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요한나
崔堯漢羅'''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0년 8월 3일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대정리
<color=#fff> '''사망'''
1956년 8월 6일
부산광역시
<color=#fff> '''종교'''
개신교
<color=#fff>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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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요한나는 1900년 8월 3일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대정리에서 최국현[1]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08년 4월 27일 전주에서 교회 회계 집사로 선임된 부친을 따라 전주로 이주했다. 최국현은 전주 전동 295번지에서 기름집을 운영하면서 남문교회의 장로로 선임되어 시무했다. 그녀는 이런 아버지를 따라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했다.
1919년 3월, 기전여학교에 재학하던 최요한나는 기독교 인사 및 신흥학교 학생들과 함께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밤새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인쇄하면서 만세시위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후 거사 당일인 3월 13일경, 기전여학교 및 신흥학교 학생들과 함께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천도교·기독교인 및 학생 등 150여 명은 남문시장(南門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최요한나를 비롯한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신흥학교,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인파 사이를 다니며 태극기와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시민들과 장꾼들은 이에 호응하여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화동(大和洞)을 거쳐 우체국까지 시위행진하였다. 일본군, 경찰은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주도자들을 검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녀는 1919년 6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후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1923년 한예정성경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의 한예정성경학교 교사 2명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으나, 언제까지 근무했고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녀는 한예정성경학교 근무 시기에 김인섭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편과 사별하고 부산에서 피난했고, 범일동의 한 탁아소에서 근무했다. 어렵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상황에서도 성미[2]를 모아 교회에 헌물했다고 한다. 1956년 8월 6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최요한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제1,2대 국회의원 최국현과 동명이인이다.[2] 매일 한 수저씩 항아리에 떠 넣는 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