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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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83년 10월 30일 ~ 1760년 10월 25일(만 76세 360일).
재위기간: 1727년 6월 11일 ~ 1760년 10월 25일. (33년 4개월 14일)
조지 1세의 아들로 영국과 하노버 공국의 군주였다.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2. 생애
4세가 될 때까지 프랑스어만 사용했다가 이때부터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도 배웠다. 특히 영어는 외국어로서 배운 것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능숙하게는 했으며, 이 점에서는 아버지 조지 1세보다 훨씬 나았다.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아버지 조지 1세는 그녀를 감금했다.[2][3] 그리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조지 2세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대신 로버트 월폴 등과 어울렸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헨델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헨델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메시아를 부를 때 기립해 할렐루야 부분에서 기립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지 2세는 아버지 조지 1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조지 2세의 아들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도 사이가 좋질 않았다. '''콩가루 집안 중 망하지 않은 사례'''
1705년 호엔촐레른 왕가의 방계 출신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결혼했다. 캐롤라인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으로 아이작 뉴턴 등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으며 조지 2세에게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기 전 재혼을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2세는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다만 애인들은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의 가장 큰 사건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담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식민제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4년간 벌어진 이 식민지 쟁탈전은 평화조약으로 원상 복구되었지만, 상호 식민지 점령 속에 영국의 우세로 끝났다. 이를 그의 이름을 따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 1744~1748)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중에는 데팅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참고로, '''몸소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다.'''
그러나 이런 영국의 행보를 얌체 짓으로 생각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의 역전으로 버림받은 영국은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이로 말미암은 1756년 7년 전쟁이 벌어져 프랑스, 스페인과 식민지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4] 7년 전쟁 역시 프랑스가 영국령 마요르카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맏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프레데릭이 조지 2세에 반대하던 토리당과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릭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5] 대신 프레데릭의 아들인 조지가 조지 3세에 오른다.
3. 여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에 나오는 영국 왕이 바로 이 조지 2세이다. 대항해시대 말기, 카리브해의 해적 토벌에도 열정적이어서 우즈 로저스를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하여 낫소에 자리 잡은 해적 공화국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던 전적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마지막 영국 왕이기도 하다. 이후의 왕들은 런던 교외의 윈저 성에 묻혔다.
영국 외의 지역에서 출생한 마지막 영국 왕이다. 이후의 왕들은 모두 영국내에서 태어났다.
조지 2세의 장남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유복녀, 즉 조지 2세의 손녀 캐롤라인 마틸다는 15세 때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왕의 주치의였던 독일인 요한 슈트루엔제와의 불륜설로 인해 이혼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이후 23살의 나이에 성홍열로 독일에서 사망했다.
[1] 조지 3세의 아버지.[2] 근데 조지 1세의 경우에는 한술 더 떠서 애첩이 여러 명이었는데 아내가 항의하자 폭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애첩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 폭행한 경우도 있다고.[3] 당시 유럽의 시대상으로는 귀부인이 애인을 두는 것은 쉬쉬해야 할 부끄러운 비밀이지만 귀족 신사의 경우 거의 공식적으로 애첩을 두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장되어서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거나 없으면 고자 취급을 받았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공공연한 비밀' 정도였지 엄청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 건 아니었다. 너무 심하게 난봉꾼 노릇을 하거나, 상식선에서 본처를 존중하지 않고 혼인이 파탄 상태에 이르면 본격적인 명예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조지 1세의 아내 취급은 당대 기준으로도 정상적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다(...)[4] 77세 생일을 5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5] 프레데릭의 생몰년도:1707~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