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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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 칠접선(斑竹 漆摺扇).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엄재수 작품.
칠접선(漆摺扇)은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의 일종이다. 쥘부채는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접었다폈다 할 수 있게 만드는 접부채를 뜻한다. 칠접선은 이 쥘부채 속살에 옻칠을 한 것이다. 내구성, 방수성, 살균성의 특징을 가진 옻칠을 부채에 칠해 견고함을 더하고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합죽선보다 훨씬 오래 전에 발생했으며 점점 그 모습이 화려해져 조선시대 후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부채다.
쥘부채의 역사는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속살에 옻칠을 한 칠접선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시기는 태종실록 10년 경인 4월 26일이다. 기록에 의하면[1] 접부채에 전부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속살 및 종이에 모두 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죽선이 영정조 시대 이전 기록이 없는 것과는 달리 칠접선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등장한 오래 된 부채다.
쥘부채는 보통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드는데, 대나무의 속살이 무른 탓에 부채의 살이 쪼개지기 쉬웠다.[2] 따라서 장인들은 옻칠을 부채의 속살에 올려 내구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살균성, 방수성 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옻칠은 당시에는 귀한 물품이어서 조정에서는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 제작을 엄금하기도 하였다.
귀한 옻칠을 올린 만큼 겉대에도 다양한 치장을 하여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데기, 우각, 반죽 등의 화려한 재료를 덧대 부채 소유자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시대에는 이 칠접선의 화려함이 극에 달하여 별의별 부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대모홍접선이다. 겉대를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전부 감싸고 속살에 옻칠을 하고 홍지를 붙인 사치품이다.[3]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난 합죽선과는 달리 칠접선은 찾는 이도 적어지고 암울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칠접선이라는 단어는 문헌상에만 존재하는 유물이 될 뻔했다가, 무형문화재의 끈질긴 복원 노력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단순히 일반 접선에 속살 옻칠하였다고 하여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상기에 서술하였듯 당시에 귀한 옻칠로 속살에 칠하였기 때문에 겉대에도 그만큼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따라서 민선이나 딱선 같은 싸구려 접선에 옻칠한다 해서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칠접선 유물 중 민선 같은 밋밋한 접선에 옻칠을 한 유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합죽선과 마찬가지로 부채 허리는 부풀어 오르다가 고리에서 좁아지고 다시 머리로 가서 넓어지는 곡선이 흐르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만 합죽선은 대나무 겉껍질을 맞붙여 만드는 특성상 그 곡선의 폭이 크지 않은데, 칠접선은 속살 하나로 만드는지라 쉬운 변형이 가능해 울룩불룩할 정도의 극단적인 곡선을 가지는 작품도 존재한다. [4]
대나무 속살로 만드는 특성상 가벼우면서도 다루기 편해 정갈한 합죽선과는 달리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했다.[5] 실제로 한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하기 매우 쉽다. 다만 이런 가벼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속살이 많아 얇은 종이를 써야 하는 합죽선과는 달리 두꺼운 종이를 쓸 수 있는데, 이 위에 옻칠이나 기름칠을 바르면 종이의 섬유질이 끊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견고해져 그만큼 종이를 오래 쓸 수 있다. [6] 종이가 견고해지면 더욱 접고 펴기 용이해진다.
칠접선은 대나무 속살을 이용해 부채 속살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올리므로, 대나무 겉껍질을 이용해 부채 속살을 만드는 합죽선이 아니다. 따라서 합죽 기법을 제외한 모든 기법이 전부 들어가므로 부채의 종류 또한 많고 화려하다.[7] 항목 참고.
칠접선과 합죽선의 관리 방법은 동일하다. 항목 참고.
아쉽게도 칠접선은 무형문화재 유물 복원 작품으로만 나와 있어 구입이 용이하지 않으며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반죽 칠접선(斑竹 漆摺扇).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엄재수 작품.
1. 칠접선이란?
칠접선(漆摺扇)은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의 일종이다. 쥘부채는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접었다폈다 할 수 있게 만드는 접부채를 뜻한다. 칠접선은 이 쥘부채 속살에 옻칠을 한 것이다. 내구성, 방수성, 살균성의 특징을 가진 옻칠을 부채에 칠해 견고함을 더하고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합죽선보다 훨씬 오래 전에 발생했으며 점점 그 모습이 화려해져 조선시대 후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부채다.
2. 칠접선의 역사
쥘부채의 역사는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속살에 옻칠을 한 칠접선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시기는 태종실록 10년 경인 4월 26일이다. 기록에 의하면[1] 접부채에 전부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속살 및 종이에 모두 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죽선이 영정조 시대 이전 기록이 없는 것과는 달리 칠접선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등장한 오래 된 부채다.
쥘부채는 보통 대나무의 속살로 부채의 살을 만드는데, 대나무의 속살이 무른 탓에 부채의 살이 쪼개지기 쉬웠다.[2] 따라서 장인들은 옻칠을 부채의 속살에 올려 내구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살균성, 방수성 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옻칠은 당시에는 귀한 물품이어서 조정에서는 부채 속살에 옻칠한 부채 제작을 엄금하기도 하였다.
귀한 옻칠을 올린 만큼 겉대에도 다양한 치장을 하여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데기, 우각, 반죽 등의 화려한 재료를 덧대 부채 소유자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시대에는 이 칠접선의 화려함이 극에 달하여 별의별 부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대모홍접선이다. 겉대를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전부 감싸고 속살에 옻칠을 하고 홍지를 붙인 사치품이다.[3]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난 합죽선과는 달리 칠접선은 찾는 이도 적어지고 암울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칠접선이라는 단어는 문헌상에만 존재하는 유물이 될 뻔했다가, 무형문화재의 끈질긴 복원 노력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3. 특징
단순히 일반 접선에 속살 옻칠하였다고 하여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상기에 서술하였듯 당시에 귀한 옻칠로 속살에 칠하였기 때문에 겉대에도 그만큼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따라서 민선이나 딱선 같은 싸구려 접선에 옻칠한다 해서 칠접선이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칠접선 유물 중 민선 같은 밋밋한 접선에 옻칠을 한 유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합죽선과 마찬가지로 부채 허리는 부풀어 오르다가 고리에서 좁아지고 다시 머리로 가서 넓어지는 곡선이 흐르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만 합죽선은 대나무 겉껍질을 맞붙여 만드는 특성상 그 곡선의 폭이 크지 않은데, 칠접선은 속살 하나로 만드는지라 쉬운 변형이 가능해 울룩불룩할 정도의 극단적인 곡선을 가지는 작품도 존재한다. [4]
대나무 속살로 만드는 특성상 가벼우면서도 다루기 편해 정갈한 합죽선과는 달리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했다.[5] 실제로 한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하기 매우 쉽다. 다만 이런 가벼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속살이 많아 얇은 종이를 써야 하는 합죽선과는 달리 두꺼운 종이를 쓸 수 있는데, 이 위에 옻칠이나 기름칠을 바르면 종이의 섬유질이 끊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견고해져 그만큼 종이를 오래 쓸 수 있다. [6] 종이가 견고해지면 더욱 접고 펴기 용이해진다.
4. 칠접선의 종류
칠접선은 대나무 속살을 이용해 부채 속살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올리므로, 대나무 겉껍질을 이용해 부채 속살을 만드는 합죽선이 아니다. 따라서 합죽 기법을 제외한 모든 기법이 전부 들어가므로 부채의 종류 또한 많고 화려하다.[7] 항목 참고.
5. 관리 방법
칠접선과 합죽선의 관리 방법은 동일하다. 항목 참고.
6. 구입
아쉽게도 칠접선은 무형문화재 유물 복원 작품으로만 나와 있어 구입이 용이하지 않으며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7. 관련 문서
[1] 칠한 부채(漆扇)를 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전칠(全漆)은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인데, 각전(各殿)에 해마다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漆)을 써서 국가의 용도를 허비하니, 금후로는 진상(進上) 이외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 대나무 겉껍질을 두 개로 합쳐 만드는 합죽선은 겉껍질 특성 상 워낙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해 그런 문제가 별로 없었다.[3]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라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는 없다.[4] 그런 유물들은 마치 근육질 남성처럼 마초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5] 다만, 왕의 유물들 중에는 이게 쓸 수 있는 부채인가 싶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부채들도 존재한다. 그런 부채들은 대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인 경우가 많다. 또한 화려한 치장이 이것저것 들어가면 합죽선보다 훨씬 무거워지기도 한다.[6] 합죽선의 종이는 얇아서 그 위에 옻칠이나 기름칠을 바르면 1년 정도 못 되어 종이가 부러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바스라진다. [7] 무형문화재 최고급 작품 중 합죽선의 속살 위에 옻칠을 한 극악한 제작 난이도를 자랑하는 합죽칠선이라는 부채가 있다. 가격도 그에 걸맞는 어마무시함을 자랑한다. 유물이나 문헌에서는 발견된 적 없는 부채이므로 장인의 창작품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