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프셀로스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궁정 생활
2.3. 말년
3. 저작물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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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수도자이자, 철학자, 정치가, 역사가, 작가.

2. 생애


프셀로스는 자신의 저술에 자전적 메세지를 많이 넣어두었기에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2.1. 초년기


본인 말로는 조상이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을 지낸 상류층 가문의 일원이었다고 하는 데 아무튼 그의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프셀로스 본인은 콘스탄티노플 출신이지만 그의 부모는 원래 터키의 니코메디아 출신으로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은 상업적 번성을 누렸고 복지도 잘 되어 있어서 많은 이들이 몰렸기에 기회를 노리고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학문에 재능이 있다고 믿어 미하일은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받던 미하일 프셀로스는 10살 쯤에 누나의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속주 판사의 비서로 파견돠어 일하기 시작했으나 누나가 죽자 일을 그만두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다.
프셀로스는 요안니스 마브로푸스 수하에서 교육받았으며 나중에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는 요안니스 흐시필리노스와 친분을 쌓은 걸로 보아 상당히 고급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2. 궁정 생활


공부를 마치고 지방에서 판사로 일하던 프셀로스는 1042년 즈음해서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황궁에서 비서관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궁정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콘스탄티노스 9세의 영향력 있는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새로 건립된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수석 교수가 되어 수석 철학자[1]의 명예를 얻는다.
콘스탄티노스 9세 말기에 프셀로스는 정치적 문제로 궁정을 떠나 올림포스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테오도라 여제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 궁정에서 정치적 조언자로서 미하일 6세에서 이사키오스 1세에게로, 다시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로 또 다시 로마노스 4세에게서 미하일 7세에게로 권력이 넘어가는 상황에 꾸준히 지위를 유지했다. 미하일 7세의 경우 프셀로스는 그의 개인교사였으며 그가 양부인 로마노스 4세에게서 권력을 뺏는데 중요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기에 자신이 궁정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르리라 예상했지만, 미하일 7세는 어째서인지 점차 프셀로스에게서 관심을 잃어 10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프셀로스가 궁정에서 뭔가를 했다는 정보가 없다.

2.3. 말년


프셀로스의 말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긴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가 궁정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미하일 7세의 몰락 이후 프셀로스가 곧 죽었다고 보지만 불가리아의 테오필락토스가 프셀로스의 동생에게 형님은 죽지 않았으나 떠나면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로워 질것이라 언급한 내용을 근거로 이후에 죽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3. 저작물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50여년에 걸친 바실리오스 2세 치세부터 시작하여 미하일 7세까지 14대의 황제와 황후를 거치며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기술한 '연대기'(Χρονογραφία, Chronographia)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제1부는 이사키오스 1세까지의 황제들을 다루고, 제2부에는 두카스 왕조의 궁정에 대하여 프셀로스가 관여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옹호적인 논조로 다룬다.
14명의 제위기간을 다루면서 프셀로스는 다른 중세의 역사기록처럼 시대순으로 사건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기 보다는 여러 편의 위인전을 엮는 것처럼 서술해 인물의 성격이나 외모를 더욱 생생히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9세 시기에는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메모에 기초해 더욱 생생하게 성격을 묘사해준다.
그 외에도 천문학과 역사, 정치 등에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나 저술에 남긴 그의 자전적 묘사들을 종합해서 보면 그가 매우 야망과 허영심이 있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으로 비춰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을 보면 정치적 혼란기에 여러 번 충성 대상을 바꾸기도 하고 그런 변화에 특별한 소신을 보이지도 않는 것 같다. 연대기 전체를 보면 황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황제가 살았을 때를 기록하면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황제에게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었는지를 그대로 적어놓기도 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호평하던 정책인데, 나중에 평가를 뒤집어 버리는 것 때문에 더더욱 기회주의자로 비춰진다.

4. 여담


  • 프셀로스는 말더듬이라는 뜻으로 별명이고 원래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다. 아마 말을 더듬었던 모양이다.
  • 프셀로스는 보편적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스스로도 동로마 제국에 고전 철학을 연구해 재도입한 업적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 능통했으며 신플라톤주의를 비롯해 이교 철학자들을 편애해서 그의 신앙심은 동시대인에게 많은 의심을 샀다.[2]
  • 그렇게 명망 높고 유식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지만 키케로카이사르를 구분하지 못하는 기록이 남아서, 당시 동로마 제국이 고전 로마랑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 수사학의 대가로서의 철학자의 지혜와 설득력있는 수사학을 결부시킴으로써 정치적 조언자로 유명해졌다. 프셀로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쿠데타를 비롯해 왕조 교체까지 빈번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이며 제국 전체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만치케르트 전투의 전야지만 프셀로스는 그 모든 변화에 매번 적응해서 황제마다 그를 좋아하게 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1] 히파토스 톤 필로소폰[2] 1054년에는 자신과 동문수학한 흐시필리노스에게 불신자로 고발당했다. 예수를 버리고 플라톤을 따른다는 게 죄명(?). 프셀로스의 제자이자 수석철학자 직울 물려받은 요안니스 이탈로스는 종말론을 부인하고 윤회전생을 주장했다는 죄명으로 두 번이나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공개적으로 참회해야 했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