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삼국지)
曹植[1]
(192년 ~ 232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문인. 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사왕(思王).
조조와 무선황후의 아들, 조비, 조창의 친동생이자 조웅의 친형이다.[2] 아내는 최염의 조카딸인 최씨. 현재의 산둥성 출신.
2. 생애
2.1. 조조 치세
재기발랄한 성품으로 특히 문재가 유독 뛰어나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아낀 조조가 장자인 조비를 제쳐놓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고민하였을 정도. 조식의 주위에는 양수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고, 순욱의 아들인 순운이나, 정의, 정이 형제들도 조식의 파벌이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비는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재능이 아니라 효심을 보여 조조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조식은 자유분방한 성품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구설수에 오르는 등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조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양수가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조조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는데, 후계자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해 조조의 마음을 더 거스르게 된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가후에게 질문했는데, 가후는 한참 뜸을 들이다 "아, 원소와 유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해 조조가 결정적으로 조비를 태자로 삼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3] 하지만 실제로는 가후뿐만 아니라 모개도 원소의 예를 들어 조비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카딸을 조식에게 시집보냈던 최염도 장자계승을 이유로 조비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즉, 여러 인물들이 장자 계승 원칙을 주장해야 했을 만큼 조조는 재능 있는 조식에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이었다.[4]
모개나 최염 등이 장자계승 원칙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5] 조식의 행실 문제가 지적되면서 조조는 결국 조비를 태자로 삼았다. 조비가 태자가 된 이후에도 조식은 제법 지지세력이 남아 있었고 조조도 조비를 태자로 삼음과 동시에 조식에게는 식읍 5천 호를 더하여 총 1만 호의 식읍을 주는 등 총애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 천자가 가는 길을 통해 궁문을 열고 나간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대노한 조조에게 문책받는 것을 계기로 점차 조조 총애를 잃었고, 이 무렵 조조가 조식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견제해 양수를 죽였기에 조식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219년,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 대행으로 임명해 구원군을 지원하라고 불렀으나, 이때 조식이 술에 취해 조조의 명령을 받들 수 없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사 완전히 총애를 잃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씨춘추》에서는 이때 조비가 조식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조조의 왕명을 받지 못하게 한 것으로 나온다. 《위씨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식은 조비의 음해공작에 희생'''된 것인데, 조조가 앞뒤 사정도 안 살펴 보고 그대로 관직에서 내쫓았던 것이나 이미 이전 태자 책봉 무렵 때부터 조식의 음주벽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을 봤을 때 그동안 술 문제로 조조의 속을 썩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이렇게 조조가 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느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단을 늦춘 것은 조식의 재능을 이용하여 '문학'의 지위를 확립함으로서 명사(특히 순욱을 위시로 한 예주 영천군 출신들이나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명사들)에 대항한다는 선택지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기초하여 인사를 담당했던 정의는 조식의 고굉이었다.[6] [7]
그러나 적벽대전의 패퇴, 그 결과로 촉한, 손오정권이 출현함으로서 조조는 명사들의 협력을 단절하면서까지 군주권의 확립을 도모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조조가 조비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이런 사정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진군#s-2의 헌책으로 명사에게 유리한 구품관인법을 조비가 제정한 것도 이 사정의 결과.
2.2. 조비 치세
한편 조조는 죽기 직전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차남 조창을 급하게 부르는데,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만다. 조창을 견제한 조비가 절차를 생략하고 황급히 왕위에 오르는데,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다."라는 말로 조식을 부추기지만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지켜보지 않았냐는 말로 조창의 제안을 거부한다.
위왕에 오른 조비는 조식의 측근이었던 정의, 정이 형제를 죽이고 왕의 사자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조식까지 죽이려 하지만 조식이 이른바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 칠보시 자체는 후세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세설신어》에서는 이 칠보시를 완성한 조식에 대해 세간에서 그를 수놓은 호랑이라고 품평했다고 한다.
한가지 특기 사항으로는 소칙전의 기록에 한이 위씨에게 선양하려 하자 이를 슬퍼하여 소칙과 함께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다. 주석 위략에는 소칙은 헌제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여 곡을 했는데, 조식의 경우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조의 총애를 잃은 것을 한탄하면서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럴 거면 굳이 상복까지 입고 곡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건 한의 신하로서 그랬건 진의가 어찌되었던 건에 조비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이후 조식은 조비의 집요한 견제를 받으며 봉지를 임성에서 옹구로 옮기며 불우하게 사는데, 조비에게 자신을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조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했는데, 내용이 매우 불쌍하다.
2.3. 조예 치세
조예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조식과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견제는 오히려 조비때보다 더 심해져, 227년에 준의로, 228년에는 다시 옹구로, 229년에는 동아로 봉지가 바뀌었다가, 232년에 진으로 바뀐다.[8]
조식은 항상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함을 분개해 했으므로 228년 표를 올려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병졸로 싸우며 죽을 각오도 보였지만 조예는 조식을 임용하지 않았다. 231년 조식은 다시 상소를 올려 친척의 안부를 묻고 그 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
친척들과도 교류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조씨들에 대한 압박을 풀어줄 것을 부탁하고 황제가 질문하는 것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겨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꿈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라며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조예는 이를 보고 제후국간의 교류를 금지하는 법은 원래 없었으며 이를 시정하겠다고 답장하였지만 역시 임용해주지는 않았다. 조식은 다시 상소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대신들 앞에서 시험해줄 것을 청하지만 조예는 좋은 문장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232년 조예는 조식을 진왕으로 봉하고 식읍을 하사했다. 조식은 항상 조예를 혼자서 만나 당시의 정치적 득실을 말하고 임용받고 싶어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결국 근심에 젖어 살다가 그 해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상술했듯이 봉지 이동이 모두 조식에 대한 견제 의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조식을 배려하여 옮겨준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조예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면 조예는 아버지에게 박대받는 삼촌을 인간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직계혈족의 정치참여를 차단한 선대의 방침을 거스르면서 조식을 중용할 생각은 없었다. 본인의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고.
조예 시절 사마의가 오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자 사마의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전략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마의 본인이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조휴가 석정에서 참패한 것을 봤을 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휴가 패하면서 조식의 선견지명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보면 조식은 실세에서 밀려난 후에도 나름대로 여러 루트를 통해 정치, 군사상의 주요 동향을 열심히 파악하며 정세를 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천재적인 문장력에 가려서 그렇지 조식의 군재도 뛰어난 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예도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 않았기에''' 조식은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경초 연간, 조예는 조서를 내려 황초 연간에 조식의 죄상을 탄핵하려던 문건을 회수하여 모두 폐기하도록 하고 조식이 지은 부ㆍ송ㆍ시ㆍ명ㆍ잡론 모두 백여 편을 초록하여 궁궐 안팎에 간수하도록 하였다. 비록 조예가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명문장들이 현존하는 데에는 조예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 평가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한 도시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군사기지화한 상태였고,[9] 그 규모상 1, 2년의 수탈로 완성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조식이 묘사했던 것처럼 초현의 지역 사회는 박살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식이 이 귀사부를 발표한 것과 같은 해에 조비는 초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는 임와부라는 부를 지어 발표했다는 것. 시적인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한없이 막장스러운 인간성의 조비가 비판을 받는 21세기의 추세에 더해 조식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부터 조비와 극명히 달랐다는 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초현의 군사기지는 무슨 동탁마냥 개인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아니라 1240년 홍수로 매몰되기 이전까지 군사용으로 계속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조 생전에 이 일대는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인데, 지배자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축조한 동탁의 미오성과 달리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요새를 건설한 것으로 국가 안보를 위한 행위에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대놓고 비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것. 거기에 후대에까지 거의 천 년이 넘게 군사기지로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이는 이 지역의 군사기지를 세워 천 년 동안이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조조의 치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기에 조식의 이 문학 작품은 조식의 인격을 보여주는 용도로 볼 수 있긴 해도 그 이상으로 해석하는 건 또 곤란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 것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인데, 당장 조조 사후 한 일만 봐도 그렇다. 군사기지는 뭐 그렇다 쳐도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에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척박한 초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하자 노육은 그 곳에서의 백성들의 빈곤한 생활을 보고 표를 올려 그들을 비옥한 양 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는데, 조비는 그의 말에는 따랐으나 크게 실망하고 마음속으로는 노육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비답게(...) 그를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고 수양전농교위에 임명한다. 또 조비의 뒤를 이었던 조예는 초기는 잘하나 싶더니 후기로 가면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여러 이유가 겹쳐서 위 3대 동안 백성들은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조식은 시골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곁에서 그걸 직접 보고 겪었으니 제법 공감이 갔을 것이다.
반면 조식은 조비 시절 '''자신의 봉국 내 영지를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토지가 부족해 필요한 만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표를 올려 농부들에게 땅을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조예가 봉국의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해가자 이를 반대하는 표를 짓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라,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매사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치졸했던 조비와는 인격 자체부터가 달랐다는 것. 조조 사후 조창의 부추김을 단칼에 거절한 것도 조식이 이토록 상식적인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딱 봐도 매우 영민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주상이 아닌가. '''
조조가 원가의 몰락을 보고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천재, 제왕의 인품, 그리고 의외로 대국적인 안목과 수준급 군재까지 [10] 겸비한 조식을 장자이지만 문제점이 많았던 조비를 제끼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한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술만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술을 마시더라도 절제하면서 이런 인품과 덕망을 아버지의 눈에 더 자주 보였다면 '''조위의 역사는 다른쪽으로 달라질 수도 있었을것이다.''' 사실 일부는 형 조비의 음모로 술에 취해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고.
밀려난 이후에도 네임밸류 자체는 워낙 거물급이었기에 행보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대에 핍박받던 인물들이 7년 뒤인 239년, 조예 사후의 격변을 틈타 정권을 잡고 사마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봤을 때 41세라는 이른 나이의 죽음은 너무 빠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예 사후에도 살아있었으면 근왕 세력의 거두[11] 로써 사마씨의 찬탈을 막을 수 있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예는 조비처럼 대놓고 조식을 비롯한 다른 황족들을 갈구지 않았다 해도 의심병은 아버지 못지않게 심하다. 뭔가 제대로 홀렸는지 이해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예는 조방의 약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로 밀려는 아집을 [12]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숙부이자 조씨 황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우와 어릴적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조우가 정통성이 약한 후계자에게 위협 인물이라고 단정지어서 숙청하고 차라리 방계인 조상과 권신인 사마의에게 뒤를 맡길 정도였다. 조식은 조우의 형이자 한 때 조비를 앞질렀던 후계 유망주였는데 절대로 그런 실력자를 조예가 차라리 숙청하지 뒤를 맡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4. 문학적 재능
앞서 말한 대로 시문에 굉장히 빼어났기 때문에 그의 시는 후세의 문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삼국시대의 건안칠자와 더불어 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로서 문학의 귀재로 불렸을 정도이다. 남북조시대 종영이란 사람은 전대의 문장가들의 시를 집대성해 평가한 책인 시품에서 조식의 문학적 재능을 인간에서는 주공 공자, 동물에서는 용 봉황, 음악에서는 거문고와 생황, 재봉에서는 천자의 예복 자수에 비교했고, 역시 남북조시대의 빼어난 문인인 사령운은 조식을 문장에 대한 천하의 재능이 1말이라면 그 중 8두를 조식이 차지한다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이렇듯 후에 두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의 시성으로 불렸다.
이런 그의 재능은 삼국지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은 보게되는 칠보시로 잘 알려져 있다.[13] 그가 남긴 문장들은 그의 문집인 조자건집에 전한다.[14]
연의에 나오는 동작대의 건립을 기념하여 지은 "동작대부"는 엉뚱하게도 제갈량에 의해 주유를 열받게 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의 동작대는 적벽대전 이후에 건립.
제갈량이 조식과 키배를 뜬 적이 있기는 하다. 조식이 광무제의 사적을 예로 들며 광무제의 운태 28장은 한고조 유방의 한신, 팽월, 영포, 소하, 장량 같은 인물에 미치지 못한다는 논설을 폈는데, 제갈량이 거기에 반박하여 주장하기를, "한고조는 재능에 부족함이 있어 신하들이 스스로 활약할 여지가 있었으나, 광무제는 너무 뛰어나서 운태 28장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건 답이 없는 문제이기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생각하기 나름. 그래도 이 설전이 그래도 당대의 기재인 제갈량 측에서부터 태클을 걸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식의 수준이 짐작갈 것이다.[15]
위왕의 잘 나가던 왕자였던 시절 시는 부어라 마셔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내가 세상 평정하리 식의 호방한 시가 많지만 떨거지가 된 이후에는 처량한 기색이 묻어나온다. 황도에서 벗어나 촌구석을 전전하다 보니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고 그를 슬퍼하며 읊은 노래도 제법 된다.
그가 자신에게 형수가 되는 조비의 아내인 문소황후를 남몰래 연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걸작 낙신부는 낙수의 여신 복비[16] 와 조우하여 그녀의 미모를 읊은 시인데, 혹자들이 평하길 이 시의 복비가 바로 문소황후라고 한다. 다만 사료 상의 근거는 불분명하고, 그저 후세인들의 찌라시일지도. 다만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해당 내용이 묘사되어있다.
조식은 조비와 조예에게 핍박 받던 시기에 지은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이 유명하다. 야전황작행이란 '들판의 참새'라는 뜻으로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명성에 비하면 작품의 인지도는 이백이나 두보에 비해 별로 없다. 일반인들에게 조식의 작품을 물으면 기껏해야 원작자도 확실치 않은 칠보시나 언급되는 수준이며 좀 안다는 삼덕이나 역덕 레벨에서도 대부분 낙신부, 백마편이나 들어봤을 정도. 조식의 재능과 명성에 거품이 있어서는 아니고 시문이라는 것이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것이라 서기 3세기 위나라 사람인 조식의 작품은 짧게 몇마디로 끝나는 당나라 시인 이백, 두보의 작품보다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5. 기타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조식이 유객환이라는 퍼즐을 만들어서 아내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식이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이 경범(驚帆)이라고 한다.
조식의 아들은 조지, 딸은 조금호와 조행녀가 기록에 남아있다.
6. 미디어 믹스
- 조식(삼국지)/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현재는 이 조식(曹植)과 조선시대의 조식(曺植)이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옛 문헌을 보면 에는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이 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이복형인 조앙, 조삭까지 따지면 다섯째 아들이다.[3] 장자를 후사로 삼지 않았다가 패가망신한 원소와 유표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교훈.[4] 사실 원소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담은 무인으로써의 능력은 나름대로 입증했지만 통치 능력에 있어서는 낙제 평가를 받았고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던 원상이 어린 나이에도 원담을 격파하고 조조를 일시적으로 물리치는 능력을 선보인 것으로 봐서는 원소의 원상 후계자 선택은 능력이라는 면에서는 딱히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유표의 경우는 유종을 후계자로 택한 이유가 유종의 뒤에 있는 채씨 가문의 강대한 위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단지 그들의 문제는 원소의 경우 원담을 배제하기로 작정했다면 호적에서까지 파버린 시점에서 아예 청주 지배권까지 박탈했어야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원담이 자체 세력을 유지하게 만듬), 유표의 경우 유종 선택은 내부 호족 세력들의 후계자 구도 정치 싸움 상 유기가 도저히 승산이 없어서 그랬다는 결론에서 나온건데 그 호족 세력들이 조조를 막을 능력은 또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5] 아이러니하게도 저 말을 한 두 사람은 조조에게 있어서 공신급 인물들인데, 조조는 위왕 즉위 이후 거슬린다며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최염을 처형하고, 모개를 면직시켰다.[6] 조식이 당대제일이라 그렇지 조비의 문학적 재능 또한 최고수준이었다. 종영의 시품에서 조식은 상품, 조비는 중품, 조조는 하품에 평가되어 있는데 건안칠자 중 왕찬, 유정이 상품이고 서간, 완우가 하품이다.[7] 조비 역시 건안칠자 대부분과 깊은 교류를 맺어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인사들을 모았고, 조식 쪽 인사인 양수, 순운은 한나라 대대로 명사 출신이다. 조비 쪽이나 조식 쪽 모두 문학+명사 골고루 모인 셈인데 그 점으로 누굴 택한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사실 후대로 갈수록 조식과 조비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평가가 계속 벌어지면서 생긴 선입견에 가깝다.[8] 다만 이 중엔 조식의 편의를 위해서 옮겨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봉지의 변경이 모두 조식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은 아니다.[9] 동서 8km 규모의 거대한 지하땅굴이 발굴되었고, 발견된 것 외에 매몰된 부분이 더 있어 최대 12km 규모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땅굴은 군사용으로 송대까지 쓰이다 홍수로 매몰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땅굴과 약간의 건물터뿐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은 성벽과 군사 주둔지, 도로 등의 부대시설을 감안하면 조조 생전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채였을 것.[10] 바로 윗형 조창의 압도적인 무인 포스 때문에 대조적으로 문약한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사마의의 대오전략을 비판할 정도로 문에 치우치지 않았고 심지어 조조가 당대 톱 클레스 장수인 관우를 상대로 조식을 총사령관으로 형주에 급파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지속적인 전쟁삽질을 한 큰형 조비보다 군략 또한 훨씬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11]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조상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 했으니 사마씨한테는 최고의 빈틈이 생긴 것.[12] 조방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예는 그런 짐덩이를 양아들로 세우는 자충수를 두었다.[13] 다만 진짜 조식의 창작인지는 불명.[14] 참고로 한국에도 번역된 책이다.[15] 둘의 키배가 사실이라면 왜 조식이 제갈량에게 의도적으로 설전을 걸고, 제갈량이 굳이 받아들였는가를 짐작 가능한데 조식은 조조를 광무제에 대입하여 추켜세워 조씨가 유씨로부터 나라를 찬탈한 것을 아주 마땅한 일로 포장하기 위함이고, 촉의 건국이념이 한나라를 계승하여 역적짓을 한 위나라를 토벌한다는 걸 내세운만큼 직접 반박해야 한다고 제갈량이 판단해서로 추정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는데, 조비-조예 부자에게 공기취급 받는 조식을 건드려서 위나라 내부에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떡밥을 투척해본 거라는 해석(...).[16] 하백의 아내이지만 예와 바람이 나서 하백이 예와 싸우다 한쪽 눈을 잃게 만들었다. 아름답지만 방탕한 이미지가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