아와 친했으나 그것이 황제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지는 못했다.
군사 귀족 출신인 레오는 이 시기에 문제의 동로마 제국의 동쪽 변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240km 떨어진 아드리아노폴리스가 속한 트라키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출신인 레오느 군사 귀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기에 그가 반란군과 연계할 것을 걱정한 콘스탄티노스는 레오를 수도로 소환하여 은퇴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레오는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외에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대로 끝낼 수 없는 야심이 있었다.
1047년 9월, 레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여 추격을 막기 위해 들리는 역참마다 말들을 죽여버리면서 아드리아노폴리스에 도착한다. 레오는 불만이 많던 장군들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포섭했다. 레오는 황제가 이미 사망했으며 자신에게 황위를 넘겨주려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고 황제로 추대되어 1047년 9월 말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에 진을 치기에 이른다.
2.2. 공성전의 전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레오에 동조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소요가 발생하였다. 9월 27일, 성의 수비대 일부가 성밖에 진출했다가 반란군에게 포위당해 처참히 도륙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수비대의 동요를 일으켜 성벽과 성문의 방어를 포기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하지만 레오는 이 기회에 문을 뚫고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동시대의 역사가인 프셀로스는 이런 망설임에 대하여 '레오는 내부 소요가 더 발전해서 궁성에 화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악명 높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상대로 가망 없는 공성전을 벌이느니 내부에서 소요가 더욱 커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게 맞을 듯 하다. 그러나 레오가 주저하는 사이 콘스탄티노스는 시내의 소요를 잠재우고 수비대를 재배치하며 아나톨리아로부터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황제의 의복으로 갈아 입은 콘스탄티노스 9세는 반란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레오 토르니키오스가 주장하던, 황제가 이미 죽었다는 말이 거짓임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기세를 잃었고 3일간 공성이 지속되기는 했지만 2차례에 걸친 반군의 공성은 황제가 직접 나서서 지휘하는 방어군에게 간단히 격퇴되었다. 황제에게는 군사적인 경험이 없었지만 그가 직접 전선에 나섰기에 방어군은 용기와 활력이 넘쳐 흘렀으며, 화살이 황제 바로 옆의 수행원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지휘를 계속하였다. 공성의 실패로 의기소침해진 반란군 사이에 황제는 조용히 밀사를 보내어 이들에게 항복을 종용하였고 반란군은 점점 결속력을 상실했다.
절망에 빠진 레오 토르니키오스는 성벽에 접근하여 수비군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수비군은 화살을 쏘는 것으로 화답했다. 결국 10월이 되자 레오는 병력을 물리기에 이르렀다. 레오는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으나 역으로 격퇴당했고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증원을 받은 콘스탄티노스가 레오의 반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3. 결과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은 레오는 체포되어 1047년, 크리스마스 날에 반란의 수괴로서 눈알이 뽑혔다. 레오의 반란을 포함해 발칸 반도에서는 군부에 의한 소요가 지속되었고 이 지역에서 제국군의 방어가 약화되자 이듬해인 1048년부터 5년간에 걸쳐 페체네그가 발칸 반도를 휩쓸고 다니는 결과를 낳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