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림

 

趙大臨
(1387 ~ 1430)
조선의 인물. 자는 겸지(謙之).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평양부 사람으로 태종 대에 총애를 받아 군직에 주로 임명되었다가 세종 대에는 외교 관련 일을 종사했다.
1402년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호군을 지내다가 1403년에 명나라의 통혼 요청을 막기 위해 경정공주와 결혼했는데, 이 때 조대림은 모친상을 당한 지 4달 밖에 되지 않아 상복을 벗고 혼인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11월 9일에 평녕군에 봉해졌고 1407년에 용양, 용기, 용무사상호군을 겸임하다가 좌군 도총제를 겸임했는데, 12월 5일에 목인해로부터 반란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으면서 조대림 사건이 일어나고 조대림은 순금사에 갇히게 된다.
조대림은 장형 64대를 맞았지만 죄가 없는 것이 입증되어 석방되었으며, 1409년에는 병서 강토 총제, 평양도도절제사 등을 역임하고 순위사를 시위사로 개편하면서 총제에서 해임되었다. 1410년에는 윤사수와 함께 명나라에 북벌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1411년에는 서북면의 흉년에 대해 풍해도의 저축한 곡식을 수로, 육로로 보내서 돕고 풍해도의 백성은 개성에 저축한 8만석, 임진 이북의 각 고을의 곡식을 수로로 보내면 된다고 했다.
1418년에 절제사가 되었고 이후로는 여러 차례 유후사에 파견되어 사신을 접대하거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일 등 외교적인 일을 담당했으며, 1422년에 보국숭록 평양부원군, 1426년에는 대광보국에 봉해졌다가 1430년에 사망하자 시호를 강안(康安)이라 했다.
평가를 내리면 조선 건국의 핵심 공신인 아버지엔 미치지 못한 인물. 그래도 그 어려운 과거에 합격하고 조선을 대표하여 사신단을 이끌고 명나라에 다녀온 인물이며, 아버지가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 초기 경제정책의 핵심인물인 조준이다 보니 저평가 받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