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열차 추돌사고
'''천안역구(口) 열차 추돌사고''' 혹은 '''천안 열차 대참사'''라고도 한다.
1. 개요
1969년 1월 31일 오전 11시 55분경 경부선 천안역 남쪽 500m지점에서 정차중인 남원발 서울행 102호 완행열차를 부산발 서울행 10호 청룡호가 추돌하여 '''41명이 사망, 102명이 중경상(중상 58명 경상 44명)'''을 입은 사고이다.
2. 발생 과정
폭설이 내렸던 천안역 남쪽 500m(서울 기점 98.5km)지점에서 남원발 서울행 102호 완행열차가 진입대기 신호로 정차, 대기중이었다. 이후 시격 3분 뒤의 열차인 부산발 서울행 제10 청룡호 열차가 천안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데, 자동폐색신호가 적색임에도 시속 80km로 달리다가 약 250m 앞에 있는 열차를 발견하고 긴급제동을 했으나 102호 완행열차를 추돌하였다. 이 추돌사고로 102호 완행열차의 맨 뒷 2등객차가 타오름 현상[1] 을 일으켜 3등객차를 약 50% 넘게 덮쳤다. 이 바람에 이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의 대부분이 2등객차에 깔려 즉사하거나 객차내 시설물에 깔려버리게 되어 인명피해가 매우 컸다.
당시 신문기사를 참고하자. 사진을 보면 타오름 현상이 매우 심각한 인명피해를 초래했음을 알수가 있다. 영상은 여기를 참고하자.
3. 사고 원인
사고 직후, 철도 당국은 신호를 무시하고 속도를 감속하지 않은 기관사 과실이라고 발표하고 청룡호 기관사를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구속한다. 그러나 구속된 기관사는 뜻밖의 증언을 한다. '''지령으로 폭설 때문에 자동폐색식이 아닌 통신식(역구간 폐색식)으로 운행하라 했다'''는 것. 그렇다면 당연히 자동폐색신호는 무시하는게 맞다. 그래서 조사해보니, 대전사무소에서 재래식으로 운행하라고 한 사실이 있었다. 문제는 서울지역사무소에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서울사무소의 관할인 천안역부터는 해당이 안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천안역에서 대기중인 102호 완행열차가 왜 12개나 되어 있는 입환선을 두고 경부본선에 대기중이었나도 문제제기가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뻔히 뒤에 열차가 오는데 '''뒤에서 차가 오는 도로 한가운데에 버스를 세워두는''' 것과 같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열차가 40분 지연을 하는 바람에 플랫폼에 정차중이었고 출발하려고 했으나 전철기(선로변환기)가 폭설에 얼어 녹인다고 대기중이었던 것이다. 당시 천안역 배선도는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 천안역처럼 주본선에서 분기하는 선로전환기가 1개였다면 나머지 선로로 진입할 수 없었을거다.
제일 큰 문제는 폭설이 와서 철도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서행운행을 건의했음에도 '''윗선에서 정상운행 명령'''을 지시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경부선의 선로용량이 모자라 ABS[2] , ATS[3] 를 통해 운행량을 늘리려 했고 열차 시격이 고작 2~3분대였음을 감안하면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4. 사고 여파
원인이 이렇다보니, 언론들도 처음엔 기관사 과실로 가다가 지역사무소들의 삽질과 폭설속 철도국의 곡괭이질이 입방아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사고 기관사의 과실을 묻는것은 부당하다는 기관사 노조들의 주장도 있을 정도이니 철도국 높으신 분들의 과실은 피하려는 냄새가 충분히 풍겼었다.
결국 기관사와 서울지역사무소 지령과 소정리역 신호원등 3명이 업무상 과실치상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기관사와 지령은 금고 2년, 신호원은 금고 1년 6개월을 확정했다.
이번 사고로 ATS의 필요성이 급부상한다. 이후 설치가 되긴 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던 사고가 발생한다(..)
5. 이야깃거리
- 당시 희생자 보상금은 대략 390만원대이며 관련 소송기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