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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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그리스어)[1]
Imperium Romanum (라틴어)

[image]
최종 분할
[image]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 최대 강역
기원전 27년/286년[2]/330년[3]/359년[4]/395년[5] ~ 1204년
1204년 ~ 1261년 (니케아 제국)
1261년 ~ 1453년
'''별칭'''
'''동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
'''위치'''
남동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수도'''
니코메디아 (286-330년)[6]
노바로마[별칭] (330-1204년)
니케아 (임시, 1204-1261년)[7]
노바로마[별칭] (1261-1453년)
'''정치 체제'''
공화전제군주제[8]
'''국가원수'''
황제 (임페라토르 또는 바실레우스)
'''언어'''
라틴어 (660년 이전 국어)[9]
그리스어#s-2.4
기타 지방 언어
'''종교'''
정교회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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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년 최초의 동서 로마 분할통치
293년 사두정치의 시작
313년 밀라노 칙령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 재통일
330년 노바 로마 천도[106]
380년 기독교 국교화
395년 최종 분할
476년 서방 영토 상실
532년 니카의 반란
552년 이탈리아 재정복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7년 니네베 전투
636년 야르무크 전투
674년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98년 카르타고 상실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26년 성상 파괴령
751년 라벤나 총독부 상실
843년 성상파괴령 철회
969년 안티오키아 수복
1018년 불가리아 정복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
1122년 베로이아 전투
1180년 마누일 1세 붕어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 폐위
1204년 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261년 니케아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41년 제2차 시민전쟁
1453년 오스만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
286년 최초의 동서 로마 분할통치
293년 사두정치의 시작
313년 밀라노 칙령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 재통일
330년 노바 로마 천도[10]
380년 기독교 국교화
395년 최종 분할
476년 서방 영토 상실
532년 니카의 반란
552년 이탈리아 재정복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7년 니네베 전투
636년 야르무크 전투
674년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698년 카르타고 상실
717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26년 성상 파괴령
751년 라벤나 총독부 상실
843년 성상파괴령 철회
969년 안티오키아 수복
1018년 불가리아 정복
1054년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
1122년 베로이아 전투
1180년 마누일 1세 붕어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 폐위
1204년 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261년 니케아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41년 제2차 시민전쟁
1453년 오스만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통화'''
솔리두스
히피르피론
'''성립 이전'''
로마 공화국
( 분할 통치 이전 로마 제국 )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1. 개요
2.2. 전성기
2.3. 장대한 존속 기간
3. 상징물
4. 경제
5.1. 동로마 제국 초기
5.2. 페르시아전 이후
5.3. 프로니아 제도
5.3.1. 병종
5.3.1.1. 중기병대
5.3.1.2. 경기병과 보병
7. 민족
8. 문화와 학문
9. 외교
9.1. 서유럽
9.2. 중동권
9.3. 유목민
9.4. 슬라브
9.5. 비슬라브 동방 기독교권
10. 평가
10.1. 근대의 평가
10.2. 현대의 평가
11. 역사적 의의
12. 국호 표기법
13.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13.1. 학계에서의 논의
13.2. 고대 로마와의 연속성
13.3. 당대인들의 인식
13.3.1. 동로마인들의 인식
13.3.2. 외국인들의 인식
13.3.2.1. 서유럽인들의 인식
13.3.2.2. 이슬람권의 인식
13.3.2.3. 슬라브권의 인식
14. 관련
15. 끝나지 않은 이야기
15.1. 근현대 그리스
15.2. 러시아
16. 매체
16.1. 등장하는 작품들
16.2. 언급되는 작품들
16.3. 모델로 한 것들
17. 관련 문서
1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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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시대의 노바 로마(비잔티움,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를 수도로 하는 로마 제국을 일컫는 용어.''' 수도의 옛 이름을 따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한다. 330년 5월 11일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노바 로마',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멸망하고 라틴 제국으로 대체되었으나,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아 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국에게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흔히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는데,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서로마 제국과 구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로마 제국의 중세 시기를 고대 로마와 구분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11]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함께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나라이며, 당대에는 이를 단절로 보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엄밀히 말하는 분열이 아니라 '분할'로, 실제 제국이 분열되어 서로를 별개의 국가로 여긴 것이 아니라,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둘로 나누어 복수의 황제가 다스린 개념이었기에, 고대의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별개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동로마처럼 로마 제국과 한 나라인 서로마 제국이 존재했기에 구분을 이유로 '동'로마라고 부를 수는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근세에 중세의 로마 제국을 고대의 로마 제국과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며, 정확히 어떤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성립되었는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 제국과 같은 국가로 인정한다면 위에 언급된 기원전 753년이 맞겠지만, 굳이 별개의 제국으로 치는 경우엔 대체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 ~ 337년)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하고 330년 5월 11일에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은 이후부터의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구별해 부른다.
동로마 제국은 중세 중기까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최강대국 중 하나였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대 로마의 기술과 학문, 문명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슬람 제국의 풍파로부터 유럽 기독교 문명을 지켜내기도 했다. 제국의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 그리스를 비롯한 정교회 국가들과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후예 터키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2. 역사




여담으로, 위 영상 24:25경에 등장하는 초상의 원본 그림은 예수 옆에 엎드린 레온 6세인데, 정작 저 영상에선 예수가 레온 6세로 나온다(...)

2.1. 역대 황제들


[image]
동로마 황후, 황제의 복식
동로마 황제가 가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단지 이름만 따온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와 막강한 권위를 가진 '로마 황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은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을 막론한 유럽 세계 전체가 입맛 다시며 호시탐탐 이를 노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서방 가톨릭 국가들을 제외한 여타 세력에게는 어느 놈이 되든 관심이 없었던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황제' 직함과는 그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와[12]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우로슈 4세가 자기네 직함에다가 '로마 황제'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것도 동로마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단행한 데서 기인했으며, 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 자칭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대업을 이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 세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라틴 제국의 황제들이 자기네 인장(seal)에다가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 떡하니 박아놓은 것도[13]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열거한 세력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며 스스로를 '제국'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국가도 아닌 바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이었다. 당대 유럽 세계에서 '제국'이나 '황제'라는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자칭'이거나(세르비아,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거나(신성로마,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것들이다.
애당초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도 여성의 제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상 당시 동로마를 다스렸던 이리니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은 채 로마 황제가 공석 상태임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14] 적어도 이리니의 선황,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정통 로마 황제'임을 서유럽인들 역시 인정했다. 그러나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국내법에 불과했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는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당대 유럽 세계에서 진정한 로마 황제로 경외되어 온 동로마 황제 자리마저 노림으로써 자기가 가진 로마 황제 직함의 '국제적인' 정통성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사실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진정한 수혜자는 카롤루스 본인이 아닌 로마 교황이었는데,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교황이었으니 이를 거두는 것 역시 교황이 결정할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교황은 황제의 정통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오히려 교황이 채워 놓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 카롤루스로서는 굳이 교황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정통 로마 황제'인 동로마 황제로의 즉위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리니와의 혼담 논의는 동로마 황제 등극이라는 최종 목표의 중간 과정이었던 것... 훗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로마 황족과의 혼인을 이유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카롤루스의 구상이 아주 허황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서방의 로마 황제조차도 그 탄생은 동로마 남성 황제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겉으로는 자기가 진짜 로마 황제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정통성 강화의 수단으로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렸다는 것에서 '동로마 황제가 진퉁 로마 황제'임을 서방 세력 스스로가 몸소 보여 주었다.[15]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고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총 88명(라틴 제국 출신의 황제 제외)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적장자 상속제 같은 명확한 상속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오랜 기간 동안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자는 황제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재위 1차 685년 ~ 695년, 2차 705년 ~ 711년)는 코를 잘린 후에도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제위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은 대개 이 뽑히거나, 가 잘리고 수도원연금되었다. 코를 자른 이유는 신체에 손상이 있는 사람은 제위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각각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대신 눈을 뽑아 연금 하는 것과 그 자식들이 다시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가 잘리고 폐위를 당했지만 멀쩡히 복위에 성공하고, 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필리피코스에게 폐위되자 처형당했다.
그래서인지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관행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신체 절단형을 끔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세련되고 문명적인''' 정적 제거법이었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폐위될 때 눈이 뽑히고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어머니 이리니 아씨나이가 특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눈을 뽑았다고 보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일반적인 서양 국가와는 다르게 환관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고위직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것도 신체절단형과 관련이 있는데 '''애초에 거세당한 사람들이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다 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는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인물을 잡아죽이는 것보다는 불구로 만들어서 제위나 권력 투쟁에 결격 사유를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명확한 적장자 상속제가 없고, 군부의 추대를 받으면 황제가 될 수 있는 체제를 본 서유럽인들은 동로마에는 음모가 많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불가리아인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포로 2만 명을 100명 중 1명은 애꾸로 만들고 99명은 장님으로 만들어 애꾸눈인 1명이 나머지 99명을 인도하게 하여 돌려보냈다. 불가리아 왕 사무일은 이걸 보고 졸도하여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일로 여겨진다. 실제로는 패잔병들이 불가리아 테마병으로 편입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2.2. 전성기


고대 로마 제국에 비해서는 영토가 많이 줄었으므로 그것까지 합쳐 생각하면 최고 전성기는 오현제 시기, 동로마 시대의 전성기들에 대해서는 최고 전성기는 아닌 중흥기로 보기도 한다.
제국의 전성기는 세 번으로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 전성기이자 최대 전성기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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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의 제국은 외적으로는 과거 최전성기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프랑스영국, 에스파냐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로마 제국의 과거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흑사병이 대유행했다. 더군다나 제국은 도시화도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른 지역보다 높아서 피해는 더욱 컸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정복으로 넓어진 영토는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본인이야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고 지켜낼 만한 역량이 있지만 후대 황제들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첫 번째 전성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빠르게 영토를 상실하며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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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전성기는 바실리오스 1세(재위 867년 ~ 886년)가 창건한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를 꼽을 수 있다. 약 200년간에 걸쳐 전개된 이 시기에는 바실리오스 1세, 현제 레온 6세(재위 886년 ~ 912년),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재위 920년 ~ 944년), 콘스탄티노스 7세(재위 913년 ~ 959년),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재위 963년 ~ 969년),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재위 969년 ~ 976년),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불가리아인들의 학살자) 등의 위대한 황제들이 배출되었으며, 영토만으로는 이전 로마 제국에 훨씬 못 미치지만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이 시기의 제국은 유럽뿐만 아니라 지중해 문화권 전체에서 최강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395년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구체적인 자료도 존재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395년의 소위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약 60~70% 수준에 달하며[16](물론 그 이후로 시대가 흘러 기술이 발전한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인구와 세입금은 거의 75%, 군사력은 110%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다.[17] 이 수치는 워랜 트레드골드가 추정한 수치인데, 일반적으로는 오히려 워랜이 인구와 세입금을 너무 보수적으로 잡았다고 보기 때문에, 대강 거의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먼 길 돌아서 회복했다고 보고 있다[18].
그러나 이 전성기는 11세기의 연이은 전쟁과 혼란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동쪽으로는 룸 술탄국이 밀려들어왔고 북쪽에서는 쿠만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략이 이어졌고 서쪽에서는 노르만의 공세가 줄을 이었다. 결국 만치케르트 전투가 결정타가 되어 기존 체제는 와해되었고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수습되어 전성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1세기 말~12세기 말[19]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로 이어지는 시기에 제국은 황금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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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모자이크 미술
영토가 아닌 재정적인 지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12세기 무렵 콤니노스 왕조 치하의 시기에 역사상 가장 융성하였다. 당대 기록에서 이미 고대를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 시기 제국의 군사력은 중앙 야전군을 4만 혹은 5만 명선까지 팽창시켜 주전력으로 삼았다. 재정 부문에서는 농상공업이 모두 골고루 발전하여 역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12세기 중반에는 이미 조세액만으로 11세기 초에 맞먹게 되었고[20] 그 세기 후반에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루 관세만 금화 2만 개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발전상이 정부기관과는 구분되는 민간에서 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발전상조차도 이 시기의 번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 그만큼 제국은 '''당대 최고의 대국'''의 지위를 가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제국의 부와 아름다움은 십자군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그리고 그 선망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1204년의 참변을 만들었다.)

2.3. 장대한 존속 기간


로마였다는 연속적인 정체성은 기원전 8세기의 신화시대에 태어나서 중세의 끝자락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3. 상징물


동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의 문장학적인 상징이나 고정적인 국기 및 국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상징으로써 사용된 표시들은 여러 개가 있으며 시대에 따라서도 다양하다. 십자가를 사용하거나 예수성모 마리아, 기독교성인들이 그려진 이콘을 군기(軍旗) 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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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년 집정관인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의 모습을 새긴 상아 조각품. 왼손에 아퀼라가 올라와 있는 셉터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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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황제 티베리우스 2세솔리두스. 왼손에 아퀼라가 올라와 있는 셉터를 쥐고 있다.
8세기 초반 황제 필리피코스의 솔리두스. 왼손에는 아퀼라 셉터가, 오른손에는 보주가 있다.
고대 로마부터 쓰였던 아퀼라는 동로마 제국에 와서도 계속 사용되었다. 군사 상징으로는 더는 사용되지 않았고, 집정관 직분과 황제를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집정관들의 모습을 새긴 상아 조각품들에서 집정관들은 아퀼라가 있는 셉터를 쥐고 있는 자세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로마 황제들의 초상을 찍은 솔리두스 동전들에서도 아퀼라 셉터가 등장하는데, 이는 8세기 초 필리피코스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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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코를 들고 있는 병사
고대 로마 후기부터 다키아에서 수입한 드라코(용)는 군사 상징으로 가끔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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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룸
콘스탄티누스 1세카이 로(☧)를 군기인 벡실룸(Vexillum)으로 지정하면서부터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군사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카이 로가 있는 벡실룸은 '라바룸(Labarum)'이라 불린다. 라바룸 외에 카이 로 십자가 자체도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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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으로 가면 길다란 천을 군기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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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쌍두독수리

동로마 제국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이 쌍두독수리이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기나긴 역사에 비해 쌍두독수리의 사용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쌍두독수리 사용은 고대 로마의 아퀼라보다는 아나톨리아 토착 히타이트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사키오스 1세가 쌍두독수리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콤니노스 왕조 치세부터 사용되었다. 이후 제국의 막바지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와서 본격적인 황실 상징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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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자 십자(Tetragrammatic cross)
붉은 바탕에 노란 십자가와 베타(Β) 넷이 그려진 도안 역시 동로마 제국의 '국기'로 유명하다. 베타 넷은 '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의 앞글자를 따온 것으로, 풀이하면 '임금들의 임금, 통치자들의 통치자'이다. 이 구호와 깃발은 동로마 제국 국가 자체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상징이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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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국기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상징물과 제노바 공화국의 국기를 합쳐놓은 문양일 뿐인데 동로마 제국의 국기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예전 위키피디아에서 이게 동로마 제국의 국기라고 소개해서 오해가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Conoscimento de todos los Reinos'라는 지도책이 출처이고, 지도책 저자가 금각만 건너 제노바령 갈라타에서 사용한 국기를 팔레올로고스 문양과 섞어서 그린 것이다.

4. 경제


동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보다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했다고 여겨진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노미스마는 13세기 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1282년에 등장하여 빠르게 보급된 베네치아 두캇 금화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높은 신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노미스마화는 후세에 ‘중세의 달러’ 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중국에서 [21]들여온 비단 기술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 제조된 견직물들을 비롯해서 귀금속 공예품·유리 공예품·도자기 제품들이 거래되면서 다른 국가와의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 이라고 불릴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여기서 만든 유리잔, 유리구슬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될 정도였다.(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등)
그러나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는 11세기 초까지로 한정되며 8~9세기 이래로 경제 전반은 점점 민간에서 역량을 강화하면서 자유로운 무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의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하루 금 2만 개를 거둔다는 진술이 나올 정도로 무역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12세기 말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에 대한 동로마 지식인들의 적개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제국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서유럽의 기술도 쇠퇴하지는 않았지만)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9~13세기 사이에 서유럽이나 중동에서 농업도구의 기술과 생산성이 개량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상대적인 우위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중괭이와 가벼운 쟁기에서 멈추었지만 이것은 굳이 깊게 땅을 팔 이유가 없는 동지중해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Angeliki 교수) 자연환경에 농민들이 적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Oikonomides 교수) 서유럽은 무거운 쟁기를 써서 생산량을 늘릴 루 있었는데, 지중해쪽은 깊게 파 봐야 모래가 나오는지라 무쓸모했다.
동로마의 노동생산성은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토지소유 형태와 경작 방식에 있어서 집약경작방식의 도입 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거대하게 관개를 진행한 아랍과 달리 동로마 제국에서는 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 관개수로를 설치하고 물레방아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동안에 서유럽의 생산성은 배로 늘어났고 아랍-이슬람 세계도 관개공사를 해 수확을 두 배로 늘리고 동양의 작물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동로마의 농업 기술은 초기에는 앞서 있었으나 점차 규모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서유럽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였다.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같은 곡창지대를 잃은 후에는 인구부양 능력이 점점 떨어졌다.
8세기에 아바스 왕조와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두환이라는 당나라 포로가 지중해 국가들의 풍습 등을 기록했는데 동로마에 대해 기록한 것에 따르면 아랍제국의 상업은 굉장히 활발하다고 했던 반면 동로마인들은 금전거래나 장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아랍제국의 공습을 받아 쇠퇴기에 든 동로마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자급자족하는 변경의 테마들을 본 것일 가능성도 있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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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동로마 제국 초기


동로마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군제 개혁을 통해 새로이 변모한 로마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군대는 스콜라이 팔라티니와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를 비롯한 근위대[22],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 국경방위대인 리미타네이, 그리고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제국 내 자치령의 소집병으로도 볼 수 있는 포이데라티, 그리고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귀족들의 사병 부대 부셀라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가가 그럭저럭 유지되던 동로마 방면 군대는 상당히 건실했으며 외국 용병인 포데라티도 로마 국내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당시 동로마 제국군은 최대 300,000~350,000명에 이르렀다. 코미타텐세스와 리미타네이로 혼성 편제된 각 야전군은 15,000~25,000명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동로마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야전군들의 편제는 거의 그대로 이라클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 용병이 편제되는 등 용병의 활용도가 높았기는 했지만 용병 활용은 고대 로마의 아욱실리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은 주적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용병 비중이 높았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라고 보이는 어렵다. 벨리사리우스의 원정대에서 주력이 된 보병 10,000명에 기병 3,000기는 기존의 야전군인 코미타텐세스와 용병대 포이데라티가 '''혼성 편제'''된 군대였다.[23]

5.2. 페르시아전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끝에 부유한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실하자 다수의 상비병과 용병으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를 해결하고자 본래 편제된 정규군인 타그마와 함께 둔전 제도의 일종인 테마 제도를 도입했다. 테마 제도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해결책이었지만 이슬람의 흥기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카르타고를 상실하고 거대한 이슬람 세계의 공세에 노출되자 다수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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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군인 타그마(το τάγμα)[24]는 상설화, 혹은 거의 상설화 된 군대로 점차 확대되어가다 후대에 총 4개의 기병 연대로 확립되었다. 이들의 수는 24,000명으로[25] 테마의 군대보다 훨씬 중무장했고 기병 비율이 높은 부대 구성으로 야전군의 역할을 맡았다.
테마 제도는 둔전병들에게 토지와 면세 효과를 부여하고(뒤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지긴 한다.) 대신 그 지역에 정착하여 외부의 군대가 습격해올 때 이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이슬람 세계에 대해 많은 군사력 열세에 처했던 8세기의 동로마 제국의 방어 전술은 테마의 둔전병이 고지대나 요새에서 적을 방어하는 한편 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고, 이 사이 인근 테마의 지원군이나 중앙군이 집결하여 적을 격퇴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지역 기반적인 군사 제도 덕분에, 일시적으로 그 지역이 적의 약탈에 유린되어도 주민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금세 군사력을 복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다만 지역분산적인 군사제도는 언제든지 이들이 중앙의 황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테마 제도가 시행되는 초기와 성상 파괴로 인한 대립이 있었을 때는 이러한 일이 잦았지만, 이후 제국은 테마를 소형화해서 여러 갈래로 갈라놓으면서 이들이 연대하여 중앙에 반발하는 일을 어렵게 해 놓았다.
하지만 테마 제도는 기본적으로 '''둔전병이 그 지역을 지킨다'''는 상당히 수세적이고 지역 기반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에 제국이 이슬람 세계에 공세로 돌아서는 10세기에는 테마 제도의 구성원은 상당히 줄어들고, 대신 타그마나 용병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호족 가문의 세력 확대로 둔전병이 토지를 잃는 상황이 이어지며 붕괴를 가속했다. 이 영향으로 제국의 수세적 역량은 약화 되어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과 바실리오스 2세 치하에 확장 되었던 '새로운 테마' 의 영역을 상실하면서 결정타를 맞고 붕괴한다.

5.3. 프로니아 제도


이렇게 중기 제국 군사 제도가 붕괴하고 콤니노스 왕조 치하에서는 군사력의 봉건화가 진행된다. 농민 위주로 편성되었던 테마 제도와는 달리 중소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병력을 제공받거나 수세권을 부여하는 대신, 직업 군인을 고용하는 프로니아 제도(Πρόνοια)가 나타났다. 프로니아 제도는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서구의 봉건제와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세습되었다. 황제들은 프로니아의 반란이나 이탈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콤니노스 가문이 지배하던 시기와 앙겔로스 가문까지는 봉건화가 절정으로 치달은 시기로 여겨진다.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에는 당시 니케아 제국의 역량으로 제국 전 영역을 커버할 군사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용병의 중요성이 더욱 늘어났다. 과도한 군사력 지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군사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멸망을 맞게 된다.
다만 직업 군인은 자신의 토지가 복잡하게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기에 국가 행정 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의 토지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특별히 공을 세우거나 아들이 아비의 직업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경우 세습은 쉽지 않았다. 프로니아 제도가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고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프로니아 제도는 제국의 몰락을 최대한 막았으며, 프로니아 제도로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의 위기가 제국을 몰락시켰다고 보고 있다. 오스만이 제국 대부분을 잠식하여 제국 영토가 고립되고 흩어진 상태에서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과 협상하려하는데 황자 하나는 테살로니키에서 오스만군을 막고 있고 황자 하나는 모레아에서 4차 십자군의 잔당들과 마찰을 빚는 상황이 와버린 것이다.

5.3.1. 병종



5.3.1.1. 중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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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병종으로는 유명한 클리바노포로이와 카타프락토이가 있다. 페르시아에서는 마갑이 있으면 카타프락토이고 반만 있으면 클리바노포로이지만 여기서는 반대였다. 니키포로스 2세의 pracepta milataria에서는 마갑 입힌 기병을 그냥 카타프락토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에 원어민들도 그다지 구별하면서 쓴 것은 아니었다. 등자는 언제부터 운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11세기쯤에는 운용했고 카우치드 랜스도 운용했다. 다만 당당하게 보병대를 정면에서 돌격해서 깔아뭉개는 걸 즐겼던 한 세기 후의 십자군[26]과는 달리, 여전히 전통적인 양익 배치 편제대로 운영되었다.

5.3.1.2. 경기병과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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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이런 클리바노포로이와 카타프락토이 중기병대 외에도, 바이킹(바랑인)들로 구성된 바랑인 친위대부대와 스쿠타토스(복수형은 스쿠타티, 방패를 든 아저씨들)라 불린 중보병 부대, 궁병, 경기병도 운용했다. 바랑인 부대는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온 바랑인들로, 나중에는 잉글랜드에서 온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디라히온 전투에서 침공해 온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무모한 전투를 벌이다 전멸하고 말았다.
후에 이 부대는 다시 재건되고,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왔을 때(1202년), 제대로 저항을 하던 거의 유일한 부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의 제국은 병력의 주 제공지였던 소아시아를 거의 상실하게 되어 용병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 상태가 되었다.
제국의 중보병은 과거처럼 더 이상 주력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은 방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고 공격에서도 필요했다고 보고 있다. 10세기 초반까지 제국의 방어전술은 테마를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기병 부대'''로 불릴 정도로 기병 비중이 높았고, 보병은 대개 궁수나 경보병으로 보조 역할만 맡았다. 하지만 10세기 중반 들어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이후 보병 부대의 강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보병-기병의 비율도 2:1까지 늘어났고, 충격부대 역할과 기병 작전의 베이스 역할을 하는 보병 전술이 완성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13살에 입대했다는 것으로 보면 입대 연령이 17세였던 고대 로마 시절보다 조금 더 낮아졌다고 보고 있다.

6. 작위 및 관직



동로마 제국은 수많은 변화에 적응하면서 관료제와 족벌주의를 혼합한 제도를 구축했다. 전형적인 관료제에서 관료의 권한과 권위는 직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제국의 관료제에서는 권위와 권한이 그 직위를 담당하는 개인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정치적 최고 권위자인 황제의 권위는 제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7세기 중반에 즈음해 테마 제도를 받아들이자 지방의 군사-정치적 실권은 스테라테고에게 집중되었다.
8~9세기에 행정제도는 족벌주의의 영향을 받아 운영되었으나 9세기 들어서면서는 귀족 가문의 경쟁이 두드러졌고 11세기에는 별도로 문관과 무관 족벌주의가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7.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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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 동로마 제국 영토 내 언어 분포
'''파랑'''
라틴어
'''하늘색'''
라틴어와 토착 언어
'''빨강'''
그리스어
'''주황'''
그리스어와 토착 언어
'''분홍'''
아람어
'''연두'''
콥트어
'''노랑'''
아르메니아어카르트벨리어족
다민족 국가이면서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그 영토 안에는 그리스인 외에 라틴인, 불가르인, 튀르크인,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흑인들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사민정책과 주변국들과의 교류로 인해 인종 간의 혼합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인종적으로 '순수한 그리스인', '순수한 슬라브인' 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합동으로 코르푸를 공략하고 있던 동로마군과 베네치아군은 사이가 서로 화목하지 못해 자주 신경전을 벌였는데, 마침 그때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전선을 시찰하러 오자 베네치아군은 황제복을 입힌 흑인 노예를 배 위에 세워두는 식으로 황제를 조롱했다. 이것은 마누일 1세의 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겨냥한 행동이었는데, 어두운 색의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요안니스 2세는 당대인들 사이에서 '흑인 황제'라는 놀림까지 받았을 정도로 그 특징이 유독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제국이 특유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콤니노스 왕조 후기부터지만 그 시기에도 그런 경향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강렬한 그리스 민족 의식과 반서유럽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니케아 제국 등의 지방 세력들을 중심으로 제국이 재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27]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붕괴되고 정체가 단절된 뒤로는 소위 '저항적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로마 정부는 1204년에 파괴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워렌 트레드골드) 제국 말기에는 대내외적으로 '그리스인의 황제'로 칭해지기도 했다. 물론 고대 로마의 황제 역시 그리스인을 신민으로 삼고 있기는 했다. 동로마 황제는 멸망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없고[28] 같은 시기의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들의 황제'로 지칭하기도 했다.
제국 내의 그리스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제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미 '제국의 신민'으로서 1600년 넘는 기간을 살아 왔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 시대의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주된 언어로 쓰고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지만, '그리스인(ελληνές, 엘리네스)'라는 단어는 근세까지도 그리스 로마 신화인 '고대 이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어휘로 쓰였다.[29] 12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심지어는 근대에 남동유럽의 각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도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처럼 혈통적으로 확실한 개념은 아니었다.
보편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부터 로마는 이미 다민족 국가로 변모되어 갔고, 라틴어를 쓰는 라틴인만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당대 '로마인'이라는 개념은 '민족'이 아닌 '국가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고 제국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에 순응하면서 스스로 '제국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출신이 라틴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슬라브인이든 아랍인이든 튀르크인이든 상관없었다.[30] 실제로도 동로마의 사회는 귀족, 사제, 관료, 군사령관, 서민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 라틴,[31] 슬라브,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랍, 튀르크 등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로마의 명장으로 유명한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도 각각 고트계 집안과 아르메니아계 집안 출신이었고, 요안니스 2세의 총신이자 명장으로서 12세기 초 제국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요안니스 악수스도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이었다. 13세기 말 라틴 제국의 부활을 목적으로 거세게 공격해 온 베네치아와 시칠리아에 맞서 동로마의 해군을 이끌었던 명장 리카리오(Licario)도[32]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최정점에 위치한 황제마저 그 선조가 아랍인이었다고 전해지거나(니키포로스 1세)[33] 아르메니아 혈통의 가문들이(헤라클리우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34] 차지하기도 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일리리쿰 속주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일리리아인이었다.(트라키아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포함한 제국 사회 전체의 이러한 다민족적 특징은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기독교도 저술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따르면 사두정치 때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35]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고,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다시 말해서 '''SPQR'''이 경악했다고 한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것처럼[36]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미 반박된 모함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속의 갈레리우스는 로마의 위기극복과 번영을 위해 충성을 다한 부제였다. 어쨌든 다민족적 보편성을 '고대 로마와는 구별되는 중세 로마만의 특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37]

8. 문화와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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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백과사전인 '수다'의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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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동로마 제국의 외과 의사 묘사
12세기 히포크라테스 선서 사본
이 시기의 예술에 대해서는 비잔틴 미술 참고.
'''고대 로마 시절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기독교적으로 변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의 교류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일컫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주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제국이 갈수록 기독교화 되어가다 보니 문화적 면에서 기독교가 우세해졌고 이것은 미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38]
이런 기독교화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본산인 아카데미가 이교 사상 취급을 받고 해체되기도 했다. 7세기 이후로는 전염병과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인과의 전쟁 등으로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지식인의 수가 급감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 문학은 지식인에게 필수였고, 법학 또한 상당히 중시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로마법 대전이 있다.
동로마 건축은 동남부 유럽 전역에 뿌리내렸으며, 이탈리아 라벤나에도 산 비탈레 성당이 남아있다. 동로마의 건축 양식은 후대 러시아로 전해져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계승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도 이 양식을 받아들여 오늘날 터키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 되었다.
동로마 문화가 가지는 의의는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유럽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는 것에 있다. 제국의 선교사들이 만든 키릴 문자불가리아 제국을 거쳐 키예프 루스로 전해져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으며, 정교회 문화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키예프 루스는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도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 프랑스로 시집간 루스 공주가 '이 촌구석 아만인 동네는 꾀죄죄해서 못살겠다며 징징거렸을 정도로.[39]
동로마 정교 문화는 카프카스 지역의 아르메니아조지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원래 언어적, 민족적으로는 페르시아와 더 가까웠지만 동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중동보다는 동유럽과 더 유사한 문화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동로마의 정교 문화는 사실상 동유럽 문화의 원조였다.

9. 외교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시절부터 양면전선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제국은 간접적 접근에 의한 문제해결을 중시했다.
예를 들어서 당시 동로마 제국의 적이었던 불가리아 제1제국키예프 공국을 이용해서 때린 것처럼,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는 전쟁보다는 먼저 외교적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전통적 작업은 나쁘게 말하면 '비잔틴'스러운 음모와 권모술수로 여겨졌고 좋게 말하면 세련된 세력 균형 유지를 통한 평화추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평화추구를 위해 '야만국'(외국 전담 정보부)을 유지할 정도로 동로마 제국은 타국에 대한 정보수집과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 항상 노력했고 이것은 외교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9.1. 서유럽


서유럽과의 관계는 그다지 양호하지 않았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당연히 자신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상 기존의 제국을 멸시했기 때문에, '진퉁 로마'인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해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수많은 흠집이 가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린 800년 이후 점차 심해졌고, '로마 제국의 정통'을 표방하던 동로마인들로서는 카롤루스 대제 및 그 계승자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는 또 다른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9세기 초 프랑크의 역사가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는 저서 '카를 대제전(Vita Karoli Magni)'은 서유럽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19장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를 '그리스인들의 황제(Grecorum imperatore)'라고 일컬었으나, 반대로 뒤의 제28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로마 황제(Romanis imperatoribus)'라고 일컫는 등 그 호칭 표기와 관련하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로마에 대한 서방인들의 폄하 어린 시선은 노골적으로 변해 갔으며, 871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가 당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이단인데다가 로마 시(市), 로마인, 로마의 언어도 몽땅 버렸으니 당신네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줄 아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40] 물론 바실리오스 1세 역시 지지 않고 루도비코 2세를 '프랑크인들의 황제(Basileus Phrangias)'라고 불렀다.
또한 오토 1세가 로마(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등극(962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968년 오토 1세의 아들(후의 오토 2세)과 전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와의 혼담을 논의하기 위해 서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는데, 그때 겸사겸사 전해준 교황 요한 13세의 편지에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들의 황제(Emperor of the Greeks)'가 언급된 것을 보고 뚜껑 열린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리우트프란드(Liutprand of Cremona)를 수장으로 하는 사신들을 모조리 감방으로 보내버린 뒤 추방시킨 일도 있었다.[41] 또한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을 내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니키포로스 2세는 교황의 편지를 읽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리우트프란드 사절단을 푸대접했고, 당연히 니키포로스 2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었던 리우트프란드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모를 극단적으로 비하하는 인신공격성 기록을 남겼다. 작은 키, 큰 머리, 두더지같이 작은 눈, 혐오스런 턱수염, 체구에 비해 긴 엉덩이, 낡고 악취 나는 옷차림 등... 그리고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에 대해 태클을 거는 니키포로스 2세에게 "우리 오토 1세 님이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정작 이 세상의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거들먹거리는 너님은 뭐했나요?"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니키포로스 2세 역시 지지 않고 "네놈들은 로마인이 아닌 롱고바르드인이잖아!(Vos non Romani, sed Longobardi estis!)"라고 맞받아치고...
거기다가 서방과는 종교적으로도 자주 충돌했다. 이미 중세 초기부터 아카키오스 분열, 포티오스 분열 등의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충돌해 왔다. 초기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세적이었으나, 서기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방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균형을 이루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계속 대립하였는데, 나중에는 필리오쿠에 논쟁 등으로 인해 교리적인 불일치도 커져 갔다. 이 대립은 서기 1054년의 맞파문 사건으로 절정을 찍었다. 교황이 파견한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로마 사절단을 '''맞파문'''하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십자군 전쟁(특히 2차와 4차)을 거치면서 제국과 서유럽인들은 서로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제국인들은 오랜 세월 남부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이 지역을 노렸지만 결국 이곳을 점령할 수 없었다. 후에 노르만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제국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창건했다. 노르만인들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제국의 도시 두라초[42]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르만인들 또한 제국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용병으로 노르만인이 고용되기도 했다.
중세 서유럽인들은 정통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는 단지 '그리스인들의 황제(Imperator Graecorum)'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로 여겨졌다.(한국도 공식 외교석상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나 북한이라 말하지, 북괴라 말하지 않는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봉신국으로 출발했지만,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니,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결정적으로 몰락시켜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 베네치아가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던 4차 십자군이다. 그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때 병사를 보내기는 했고 베네치아인들은 구원을 위해 결사대로 포위를 뚫고 나가기도 했다. 구원병이 없다고 알았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그 도시에서'라고 하면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볼 때 최소한 제국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로서는 제국이 살아남는 게 무역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여러 모로 이득이 컸고, 일부 베네치아인들은 예전부터 조계지에서 정착했던 도시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 등에게 '서둘러 힘을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도 국가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베네치아였고, 동로마의 구원 사절단을 맨 처음 받아 교황과 여타 유럽 강대국들에게 빠르게 전달한 것도 베네치아였다. 물론 그렇게 한 원인 중에는 도시가 함락당하면 베네치아의 상업적인 득 역시 해를 입게 될 것을 걱정한 점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만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이때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지중해 거점들을 상실하여 쇠퇴하고 만다.

9.2. 중동권


그 외에도 제국의 주변에는 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동방의 주적은 사산조 페르시아로, 호스로 2세 때 페르시아에게 밀려서 626년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적에게 포위되는 사태[43]를 맞이하게 되나 결국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역관광을 보내며 크테시폰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린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대한 적들인 아랍무슬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순식간에 피폐해져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시리아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했다. 잠시 숨을 돌린 아랍인들은 곧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격해 왔다. 콘스탄티노스 4세 때에는 그리스의 불로 해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레온 3세 때 다시 한번 아랍인들을 격파했다. 두 차례의 아랍인들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서 동로마인들은 아랍인들을 저지할 수 있었고, 서쪽에서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럽과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라이벌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동방의 적은 유목민이었던 이슬람화된 오우즈 튀르크인이었는데 11세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소아시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아나톨리아에 룸 술탄국이 세워지기에 이른다. 이들을 막기 위해 십자군 기사들을 불러들이기도 했고 마누일 1세 시기 룸 술탄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 내지 영향권 신세였을 정도였다.[44] 마누일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룸 술탄국은 다시 기지개를 폈고 4차 십자군에 의해 본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털린 후에는 예전과 같은 힘을 상실한 제국이 계속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룸 술탄국이 몽골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고 지방 베이들이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독립해서 해체되면서 여러 베이국이 탄생하였는데 이 중 오스만 베이국은 동로마 영토에 제일 가까워서 동로마에 가장 공격적이었는데 동로마 영토를 점령하고는 다른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을 합병하면서 아나톨리아-발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에게 영토를 전부 빼았겨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모레아 반도 밖에 남지 않은 동로마 제국은 결국 오스만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정교회+그리스어)[45] 계승자인 현 그리스와 튀르크의 계승자인 터키의 대립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동로마-아나톨리아 튀르크 관계는 적대적이기도 했지만 서로 영향을 받은 관계이기도 했는데 투르코폴레스로 동로마군에 튀르크인이 복무하기도 했고 튀르크의 영향을 받아 말기로 갈수록 복식이 튀르크와 비슷해 졌다. 튀르크는 룸 술탄국 시절부터 동로마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고 오스만의 개국공신 중에는 동로마 출신도 있었을 정도로 양측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비슷해져 갔다.

9.3. 유목민


오우즈 튀르크 이전에도 동로마 제국은 초원의 유목민과 종종 충돌하였는데 훈족아틸라44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바 있었고 그 이후 아바르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아바르족은 복속된 슬라브 부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으며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불가르족이 비잔티움 제국을 침입했는데 다뉴브 강 유역에 정착한 불가르족은 볼가강에 정착한 불가르와 달리 현지 슬라브족에 동화되어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성립시키고 언어도 튀르크계 언어에서 슬라브계 언어로 바뀌었다. 이들은 8~9세기에 동로마 제국을 크게 압도할 뻔했다가 동로마의 반격으로 멸망한다. 페체네그, 마자르와도 충돌하였는데 페체네그는 약체화된 뒤 레부니온 전투, 베로이아 전투로 소멸하였고 마자르는 페체네그의 침공으로 밀려나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고 헝가리를 세웠는데 이들은 불가리아와 동로마 뿐만이 아니라 서유럽을 약탈하였고 레히펠트 전투로 그 기세가 꺾이자 서방교회에 귀의하였다.[46] 그러나 헝가리가 서방교회에 귀의 했어도 동로마의 영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여서 성 이슈트반의 왕관 중 링 부분은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선물한 것이고 콤니노스 왕조 중흥기에는 하람 전투, 시르미온 전투로 인해 속국신세 였으나 마누일 1세 사후 속국신세에서 벗어났다. 키예프 공국의 원정으로 하자르가 약화되어 세력이 강성해진 쿠만과 가끔 충돌하였으나 쿠만은 키예프 공국과 자주 충돌하여서 인지 동로마 제국과는 많이 싸우지는 않았다. 그 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동로마와 접촉했다. 당시 재건된 동로마는 미하일 8세~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까지 사라센이나 튀르크를 견제하기 위해 몽골(+ 일 칸국)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9.4. 슬라브


제국의 또 다른 적들로는, 발칸 반도 지역에 남하해온 슬라브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인들의 적이었지만,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의 포교와 제국의 압도적인 문화 덕분에 동로마 문명에 동화되었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동화되었지만, 후에 세르비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노리기도 했다. 스스로 '세르비아와 로마니아의 황제' 자리에 올라 로마 황제를 자칭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좋은 예다.[47]
초기에 슬라브족들은 발칸 반도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지만, 얼마 안 가 제국의 영토에 정착했다. 슬라브족들 외에도, 북쪽에서는 계속해서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왔는데, 초기에는 아바르족,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불가르족, 나중에는 페체네그족들이 남하해왔다. 아바르족은 이라클리오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가 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세력은 붕괴되었다. 불가르족은 오랜 기간 제국을 괴롭혔다. 튀르크계 불가르족은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 불가리아 왕국을 세워 제국과 대립했다. 제국은 한 때 불가리아 국왕에게 제위를 선물해서 그들의 비위를 달랜 적도 있었다.(제1차 불가리아 제국) 바실리오스 2세(재위 976년 ~ 1025년) 때는 불가르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기도 했지만(1018년), 이내 제국이 약화되면서 불가리아는 다시 나타난다(제2차 불가리아 제국). 페체네그족은 제국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발칸 반도로 남하해 왔고, 알렉시오스 1세는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쿠만족을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켜 버렸다. 그 후에도 이들은 제국의 병사와 정주민으로서 존속했다. 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을 보호했다.
동슬라브인의 키예프 공국과도 자주 교류와 충돌을 했다. 바이킹 노르드인이 동화된 이들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도 했고 동로마의 사주로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마저 공격하려다 격퇴당했다. 그 이후 키예프 공국이 동로마로부터 기독교, 키릴 문자, 교회법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같은 정교회로서 동질적인 문화권이 되어, 전쟁도 몇 번 있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러시아는 우호관계가 되었다. 이런 사례의 대표격으로 키예프 대공 볼로디미르의 일화가 있다.
  1. 986년, 키예프 대공 볼로디미르는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으로 개혁하고 종교의 권위를 빌려 자신과 후계자들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존의 동슬라브인이 믿고 있던 슬라브 신화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2. 당시 볼로디미르가 도입하고자 한 종교는 볼가 불가르인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교, 하자르인들이 믿고 있던 유대교, 서유럽 게르만인들의 가톨릭, 그리고 흑해 건너 로마인들의 정교회, 이렇게 네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이슬람교 이맘들로부터 이슬람교가 술과 돼지고기를 금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루스인들이 술을 못 마신다는 게 말이 되냐?"[48]는 말과 함께 바로 이슬람교를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하자르에서 온 랍비들에게는 "너희들이 하느님한테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면 왜 너희들 성지인 예루살렘을 잃어버린거냐? 이건 곧 하느님이 너희들을 버렸다는 증거다."라고 반문했고 랍비들이 이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하면서 유대교 역시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3. 이로써 볼로디미르에게는 가톨릭과 정교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는데 둘 중 어느 종교로 개종할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서유럽과 동로마, 두 곳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서유럽으로 간 사절단이 서로마가 멸망한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유럽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실망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반면, 동로마로 간 사절단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고 그곳의 화려함에 반해[49] 당장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조언했다.
  4. 이에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볼로디미르는 이제 어떻게 정교회로 개종할지 간만 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제위를 노리는 군사 귀족들의 반란으로 위기에 몰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지원 요청을 보내자 지원군 6천 명을 보내주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타 안나와의 결혼을 약속받았다.
  5. 볼로디미르 대공의 지원에 힘입어 바실리오스 2세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여동생 안나는 "아무리 그래도 병사가 필요하다고 여동생을 첩을 수백씩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야만족 왕에게 팔아먹냐"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바실리오스 2세 자신도 제국의 적통 황녀를 이교도 야만족에게 시집보내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싶었는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적거리기 시작했다[50].
  6. 물론,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에 격분한 블라디미르 대공은 당시 제국령이던 크림 반도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이 지역에서 제국의 거점이던 도시 헤르소니소스[51]을 점령한 뒤 약속 안지키냐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7. 귀족들의 반란은 진압했으나, 언제나 양면 전선, 심하면 3면 전선에 시달리던[52] 동로마 제국으로써는 신흥 세력인 루스까지 적으로 돌릴 여력이 도저히 없었고, 별 수 없이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써 정교회의 수호자인 입장이기 때문에... 황실의 공주는 죽어도 이교도에게는 시집 못 보낸다!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 정리해라! 그럼 나도 약속 지키겠다!고 응답했다.
  8. 이미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볼로디미르 대공은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대공은 988년 헤르소니소스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안나는 별 수 없이 대공에게 시집갔으며, 이로써 현대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은 동슬라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동시에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공국 양측 모두 향후 수백년간 우려먹고 긁어먹고도 남을 엄청난 이득을 얻은 외교적인 대승리라 할 만한 사건이기도 하다. 일단 볼로디미르 대공은 자신이 정교회로 개종했을 뿐 아니라 가신과 봉신들에게도 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직접 영토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집단 개종과 세례를 독려했다고 하는데...[53] 체계화된 교리를 가진 국가 종교인 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 체계적으로 개선하고 종교의 권위를 빌려 자신과 후계자들의 통치기반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효과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만한 일이었고, 더 나아가 당시까지 문화적, 기술적 수준이 높지 못했던 키예프 공국으로써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발전의 기회를 얻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루스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운명의 캐삭빵을 벌이던 동쪽의 이슬람 세력, 호시탐탐 제국의 영향권을 넘보는 서쪽의 가톨릭 세력,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털고가는 북쪽의 유목민세력에 포위된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 가능한 동맹국을 확보하여 국방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기독교 개종 이후라고 류리크 왕조의 대공국들이 조지아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을 전혀 안 턴 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이교도였던 시절에 툭하면 제국을 대규모로 약탈하러 들어오던 것보다는 훨씬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동로마 제국이 돌이킬 수 없는 쇠망기에 접어든 1300년대 무렵에는 루스가 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열심히 달래고 부탁해도 딱히 시원한 도움을 주지는 않던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에 비해[54]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신들도 몽골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 썩 좋지 못한 형편이었는데도) 거리가 멀어서 지원군은 보내지는 못했지만 정교회의 총본산인 성 소피아 성당의 수리비라는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해 주는 등 그나마 시원시원하게 동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었던 것. 결국 이 수리비는 성당 고치는 데 안 쓰고 용병 고용비로 다 써 버렸지만, 모스크바 측에서는 별 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로마가 멸망한 훗날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 국가이면서도 제3의 로마로 자칭하며 동로마의 후예를 자칭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같은 정교회를 받아들인 것, 동로마와 혈연적으로 이어졌던 것에서 비롯되었다.[55]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기 위해 수없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물론 보스포루스 해협이 지리상의 요충지라서 노린 것도 있지만, 옛 동로마와 정교회의 본산이란 상징성, 오스만 치하에서 동방 정교회를 믿는 동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명분이자 동기 부여였다.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문서 참조.

9.5. 비슬라브 동방 기독교권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기독교→정교회였던 동로마 제국과는 다르게 오리엔트 정교회(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신봉해서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도 많았고 황제도 여럿 배출했다.
같은 정교회권인 조지아와는 바실리오스 2세 때 전쟁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으며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가 잠시 멸망했을때 전성기를 맞이한 조지아 왕국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였던 에티오피아는 동로마 제국의 제안으로 유대교 국가였던 힘야르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교류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발흥으로 동로마가 이집트 및 레반트를 상실하고 에티오피아도 해안가 지역을 상실하면서 서로의 교류가 매우 힘들어졌다.

10. 평가



10.1. 근대의 평가


동로마에 대한 폄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대의 일인데 중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았으니 중세 제국인 동로마 제국 역시 그랬을 것이다. 18세기 영국인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명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제국을 악의적으로 왜곡·곡해하고 매우 평가절하했으며, 이는 작품 내에서도 노골적으로 암시되듯이 반기독교적 성향인 기번에게 있어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는 그저 로마의 이름만 빌린 짝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계몽시대에 전반적인 제국 평가에 영향을 주어 동로마 제국이란 그저 "궁정의 음모와 환관이 판치던 저질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모 근대 저자는 "'''저열 제국'''(The Lower Empire)" 이라고도 서술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기번은 양반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서구 역사학계가 계몽사관 - 근대사관의 그늘을 벗어나, 비서유럽 문명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평가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에는 고유의 하자가 있었으며, 그들의 승리는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군사적 역량 자체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어서 가끔 운 좋게 이겼을 뿐 대부분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평가했지만 20세기 초에 활동한 역사학자 찰스 오만은 기번의 이런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패배가 우연의 결과이고 승리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특별히 불리한 조건이나 상황, 불운 등이 겹쳤을 때 가끔 패배했을 뿐, 대부분의 싸움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분석한 바 있다. 즉 당대까지(근세~근대)의 역사가들이 동로마 군대가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력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불공정하고 잘못된 평가인데, 이에 반론하기 위한 글이 많이 쓰여지고 있지만 만연한 편견을 반론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개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일단 기번 본인의 신념과 사조(계몽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기독교 -특히 구교-에 대한 반감과 고대 로마에 대한 흠모)에 의한 폄하의 영향도 상당하다. 동로마 제국의 군사 제도를 예로 들어보자면, 동로마 제국은 단위부대당 최강의 파괴력으로 전략적 타개책이 될 수 있는 중기병이나 전문 기술이 필요한 공성전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군(타그마병)와 무장 수준과 정예도는 낮지만 수가 많고 주둔 지역에 익숙한 지방군(테마병)을 동시에 운용하여 테마병을 일차적 거점 방위의 핵심으로 삼고 타그마병을 활용하여 역습-분쇄하며 대규모 전력 동원 시에는 타그마병을 핵심전력, 테마병을 보조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군사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궁기병 등 자국 내에서 수급하기 어려운 특수한 병종을 확보하면서 병력 유지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규모의 용병을 고용하고, 건설 및 유지비용이 막대한 해군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동로마의 적이었던 다른 세력들의 군사제도, 즉 '중장기병 확보에는 유리하지만 총 병력 동원수에 한계가 있고 해군이나 특수한 병종의 확보에는 크게 불리한' 봉건제나(사회생산력을 소수 기병에게 쫙 몰아준다) '대부분의 성인 남성을 전력으로 확보 가능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심각한 사회적 제약이 따르는' 유목정, '용병을 활용하여 군사력의 주축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용병들이 정치의 주축까지 장악하고 나라를 차지해버린' 이슬람 제국의 맘루크등과 비교해 보면 군사력 확충과 정국 안정을 상당수준까지 동시에 확보한 고도화되고 효율적인 군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하지만 '역사를 통해 현대 사회에 교훈을 주고자 하는' 역사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실증적인 차원보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적당히 재해석된 이야기가 훨신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은 대체로 용병을 상당히 잘 활용하여 군사적 위기를 여러 번 극복하면서도 용병에 대한 통제력은 비교적 잘 유지할 수 있었던 편이었지만... 국민개병제가 대세가 되기 시작한 시기를 살았던 기번이나 대세가 된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지, 저 로마를 봐라. 용병에 군사력을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알기 쉽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번 당대의 학술적, 기술적 한계로 인해 발생한 오해의 영향 역시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예로 들어 보자면, 중세 중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가톨릭 세력, 북방의 유목민 세력,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3면에서 가해오는 공세를 버텨내면서도 수백년 이상 번영했고, 상식적으로 상당한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면 이러한 3면 전쟁에서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경이 전선인 상황에 처해있던 동로마 제국으로써는 자국의 모든 군사적 역량을 방어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정복을 통해 영토를 다시 확장할 여력까지는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동로마 군대는 100번 싸워 99번 이길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승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제국의 유지일 뿐이니 역사에 그리 크게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100번에 한 번 지휘관의 무능이나 극히 불리한 상황, 불운 등이 겹쳐 패배하게 되면? 방어전의 패배는 곧 영토의 상실과 국가의 위기로 돌아오니 역사에 중요하게 기록된다. 결국 동로마의 역사를 읽다 보면 비잔티움 군대가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동로마가 승리하면 제국은 별 일 없이 유지되니 중요한 전투가 아닌 것이 되고, 패배해야 중요한 전투(제국을 위기에 몰아넣은 패배)가 되니까.(...)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실증적인 관점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기번은 이런 과학적 역사관이 형성되기 이전, 사료의 수집과 해석 역시 현대보다 극히 부족하던 시대 인물이라는 점은 참작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56]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로 본 것이다. 아무튼 오랫동안 가해진 동로마 폄훼로 인해 서유럽인들은 물론이고 비유럽 세계 주민들조차 1123년이나 유지된 동로마 제국을 부정적으로 취급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10.2. 현대의 평가


현재 역사학계 주류는 동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전통과 새로 도입한 기독교를 잘 조화했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세에 가장 선진적으로 발달한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의 강고한 방파제 노릇을 수행한 것'''은 동로마 제국이 역사에 남긴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중동의 여러 지역들[57]에서 기독교가 모조리 사그라들고 대부분 이슬람화된 것을 볼 때, 동로마 제국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수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또한 문화적 수준도 당시 유럽의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월등히 높아서,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이탈리아로 망명한 고전 학자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동로마가 서유럽에 전달해준 것은 많다. 대표적으로 수도원[58], 미술 양식 등이 있다. 서유럽 역시 각 지역의 수도원과 교회가 문명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고전 문화 보전에 힘썼다. 물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로는 피해가 커서 동로마 제국만큼의 보존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거쳐서, 12세기에 이르면 서유럽도 상당히 찬란한 중세 전성기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그러나 동로마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성주의적인 철학과 과학은 동로마의 종교적 과열, 다시 말해서 황제수장주의와 어긋나는 것이기에 이 둘은 철저히 탄압받았다.[59] 오히려 페르시아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성주의적 철학과 과학을 환영하였다.
또한 중세 이슬람 역시 동로마 문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아랍인들은 원래는 동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야만인, 즉 오랑캐라 멸시당하던 유목민들 이었으나 6~7세기의 폭발적인 확장 이후 적극적으로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해 찬란한 중세 이슬람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베네치아부터가 동로마 제국의 중소도시에서 시작하여 독립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베네치아의 초기 건축물은 동로마 양식에서 가져온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다. 대표적인 건물이 산 마르코 대성당인데, 이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가는 교회인 성 사도 성당을 모방해서 건축하고 동로마 양식의 황금빛 모자이크로 도배했으며 몇몇 유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해와 장식하기까지 했다.

11. 역사적 의의


동로마 제국은 천년에 가까운 존속 기간 동안 동방에서는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스와 항시 대치하는 도중 때때로 동맹 아닌 동맹의 얼굴로 옆구리를 찔러 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십자군 같은 프랑크-라틴계 세력 같은 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대한 모든 세력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력과 유산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을 수백 년에 걸쳐 유린하고 간혹 콘스탄티노폴리스 대문을 두들기기도 했던 루스족과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같은 슬라브계 공국들과 현대 루마니아의 중세적 모태인 블라흐족, 캅카스 산맥 오지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조지아는 동로마를 괴롭히면서도 그 문화력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뿌리까지 깊게 감화되어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차츰 교회 자치권을 인정받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의 정교회들은 그 민족들이 400년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 원동력이자 민족적 자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나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성인들이 고안한 키릴 문자를 문자로 삼았으며, 동로마 제국이 쇠락해 가고 결국 멸망하자 그 직접적인 후계자를 자처하며 끝끝내 제정 러시아 시절까지 가서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정교회의 세속적 수호자라는 동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망하는 날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을 국가적 사명으로 천명했다.[60]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도 제국을 공격할 때는 공격하더라도 이들의 문화적 광휘, 황제적 권위, 제도의 세련됨에 깊게 감화받아 로마 황제의 계승을 천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와 아토스 산의 수도회 조직 또한 유지하며 건축, 통치 기관, 국가적 이데올로기 등 많은 면에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고, 셀리미예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등이 상징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건축 양식을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쇠망에 치명적인 기여를 한 베네치아 공화국도 그 기원은 상술했다시피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고, 통수를 칠 때는 치더라도 공화국 내부적으로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습이 보여주듯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예술적 찬란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동유럽, 이슬람 세계의 관점에서 이들이 더 오래 보았고,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문명사적 관점에서 받아먹은 빚이 많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서로마보다 천 년을 더 오래 간 이 동로마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정교회에 있어서 동로마의 유산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구심점이자 '''문명과 종교의 어머니'''였고, 이후로도 수백 년에 걸쳐 정교회권 지도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천명하게 만든 거대한 역사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12. 국호 표기법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로마 제국)이라는 호칭을 고전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바실레이아 톤 로마이온' 정도 되지만, 중세 시절의 그리스어는 이미 상당한 복모음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어와 거의 같게 발음된다. 사실 고전 그리스어가 쓰이던 시절과 동로마 제국은 이미 1000년 가까이 갭이 난다. 라틴어만 해도 원수정 당시 라틴어와 동서로마 분열기의 라틴어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Β' 가 'v' 자음으로 바뀌게 된 것도 기원 후의 일이다. 중세 그리스어식 발음은 '''바실리아 톤 로메온'''.[61]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동로마 시대 인물들의 호칭에는 이와 같은 그리스어의 변화 양상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고, 라틴어식 표기와 혼재되기 때문에 (특히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62] 당시의 발음을 살리려면 코이네 그리스어 '헤라클리우스' 는 중세 그리스어 '이라클리오스' 가 된다. 그리고 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라틴어식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보다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가 될 것이다. 물론 당시 동로마 제국인들 역시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에도)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는 황제의 명칭을 여전히 라틴어로 기록했으니 어느 쪽 독법을 따르는지는 상관이 없다. '''다만 코이네만 괴이하게 고집했던 한때의 풍토는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서구에도 이런 풍조가 있어서 워랜 트레드골드 교수가 일부러 한 단원을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까댔을 정도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꼽자면, 아무래도 서구인이 그리스어 문헌을 접하는 주된 수단이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학자들의 작품과 성경이고, 따라서 그리스어에 대한 흥미 역시도 압도적으로 고전어와[63] 코이네에[64] 몰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익숙하고 편한 표기와 발음으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 역시도 그리스어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읽을 줄은 안다' 는 선에서만 학습할 경우, 고전어 혹은 코이네부터 배울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13.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13.1. 학계에서의 논의


"비잔티움 제국" 이라는 용어는 마치 한국사에서 신라통일신라를 676년 기준으로 구분하듯이, 연속성 있는 한 나라를 후대 역사가들이 편하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당대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이 제국의 공식 명칭은 언제나 '''로마 제국'''이었다.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도 더 지난 155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 이름에 착안한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AE BYZANTINAE)" 이라는 사료 모음집을 출판한 것이 최초의 용례이다. 그 뒤 몽테스키외를 위시한 서구 계몽사상가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중세의 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풍조가 정착되었다. 제국이 멀쩡히 살아 있던 당시에는 정통 로마에 도전하려는 서구권을 중심으로 '그리스인들의 제국'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이라는 단어가 운운되곤 했어도, 최소한 '비잔티움 제국' 이란 말 자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인식대로 4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그럼 '고대 로마 제국'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남긴다. 330년 동로마 제국이 시작됨에 따라 고대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고 보면 서로마 제국의 설명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고, 그렇다고 330년을 기점으로 동로마 제국과 고대 로마 제국이 한동안 공존했다고 하기에는 당시 제국은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며 통치자 역시 콘스탄티누스 한 명뿐이었던 사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마 동서 분열'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해인 395년은? 그러나 실제로 이 해에도 로마가 별개의 두 나라로 공식적으로 쪼개진 것은 아니었으며, 동로마와 서로마는 서로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고, 이민족들의 침입에 상호 협력해 가며 열심히 대항했다. 게다가 소위 그 '분열'마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제위를 동로마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형식적으로 다시 합쳐진다. 그렇다면 이라클리오스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당시 제국을 줄기차게 공격하던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기네들의 상대는 이라클리오스 이전이나 이후나 로마였을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로마가 사라지고 비잔티움이 새로 들어섰다는 인식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분열'이라는 말은 올바르지 않는다. 분열은 시초가 다른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인데, 동서로마는 시초가 같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으로 만들어진 통치 방법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로마 동서분열'이라는 말은 올바르지 않고 '분할통치'가 올바르다. 또한 제국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국가가 나뉘지 않았고 단순히 로마 제국 내에 통치하는 지역의 황제가 구분되어 있을 뿐이지, 한 나라이다. 지역을 다스리는 각각의 정부가 있을 뿐이지, 두 지역 사이의 국방 경계도 없고 그냥 하나의 나라이다[65].
옥스퍼드 대학의 동로마 연구자 에이브릴 캐머런(Averil Cameron)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동로마 제국은 결코 중세 시대에 새로이 형성된 나라가 아니었다.(It was not a new state formed only in the medieval period.)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분할된 동쪽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라고는 불리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비잔티움을 세웠다고 여겨지는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왕인 비자스(Byzas)의 이름이 라틴어화하여 비잔티움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Byzas라는 이름은 트라키아일리리아 지방에서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이 제국이 고대 로마로부터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착된 용어라는 점도 있고, 2200여년의 길디 긴 로마사를 지칭할 때 편리한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점도 있다. 물론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를 '고대 로마 제국과는 단절된 별개의 나라'임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쓰기도 한다. 일례로 역사 마니아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는 어느 외국 사이트에서 '동로마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를 써야 하는지를 가지고 투표를 벌인 적이 있는데, '비잔티움 제국' 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 중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라클리오스와 같은 특정 황제의 통치기 또는 이슬람 세력의 카르타고 함락과 같은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그전은 '동로마', 그 후는 '비잔티움' 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단지 구분상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면 그냥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쭉 '동로마'라고 써도 될 것을 굳이 특정 기준을 전후하여 '동로마'와 '비잔티움'의 사용을 가른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비잔티움 제국' 안에는 로마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은 별개라는 인식하에 저술된 서적들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 사업만큼은 일반적인 영토 확장·침공(conquest·invasion·expansion)이 아닌 수복·고토 회복·재편입('''re'''conquest·'''re'''incorporation·recovery·restoration)이라고 설명해놓은 경우가 대다수다.
그 밖에 연속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로마 제국이면서 로마가 왜 영토에 없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작위로서의 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인 로마 시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로마가 영토에 없다는 것부터가 오류인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래 이름은 노바 로마, 즉 새 로마였다.[66][67]
일본의 서양사학자들 중에는 이 나라를 '''중세 로마 제국(中世ローマ帝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용어는 일본에서만 쓰이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긴이치(渡辺金一)가 1980년에 쓴 《중세 로마 제국: 세계사를 다시 본다(中世ローマ帝国―世界史を見直す—)》는 책이 일본 내 보급력이 좋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이 일반인들에게 꽤 읽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와타나베가 '중세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東ローマ帝国)이나 비잔츠(비잔틴의 독일어명에서 유래) 제국(ビザンツ帝国)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참고로 영어로 'Medieval Roman Empire'라고 하면 신성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영어로는 'Byzantine Empire'라고 쓰며 발음은 /baɪˈzæntaɪn/, /bɪˈzæntaɪn/, /baɪˈzæntiːn/, /bɪˈzæntiːn/, /ˈbɪzəntiːn/ (출처: 옥스퍼드 영어 사전)으로, 영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는 순서대로 바이잰타인, 비잰타인, 바이잰틴, 비잰틴, 비전틴으로 한다. 이 영어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에서는 보통 '비잔틴 제국' 이라고 표기하나 엄밀히 말하면 'Byzantine' 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므로 잘못된 표기이다. 'Roman Empire' 를 '로마 제국'이라고 하지, '로만 제국'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학계에서는 '비잔틴 문명', '비잔틴 미술' 등의 표현도 여전히 사용된다. 이는 고딕(고트의 형용사)처럼 관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13.2. 고대 로마와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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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확장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의 시민 즉 '로마인'이 되고, 이로 인해 문화와 제도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고대 로마 시절 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기술을 성장시켜 로마네스크, 로마법 대전 등으로 중세 유럽시대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15세기에 제국이 오스만국에게 멸망하자 제국의 인력이 이탈리아 등으로 건너가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문물은 도리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녹색당과 청색당과 같은 시민 조직들이 황제의 폐위와 즉위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은 로마가 공화정적인 전통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른 전제국들과 로마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기도 한 것이 이것이다. 둘 다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쉽게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와 달리 로마는 '''시민들의 지지가 곧 황제의 정통성이었다.''' 이것이 로마에 남은 마지막 공화정적 전통이자 로마의 후계구도가 마지막까지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신격화나 신의 대리자로 권위를 다지려 시도는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수많은 황제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시작해 수세기 동안 황제 권위의 신격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끝끝내 정교분리 원칙이 성립되고 말았다. 동로마 시기에도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교회와 황제는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왕조는 몰락해도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국가는 지속시킬 수 있었음으로 동로마 제국 독자적으로도 천년넘는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일장일단이 있었던 것이다.
동방을 벤치마킹하고 본격적으로 전제군주화됐다고 하는 동로마 제국도 황제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행정, 예산, 법률의 삼권분립을 진행하는 등 생각보다 훨씬 공화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여준다. 또한 당대 역사가들도 혈통으로 제위를 계승받은 황제보다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한 황제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등 여러모로 전제군주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했으면 동로마의 군주정이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평가하는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동로마 황제의 제위는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직으로 여겨질 정도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마저 온갖 편법을 활용해 황제라는 직위를 만들어야 했을 만큼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렇다보니 계승 원칙조차 두루뭉실했던 것이 수천 년 역사 동안 그 수많은 내란의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있던 시기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공화정 유지가 불가능해진 과도기였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정의 설립이 필요했기에 시민들이 용납했다고 보는 게 로마제국의 역사 동안 이어진 생각이다. 10세기 증흥기 이후 들어 로마의 고대 공화정에 대한 고찰이 로마 제국 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것도 이런 연유로 볼 수 있다.
제정 말기 게르만족을 필두로 마자르 · 바이킹 · 무어인들의 집중적인 침략으로 인해 점차적이기는 하나 확실하게 고전 문명의 방대한 이데올로기적 일치감과 이를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뒷받침할 관료제 · 상수도와 도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체계가 재건 불가능하게 파괴당한 도나우 강 서쪽(서유럽/남유럽)과 달리, 발칸 반도그리스 · 아나톨리아 · 레반트 지역의 로마 세력은 훈족의 침략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을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하여 고전 문명의 찬란함을 서방만큼의 단절성 없이 유지해왔다.
일례로 수도(水道)와 관련해서 서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는 '먼 곳으로부터 물을 대량으로 끌어와서 도시에 공급한다'라는 발상 자체가 사라져버려,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수도교를 보고는 "다리 폭이 뭐 이리 좁다냐? 이건 필히 악마가 만든 것이다" 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물론 동로마는 그런 것 없이 수도교의 개념과 용도를 확실히 이해한 채 이를 꾸준히 활용하고(콘스탄티노폴리스발렌스 수도교) 소규모로 신축하기도 했고,(에페소스의 수도교) 훗날 이 땅을 접수한 이슬람 세력도 과거 동로마의 수도교 운용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를 오랫동안 잘 써먹었다. 368년에 건설된 발렌스 수도교의 경우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 기능을 유지했으며, 오스만은 지진 등으로 수도교 일부가 손상될 때마다 즉시 이를 보수하며 애지중지하게 관리한 것을 넘어 아예 여기에다가 새 라인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 등 몇몇 일본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화된 그리스인의 로마 제국(キリスト教化されたギリシア人のローマ帝国)' 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것도 앞서 각주와 마찬가지로 연구와 편의를 위한 것이다. 기독교화는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되던 변화고,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도 무려 12세기 중후반부터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 그전에는 그런 관념 자체가 보편제국 속에 용해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 국가를 이의없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7세기 이후의 모습이다. 물론 이슬람의 침입과 성상파괴론의 등장 등으로 제국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든 소위 "7세기의 위기"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겪은 변화가 크긴 하였으나, 다른 시기보다 그렇게 큰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로마 제국과 7세기 말~8세기 초의 로마 제국은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지만, 도시 국가 로마 시기와 이탈리아의 맹주이던 라틴 연합 시기,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시기, 2세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와 3~4세기 점차 외부의 위협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든 시기의 로마'''들'''이 겪은 그 모든 변화보다 그렇게 낙차가 크진 않았다. 4세기, 6세기, 8세기의 로마를 비교해 보면 8세기의 로마는 6세기의 로마와 공통점이 더 많다. 한편으로는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왔던 제국은 굳이 로마/비잔티움으로 나누어 보면서, 정작 진짜 한 번 망하고 재건되었던 1204년 이후의 제국은 같은 국가로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3.3. 당대인들의 인식


동로마 제국 사람들 자신들이나 당시 유럽인들은 물론, 아랍페르시아도 모두 동로마 제국을 로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튀르크까지도 이 제국을 룸(로마)이라고 부르는 등 주변국가 모두 동로마 제국이 곧 기원전 753년부터 시작된 그 로마라고 생각했다.

13.3.1. 동로마인들의 인식


동로마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Ρομαίοι, 로메이)[68]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들이 쓰던 중세 그리스어도 '''로마어'''(Romaic)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부와 국가 체제가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당대 동로마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재편"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비잔티움은 그리스 속주[69]가 아니라 트라키아 속주에 속하는 소도시였고, 의도적으로 재편된 바 없으며, 그리스 문화나 그리스인이 어느 날 갑자기 제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 이미 공화정 말기 때 군사적으로 정복당해 편입되면서 로마 제국에 하나로 융해된 것이다. 대중적 인식과는 달리 로마 제국은 라틴어만을 쓰는 라틴 민족들만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그리스어는 이미 그리스가 제국에 편입된 시절부터 제국 동방의 공용어로 널리 쓰여 왔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저술되었다는 점, 그리스어로 '물고기' 를 뜻하는 단어인 '이크티스(ἰχθύς)' 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암호로 사용했다는 점,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를 가리키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 의 첫 번째 글자 Χ와 두 번째 글자 ρ를 조합한 '카이-로(Chi-Rho)' 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모노그램으로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 시대의 초기 기독교를 구성하던 중심 언어 역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였다. 밀라노 칙령 역시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대한 적용의 일환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두 언어로 공포되었다.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하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의 각 단어의 첫 번째 알파벳을 조합하면 'ΙΧΘΥΣ'가 되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이크티스(ἰχθύς)' 를 중세~현대 발음으로 읽으면, x 즉 로마자로 옮긴 ch는 ㅋ과 ㅎ가 섞인 음가에서 ㅎ이 강해서 ㅎ로 표기하고 θ는 ㅅ가 되어 '이흐시스' 지만, 기독교 관련 용어는 기독교 형성기에 용어들이 정립될 때 쓰인 코이네 발음으로 읽는다. 코이네 발음으로 읽을 때의 x(ch)는 ㅋ과 ㅎ중 ㅋ 음가가 더 강하다. 크리스마스를 X-mas로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3.2. 외국인들의 인식


물론 '동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로마 제국으로 일컬었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을 같은 국가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데 비잔티움 혼자서만 "우리가 로마다" 라고 주장했다면 '비잔티움 = 로마' 라는 역사관은 주변 국가들의 공인 없이 국내에서만 통용된 설정 놀음에 불과했을 것이며, 그만큼 '비잔티움은 로마와는 별개의 국가'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바라봤는지를 토대로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하여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여타 세력들은 모두 동로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13.3.2.1. 서유럽인들의 인식

앞서 언급했듯 서유럽인들은 스스로의 로마 제국을 세우고 나서 동쪽의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열심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 중서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제국'''(Imperium Graecorum), '''그리스 황제'''(Imperator Graecorum) 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용어들은 동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동로마는 충분히 로마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장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뭐였는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칭한 칭호[70]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오늘날 이탈리아로마냐(Romagna) 지역도 그 명칭이 이 일대의 도시들 중 하나인 라벤나에 동로마의 총독부가 소재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서 '로마인들의 땅(로마니아(Romania))' 을 뜻한다. 서로마의 실질적인 마지막 수도이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한 도시인 라벤나는,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벨리사리우스의 군대에게 점령당한 이래 200년간 동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의 고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라벤나 일대만 '로마냐' 로 불린 건, 서로마 멸망 이후 이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곳만큼은 여전히 (동)로마인이 강한 지배력을 유지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지역이 과거 랑고바르드족의 왕국이 자리해 있었던 롬바르디아인데, 명칭의 극명한 대비를 반영하듯 실제로도 롬바르디아 지역의 랑고바르드 왕국과 로마냐 지역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 유지 · 확장을 위해 서로 오랫동안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함락시키면서 동로마는 로마냐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으나, 이후에도 남이탈리아에 장기간 발을 걸쳐 놓음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라벤나 총독부의 몰락을 계기로 상당히 약해졌을지언정 제법 오래 유지하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세운 라틴 제국의 경우 그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으며, 서유럽 출신인 라틴 황제들은 스스로를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라는 칭호는 이미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 제국의 황제가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신성로마제국 및 이에 정통성을 부여한 교황과의 정치적인 분쟁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아무런 칭호도 안 붙이기에는 '로마 제국 수도의 새 주인' 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자기네들의 권위도 살리고 교황과의 충돌도 최대한 피하는 심산으로 택한 것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로마 땅의 황제)'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 제국 황제의 타이틀이 적힌 각종 문서나 인장을 보면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아닌 '로마인들의 황제' 라는 칭호를 대놓고 쓴 사례도 적잖이 발견된다. 'Balduinus Dei gratia fidelissimu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 라든지... 'Henricus Dei gratia imperator et moderator '''Romanorum'''' 이라든지... 그리고 '로마인들의 땅의 황제' 도 어쨌든 '로마' 라는 단어가 들어간 칭호이다 보니 분쟁의 소지가 아예 없었던 게 아닌지라, 대용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e Constantinopolitane, 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라는 칭호도 사용되곤 했다. 결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서방 제국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마' 라는 단어에 끈질기게 집착한 라틴 제국 황제들의 이러한 행위는, 당대의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어떤 때는 그리스로 봤다가, 또 어떤 때는 로마로 봤다가) 가졌음을 보여 준다.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69.] 그리고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진두지휘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도제들에게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DOMINUS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Signor della quarta parte e mezza di tutto l’Imperio di Romània)'[71]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여기서 '로마니아' 는 '''로마인들의 땅(Land of the Romans, 로마 땅)'''이라는 뜻으로, '로마니아'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동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부르던 속칭으로 널리 사용해온 국명이었다.[72]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인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에서의 '로마인' 이 '비잔티움인' 이 아닌 당시 십자군을 주도했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방인' 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 모두 자신들을 각각 '베네치아인(라틴어: Veneticis)' 과 '프랑스인(라틴어: Francorum)' 이라고 칭했지 '로마인' 이라고는 안 불렀기에 여기서의 '로마인' 은 명백히 '비잔티움인' 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마니아 제국' 이라는 국명은 라틴 제국이 아주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과거 동로마인들이 스스로를 즐겨 일컬었던 국명을 서방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라틴 제국이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나라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짙었다. 마치 '라틴 제국' 이라는 아주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게 아닌 단지 '동로마 제국의 라틴 왕조' 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도 가능할 정도로, 최소한 '국명' 만 놓고 봤을 때에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기존에 견지하고 있던 '비잔티움은 그리스일 뿐' 이라는 멸시적인 태도를 강하게 관철시켰으면 이곳의 이름을 아예 '그라이키아(Graecia, Land of the Greeks, 그리스인들의 땅)' 로 충분히 뒤집어 엎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73] 당대의 서방인들 사이에도 '비잔티움은 로마' 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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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국의 영토가 크게 쪼그라든 시기에도 동로마의 황제는 '''로마 황제'''로서 서유럽인들에 의해 경외되었다. 갈수록 커져가는 오스만의 위협에 대응하는 원조를 얻고자 서유럽을 돌아다닌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례가 좋은 예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이기도 한 요안니스 8세의 1438년 이탈리아 방문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어 그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74]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 사진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메달(Medal of John Ⅷ Palaeologus)' 이다. 1438년 요안니스 8세의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참석을 기념하고자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가 현지 예술가 피사넬로(Pisanello, 피사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이 메달의[75] 표면에는 그리스어로 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Ἰωάννης '''Βασιλεύς καί Αὑτοκρἀτωρ Ῥωμαἰων''' ό Παλαιολόγός', 즉 '요안니스, '''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 팔레올로고스(John, '''King and Emperor of the Romans''', the Palaeologus)' 이다.[76] 이것은 동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 만들어서 유럽 대륙 곳곳에 뿌린 것이다.[77] 자기네들 나름의 로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떡 하니 옹립해 두고 있었던 서유럽조차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 라고 지칭했다. 국력이 사실상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시기에도 로마 황제의 권위만큼은 서방과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를 막론하고 여전히 높았던 셈이다.
그 서유럽 사람들조차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일례로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는 헤라클리우스 통치기에 발칸 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슬라브인들의 침공을 'Sclavi Graeciam Romanis tulerunt', 즉 '슬라브인들이 로마에게서 그리스를 빼앗았다' 고 기록했다. 당연히 800년 이전, 즉 교황이 동로마 황제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시기에는 서방인들 사이에도 '동로마 = 로마' 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800년 교황의 서로마 황제 옹립 이후 변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십자군 원정 초기의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로마인(al-Rum)' 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동로마와 십자군 모두 기독교 세력인 데서 비롯된 혼동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대차게 맞붙긴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 온 주요 기독교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가슴팍에 십자가가 그려진 옷 입고 갑툭튀한 서유럽인들을 보고는 '저 놈들도 기독교도인 걸 보면 로마인이군' 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와 십자군은 서로 별개의 세력임을 알아차린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을 일컫는 별도의 명칭으로서 '프랑크인(al-Ifranj)' 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Angeliki E. Laiou, 『The Crusades from the Perspective of Byzantium and the Muslim World』p.56. #

13.3.2.2. 이슬람권의 인식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의 강역을 '빌라드 알 룸(Bilād al-Rūm, بلاد الروم)' 즉 '로마인들의 땅' 으로, 지중해(특히 동지중해)를 '바흐르 알 룸(Baḥr al-Rūm)' 즉 '로마의 바다' 로 불렀다. '비잔티움 = 로마' 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1077년 아나톨리아에 새 나라를 세운 셀주크 일족은 과거 이곳이 룸(Rum, 로마)의 땅이었음을 이유로 자신들의 나라를 룸 술탄국으로 명명했다.[78]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의 메흐메드 2세는 자신이 Kaysar-i Rum, 즉 '''로마의 황제'''[79]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이후의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 을 자신의 타이틀에 포함시켰다. 이븐 바투타도 자신이 방문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룸' 의 수도라고 했고 그곳 사람들을 '로마인' 이라고 기록했다. 발칸 반도 지역은 로마인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 라고 불렀다. 오스만 제국 말기 그리스가 독립해 나간 뒤에는 독립국가의 그리스인들은 '유난(Yunan)', 제국 치하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룸(Rum)' 이라고 불러 구분하기도 했다. 이런 용법은 현재의 터키 공화국에서도 통용된다. 1923년 인구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과 인근 섬에 잔류한 그리스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하여 튀르크 세력은 비당사자의 위치에 있다. '스스로를 로마라고 주장한 동로마' 나 '그리스 운운하며 동로마의 정통성 흠집 내기에 바빴던 서유럽' 모두 로마의 정통성 논쟁과 관련한 직접 당사자였기에 저마다의 주장에 객관성이 흠결될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비당사자였던 튀르크 세력의 판단은 이러한 논쟁에 . 만약 이슬람 세력마저 동로마를 '고대 로마 멸망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 들어선 별개의 국가' 라고 인식해 버렸다면, 동로마의 로마 정통성 주장은 누구 하나 인정하는 이 없이 자기 혼자서만 그리 우기는 '자뻑' 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대제는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다는 것을 정통성으로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청했다. 정치적, 영토상으로는 시작부터 1453년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식하며 적대, 경쟁한 무슬림 튀르크계 지배자들 입장에서도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당시 이슬람, 기독교권을 초월한 보편적인 지중해권의 정치 사상사적 관점에서 '''동로마의 로마성'''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무슬림 정복제국, 특히 오스만국 입장에서도 본인들은 '''로마의 정복자'''라는 타이틀이 훨씬 더 위엄쩔지 당대에는 지리적, 문화언어학적 명칭에 불과했던 '''그리스'''의 정복자 따윈 영 폼이 안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로마의 로마성을 계승하는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까지도 각종 외교 문서에서 서방,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들을 '''빈에 위치한 독일의 왕''' 따위로 부르며 절대 황제위를 인정하지 않다가 국력 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더이상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에 있지 않다는게 확인 된 1606년, 15년간의 대오스트리아 장기 전쟁을 끝낸 쥐트바토록 조약에서야 '''독일의 황제''' (Padishah)라 부르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로마에 대한 관점은 아예 이슬람 경전 꾸란의 30번째 수라, "수라 알 룸", 즉 '로마장'[80] 2~4절에서 613년 안티오케이아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동로마가 크게 패배한 것을 두고 '로마는 가까운 곳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10년 이내에 다시 승리할 것이다. 하느님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통치하시는 바, 신자들은 이날 크게 기뻐하리라(The Romans are vanquished, In a nearby land, and they, after being vanquished, shall overcome, Within a few years. Allah's is the command before and after; and on that day the believers shall rejoice)' 라고 자신들의 성서에 '(서방에서 소위 말하는 고전 시대의)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이란 역사관을 명시해 놓았다.[81]
이와 같은 사례는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및 이를 기록한 하디스에서도 발견된다. 628년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휴전조약(후다이비야(Hudaybiyyah) 조약)을 체결한 무함마드는 곧이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주변의 통치자들에게 보냈는데, 물론 여기에는 헤라클리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에서 무함마드는 당대의 상식대로 헤라클리우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했다.[82] 하디스에서는 당시 아랍인들이 동로마 사람들을 로마인, 혹은 “바니 알 아스파르”[83]라고 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에 활동한 이슬람 역사 학자 이븐 카시르(Ibn Kathir)가 쓴 쿠란의 주석본(타프시르) 및 역사서에도 동로마를 '로마' 로, 동로마인들을 '로마인' 으로 지칭했다. 여러 타프시르들 중 이슬람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이븐 카시르의 타프시르는 로마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메시아(예수)의 출현 이후 300년간 로마인들은 그리스 지역의 종교를 믿었다는 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점[84],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움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 성당들을 건립했다는 점 등. 뒤이어서는 로마의 '카이사르' 인 헤라클리우스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를 물리치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서술해 놓았는데, 여기서 이븐 카시르는 헤라클리우스를 '가장 지혜롭고 단호하고 기민한 인물' 이라며 훌륭한 리더십으로 로마인들을 다스렸다고 크게 호평하였다.

13.3.2.3. 슬라브권의 인식

한편 정교회 신앙과 키릴 문자 등 동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슬라브족과 동슬라브족 역시 동로마를 로마라고 불렀다.
우선 불가리아의 경우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전성기를 연 시메온 대제가 9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섭정단 대표를 맡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 1세로부터 모든 불가르인과 로마인의 황제이자 군주(Car i samodǎržec na vsički bǎlgari i gǎrci) 칭호를 받았다. 비록 로마 당국은 총대주교의 독단이었음을 주장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메온은 로마와의 전쟁 기간 내내 로마 황제 칭호를 사용하면서 동로마의 신경을 거슬렀으며 결국 924년 공동황제였던 로마노스 1세와 화평을 맺으면서 '불가르인의 황제'라는 칭호로 합의를 보았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에서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세워진 라틴 제국을 격파하고 라틴 황제 보두앵 1세를 잡아죽인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의 경우 이후 마케도니아트라키아 일대에서 동로마인들을 학살하고 다니며 과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은 데 따른 보복으로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1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쇠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이 강성해지자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불가리아어 명칭인 '차리그라트(Цариград)'에서 따온 '황성 터르노보(Tsarevgrad Tarnov)'라고 부르며 제3의 로마를 자칭하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경우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 제국 내에서 잇달아 내전이 터지자 기회를 틈타 발칸 반도에서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동로마의 서부 영토 일부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1346년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85] 자리에 등극해 로마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세르비아 제국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같은 정교회 신앙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7개의 언덕으로 둘러쌓였다는 점을 근거로 자신들의 수도 모스크바를 본격적으로 제3의 로마로 자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모스크바 총대주교 조시무스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인 모스크바의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칭호를 바쳤으며 이반 3세 역시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조이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한 후 로마 황제와의 혈연관계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차르로 칭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제3의 로마 주장은 1510년 프스코프의 수도원장 필로페이가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두 로마는 무너졌지만 세번째 로마는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네번째 로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14. 관련


유럽에서도 역사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재평가하고 있는 분위기이며 관련 교양 입문서들도 많이 발간되었다. 《비잔티움 연대기》 이전에 이미 문고판으로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86]이 시공디스커버리에서 발간되었고, 진원숙의 《비잔틴 제국 - 천년의 명암》(살림지식총서285)이 있는데, 이 책은 알려진 동로마 제국 관련 저작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인이 지은 것이다. 게오르크 오스토르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뿐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책도 인용하고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국내에 출판된 동로마사 관련 저작으로는 먼저 입문용인 《타임라이프 세계사 시리즈 10번째 음모와 반역의 천년제국 - 비잔티움 제국편》을 읽어보면 좋다. 입문용이기에 자세하고 세세한 역사서는 아니지만(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치세, 레온 6세 즉위 전 상황, 바실리오스 2세 치세) 왕조사와 당시 비잔티움 사회상, 문화 소개 및 이를 보충해주는 도식 자료와 사회상 에세이와 도표 등이 있으므로 동로마사를 입문할 때 큰 흥미를 생기게 해준다.
다음으로는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대표적인 서적이다. 한국어 번역물 중에선 가장 인기가 많지만 작가의 성향에 따른 왜곡과 과장, 축약이 심하다. 예를 들어 수세권(收稅權)을 부여하는 대신 직업 군인을 고용하는 프로니아(Πρόνοια) 제도를 단순 민병대로 묘사한다든가, 나라를 말아먹은 내전의 주범을 의분으로 인해 봉기한 것으로 미화한다든가.[87] 노리치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며 역사가는 더더욱 아니고, 《비잔티움 연대기》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 에세이에 가깝다. 그것만 조심하면 입문자들이 읽기엔 편하다. 3부 서문(한국판 5권)에서는 스스로 '결코 학술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전이 없으면 간단한 그리스어 문장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시인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은 괜찮으나, 번역자가 단 주석과 번역 후기는 안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기거든 국내에 출판된 워렌 트레드골드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좋다. 번역의 질이 조금 많이 낮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책 중에서는('''어디까지나 번역된 책 중에서''') 가장 최근 연구 결과를 반영한다. 이 책은 같은 저자가 《비잔티움 국가와 사회의 역사》를 축약하고 몇 가지 부분을 추가해서 교양 서적으로 만든 판본이고, 원본은 아직 미출간 상태다. 이외에도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 어떤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가 있다.
추가로 게오르크 오스토르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도 읽어보자. 문체가 약간 딱딱하고 번역투의 느낌이 나지만 이쪽이 정통이다. 다만 1965년대의 저작이라 최신 연구 결과에 심하게 뒤쳐져 있다.(역사학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구 성과의 업데이트가 활발한 분야이고, 일반적으로 10년만 넘어가도 상당히 오래된 연구로 취급한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동로마 제국이 6~7세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기반으로 8~10세기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이룬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이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 제국의 종교 생활을 중심으로 다룬 메리 커닝엄의 《비잔틴 제국의 신앙》도 있다.
내공이 더 쌓이고 흥미가 생기면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 미하일 프실로스의 《연대기》 같은 동로마인들이 쓴 글을 접해보는 것도 좋다. 아직 한국어로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는 당대를 알 수 있는 1급 사료로 꼽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전쟁사》(Ὑπὲρ τῶν πολέμων λόγοι, 戰爭史)와 《비사》(Ἀπόκρυφη Ἱστορία, 秘史)의 경우, 문체가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이하고, 이 가운데 《비사》만이 2015년에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영문 중역이다.
언급된 책들 대부분이 품절되어 구입하기 힘든 책들이 많다. 따라서 도서관을 애용하고, 정 구입하고 싶으면 중고서점에 가보면 좋다.

15. 끝나지 않은 이야기




15.1. 근현대 그리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으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메흐메트 2세는 전쟁으로 피난 간 그리스인의 복귀를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인 인구가 도시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함락 당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점령군이 물러나길 바라는 여성들과 성직자들이 성찬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튀르크 군대가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미사를 참례하던 신자들이 모두 벽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전사' 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는 확실히 발견되지 않은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그들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다시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면 이들이 모두 돌아와서 성찬예배를 마저 끝내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다.[88] 그리스인, 즉 동로마인들이 정통 로마 치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잘 드러내 주는 전설이다.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아나톨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의 대부분은 신생 독립국인 그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지배를 받더라도 어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침공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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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 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 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메갈리 이데아, Μεγάλη Ιδέα)' 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 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 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소아시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이다.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터키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크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었다.
메갈리 이데아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 왕국은 1832년 독립 이후 이오니아 제도, 테살리아, 남부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금씩 빼앗았다.다만 그리스 왕국이 홀로 차지한 게 아니라 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으로부터 뺏어온 것이 아닌 1861년 왕실끼리 사돈 관계였던 영국이 선물한 영토이다. 그리고 차지한 땅들도 그리스 홀로 이긴 게 아니라 강대국들과 연합하여 빼앗아 온걸 차지한 거였다. 그리스 독립도 거저해준게 아니라 그리스에 영국과 여러 강대국이 주둔하고 여러 항만시설 이용권을 거저로 내주고 온갖 무역 특혜에서 여러 모로 내정간섭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스 홀로 오스만에게 덤비다가 하필이면 크림전쟁으로 인하여 오스만과 동맹을 맺던 영국과 프랑스가 분노해 실컷 처맞고 오히려 이들에게 가진 땅을 내놓으며 온갖 배상금을 뜯긴 적도 있었다. 반대로 그리스 홀로 쳐들어가다가 오스만에게 두들겨 맞았던 적도 많았다. 1차 발칸 전쟁 때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등과 손잡고 오스만을 뭉개면서 비로소 크레타와 남부 마케도니아 등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거꾸로 2차 발칸 전쟁때는 오스만과 그리스가 손잡고 같이 불가리아를 처뭉개면서 불가리아가 1차 발칸 전쟁에서 차지했던 땅을 서로 빼앗아갔다...
하지만 2년도 안가 그리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군에 가담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를 위시로 한 유럽 터키 전역과 이즈미르를 비롯한 일부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리스 홀로 소아시아 해안을 넘어가다 못해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점령하려다가,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군의 잔해를 급히 긁어 모아 구성한 병력에 격파당하고 말았다.(그리스-터키 전쟁) 그리하여 그리스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러싼 동부 트라키아는 그리스가 점령했지만, 정작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연합군(주로 영국군)이 주둔해서 그리스군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여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리스의 꿈이라는 건 목표치도 채우지 못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1923년에, 터키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땅으로,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터키 땅으로 이주한다는 협약(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에는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다. 인구 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섬들에는 여전히 터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고 있고,[89]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 - 그리스어 타이틀은 'Πολιτίκη κουζίνα'(도시의 요리) - 에도 잘 나타나있다.[90] 그들에게 있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었더라도 여전히 로마였으며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새해를 맞아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가사가 나오는데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성 바실리오의 도움으로 아홉 아들과 아홉 딸을 낳으시길. 딸들은 저마다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살림꾼이 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게 하소서."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 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91] 같은 표현이 쓰인다. 그러나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 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 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로마에 합병되었다가,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이전까지 무려 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146년부터 1830년까지 2천년 가까이 동안 로마-비잔티움, (그리 오래지 않은 기간 동안 북부나 서부 등 일부 지역 한정으로) 남슬라브계 세력(소위 Sclaveni/Sklabenoi라고 불리는 국가형성 전 부족단계의 남슬라브인,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제국 등), 서유럽계 십자군 세력, 오스만이 끝이다. 그리스 독립운동시기 정체성으로 부르짖은 헬라스의 의미가 중세 시대에서는 이교도,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로마 다신교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이 문제는 복잡한 문제인데, 우선 공화정기나 제정 초기까지의 그리스 본토나, 넓게 보아 소아시아 서부와 마케도니아 등을 포함하는 에게 해 연안의 확실한 그리스권은[92] 로마 본국 이탈리아의 라틴인이라는 외세 내지는 외래종족의 통치를 받았던 점이 확실하지만, 가장 많이 땡겨잡으면 카라칼라의 212년 시민권 확산 이후, 내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0년대 사두정치 및 '수도와 궁정을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밖에도 둘 수 있다는 개념'의 첫 도입 이후, 혹은 330년 콘스탄티노플의 완성 이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동로마 중후기에는 (비단 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아니라 그 이전인 콤니노스 시대부터) 다종족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점점 민족국가에 가까워졌던 점도 고려해야 하며[93],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역부족으로 거의 진압되고 나서는 서유럽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음은 물론, 당시에 이미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카톨릭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은 오스만의 충실한 어용(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으로는 'The Byzantine Hellene', 'Romanland', 'Being Byzantine', 'Hellenism in Byzantium', 'Byzantium and the Modern Greek Identity' 등이 있다.

15.2. 러시아


훗날 제국이 멸망한 뒤 모스크바 대공국이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관계를 찾아내며 '모스크바제3의 로마'[94]임을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러시아 국내용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이와 결혼한 것에서 근거를 두었지만, 오스만 치하의 정교도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말이 아니었다.
하여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자기들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러시아는 시간이 흘러 국력이 강성해져 이반 4세 때 차르를 칭했고 표트르 1세 때부터 임페라토르 칭호를 사용하면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고 황제국이 된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며 동시에 이교도 튀르크인의 지배 하에 신음하는 정교회 신자들을 구원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수십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여 진정한 로마가 되고자 한 생각은 예카테리나 2세의 일명 '그리스 계획' 에서 잘 나타나는데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며 그 도시들에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것이 대표적이다. 오데사, 케르손,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스타브로폴 등이 바로 그 예시다.
러시아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했을 때, 서방연합국 (프랑스, 영국)과 함께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을 러시아가 갖는다" 는 밀약을 맺었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맹주를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에게 동로마 제국을 승계한다는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참패를 거듭하다가 국내에 혁명이 두번이나 벌어져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맹국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빠졌고, 그 다음은 국내에서 적백내전이 벌어져 이스탄불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졌다. 오히려 1920-30년대 신생 터키 공화국소련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는 터키나 소련이나 사이좋게 국제 왕따였고, 소련군이 중앙아시아를 병탄하면서 아타튀르크의 정적이 될 수 있는 舊 오스만에 대한 충성파 군벌들을 토벌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와 소련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터키가 소련의 남하에 압박감을 가져서 친미 성향으로 기운 이후이다.

16. 매체



16.1. 등장하는 작품들


  • 영화
    • 칸의 영광
사회주의 시절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적국으로 나온다. 1차 불가리아 제국의 태조인 칸 아스파루흐의 활약을 그린다.('칸'이 '차르'가 되기 이전 시대)당연히 '적국'이기에 아주 처참하게 발린다. 참고로 동로마 군대가 제대로 나온 거진 유일한 영화이다. 수만에 달하는 동로마 군세의 물량을 사회주의의 파워로 잘 보여준다. 물론 발린다. 그리고 발리는 것이 사실 역사적 고증으로도 맞다.
2012년터키에서 만들어진 1453년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영화. 터키 정부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영화인지라 대놓고 오스만 미화와 동로마 왜곡이 만연한 작품.
  • PC용 게임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게임 -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역사 배경 전략 시뮬레이션 시리즈는 팬덤에서 대놓고 회사 자체가 동롬빠라고 간주할 정도로 동로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넘쳐흐르는 편이다. 동로마가 당당한 열강이던 중세를 배경으로 한 크킹 시리즈에서 동로마에 큰 비중이 주어지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더라도,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여 멸망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랜드 캠페인이 시작되는 유로파 시리즈에서도 동로마 관련 컨텐츠는 충실하고, 심지어 멸망한 지 수백 년 이상 흘러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진 국가가 된 시점을 다루는 빅토리아 시리즈나 HOI 시리즈에서도 최소한 '동로마 재건' 관련 디시전 정도는 빼놓지 않는 편. 지구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는 페로 제도의 북극곰과 함께 회사의 마스코트격인 이스터 에그 정도의 존재감은 보장받는 편이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2편에 이르러선 서유럽의 가톨릭 세력과 함께 사실상 본 게임의 주인공 포지션이다.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 디시전을 오직 동로마 제국으로 플레이했을 때만 가능하게 함으로써 '동로마가 정통 로마 제국' 임을 드러내 보였다[96]. 또한 고대 로마 황제들 작위는 동로마 황제 작위를 가진 것으로 구현되어 있다.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 각 국가별 특성 컨텐츠가 충실해진 4편 기준으로 보면 국력 자체는 3티어급 정도로 평가되는 약소국이지만 전용 이벤트 및 정복 미션 등의 컨텐츠는 최소 2티어급에서 종종 1티어를 뛰어넘는다고 할 정도인데다 시작 단계부터 사실상의 도시국가인 주제에 정부 등급은 제국(명이나 티무르 제국등과 동급)이다[97]. 말 그대로 제작진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98] 애초에 그랜드 캠페인의 시작 시점인 1444년 11월 11일 자체가 바르나 십자군의 종결 직후, 즉 대 오스만 기독교 동맹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 시도가 실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본격적인 승천이 시작될 무렵이다. 이는 보통 (근세 유럽사의 주인공 중 하나인) 오스만 제국의 비중을 밀어주기 위해 선택한 시점이라고 여겨지지만, 다르게 보면 동로마의 구원을 위한 사실상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고 최종적인 멸망 과정으로 접어든 시점을 그랜드 캠페인 시작 시점으로 잡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즉 서로마의 멸망으로 유럽 중세가 시작된 것처럼 동로마의 멸망으로 유럽의 근세가 시작되었다는 관점에 따라 설령 플레이어가 붙잡고 재건시키지 않더라도 배경상 큰 의미를 부여받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애정와 관심을 듬뿍 받는다고는 해도 플레이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고, 패치 내용에 따라 난이도는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접하는 유저들을 위한 컨텐츠가 아니라 이거저거 즐겨본 유저들을 위한 도전적인 컨텐츠로써 내용이 풍부한 쪽에 가깝다. 전용 소형 DLC나 화려한 미션트리 등 이거저거 받기도해서 애정을 주는건 맞으나, 그거야 로마니까 응당 받는거 아니겠는가. 유로파4에선 신성로마제국도 몇 없는 전용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도하고 동로마는 시작부터 이 게임 최강 국가로써 승천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 맞서야하기때문에 숙달된 플레이어가 잡지 않는 이상 AI가 위기를 극복하고 승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Victoria 시리즈 - 빅토리아 2에서 그리스나 크레타로 이스탄불을 탈환하면 디시전을 통해 재건할 수 있다(동시에 이스탄불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된다). 그러나 이는 전제군주제일 때의 얘기고 입헌군주제인 경우에는 그리스 제국으로 바뀐다.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에도 코어가 박히므로 될 수 있으면 아나톨리아를 전부 점령한 다음에 쓰는 것이 좋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 - 그리스로 어찌저찌 해당 국가를 먹은 뒤 디시전 발령으로 선택이 가능하다. 7대 열강 국가에는 당연히 속하지 않고, DLC로 국가 정책이 추가된 국가도 아니면서 그 작디작은 그리스로 다 먹어야 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고수용으로 여겨질 정도로 굉장히 힘들지만, 일단 성공하면 그리스가 먹어둔 비잔티움령 땅 모두가 식민지가 아닌 본국이 되기 때문에 엄청난 인력과 엄청난 자원을 사용해 미국/독일/소련과 맞설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된다.[99]
    • 토탈 워 시리즈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3, 문명 4, 문명 5에서 확장팩이 있다면 정규 문명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문명 6에서는 바이킹 시나리오에서 NPC 문명으로 나오기도 하고, 2020년 9월에 DLC로 정규 문명으로 추가 되기도 하였다.
    •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 - 작 중에선 이미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 소속 비잔틴 잔당들이 다시 비잔티움 제국을 세우기 위해 남아있으며 템플 기사단 소속인 만큼 적대관계로 등장한다. 참고로 오스만군과 플레이어는 중립관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
  • 소설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 : 콘스탄티노스 11세로 환생한 주인공이 떠오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제국을 살리기 위해 구르는 소설. 라노벨스러운 제목과는 달리 독자들이 히로인은 제국이었다고 할 정도로 여자랑 사귀기는커녕 무라트 2세오스만 제국을 상대하며 온갖 고난을 겪어댄다. 어찌보면 정말 제목에 딱 맞는 내용.
    •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 주인공이 헝가리에 멸망한 크로아티아 왕가의 후계자에 빙의해 3차 십자군 참여 뒤 동로마에서 활약하는 소설. 주인공은 동로마 출신이 아닌 크로아티아 출신이지만 소설의 주무대가 동로마 제국이며 탈주 후 주인공의 첫 직급도 동로마 휘하의 용병대장이었고 최신화 기준 주인공의 신분도 스코페의 둑스이자 트라페준타의 둑스, 즉 동로마의 귀족이다. 그러나 시대적 고증은 작가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다. 로마에서 쓰이지도 않는 작위를 갖다붙여 영주들이 난립한 것은 둘째치고, 주인공인 블라드미르에게 호국경이라는 영국식 칭호를 붙여놓았는데 하는 짓은 알렉시오스 4세의 재림이다.[100] 판타지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하지만 이를 납득시킬 개연성과 필력이 빈약해서 대역갤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실제로 이런 짓을 벌인 알렉시오스 4세가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로마인들의 평가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로마인도 아닌 데다가 헝가리와 동군 연합인 크로아티아의 일개 용병대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고 해서 로마 황제를 참칭하는 건 불가능하다.[101]그러나 이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이 시기는 민족이라는 요소가 아직은 없는 시기이며 로마인이란 요소도 고대 제국시기부터 다민족 성향이 강한 용어다. 블라디미르는 황제에 오르기 이전부터 동로마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방어, 가짜 알렉시오스 2세 진압, 불가리아 격퇴등의 수많은 공을 세워 왔고 귀족들 진압시점에서는 4차 십자군을 토벌하고 수도를 수복하며 그 방점을 찍은 상태였다. 거기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황제의 공인을 받고 스코페, 트라페준타의 영주로서 그 지역을 직접 다스렸기에 로마인이라 할 수 있고 전대 황가인 앙겔로스 황가는 무능의 대명사로 남은데다 4차 십자군 통에 다 죽어나간지라 남자 후계도 없었으니 시민들의 영웅인 블라디미르가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십자군으로 귀족을 쓸어버린 건은 유도를 한 면이 있긴 했지만 수도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블라디미르에게 선빵을 갈긴 것이고 이때 나온 십자군은 이 시점에선 사실상 블라디미르의 용병이었다는 것[102]도 포인트. 또한 관작에 대해서는 자료조사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할 순 있겠지만 국내에서 동로마 관련 사료는 적고 어지간한 역덕이 아닌 이상 동로마의 관작을 한국 대중들이 알긴 어려우니 이해도를 올리기 위해 대중들에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서구식 봉건 작위를 써먹었다고 이해는 해줄 수 있다. 이미 쿠만족에게 멸망한 페체네그족이 버젓이 나온다고 지적하는 이가 있지만 몽골의 침입시기까지도 소수나마 살아남아있던 페체네그족이 있기에 이건 적절하지 않은 비판이다.

  •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 : 주인공의 활약으로 인해 역사가 바뀌어 티무르 제국이 건재하고 오이라트가 대대적인 서진을 벌여 오스만의 관심이 동쪽으로 쏠리자 그 틈을 타 티무르 제국과 협조, 미당을 획득해 유럽에 퍼뜨린다. 또한 조선의 형제국이라는 이 소설상 최강의 버프를 먹게 되고 이를 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수복하는데도 성공한다. 외전에서 보면 성묘 교회의 열쇠를 티무르에게 넘겨 받으려 하다가 바티칸의 개입으로 경쟁이 붙은 모양이다. 이 소설상에서는 조선, 티무르 다음 가는 대체역사의 수혜자.

  •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 미하일 8세에게 밀려나 두 눈을 뽑히고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요안니스 4세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 빙의해서 소산드라 쿠데타를 막아내고, 오스만의 부족을 제국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등 제국의 역사를 바꿔나가는 소설. 작가가 국내에서 동로마 전문가로 유명한 사람인지라 고증에 대해서는 충분히 믿고 봐도 된다. 여담으로 문피아에서 처음 연재될 때의 원제는 회귀한 황제의 제국재건비법이었으나 2020년 11월경 네이버 시리즈에서 독점 연재가 결정되어 문피아에서 작품이 내려간 뒤 2021년 1월 13일 연재를 재개하면서 제목이 바뀐 것.

  • 비잔티움 연대기: 조아라에서 연재되었던 소설. 1~2년 마다 한번 연재되고 있다 시기는 11세기 초반, 바실레우스 2세가 사망한 직후 바실레우스 2세가 유능한 아이를 낳은것도 있고 이사브리아 왕조가 계속 명군을 배출해 로마는 현재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의 영토를 모두 되찾은 상태라는 설정이다. 롬바르드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 멸망당하지 않고 로마와 동군연합으로 합병되었고 시리아는 선제시절 주인공이 직접 정복하였으나 나머지(아프리카야,카레나이카)에 대해서는 어찌 수복했는지 나오지 않았다. 동서 대분열의 징조는 롬바르드 왕국을 물려받은 선제시절 로마교황령을 정복해 사라진 상황이지만 현재 신성로마에서 대립교황을 세우며 다시 분열된 상황이다. 또한 아바스 칼리파조도 분열을 종식하고 강해진 상황이라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주인공의 영재 트레잇과 황후의 천재 트레잇 덕에 제국 역시 전성기를 이어나갈 수는 있는 상태

  • 제국은 영원하리라
조아라의 던만추x동로마 패러디 소설. 로마제국이 4차 십자군에 망한 이후 라스카리스-바타치스 왕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현황제는 테오도로스 2세이며 테오도로스 2세와 라스카리스 본 가문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담으로 죽음의 신 하데스가 라틴제국의 신으로 나온다.
  • 분열된 제국
롬연시 갤러리와 조아라에서 연재되고 있는 메이플 패러디 로마 대체역사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로마제국이 멸망하던날 친위대와 함께 메이플 월드로 전이해 대적자가 되어 검은 마법사를 소멸 시킨 직후부터 이야기가 이어진다. 4차 십자군 시기 수도에서 탈출해 니케아로 가던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가 메이플월드로 전이해 와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만나게 되어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후 가문의 원죄(요안니스 4세 항목 참고)와 메이플에서의 평화로운 생활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누일 2세의 영혼을 뵙고 결심을 굳히게 되고 이후 테오도로스를 따라 니케아 제국으로 가는 이야기. 이후 알렉시오스 3세의 둘째 딸(테오도로스 1세의 아내)과 만났을때는 첫째 딸의 사위가 팔레올로고스 가문이기에 정체를 들킬수 있어 드라가시스 가문으로 칭해서 그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16.2. 언급되는 작품들



16.3. 모델로 한 것들


  • 드래곤 에이지 - 테빈터 제국
  • 반지의 제왕 - 곤도르[103][104]
  • 얼음과 불의 노래 - 볼란티스[105]

1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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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티움 제국)라는 표현이 쓰인다.[2]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통치 기준[3] 콘스탄티노폴리스 완성 기준[4]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 격상 기준[5]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통치 기준[6]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동방의 수도로 지정되어 근처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질 때까지도 수도 역할을 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별칭] A B 콘스탄티노폴리스[7]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지방 정권들의 분립기 시대이다. 그중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제국의 부활을 선포해 로마제국을 계승하는 것이 아닌 로마제국 그 자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제국 당시엔 지리상의 문제로 님페온이 실질적인 수도였다.[8]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보면 되겠다.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제위가 세습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직으로 여겨질 정도다.[9]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제국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바꾸었다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데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제국 동방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가 널리 쓰였다. 로마법 대전에서 라틴어가 쓰이는 등 동로마에서 라틴어의 지위는 결코 '외국어'가 아니었으나 7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 의례 부분으로나 때때로 나타나는 정도였다.[10] 당시에는 행정수도 건설. 359년이 돼서야 로마시에만 두었던 수도시장 내지는 특별시장(Praefectus Urbi)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두었으며, 원로원 또한 로마의 그것과 동급으로 격상시켰다.[11] 이와 같은 후대 학계에서의 편의상 구별법은, 비단 로마뿐만이 아니라, 고조선과 (근세의 이씨) 조선(다만 이쪽은 국체가 직접적으로 이어진건 아니고 계승한다는 의미다.), 북송과 남송, 전한과 후한 등 사례는 많다.[12]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골적으로 탐했던 시메온 1세의 경우, 92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후 그곳 총대주교인 니콜라스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기까지 하였으나, 동로마가 인정한 그의 제위는 어디까지나 '불가리아인의 황제'일 뿐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 제국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중국 황제가 이민족한테 '너도 황제 해' 라고 허락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중국의 포지션은 통일 로마와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니만큼, 통일 로마에서 1/4 정도로 쪼그라든 동로마의 입장에서 중국과 1:1로 비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열심히 두들겨 맞던 남송도 고려나 베트남이 외왕내제 하는 걸 부들거리며 모른척했을 뿐 제대로 허용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불가리아인의 황제' 자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시메온 1세는 이후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부르며 마음껏 그 위세를 떨쳤다.[13] 출처: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14] 이외에도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의 근거로 제시된 게 '콘스탄티누스 기증서(기진장)'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 및 그 후계자들에게 서방 황제 임명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이 기증서는, 훗날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키는 주요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도 오랫동안 즐겨 활용되었는데... 그러나 실제로 이 문서는 위조된 것이었으며, 서방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는 동방 황제가 여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서로마를 무너뜨린 오도아케르마저 옛 서방 황제의 권한을 모조리 동방 황제에게 넙죽 바친 마당에 교황에게는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임명할 아무런 권한도 없었던 셈... 그저 종교적 권위와 조작 문서에 기대 자기 멋대로 로마 황제 왕관을 뚝딱 만들어 샤를마뉴 머리에 씌워준 거나 다름없었다.[15] 단 신성로마제국이 로마 제국이라 주장할 여지는 없지는 않은데 이탈리아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로마 유민의 어느 정도의 동의는 얻었다는 점이다. 다만 로마가 '이 거지같은 땅 더러워서 안가져' 하고 손절했던 게르마니아를 정통 로마로 인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16] 부유한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 속주들이 날아가긴 했지만 대신 군사적으로 중요하고 지키기도 용이한 일리리아와 남이탈리아, 서부 아르메니아 지방이 제국으로 편입되었다.[17] 세입에 비해 군비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많은 거 맞다'''. 동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문제인 양면전선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군비의 소모가 강요되었고, 둔전병의 특성을 가지는 테마 제도를 고려해도 당시의 군비는 위험할 정도로 재정을 잡아먹었다.[18] 왜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했는데 동서 로마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 국력을 회복까지밖에 못했느냐고 한다면 본래 동로마의 영토 중에서 부유한 인구밀집 지역이던 이집트와 시리아(레반트) 지역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영토 자체는 크게 감소했지만 기술의 발전과 인구 증가, 그리고 남아있는 핵심 영토 경영의 효율화로 영토가 훨씬 넓던 시기와 맞먹는 국력을 키워냈다는 것.[19] 1081년~1180년으로 딱 100년이다.[20] 이 역시 다른 나라 같으면 어떤 시점의 조세액이 한 세기 반 전의 조세액과 '맞먹는다'면 그건 명백한 퇴보겠지만, 비잔티움 제국이 11세기 초~중기의 위기를 거치며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음을 생각한다면 역시 또 줄어든 영토에서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켜 영토가 더 넓던 시기와 맞먹는 조세액을 거둬들일 정도로 경제를 부흥시킨 것이니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 중국으로 치면 북중국을 잃은 남송이 남중국 영토만으로 북송시대를 회복한 격이다.[21] 중국의 고유 기술이었던 비단사업은 중국의 기밀이었으나 문익점마냥 널리 퍼지게 된다. 견직물 항목 참조.[22] 다만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 조직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재건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23] 여기에 자신의 사병 부셀라리 기병대 1,500기를 추가로 데려갔다.[24]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연대' 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복수형은 타그마타(τατάγματα)[25] John Haldon이 6,0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평소 명성을 고려해봐도 놀라울 정도로 별다른 문헌 근거가 없다. 반면 24,000명이라는 주장은 동시대에 동로마 제국에서 포로 생활도 해본 바 있는 이슬람 학자의 저술이나, 다른 제국 문헌에서 뒷받침된다.[26] 로마인은 물론 이런 전술에 가장 혹독히 당한 이슬람측도 이들의 기병 돌격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27] 그전에도 반서방의식은 베네치아와 동로마의 반목처럼 상당히 있었고, 그것을 야심가 안드로니코스가 이용해서 1182년 라틴, 다시 말해서 서방인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28] 일례로 1451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에게 라틴어로 보낸 편지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본인을 'Constantinus in christo deo fidelis imperator ac moderator Romeorum semper augustus', 즉 로마의 '임페라토르'이자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칭했다.[29] 1908년 림노스(렘노스) 섬 출생의 미국 비잔티움 학자 피터 차라니스(Peter Charanis)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때 섬을 점령한 그리스 해군 병사들을 보러 나온 아이들은 그 병사들을 마치 자신들과는 별개의 족속을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인(Hellenes)'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흡사 외국인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내심 황당해 한 그리스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니?"라고 물었고, 아이들은 "네, 우린 로마인이에요."라고 말했다.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42.[30] 심지어 이탈리아 본토와 속주를 막론하고 제국의 모든 자유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카라칼라 황제 때부터는 노예나 투항자만 아니면 민족이 어떻든 법적으로도 다들 '로마인'이 되었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의 본명) 황제의 법령에 의해 로마의 세계에 사는 모든 이들은 로마 시민이 되었다(By an enactment of the Emperor Antoninus, all those living in the Roman world were made Roman citizens)'라고 쓴 당대의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울피아누스의 이 문장은 로마법 대전의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 seu Pandectae)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학설휘찬의 내용 태반이 그의 저서에서 따왔을 정도로 울피아누스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률가로서의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31] 그전에도 제국에 라틴인, 프랑크인을 비롯한 서방 출신 민족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누일 1세의 친서방 정책에 힘입어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 피사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라틴인들이 대거 제국으로 이주해 와 로마 시민권도 따고 각자의 커뮤니티도 형성함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편 제국의 수도로서의 모습을 과시했다. 1180년에는 무려 6만 명의 라틴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살기도 했고, 출신 도시별로 구분된 이들의 공동체는 상업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서로 치열한 기싸움을 이어 갔다. 단체로 상대방의 구역에 쳐들어가 패싸움을 벌이기도... 단지 상인뿐 아니라 동로마의 관료 집단에도 서방인들이 꽤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마누일 1세의 후계자 자격으로 동로마 황제에 즉위한 알렉시오스 2세는 그 어머니가 안티오키아 공국의 마리아로서 프랑크인 핏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알렉시오스 2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황태후를 위시한 섭정단이 황제를 보필했는데, 이 섭정단 역시 서방인 및 제국의 친서방파가 주류를 이루었고... 제국의 서방인 공동체는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 때 자행된 라틴인 대살상으로 크게 위축되었지만, 이후에도 제국의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은 본국과 연계해 가며 동로마의 권력 투쟁에 제법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로마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서방인 사례는 군대에서도 발견되는데, 일례로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시신을 훼손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은 제국의 라틴인 병사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32] 라틴 제국의 수립 이후 베네치아는 제해권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에게해의 수많은 섬들을 정복했는데 이것을 모조리 탈환하여 에게해를 다시금 제국의 바다로 만든 인물이 리카리오였다. 물론 베네치아도 두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카리오는 서방의 함대가 자신을 막으러 올 때마다 물리쳤다.[33] 최초의 아랍인 로마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다. 이름부터가 '아랍인 필리푸스'라는 뜻.[34] 아르메니아인은 적지 않은 수가 제국의 고관대작에 오르는 등 동로마 사회에서 꽤나 끗발 날린 민족이었고, 아르메니아 혈통이었던 마케도니아 왕조 황제들의 치세 동안 동로마는 아르메니아 본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슬림의 침공을 막을 목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를 형성 ·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고, 훗날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발전한다.[35] 이미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에서 백 년 가까이 지나서, '트라키아계 로마인'이나 '다키아계 로마인'도 자연스러운 개념이었다.[36] 410년 로마 시 함락과 약탈 때의 알라리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포위한 다음에, 우리 고트족은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서, (당시 세계를 몇 백 년간 지배해왔기에 배고픔 따위는 장식이었던) 로마인도 이런 굶주림을 겪어봐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37]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는 히스파니아 출신의 트라야누스였지만, 트라야누스의 가문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건너온 귀족 가문이었기에 평범한 속주민이 황제로 출세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속주민' 로마 황제는 일반적으로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 여겨진다. 이후 아랍인, 일리리아인, 다키아인, 트라키아인, 이사우리아인, 아르메니아인, 게르만인, 시리아인 등 정말 여러 민족들이 로마 황제를 배출함으로써 '로마 황제'라는 자리가 절대로 라틴인 또는 그리스인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드러냈다.[38] 물론 본토가 그리스이다보니 마케도니아 왕국부터 이어진 헬레니즘 문화의 잔재가 이전보다 많이 보인다.[39] 그러나 몽골군의 침략, 타타르의 멍에, 크림 칸국의 노예 사냥 등으로 인해 번영하던 문명은 파괴되고, 풀밭만 남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벨라루스는 훨씬 뒤쳐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40]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337[41] 리우트프란드(Liutprand of Cremona)는 젊은 시절에는 자비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학하기도 하는 등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서방의 대표적인 동로마통 인물로 활약하였다. 968년 이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사절 업무를 수행하는 등 대(對) 동로마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전까지는 딱히 동로마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968년 감금당한 이후로는 단단히 앙심을 품고 동로마 궁정을 욕하는 온갖 악담과 사실 왜곡을 늘어놓는 기록을 남겼다. 문제는 이후 그와 같은 동로마통 인물이 서방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평도 있을 정도로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리우트프란드였기에, 동로마와 관련하여 남긴 여러 악평들이 후세에까지 제법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42] 오늘날 알바니아의 듀러스(Durrës).[43] 이때 비잔티움 제국은 발칸 반도의 아바르와 동방의 페르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악조건하에 있었다.[44] 왜 옛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내륙을 직접 수복하지 않았나면 이미 아나톨리아에 튀르크 부족들이 상당히 이주해서 이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45] 그러나 로마 제국은 보편제국인 반면, 현재의 그리스는 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계승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더군다나 국호를 다시 로마라고 한 것도 아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영유하고 있지 못하니...[46] 사실 마자르는 그 이전에는 동방교회의 영향이 더 컸지만 레히펠트 전투의 영향으로 서방교회에 귀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47] 심지어 두샨은 새로 제정한 법전에 자신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임을 명시하기도 했다.[48] 키예프 공국 때나 지금이나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은 유럽에서 알아주는 술꾼이다.[49] 동로마를 사절단이 하기아 소피아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님긴 기록은 하기아 소피아 문서에서 볼 수 있다.[50] 이런 바실리오스 2세의 태도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한 것이, 제위의 여계 계승(특히 사위 계승)을 폭 넓게 인정하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통 황녀를 외국으로 시집보내는 것을 엄청난 금기로 여겼다. 혼인동맹을 위해 황실의 여성을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 정도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전 황제의 딸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타를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는 볼로디미르 대공과 안나의 사례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51] 오늘날의 세바스토폴.[52] 사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지중해, 중근동 문화권의 강대국이었다는 평이 아깝지 않은 것이... 사실상 모든 국경이 군사적 접경지대인 상태에서도 잘만 버텨냈다는 것이다.[53] 일례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수도 키예프로 돌아오자마자 키예프 주민들을 불러모아 단체로 드네프르 강입수(...)시켜 세례를 받게 했다.[54] 서유럽이 도와주기 싫어서 도와주지 않았다기보다는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미 한 차례 십자군을 결성해서 도와주러 왔다가 국왕이 전사하면서 오스만에게 완전 박살이 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서로 백년전쟁 하느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자국과 인접한 이슬람 세력과 싸우는 데 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다 교황이 도와달라고 서유럽 각국에 호소했지만, 이전만큼 교황의 말을 듣던 시기가 아니었다.[55] 동로마 제국 멸망 뒤 러시아 제국의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조이 팔레올로고나의 결혼이 가장 큰 요소.[56] 기번은 근대적인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레오폴드 랑케보다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정확히 기번이 죽고 1년뒤에 랑케가 태어났다.[57] 초기 기독교 5대 총대주교좌 중에서 로마를 제외한 4곳(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이 이슬람권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총대주교좌는 모조리 이슬람교가 우세한 지역이 되었다. 지금 로마 교황이 권위가 기독교 세계에서 압도적인 것 중의 하나가 다른 총대주교좌가 이렇게 이슬람교의 교세에 밀려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58] 수도원은 동로마령 이집트에서 최초로 나타났다.[59] 동로마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어머니를 성모 마리아처럼 보기도 했다. 그 예로 10세기 동방 교회 성화 도상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후 헬레나의 모습이 예수와 마리아를 묘사하는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60] 물론 러시아에게는 이런 명분, 이데올로기적 이유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짜리그라드 '수복' 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했다. 예를 들어, 흑해 연안 국가인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스탄불과 그 주변을 확보한다는 것은 곳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뜻이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것은 곧 유럽 전체와 연결된 지중해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반쯤은 호수나 다름없는 흑해와 고대부터 현대까지 유럽 문화권의 중심 중 하나인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의 통제권만 생각해도 국운을 건 전쟁을 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까지 진격하여 결국 황제의 도시 자체마저 낼름하는 것은 결코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니라 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작계까지 있었던 실질적인 대 오스만 전쟁과 남진 정책의 최종적인 목표였고, 현실적인 구상이었다. 물론 이스탄불 점령을 눈앞에 두었던 러시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비스마르크에게 러시아는 피꺼솟헀고, 이는 러시아의 1차대전 참전을 부른다.[61] '레이', '마이' 내의 이중모음이 '리' '메' 내의 단모음으로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발음 변화는 이미 코이네에서도 나타나는데,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는 코이네로 읽으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바실리아 톤 로마이온' 또는 '바실리아 톤 로메온' 이다.[62] 언제부터 라틴어식이 아니라 그리스어식으로 표기를 해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스티니아누스 정도면 라틴어로 표기해도 크게 이견은 없을 것이다.[63]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 등을 해석하기 위해서다.[64] 성경, 아르키메데스, 스토아 학파 등을 해석하기 위해서다.[65]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상위 중앙 정부가 없는 동격의 지방정부에 의한 지방자치제, 또는 연방제 정도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양 지방정부를 구속하는 상위의 단일 정부가 없는 특성상 권력 자체가 분산되어 체제의 통일성이 약한 것처럼 보일수는 있으나, 현대 국가로 쳐도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높여준다고 해당 국가가 '분열'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단일 권력구조에 대한 구심력이 약하다' 정도로 설명할 뿐이다.[66] 신성 로마 제국도 영토에 로마가 없다고 로마를 칭할 수 없다는 오류가 존재한다.[67] 로마라는 도시의 이름이 로마 제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고 이해하면 간단할 것이다. 발상지였던 도시 로마를 잃었다고 해서 멀쩡히 남아있는 나라가 없어졌다, 안 멀쩡히 남아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어원이 무엇이든 '로마 제국' 이라는 나라는 해당 국가를 지칭하는 표현인 것. 조금 우습게 비유해보자면 닭개장의 어원이 개고기를 이용한 개장국이라고 해서 개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닭개장은 닭'''개'''장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68] 고전이나 코이네 식으로는 발음이 '로마이오이'지만, 중세 그리스어 때는 ai를 아이가 아니라 에로 읽고, oi를 오이가 아니라 이로 읽는 발음변화가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69] 좁게는 헬라스(=아카이아), 넓게는 헬라스+마케도니아(+에피루스(노바와 베투스))[70]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로마 제국 3/8'''(...)의 통치자. 무식해 보이지만 다른 지명을 절대로 안넣으려고 실제로 차지한 땅의 이름은 하나도 안붙였다....[71]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로마니아 제국의 1/4와 그 절반(a quarter and a half quarter)' 인데, 여기서 '로마니아 제국' 은 라틴 제국이 아닌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 영토의 분할' 조약에 따라 동로마 영토의 3/8은 베네치아가, 2/8는 라틴 제국이, 3/8은 기타 십자군 지도자들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 만약 여기서의 '로마니아 제국' 을 라틴 제국으로 해석해 버린다면, 라틴 제국은 '라틴 제국의 황제' 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가 각각 2/8와 3/8씩 공동 통치하는 국가가 되어 버린다. 참고로 이 조약에 의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 3/8이 베네치아에 할양되었는데, 이때 베네치아가 먹은 구역에 하기아 소피아가 포함되어 있었다.[72] 국명으로서 '~의 땅' 을 쓴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니아' 로도 불렀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한 게 못 된다. '루스족의 땅' 을 뜻하는 러시아도 있고, '노르만족의 땅' 을 뜻하는 노르망디도 있으니... 어차피 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른 명칭으로 쓰인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 '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모두 자신들이 로마고 로마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국명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궤를 같이한다.[73] 이미 오래전 고대 로마 시대에 탄생한 단어로서 동로마 땅과 연관성이 강한 '그라이키아' 로 이곳의 지명을 바꾸는 것은 서방인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서방인들이 동로마의 정통성을 깎을 목적으로 '그리스' 라는 말을 즐겨 썼음을 감안하면 이곳의 이름을 '로마니아' 에서 '그라이키아' 로 갈아치우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더욱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베네치아인들은 그러지 않았다.[74] 이 외에도 피렌체와 페라라에서는 요안니스 8세의 방문을 계기로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 수많은 이탈리아의 젊은 학자들이 동로마 사절단에게서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플라톤과 스트라보 등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어로 된 문헌의 수집 및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이 시기에 많이 이루어졌다. 덩달아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위조된 것이었음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한 15세기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의 경우 이 시기에 축적된 그리스어 텍스트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스어 성경과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성경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꾀하기도 했다.[75] 요안니스 8세 메달은 많은 수가 제작되어 유럽 곳곳에 퍼졌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오늘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구미의 여러 박물관들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달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서유럽에서는 당대에 생존한 인물의 얼굴을 넣은 메달 제작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76] 반대면에는 말을 타고 있는 요안니스 8세의 모습과 함께 '화가 피사노의 작품' 이라는 글귀가 그리스어(Ἕργον του Πισἀνου Ζωγρἀφου)와 라틴어(OPVS • PISANI • PICTORIS)로 새겨져 있다.[77] 여담으로 이때 피사넬로는 동로마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의 차림새에 대단히 감명을 받아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과 스케치를 다수 남겼고,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는데, 특히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의 경우 동방박사의 경배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발타사르(Balthasar)의 얼굴을 아예 요안니스 8세의 그것으로 묘사해 놓기까지 했다. 심지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5개 출입문 중 하나이자 가운데 문인 필라레테 문에도 요안니스 8세가 이탈리아로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등 당시 동로마 황제의 방문은 서구 예술가 및 인문학자들 사이에 있어서 엄청난 화젯거리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78] 이러한 명명법은 서유럽인들이 세운 라틴 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 다시 말해서 '로마 땅의 제국' 이었으니...[79] 서유럽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스만이 로마 제국과는 관계 없는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이다.[80] 수라꾸란의 각 장, 즉 챕터(chapter, 章)이다.[81] 참고로 과거 무료로 배포되던 한국어판 번역본에서는 번역자의 배경 지식 부족으로 2절이 “로마는 망하였으되”로 번역되어 있다. 애초에 해당 번역본은 “파라오족”같은 정체 불명의 어휘가 튀어나와서 읽는 사람들 뒷목을 잡게 하는 일이 많다.[82] 현대에는 이러한 사료들을 '비잔티움'이라고 번역한다.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역사왜곡일 수도 있다.[83] 동로마 제국의 유명한 장수 중 한 명 아스파르의 이름에서 따온 어휘로 아스파르의 부족이라는 뜻이다.[84]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이븐 카시르의 관점은 개신교 학자들이 가진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흡사했다. 이븐 카시르는 자신의 역사서 및 탑시르에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으며 개종 이후에도 기독교와 이교 이중 신앙을 가졌다.”라는 식의 서술을 남겼다.[85] 세르비아어로는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그리스어로는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 로 표기되었다. 세르비아어 명칭으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 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 라고 불리기도 했다.(참고로 'Emperor of the Serbs' 문서의 세르비아어 위키백과 타이틀은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방 세력을 상대로 한 라틴어 명칭으로는 'I(m)p(erator) Roma(niae)(Emperor of Romania)' 또는 'I(m)p(erator) Ro(ma)io(ru)m(Emperor of the Romans)' 을 사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도 자신이 '로마 황제' 에 올랐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86] 원저자는 미셸 카플란.[87] 다만 이 두 문제의 경우 현대 연구자들 중 다수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도 노리치와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으며, 점점 부상하는 추세다. 근거 없이 한 얘기는 아니란 소리다.[88] 물론 전설이지, 오스만 측 기록으로는 울며불며 기도하던 이들은 성당으로 들어온 오스만군에게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고자 끌려나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도시를 완전 점령하자마자 성당으로 들어온 메흐메트 2세가 학살을 그만두라고 명할 때까지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지 않지 않은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89] 앞서 언급하였듯, 터키인들은 이들을 독립국가 그리스인(Yunan)과 구별하여 '로마인(Rum)' 으로 부른다.[90] 잘 보면 자막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의 공식 지명인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리스의 입장이 반영된 부분이다.[91] 그리스어 형용사 ανατολικός는 '동쪽의' 이라는 의미이다. 아나톨리아라는 지명부터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영어로 직역해놓으면 Eastland, Easteria 정도로 치환할 수 있다. 참고로 '서쪽의' 는 δυτικός로 서로마 제국은 Δυτ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92] 즉 非 그리스-로마적인 문화, 언어, 종족성 등이 여전히 강했던 시리아, 레반트, 소아시아 중-동부 내륙 등의 지역은 배제한.[93] 콤니노스 시기의 저작물 중 하나에는 영어로 번역하면 'a Roman by birth', 즉 '출생에 의한 로마인'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근현대적 의미의 국적(이중국적, 속지주의, 속인주의 등) 개념이 없던 중세 시절, 저 구절은 종족적인 의미의 로마인, 즉 '로마족'(Roman ethnicity)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94] 이에 대한 일화로 이후 러시아 제국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적백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황제파는 극동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개월 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폴리스→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만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95] 다만 3편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제국으로도 로마 복원 결단을 실행할 수 있다.[96] 이 때문에 팬덤 내의 동로마빠 중에서는 '동로마 제국은 이미 로마 제국 그 자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왜 로마제국을 또 재건하냐'는 지적이 있기도 하였지만, 이벤트 텍스트를 잘 읽어보면 이벤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스스로 로마 제국의 재건을 선포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자 서유럽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를 장악함으로써) 더이상 서유럽 군주들이 동로마 제국을 "그건 진짜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제국일 뿐이다" 라고 폄하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벤트이다. 신롬 황제로 플레이하다가 AI에 의한 로마 재건 이벤트를 보게 될 경우의 선택지 역시 깨알같이 "하지만... 나의 제국은?".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주요 영토들에 대한 수복 이벤트 역시 동로마 제국으로 플레이할 경우에만[95] 볼 수 있을 정도로, 제작사 자체에서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국가는 오직 동로마 제국 뿐' 이라는 관점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97] 패치로 <정부 등급> 개념이 생기기 이전 버전에서는 동로마 전용 정부 체제인 <제국> 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군주의 칭호는 <황제>. 패치로 정부 등급 개념이 생기면서 전용 체제 제국은 삭제되었지만, 인게임상 국력 수준으로는 왕국->제국 승격은커녕 공국->왕국 승격도 힘든 수준이지만 처음부터 <제국> 등급으로 시작하기에 역시 군주의 칭호는 황제.[98] 다만, 편애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게 실제로도 로마 제국이고 황제의 칭호를 썼기에 오히려 고증이라 보는게 좋다.[99] 동로마 재건 필수 지역 인구는 디폴트 기준 도합 4800만. 마이너 국가 중점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징집 인구를 각기 5%, 2.5% 늘려주는 중점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제한적 징병 2.5%까지 더하면 무려 10%, 즉 480만 명의 인구를 징병할 수 있다. 거기에 공략상 이탈리아를 단독으로 장악하는 건 필수적이며 이탈리아에서의 승리 디시전 역시 존재하는데, 이탈리아 전체 인구가 역시 4천만을 넘어가며, 건설 슬롯 역시 열강 국가 답게 그럭저럭 동로마보단 괜찮게 열려있다. 즉, 56개 주 중 54개가 모두 핵심 주라 농촌일지언정 슬롯을 온전히 사용이 가능해져 중후반부 산업력을 쌓아 탄탄하게 성장이 가능해지고 병력 역시 1억 가까이 되는 인구 중 1천만 명 가량 징병이 가능해 보병 스패밍이 가능해지는 초강대국이 된다는 소리다. 거기다가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디시전에 포함되지 않아, 사르데냐에 괴뢰정부 차리게 만들고 서서히 합병해 비록 성능은 쓰레기일지라도, 꼴에 열강이라고 제법 갖춘 이탈리아 해군을 고스란히 손에 넣어 유익하게 굴릴 수 있게 된다.[100] 로마 귀족들을 물갈이한다고 십자군을 끌고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다.[101] 중세 유럽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비유하자면, 조선 대역인데 조선이 일본식 봉건제를 사용하고 조선인도 아닌 조선의 쇼군이 여진족 같은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보면 된다.[102] 블라디미르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에 배신은 불가능하다. 알렉시오스 4세와의 가장 큰 차이점.[103] 왕국이다.[104] 전신인 누메노르의 모티브는 로마 제국, 아틀란티스 등으로 추정된다. 아르노르는 몰락하였다가 수복되는 서로마 비슷한 위상일 것이다.[105] 다만 볼란티스는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