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호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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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프랜치-인디언 전쟁 시기인 1755년 9월 8일 뉴욕 조지 호수 남단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고전했으나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고, 이후 양국의 군사 대립은 한층 더 격화된다.

2. 배경


이로쿼이 족의 영국 에이전트로 지명된 윌리엄 존슨 경은 1755년 8월 28일 프랑스 측이 '상 사크르망 호수(Lac Saint Sacrement)'라는 명칭을 붙인 호수의 남단에 도착했다. 그는 이 호수를 당시 영국 국왕 조지 2세를 기리고자 '조지 호수'로 개명했다. 존슨은 이 호수와 챔플레인 호수를 거쳐 진군하여 프랑스령 생 프레드릭 요새를 공략하여 크라운 포인트를 장악하기로 했다. 이 크라운 포인트는 영국군이 캐나다를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할 요충지였다.
한편, 크라운 포인트의 수비를 맡고 있던 프랑스군 사령관 장 에르망 디스카우는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크라운 포인트를 떠나 조지 호수와 챔플레인 호수 사이의 둔지에 진을 쳤다. 그해 9월 4일, 디스카우는 존슨의 주력군이 조지 호수를 떠났다고 판단하고 적의 빈틈을 노려 리만 요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디스카우의 병사들은 남쪽으로 남하해 9월 7일 저녁에 리먼 요새 근방으로 접근했다.
이때 존슨은 리먼 요새에서 북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척후병으로부터 적이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적이 리먼 요새를 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급히 요새에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전령은 요새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프랑스군에게 붙들렸다. 디스카우는 적의 주력군이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들을 먼저 격파하기로 판단해 군대의 방향을 틀었다.
자신이 보낸 전령이 붙들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존슨은 9월 8일에 에피라임 윌리엄스 대령에게 500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리먼 요새를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뒤이어 나단 휘팅 대령에게도 별동대를 이끌고 리먼 요새로 가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양측의 교전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제1 매사추세츠 주 방위군: 450명. 티모시 러글 대령 지휘.
- 제2 매사추세츠 주 방위군: 450명. 모세 티트콤 대령 지휘.
- 제3 매사추세츠 주 방위군: 450명. 에브라임 윌리엄스 대령 지휘.
- 제1 코네티컷 주 방위군: 450명. 피네아스 리먼 소령 지휘.
- 제2 코네티컷 주 방위군: 450명. 나단 휘팅 대령 지휘.
- 로드 아일랜드주 방위군: 250명. 콜 중사 지휘.
- 뉴욕주 민병대: 200명.
  • 이로쿼이 인디언: 250명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장 에르망 디스카우
  • 프랑스군: 216명
- 랑그도크 보병대
- 라렌느 보병대
  • 인디언: 600명

4. 전투 경과


약 1,500명의 병력을 확보한 디스카우는 숲을 통해 빠르게 전진하여 곧 존슨의 진영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계곡으로 들어갔다. 캐나다 민병대와 인디언들이 숲 속을 이동하는 동안 정규병들은 길을 따라 행진했다. 그들은 호수에서 5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들의 척후병들이 영국군 파견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알린 탈영병을 데리고 왔다. 이에 디스카우는 매복을 준비했고, 오전 10시 30분 쯤 윌리엄스 대령의 분견대가 매복에 걸려 삽시간에 박살나 본진을 향해 패주했다. 에피라임 윌리엄스 대령과 이로쿼이 동맹에 속한 모호크족 추장 헨드릭 테야노긴이 이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디스커우는 11시경에 그의 병력을 재편성했다.
한편, 존슨은 전방에서 총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뒤이어 위급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들었다. 그는 즉시 진영 앞에 통나무들과 마차, 나무배 등으로 만든 급조된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바리케이드는 진영의 좌측 언덕에서 우측 습지까지 뻗어있었다. 또한 도로에 세 개의 포대를 배치했고 네번쨰 포대는 언덕 꼭대기에 배치했다. 곧 매복에 걸려 패퇴한 병사들이 진영에 도착했다. 그들로부터 상황을 들은 존슨은 약 500명의 병사들에게 진영의 측면을 지키게 했고 나머지는 바리케이드 뒤에 자리를 잡았다.
낮 12시 30분, 디스커우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진지에서 150야드 이내로 접근해왔다. 프랑스 정규군은 도로로 진군했고 캐나다 민병대와 인디언들은 숲을 통해 접근했다. 프랑스 정규군은 대열을 갖추고 일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개의 포대를 운용하고 있던 영국군들이 일제히 포도탄을 발사했다. 결국 프랑스 정규병들은 적의 이같은 반격에 못 버티고 후퇴했다. 한편, 프랑스 분견대는 영국군 우익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던 중 존슨이 부상을 입자 피네아스 리먼 소령이 대신 군대를 지휘했다.
한편, 프랑스에 가담한 인디언들은 습지를 넘어 우측으로 간신히 올라가 측면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포격을 가해오는 영국 포병대에게 밀려 패주했다. 그러던 중 디스커우는 방광에 총탄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후 프랑스군이 지리멸렬해지자, 영국군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했고 디스커우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다가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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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크족 인디언을 말려서 디스커우의 목숨을 구한 존슨. 벤자민 웨스트 작.
이때 한 모호크족 인디언이 추장을 죽인 디스커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다가가자 윌리엄 존슨이 그 인디언을 말려서 그러지 못하게 했다. 이후 디스커우는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1763년에야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조지 호수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조지 호수 전투에서 영국군의 손실은 190명 사망, 150명 부상, 62명 실종에 달했고, 프랑스군은 132명 사망, 184명이 부상당했는데 대부분 프랑스 정규병들이었다. 에피라임 윌리엄스 대령과 모호크족 추장 헨드릭 테야노긴이 전사했고 존슨은 큰 부상을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총사령관 디스카우가 생포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를 돌러싼 대립은 격화되었고, 양측은 조지 호수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