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삼국지)
曺冏[1]
(?~?)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원수(元首).
조조의 할아버지인 조등의 셋째형 조숙흥의 후예로 홍농태수를 지냈다.[2]
243년에 조상의 집권 시기로 당시 천자가 어렸기에 조상을 감동시키길 바라고 육대론이라 부르는 날카로운 상소를 올렸으나 조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처음에는 중국의 이성제후와 동성제후 제도의 의의를 말한 것으로 이는 옛날 주나라에서 친척들과 공신들에게 봉토를 주었다가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대처한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옛날 제왕이 반드시 동성의 제후를 봉한 것은 친친(친족간의 화목)을 밝힌 것이고 이성의 제후를 봉한 것은 현현(현인을 존중함)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친친을 구사하면 점차 쇠약하게 되고 현현만을 구사하면 겁탈(찬탈)의 병폐를 가져옵니다. 성현들은 이를 알고 광범위하게 인재를 구하되 친소를 막론하고 발탁함으로써 능히 국가를 보존하고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것에서는 위나라가 귀족들이 군권, 행정권을 독점하는데, 황족들은 미약하다는 내용[3] 으로 선대에 해당하는 조비가 후계를 위협할만한 황족인 조창, 조식 뿐만 아니라 여러 황족들을 연금 상태에 놓고 지나치게 억눌러 위나라의 방계 황족들은 힘이 매우 약한 상태였다.지금 위나라는 존존(현인을 존중함)의 법은 비록 밝게 되어있으나 친친의 조치는 완비되지 않아 어떤 자는 비록 임용되어도 중용되지 않고 어떤 자는 아예 버려져 임용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 황실의 자제가 빈 땅에 봉해져 군왕 밑에 부릴 수 있는 백성이 아무도 없습니다. 황실의 일족은 민간 속에서 떠돌며 국가의 정치를 들을 수 없으니 권력이 필부와 같고 위세가 평민과 같아졌습니다. 안으로는 뽑히지 않는 깊은 뿌리의 견고함이 없고 밖으로는 반석과 같은 일족동맹의 도움이 없으니 이는 사직을 안정시켜 만세의 대업을 이루는 계책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주목과 군수는 옛날 방백 및 제후와 같이 모두 1천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점거한 채 문무의 고위직을 겸하고 있습니다. 어떤자는 일가중에 몇 사람이 수개 주군의 장관을 맡고 있고 어떤 자는 형제가 공동으로 한 지역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황실의 자제는 오히려 몸 하나 기울일 당도 없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니 이는 강간약지하여 만일의 우환을 대비하는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지금 용현을 보면 어떤자는 통상의 기준을 건너뛰어 커다란 지역의 장관이 되기도 하고어떤자는 편사(편대)의 장수가 되기도 합니다.그러나 황실의 자제 중에서 문재가 있는 자는 겨우 작은 현의 현장이나 되고 무략이 있는자 또한 백부장이 되는데 불과하니 이는 현능한 자를 발탁하고 종실을 장려하는 예유가 아닙니다. 제왕은 안전할때 위험을 잊지않고, 생존할때 죽음을 잊지않으니 천하에 비록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종내 위망의 우환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위나라는 황족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고 황족이 있어서 한나라가 왕망에 의해 망하고도 후한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며 황족들이 이름만 왕인데 실제 권한이 없으니 그냥 이름만 왕이지 평민과 같은 신세인데 반해 귀족들은 문무 고위직 겸하고, 친척과 형제끼리 넓은지역을 다스리고 있으며 인사제도도 귀족들은 행정, 군권을 잡고있는데 황족은 겨우 작은 현 현장, 일개 백부장이나 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황족이 힘이 있어야 변란이 있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건의를 조상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마씨의 고평릉 사변으로 조씨들은 실권을 잃었다.
손성은 위나라의 봉건제도에 대해 평가하면서 오등작의 제도를 만세토록 바꿀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6대의 흥망에 관해 조경이 상세하게 논했다고 언급했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의 주석에서 '명제 조예도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종실들을 써달라는) 삼촌 진사왕 조식의 건의를 채택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어린 황제를 끼고 있는 조상이어서야!'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