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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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국왕
영조 | 英祖'''

'''영조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
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순
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
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純
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1]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영종(英宗) → '''영조(英祖)'''[2]
'''존호'''
지행순덕영모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3]
장의홍륜광인돈희(章義洪倫光仁敦禧)[4]
체천건극성공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5]
대성광운개태기영(大成廣運開泰基永)[6]
요명순철건건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7]
배명수순경력홍휴(配命垂純景曆洪休)[8]
중화융도숙장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9]
'''시호'''
'''조선'''
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10]
''''''
장순(莊順)
'''출생'''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즉위'''
1724년 10월 16일 (음력 8월 30일) 오시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사망'''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 묘시
(81년 5개월 22일 / 총 29,759일)
조선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
'''능묘'''
원릉(元陵)[11]
'''재위'''
'''조선 왕세제'''
1721년 11월 15일 ~ 1724년 10월 16일
(음력 1721년 9월 26일 ~ 1724년 8월 30일)
'''조선 국왕'''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1724년 8월 30일 ~ 1776년 3월 5일)
(51년 6개월 6일 / 총 18,816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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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금(昑)
''''''
양성헌(養性軒)[80]
''''''
광숙(光叔)
'''전호'''
효명전(孝明殿)
'''부모'''
부왕 숙종, 모후 인원왕후 김씨, 생모 화경숙빈 최씨
'''부인'''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1. 개요
2. 생애
2.1. 왕자 시절, 세제 시절
2.2.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이인좌의 난
2.3.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2.5. 집권 말기, 사망
2.6. 사후
3.2. 영조의 노망설?
3.3. 조선 최장수 임금
4. 업적
5. 한계와 비판
6. 어진
7. 가계
8. 여담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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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13]으로 태어났다.
군호는 연잉군(延仍君). 영조는 왕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왕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즉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약점이 있었다. 대부호 집안의 중인 출신에 한때 정비 인현왕후를 제치고 정비가 됐었던 희빈 장씨의 아들인 형 경종과 달리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다. 형 경종의 즉위 때 신임옥사(훗날 영조를 지지해준 노론 4대신이 집권 여당인 소론 측의 공격으로 이때 사약을 먹고 죽었다.)가 일어나면서 거의 죽을뻔 했었다.
1724년. 31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으며[14][15]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한다. 또한 영조는 한국 역대 군왕 중 고구려 장수왕(78년 재위), 발해 문왕(57년 재위), 신라 진평왕(53년 재위)에 이어 네 번째로 오래 집권한 군주이며, 고구려 장수왕 이래 두 번째로 오래 산 군주에 해당한다.[16]
오랜 집권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과오도 범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처형시킨 임오화변이 꼽힌다. 임오화변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형태의 왕실 사건에 해당한다. 영조는 임오화변 당시 69세로 이미 조선의 역대 군왕 중 최고령에 해당했으며 사도세자 처형 이후로도 14년의 기간 동안 조선을 더 다스렸다.
탕평책을 위시한 영조의 전반적인 정치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영조의 가정사는 언제나 불행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장남 효장세자(진종)는 10살도 채우지 못하고 요절했다. 뒤를 이어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인 이선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에 사도세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조는 가까스로 얻게 된 아들 이선을 출생 직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아들이 젖먹이 유아이던 시절부터 과도한 학습을 강요하였다. 영조의 어긋난 애정으로 정서적인 학대를 당한 이선은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각종 기행을 일삼게 된다. 세자 책봉을 물릴 수 없었던 영조는 그러한 이선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며, 머지않아 이를 크게 후회하여 사망한 아들에게 생각할 사(思)와 슬퍼할 도(悼)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도 손자이산(당시 왕세손)에 대한 영조의 애정은 각별했고, 그를 통해 300년 종사와 보위를 이을려는 생각도 확고했다. 국왕으로서 불가결했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영조는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 자신이 왕세제 책봉식에서 입었던 옷을 입힐 만큼 지극정성이었다.

2. 생애





2.1. 왕자 시절, 세제 시절


[image]
연잉군 시절 영조의 풋풋한(?) 모습. 21세 때의 모습.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연잉군[17]으로 책봉되어 숙종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인 미운 경종을 몰아내고 연잉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노론 대신 이이명과 독대를 하고 노론에게 세자를 물 먹일 것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노론 대신 김창집, 이이명 등이 숙종이 "아이고 내가 눈도 잘 안보이고 골골해서 왕 노릇 못하겠다. 대리청정 어떠냐?"라고 말을 꺼내자 대찬성 하며 세자의 대리 청정을 지지한 것도 수상한 정황이다. 이에 윤지완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이 도끼 상소까지 하면서 격렬한 반대를 하지만 숙종은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고 혀를 찰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후일 경종이 되는 세자의 대리 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세자는 공은 없어도 실책도 하지 않으며 세자 자리를 유지했고 독특한 처신으로 노론 대신들에게 꾸지람까지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숙종의 병환이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세자가 승지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세자를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반발할 정도였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 할 정도이었다.[18]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왕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어디서 감히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너무 병환이 심해져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경종이 승계한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초반부터 경종을 우습게 알면서 갖은 모욕적인 처사를 했으며 마침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강제로''' 세제로 삼게 했다. 경종이 아들이 없었으되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 "너 아들 못 낳지? ㅋㅋ 동생이나 후계자 삼아?" '''하고 왕을 능멸한 것이다.[19]
각설하고, 이때 세제가 된 연잉군은 공부에만 힘을 썼으나, 노론은 경종을 아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연잉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킬 것을 완곡히 권했고 경종이 받아들이면서 신임옥사의 난리가 난다. 우여곡절 끝에 노론은 지네가 역당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 되었으나, 세제 본인은 사양도 했었고, 유일한 혈육이다 보니까 무사했었다. 오히려 세제는 경종에게 청해 자신을 음해하려는 궁인들이 있다고 아뢰어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지목하고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자 세제는 경종에게 그럼 그 사악한 내시들을 전하 곁에 두면 되겠군요 라고 말했다가 경종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20]
이에 세제는 "사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 하니 세제 노릇 못해먹겠다"며 세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했다. 이에 놀라서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 신하들도 박상검, 문유도를 처벌한 것을 요청하였다. 정치적 입장이 어쨌든 세제 대신에 내시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결국 경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처형해야 했고, 그들과 체결하여 웃전의 사정을 살핀 궁녀 석렬과 필정도 자결했다. 이렇게 세제는 정치적 위기를 정면 승부로 돌파하는 듯했는데…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그는 반란 수괴로 몰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김일경 등은 김성 궁인을 캐낼 것을 요구하며 세제를 공격했고, 세제는 "이런 죄인이 어찌 세제의 자리에 있겠냐"고 눈물로 호소하며 세제 자리를 벗게 해달라고 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경종이 세제를 보호한다. 결국 37세의 나이로 경종이 승하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견딘 연잉군은 '''드디어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2.2.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이인좌의 난


[image]
20대와 50대 시절의 초상의 얼굴 부분 확대 비교. 눈꼬리가 더 올라간 게 포인트. 매부리코 등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회를 치기 시작한 것은 소론, 그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든 소론의 강경파였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 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소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규합하여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탕평파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가 잔뜩 올라 있던 강경파와 남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초거 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 진압되었고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선 태인 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 감사 정사효[21]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선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선 근왕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 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소론 탕평파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자세한 것은 각각의 항목 참조.

2.3.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이후 영조는 당파 싸움을 뿌리 뽑자는 취지로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과 노론의 홍치중, 홍치중 사후엔 김재로 등을 중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는 쌍거호대 정책을 유지한다. 하지만 깊어진 적대감으로 인해 유척기를 비롯해서 탕평에 응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탕평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는 노론의 공공의 적이었다.
결국 영조가 비 오는 날 숙종의 진현 앞에서 절하면서 "왕 노릇 못해먹겠다!" 라고 선포하고 나서야 신하들이 몰려와 비를 맞으며 통곡하며 '''"다시는 당파 싸움 안할게요. 당파 싸움하면 신들을 죽여주세요!"'''라고 맹세를 하는 일이 벌어졌고 다음날 이광좌가 죽으면서 노론, 소론 대립은 한풀 꺾인다. 하지만 당파 싸움이 여기서 끝났냐면 '''그럴 리가 있나?'''
무엇보다도 영조 본인이 왕세제 시절에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뻔했던 신임옥사에서 본인의 죄를 없애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저절로 노론의 힘을 싣게 되는 행보를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과 소론 강경파가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면서 영조는 싫어도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계속 처형해야 했고 나주 괘서 사건에 이어 최후의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의 친림 시험장에 나타나서 영조에게 "야 이 찬탈자노무 새끼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갑진년 이후로 네놈이 선왕을 독살한 게장을 다신 먹지 않았다고 말해서 네놈 머리통을 날리겠어!"라고 최후의 발악까지 하면서 살아남은 소론 탕평파는 반역 전문 집단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 등을 역률로 추죄하고 이광좌도 직첩을 거두면서 소론을 박살 내고 만다.
이쯤 되면 조정은 쌍거호대는 사라지고 노론 1당 독재가 되고 마는데 겉으론 그렇지만 실상은 또 그렇지 않았으니 바로 영조가 척신 정치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명문가들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한미하지만 외척이면서 똑똑한 노론 가문인 풍산 홍씨를 영조 본인의 뜻에 충실할 것이란 생각에 중용한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22] 말직에서 순식간에 훈련대장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된다.

2.4. 임오화변


그러던 중 영조가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대사건이 터진다. 이게 이름하여 임오화변이다. 이때부터 치매 증상이 나타나면서 오락가락하는 행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2.5. 집권 말기, 사망


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세손을 동궁으로 삼았고 그를 후계자로 보호했다. 영조는 말년에 몇 달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23] 더 외골수적이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자주 보였으며 동시에 수천 명의 백성을 만나보는 등 여러 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그의 업적이 대부분 재위 전반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한편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소위 청명당이란 그룹을 이뤄 유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된다."[24]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영조 46년에 십수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빡친 홍봉한과 김귀주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삼왕손이 유배를 가는 등 정국은 혼란해졌으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이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유배 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한편 영조는 즉위 51년 쯤에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정조의 반대파인 홍인한이 반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때 임금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25]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하여 나를 지성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26]

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나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 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하여 신하의 예(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인한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임금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1775년 청 건륭(乾隆) 40년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를 지원 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하면서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조에게 임명권과 군대를 움직일수 있는 병권을 넘겨주었고 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어도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달 후인 1776년 음력 3월 5일 묘시(아침 6시경) 영조는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망하기 전 가래침과 구토를 자주했다는 증상으로 보아 폐렴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묘시(卯時)에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3월 5일 병자 1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2.6. 사후


본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영조로 고쳤다. 때문에 영조실록의 표지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혀있다.(선종 → 선조와 마찬가지)
수명과 재위 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27]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堯)와 (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image]
영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의 원릉(元陵)이다. 늘그막에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덧붙여 영조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는 영조와 완전 반대쪽인 서오릉에 묻혀 있으며[28]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역시 서오릉에 묻혀 있다.

3. 성격




3.1. 경종 독살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남인과 소론 준론 쪽의 지지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29] 한 술 더 떠 일부 반대세력들은 영조가 사실 숙종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마저 제기했다.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 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사실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30]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31][32]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 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린 다 안다!" 등 대놓고 우릴 죽여라! 라고 개겼다.[33]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34][35]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36]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37]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암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38]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되었다.
영조는 이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것이 많았는지 영조 31년(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39]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몇 가지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궁합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의학 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 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세제였던 영조는 신임옥사로 인해서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40][41]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세제(世弟)'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옥사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시기에 측근에서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였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했었을리가 전혀없다.

3.2. 영조의 노망설?


야사에 따르면 노망에 대한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 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조중회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조중회가 충신 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 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 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라 하더니 연못 물에 빠져죽겠다면서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들어간 채 군사들을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여 신하들의 출입을 막았다.[42]

[43] 당연히 감히 왕명을 어길수도 없으니 다들 어쩌지 못해 당황만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알현을 허락받은 세손도 안절부절못하며 영조를 말리는데도 영조는 조중회의 목을 베어와야만 연못에선 나오겠다고 버티었다. 세손은 조중회의 목을 가져오라고 신하들을 다그쳤으나 그렇다고 평상시 옳은 말을 자주 하는 충신의 목을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벨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조중회를 흑산도로 '''위리안치'''[44]하기로 하자 영조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라며 연못에서 걸어나와 입궐하였다. 그리고 이 난리를 쳐놓고는, '''조중회가 흑산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 보내던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가 노망난 거 아니냐고 수군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조가 노년에 노망이 났다, 조중회가 영조의 화를 키웠다, 세손이 말렸다는 내용은 실제 실록을 검토해보면 전혀 다른 부분이 보인다.
>영조 19년 계해(1743)11월 29일(무신)
>조중회의 소장에 몹시 노하여 동궁에게 전위하려고 하면서 그의 처벌을 논의하다
>이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조중회(趙重晦)의 소장에 몹시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책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조중회(趙重晦)가 나를 몹시 모욕하였으니, 대개 다시는 이 자리에 임어하지 않겠다.”
>하고, 인하여 동궁(東宮)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보였는데,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다.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들어가 극력 간쟁(諫諍)하여 비로소 정지하게 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조중회의 상소로 인하여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다가 연석의 하교가 진박(震迫)함을 듣고 서로 잇따라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중회는 한낱 망령된 사람인데, 성덕(聖德)에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하교하십니까?”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나이가 젊어서 명예를 얻기 좋아한 소치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죄에 따라 엄중히 조치함이 마땅하니, 지나치게 사기(辭氣)를 허비하시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자신이 조중회에게 직접 죄를 주지 않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먼저 죄를 청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조중회를 중형(重刑)에 처하자니 차마 못할 일이고 죄를 주지 않자니 임금의 노여움이 또 점점 격렬해질 것이므로, 온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정언 조태상(趙台祥)이 입시하여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태상이 조중회의 죄를 논핵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하교하기를,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임금을 모욕한 사람을 보고도 청토(請討)할 의리를 알지 못하니, 이러한 대관(臺官)은 내가 그 낯에 먹칠을 하고 싶다. 조중회는 내가 마땅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우리가 영조 노망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영조 19년 실록에 나오긴 한다. 노여움을 보이고, 눈물까지 흘렀으니 실록에도 동일한 내용 아닌가 싶은 이도 있겠지만.. 영조 19년은 왕이 50세가 되는 해이다. 또 설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자 또는 세손이 말려서 화를 풀은것도 아니다.

영조 24년 무진(1748)3월 16일(경자)

부수찬 조중희가 상소하여 사직했으나 임금이 잘못을 뉘우치니 다시 입직하다

부수찬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조중회가 일찍이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었는데 임금이 노여운 바람에 그의 아버지 조영복(趙榮福)이 일찍이 엄시(閹寺)를 통하여 벼슬을 구했던 일을 폭로하여 드러내어 꾸짖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조중회의 소장을 보고 깊이 뉘우치면서 이르기를,

“주서(注書)가 일을 기록함에 있어 착오를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 내가 마땅히 그를 부르겠다. 지난번 그 아들의 놀라운 거조로 인하여 말이 그의 아비에게 언급된 것에 대해 스스로 잘못임을 깨달았다. 대저 환시(宦寺)의 무리는 거짓으로 뜬말을 만들어 아무는 이러하니 마땅히 이렇게 조처해야 하고, 아무는 이러하니 마땅히 이렇게 조처해야 한다고 말하여 서로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만드는데, 이는 바로 저들의 놀랍고 패려스런 말인 것이니, 그 사람에 대해 노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개연스런 마음으로 인하여 하교하였으나 그뒤 생각해 보니 스스로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논하지 않으면 그 아들이 무엇을 연유하여 아비의 억울함을 신리(伸理)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비답을 내리기를,

“말단에 부진(附陳)한 것은 연교(筵敎)에서 개석(開釋)하였고 이미 나의 잘못임을 알고 있으니 그대의 아비에게 무슨 누가 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조중휘가 즉시 나아와서 사례하고 입직(入直)하였다. 임금이 또 그를 불러서 접견하였다.

영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중회를 용서한게 영조 24년 왕의 나이 55세였다. 이때 세손은 태어나지 않았다.[45] 실록과 국조보감, 승정원일기를 찾아보아도 연못에 뛰어든 기록은 없다. 영조 19년에 일어난 사건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조 20년(1744) 영조어진이 제작되기 한참 전이라고 할 수 있다.

3.3. 조선 최장수 임금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살았는데 이는 현재 기준으로 90세를 넘긴 수준'''이다.[46] 현대 사회에서도 큰 병 없이 80대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47] 장수 비결로 소식과 검소한 식단이 거론되는데[48],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특별한 별미도 아니고 고추장이었다.[49] 그런데 장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실록을 보면 당시에는 영조의 금욕적인 소식과 채식 위주 식단[50]을 주변에서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오히려 즉위 52년간 큰 병 없이 조선시대의 최장수 왕이 되었다.
다만 영조가 즐긴 고추장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특별한 별미가 아닌'검소한' 반찬으로 보아야 할 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국에 고추가 전래된 것 자체가 임진왜란(1592년~1598년)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고, 그 고추를 이용해 담그는 고추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0년 어의 이시필의 <소문사설> 로 알려져 있으며, 영조 시기의 승정원일기 기록에서도 당시는 고추장이 궁중요리에 도입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 시절의 고추장은 흔하고 소박한 반찬이 아니라 개발된 지 얼마 안 되어 제조법도 널리 알려지지 않고, 종종 약재처럼 다뤄지기까지 하던 새롭고 희귀한 진미였다는 것. 또한 고추장과 함께 영조가 즐긴 것으로 유명한 밥상의 네 보물이 송이버섯, 전복, 어린 꿩고기인데, 이 중 송이버섯은 말할것도 없고 전복이나 꿩고기같은 경우도 (양식이 가능해진 현대에도) 결코 저렴한 식재료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귀하고 값진 식재료들이었다. 즉 영조의 식성은 검소하고 소박하다기보다는 채식 중심으로 소식하지만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동물성 단백질 역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쇠고기나 돼지고가가 아니라) 전복, 조기, 꿩고기등 저지방 고단백에 맛이 좋은 귀한 재료들로 충분히 섭취하고, 입맛을 잃지 않도록 자극적인 감칠맛의 고추장까지 챙기는[51], 현대 기준으로 보면 럭셔리 웰빙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검소하다기보다는 그냥 영양학적 균형에 맞춰서 잘 먹은 것.
이 때문에 현대 한국웰빙 바람과 더불어 영조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참고로 영조는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조선 왕들의 고질적인 유전병인 종기당뇨도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입에 달고 사는 체질이었는데, 소화불량이나 소화장애로 고생했고, 말년엔 극심한 피로와 하지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골골백세였는데,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소음인적 체질인 비위허냉(脾胃虛冷) 체질이라서 산증(疝症,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땡기듯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증)에 시달리고 살았다.[52]

4. 업적


경종을 제치고 영조를 등극시키려 했던 것은 원래 노론이다. 그러나 노론이 경종 즉위 당시 신임옥사로 죄다 떨려나가면서 영조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복 형 경종이 4년 만에 승하하면서 당시 연잉군이 어렵게 보위에 올랐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소론을 어쩌기는 어려웠다. 이때 소론의 거두 김일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기로 소론(준론)을 일부 숙청한다. 때문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준론 + 남인)까지 진압하고 조선 조 마지막 공신 지정인 분무 공신(奮武公臣)을 지정했다.
노론을 재집권시켰지만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첨해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탕평책이란 이름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일례로 즉위 초 사면 복권으로 기가 오른 노론들이 정치 보복을 하려하자 정미환국을 일으켜 정권을 간단히 뺏고는 소론(완론)에게 줬다. 한편 이인좌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출사길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이 억울하다며 상소를 연달아 써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을 해결한 영조가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어 세자 책봉에서의 문제점을 변명하려 했다. 이미 소론들은 다 떨려 나가고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거리낄게 없어보였던 노론은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영조에게 분노를 샀다. "이 미친 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53]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영조 자신과 정치의 안정을 위한 서적 간행을 다시금 정치 보복에 써먹으려던 노론에게 겁을 준 것이다.[54]
결국 영조는 노론 명문가들마저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혜경궁 홍씨의 집안) 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곧 당파 경쟁은 유명 무실해져 태평 성대가 될 것 같았지만 영조, 정조 두 명군이 죽자마자 척신 정치(세도정치)로 귀결된다. 영조가 외척도 박대하면서 만들어낸 강한 왕권이, 불과 2대 만에 큰 권력을 거머쥔 신하 몇에 의해 좌우되게 된 것이다. 벌써 정조 즉위 초부터 홍국영세도정치를 선보이는 등 조선 말기 정치의 난맥상은 그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없애 압슬형[55], 낙형[56], 자자형[57], 부관참시[58], 전도주뢰형[59]과 같은 고문을 없앴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 제도의 모순을 개혁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60], 청계천 준설, 서얼 차별 완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61] 통치 기간 동안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완전히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았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죄를 엄히 물었다.
영조 때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 청나라옹정제의 완벽한 내치, 이를 물려받은 건륭제의 준가리아 복속으로 최대 판도를 자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해 조공 무역도 본궤도에 올랐다.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치하의 안정기로 도쿄 인구는 현재 추산 100만을 넘는다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아직 산업 혁명 초입에 불과한 서방 역시 아직 인도 동쪽까지는 본격적으로 손을 뻗지 못했지만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동쪽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영조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렸고, 조공 사신들을 통해 서방의 문명을 조금씩 들여오고 있었다. 영조 역시 안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이나, 고구마나 , 참마 등 구황 작물이 널리 재배됐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금주령'''[62][63][64][65]을 내렸다. 숙종 때 강화된 오가작통법을 엄히 지켜 백성의 유민화를 막고 조세 수입의 안정화를 꾀했다.
또한 양역변통론을 통해 균역법 시행에 앞장섰으며, 청계천 준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참고로 이 두 가지 업적과 탕평을 영조 스스로가 만년에 자신의 치적이라 내세운 세 가지 업적이 되겠다.
무엇보다 영조는 검소했다. 특히 그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었고, 식사는 김치, 시금치나 청경채와 같은 채식 위주의 반찬, 장류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소식했다.[66] 여자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67] 연과 여(왕실 가마)의 금박주석으로 교체시켰다.[68]
또한 동국문헌비고과 해동악장을 말년에 편찬하고 대보단에 제사도 열심히 드렸다고 하며 자신의 자서전을 편찬했다.

5. 한계와 비판



하지만 영조도 많은 실책을 저지르며 인간적인 결함이 상당했다. 특히 아내인 정성왕후를 그녀가 죽는순간까지 박대했으며,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나머지, 아들인 사도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질책하고 매우 닦달하여 아예 학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너는 왜 이거 밖에 안되냐'는 등 아들을 몰아붙이기만 하다가 견딜수 없었던 세자가 시름시름 앓는다. 게다가 영조는 완전히 신용할만한 상태도 아닌 아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대리 청정이란 미명 하에 뒷방으로 잠깐 물러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참견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신하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무시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사도세자에게 양위한다 난리를 치고, 사도세자는 잘못한 것도 없이 아비의 침전 앞에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며 석고대죄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간섭과 질책을 여전히 멈추지 않으며 나중에는 아들을 자식이기보다 신하로 취급하며 학대하게 된다. 세자의 스승들과 신하들도 보다못해 영조한테 세자를 잘 대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그들에게 화를 내고는 계속 세자를 핍박한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견디지 못한 나머지 아예 미쳐버려 대낮에 내관과 궁녀들을 수차례 죽이는 등, 차기 군주로서는 절대 보여서 안될 온갖 추태를 부렸고 결국엔 이를 알게되어 격분한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만다.
문제는 이 일이 후에 왕위를 잇는 손자인 정조에게 정치적, 심리적 상처를 준 것을 넘어,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한 신하들로부터 안 받아도 될 견제를 받게 만들었다. 연산군 때 일을 떠올린 그들은 정조를 매우 힘들게 했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자기 왕세제 책봉 때 입던 옷을 입히는 등 노력을 아끼진 않았다. 아무리 정치에 부자지간도 서로 죽고 죽인다지만 사도세자 건은 당시로서도 매우 불편하고 큰 흠이 될 행동이었다. 영조는 이후 정국 운영에서 사도세자에 관해 조금의 문제 제기도 받아들이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친국[69]하고 죽이느라 당파 몇이 날아갔다. 그리고 사도세자 일은 훗날 정조가 본의아니게 '''세도정치의 씨앗을 남기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아버지 숙종을 본받아 환국을 써먹은 적이 있을 뿐더러, 이복 형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목호룡 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은 시작부터 자기 모순이 됐다. 모든 당파에서 두루 인재를 뽑겠다는 영조의 구상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노론 독차지의 양상으로 결국 변질돼간다. 이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려 외척 세력이나 노론을 중용하지 않고 새로 척신을 만들어 다스렸지만...... 이때 출세한 사람이 홍봉한으로 종9품 말직에서 7년 만에 훈련 대장으로 출세해 영조 46년까지 실세가 된다. 이것이 정조 즉위 후 홍국영 등의 배경이 됐으며 세도정치의 물꼬를 터, 조선멸망 테크를 제대로 타게 만든다.
영조가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66세의 나이까지 버텨줬음에도 사망하여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 이때 계비로 들어온 것이 정순왕후 김씨였고, 영조는 조강지처 때와 달리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고, 정순왕후의 6촌 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잠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김귀주는 너무 기분을 낸 나머지 실세 홍봉한까지 목을 날리려다 실패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서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된 일도 있었다. 김귀주는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의 연합, 그리고 홍봉한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수 등과 함께 청명당을 이뤄 맞서기도 했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고 김관주는 순조가 수렴 청정을 당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려다 실패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가 죽는다. 홍봉한은 정조 등극과 함께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덕에 실각에도 목숨을 부지한다. 잠시 홍씨 세도 정치를 기획한 홍국영 역시 정조에게 숙청되며 척신 정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른다.[70]
무엇보다 영조가 검소하다고 여겨지는 행동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전혀 아니며 위선자라는 평가마저 있다. 특히 금주령을 내렸으면서 정작 자신은 솔잎으로 만든 술인 솔잎주를 먹으면서 차를 마신다고 합리화한다던가[71], 왕실에서 쓰는 가마에 금 도금을 금지하는 대신 당시 한반도에서 구하기 매우 힘들었던 '''주석 도금'''[72]을 했다던가, 본인이 선호하던 반찬은 당시에도 비싼 식재료인 송이버섯, 전복, 뀡고기, 고추장이었다.[73] 이인좌의 난까지 극복한 군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재위 후반부의 행적은 위선자에 가깝다. 이 점은 비슷한 시기 '검소'를 빙자한 스페셜 건강식단 덕에 장수한 청나라 건륭제와도 겹치는 부분. 다만 재위 후반부당시 영조의 나이는 조선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인 4~50을 넘긴 나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왕이 병이 들 경우 그만큼 비상사태이기에 검소고 뭐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74][75]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대량으로 폐기한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으로 역사에 남았는데, 영조 치세에 이렇게 삭제당한 사초는 바로 임오화변 시기의 기록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뿐만이 아니었다는게 문제.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76]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때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나서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분서갱유와 다를 바 없는 사상 초유의 '사초 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 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 중반으로, 역사상 국력이 최정점을 찍었던 시절이다. 혹여 칭제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훗날 대한제국이 세워진 것도 청나라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후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 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5월 12일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이에 대한 설명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한 설명 다만 1770년 4월 5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태양의 흑점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에 대해 관상감 관원에게 물어보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설명 그리고 저 사건에 대해 승정원일기에서는 이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서 부쉈다는 말도 함께 나와 규일경을 부순게 천체 관측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 한 일인지 아니면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일인지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6.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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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 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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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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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 어진의 영조의 초상
열성 어진에 실린 영조[77]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 시대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 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 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약간의 사각턱 등 다른 영조 초상화나 연잉군 초상화와 이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7. 가계


  •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제1후궁: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 제1왕녀: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 제1왕자: 진종 소황제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 제2왕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 제2후궁: 의열 영빈 이씨(義烈 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제3왕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 제4왕녀: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 제5왕녀: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 제6왕녀: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 제7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 제2왕자: 장조 의황제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 제9왕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 제3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 제8왕녀: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 제10왕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 제4후궁: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 미상 - 1776년 8월 10일)
    • 제11왕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 제12왕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8. 여담


  • 한국사에 유일무이한 공식 왕세제(王世弟)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형제승계 사례 자체는 많았지만, 그 형제들은 보통 선대왕이 후사 없이 사망한 이후 정치적 결정에 의해 즉위하거나 선대왕이 임종하면서 직접 유언으로 왕위를 물려주거나 했지[78] 태제/세제를 공식적으로 임명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은 고대부터 부자세습이 원칙이라 아무리 왕에게 후사가 없더라도 혹여나 후사가 생산되는 것을 기다려야지 세제를 임명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 더이상 아들 못낳소" 하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 그만큼 전례없는 세제책봉을 해야 했던 경종(조선)의 처지가 안습했다는 소리다. 영조 이전 사례로는 최충헌 묘지명에서 신종(고려)명종(고려)의 황태제였다고 기록하긴 했는데, 정사를 보면 신종은 사저에 있다가 얼떨결에 추대된거라 정식으로 황태제에서 즉위했다기보다는 최충헌 정권에서 즉위를 위해 대충 붙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방원은 형 정종을 잇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종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성계의 유일한 세자였다고 볼 수 있고, 태종 입장에서는 이성계의 아들인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정종의 지위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현 국왕인 정종의 세자로 들어가면서 상왕인 이성계가 개입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훗날 영친왕 이은 역시 순종의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때는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었던 만큼 진짜 임금은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걸 청나라 황제에게 책봉받아야 했던 연행사들의 입장도 굉장히 난처해져서, 노년의 강희제나 다른 관료들이 "너네 임금 젊은데 웬 세제?"냐며 의문을 표했을 때 이건명이 강희제한테 둘러댄답시고 금상께서 양기가 부족하시다(...)는 무엄한 소리를 했다가 훗날 목이 달아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봉 과정에서 조선 혈통 예부상서 김상명[79]이 큰 도움을 줬는데, 조선 사신들이 영조 즉위 후 의주에 있는 김상명의 증조 묘소에 그의 부탁을 받아 대청광록대부조선국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지묘(大淸光祿大夫朝鮮國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之墓)이라는 묘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한 신하들이나 들은 영조의 반응은 실록에나 승정원일기에나 몹시 띠꺼운 태도로 남아 있는데, 대략 "ㅉㅉ 오랑캐 주제에 제 뿌리는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네여", "님 근데 절충장군 소리는 뇌피셜 아닌가염?",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냥 세워 줘라" 등의 말이 남아 있다. 실록 기사 승정원일기 기사 원문 승정원일기 기사 국역 이후 영조 때는 물론 정조 때까지도 이 가문의 사람들이 역관 등의 직책으로 조선 사신단에 자주 따라오기도 했고, 조선 측에서도 이 가문을 통해 이런저런 로비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 영조 본인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자신도 몰래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본인은 오미자차라 변명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름은 차이지만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실상은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조 48년에 영의정 홍봉한을 탄핵하는 김관주의 상소에서 몇 해 전 영조가 송다를 내오라 시켰을 때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해 왕의 체면과 건강에 해를 끼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진짜 차가 맞는데 홍봉한이 금주령 핑계로 막은 거라면 몇 년 후에 탄핵당할 일이 아니라 금주령 운운한 그 시점에서 기군망상으로 박살이 났어야 한다.
  • 앞서 언급되었듯 영조는 반찬으로 고추장을 즐겨 먹었는데, 고추장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궁내에서 만든 것보다 민가, 특히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의 집에서 만든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조종부는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문제 삼았던 인물이다. 영조는 이를 당파성의 발로라며 조종부를 괘씸히 여겼지만,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집 고추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말년에도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대부집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평했다.
  • 김귀주의 당색은 노론 벽파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오빠가 된다. 홍봉한 탄핵에 실패한 그는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정순왕후 김씨의 6촌 오빠 김관주는 먼 훗날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면서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순원왕후를 등에 업은 안동 김씨들과 싸우다 져 다시 함경도 유배를 가서 죽는다.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여는 인물이다.
  • 영국엘리자베스 1세와 많이 닮았는데, 피가 다른 이복 형제 자매가 있었으며, 서로 형제 자매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버지의 성격을 닮아 다혈질이고 평소에 검약을 실천하였고 둘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학식이 수준이 높았고 명군이며 장수하면서 재위가 길었다는 점과 백성들에게 자비로운 군주였단는 점이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하지 않아 직계후손이 없었다는 것 정도.

9. 창작물에서




10. 관련 문서


[1] 사망 당시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2]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인 고종 26년에 이미 묘호가 격상되었다.[3] 영조 16년[4] 영조 28년[5] 영조 32년[6] 영조 48년[7] 영조 52년[8] 정조 8년[9] 고종 26년[10] 묘호가 격상될 때 같이 바뀌었다.[11] 원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에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다르게 파묘(破墓) 자리를 쓴 능이라는 것'''이 특이하다면 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정성왕후가 묻혀 있는 능(홍릉) 옆에 묻혔어야 하나, 임오화변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정조의 한탄섞인 증오와 복수심 때문에 "정성왕후 옆에 묻히게 해 다오"라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언을 무시한 채 효종이 처음 묻혔던 곳에 묻히게 되는데 그게 바로 '원릉'이다. 그리고 풍수적으로도, 성리학적으로도 다른 이가 한번 묻혔던 파묘 자리는 길수에 안좋은 지라 효와 예를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이같이 파묘자리에 묻히는 것은 비판받을 만 하다.[12] 조선왕조 역사상 최장기, 최장수했던 유일무일한 집권이다.[13] 숙빈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대부분 생각하겠지만 전에 태어났었던 영수라는 아기가 있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 순서는 둘째이다.[14] 조선국왕 평균 재위 기간의 두 배하고도 14년, 조선왕조 518년 역사 중 영조 혼자서 무려 10분의 1을 차지한다. 아버지 숙종도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재위가 길었기 때문에(46년) 부자가 합치면 조선 왕조 오백년 중 약 100여년, 대략 5분의 1를 차지한다.[15]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중종(38년)이 뒤를 잇는다.[16] 단순 기록상으로는 가야수로왕고구려태조왕이 더 오래 살았고 더 오래 집권했으나, 이는 후세에 조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만, 발해 문왕의 경우 정황상 영조와 비슷하거나 더 긴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삼국 시대 국왕들은 출생연도가 알려진 경우가 거의 없기에 실제로 영조보다 더 오래 산 국왕도 분명히 존재할 여지가 있다.[17] 군호는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유래했다.[18] 상황을 볼 때, 이유없는 꼬장이라기보다는 이유가 있는 분노이기도 했고.[19] 참고로 선조 시절에는 정철이 아들을 세자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가 "내가 아직 젊은데 이게 장난하냐?"라고 개발살이 났고, 후일 홍국영도 정조 시절에 양자를 제멋대로 들이고 전횡 하다가 끝장났다.[20] 실록에서는 세제에게 경종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다고 나온다. 이는 왕이 쌍욕을 했을 때 실록에서 쓰는 일종의 필터링이다.[21] 정사효는 경북 상주 목사, 제주 목사, 사헌부 지평, 경기도 도사, 강원도 관찰사, 승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로 상주 목사 시절에는 우수 수령으로 뽑히기도 하였고, 경기도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나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22] 사도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즉, 영조의 사돈.[23] 1년에 3명을 10번이나 영의정에 제수했다. 다만 김상복, 신회는 말기에 재임할 때에는 1년 이상 재임했다.[24] 경주 김씨 일파를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척을 중용하는 것이라며 정순왕후 김씨가 직접 반대했다.[25] 박시백은 영조가 정국의 안정을 생각했다면 적어도 세손의 나이 스물에는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어야 했다며 "다 늙어서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며 깠다. [26]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27] 추존 왕까지 포함하면 그의 고손자인 효명세자가 가장 길다.[28]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묘를 만들 때 자신이 들어갈 자리도 만들어 뒀으나, 정조정순왕후 김씨를 생각해서 결국 따로 묻히게 됐다.[29] 숙빈 최씨는 과부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사항이 없는게,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30]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 즉 네가 선왕에게 게장 먹여 독살한거 다 안다! 라는 조롱이다.[31] 영조 31년 신치운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32] 영화 사도에서 잘 구현해냈는데 국문에 끌려온 죄인 하나가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라며 소리치자 영조가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라며 죄인 두명의 입을 찢으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문이 끝난 후에 영조가 귀를 물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형을 꺼려했던 영조가 입까지 찢으라 했으니 본인도 정통성 문제 만큼은 어지간히 스트레스 받았던 모양이다.[33]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의 친국 정도를 빼면, 아니 실록에서는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릴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34] 실록에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잘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계속되었다고.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 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안 그래도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35]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만드는 중간 중간 간장을 따라내 가열해서 염도를 최대한 올려 주는 작업을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그것도 가열되지 않아 소화에 더 큰 에너지가 드는),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 중인 환자에게 먹일 만한 음식은 아니다.[36] 부자는 잘만 쓰면 좋은 약이지만 흔히 사약의 원료로 추정되는,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다. 지금도 해마다 제대로 처방없이 부자를 달여먹다가 죽는 사람이 나온다. 물론 임금에게 올려야하니 당연히 어의들도 정성스레 추출하고 정제를 했겠다만 그 특유의 독 이미지때문에 독살설 지지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 것은 자명한 일. 또한 사약넣을때 인삼을 넣었다는데 부자는 열을 받아야 최고로 활성화되기때문이라고 한다.[37]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38]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조는 조선 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즉 그 긴 통치 기간 내내 시달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소론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인좌의 난.[39] 천의소감은 영조(연잉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 할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정통성을 밝혀서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경종 독살설을 변론하기 위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40] 그나마 숙종의 살아있는 아들이 당시 경종과 영조가 유일했다. 이것만 아니였다면 적서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조선사회에서 무수리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41] 조선시대에는 후궁들도 양반가문에서 선발하였고, 궁인 중에서 되더라도 상궁-나인들은 상민 이상 계층에서 선발된다. 궁인의 잡역을 위해 고용된 무수리가 후궁이 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일이였다.[42] 빠져죽겠다면서 웅덩이에 발만 잠갔다는 내용으로도 노망이 났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영조 본인은 웅덩이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 하는 것이다[43] 하지만 이 때가 한겨울이었다. 아무리 발만 잠기는 깊이라 해도 동상이 걸리거나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노인이라 자칫하면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 같은 걸로 사망할지도 모르니 신하들은 애가 탈 수 밖에.[44] 귀양 중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걸로, 가족이나 제자 등이 함께 갈수도 없고 집 주변에 가시나무를 심어 출입을 금하며 밥만 받아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45] 정조는 영조 28년생이다.[46] 어디까지나 조선 국왕 중 가장 장수한거지 영조보다 오래 산 역사적 인물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장수왕, 강감찬, 최충, 최우, 일연, 황희, 효령대군, 정인지, 정인홍, 이원익, 송시열 등.[47] 다만 의학과 공중 보건이 발달한 현대에는 80을 넘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48] 식사를 매우 규칙적으로 한 것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하루 3번 식사를 채식 위주로 항상 꼭꼭 씹어먹으면서 검소하게 먹었는데(원래 5번이던 것을 영조가 줄인 것) 대신들과 회의를 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수라상부터 받았다고 한다. 다른 왕들은 아침은 부득이하게 거르거나 야식을 즐기는 등 식사가 불규칙했지만 영조는 소식을 하되 끼니는 거르지 않고 무조건 제때 꼬박꼬박 챙겼다.[49]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이 서울대학교 선정 전국 최장수 지역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50] 그러나 몸보신을 할 때만큼은 전복, 꿩고기, 조기 등을 먹는 등 단백질 보충도 확실하게 해 주어서 균형잡힌 식단을 짰다.[51] 맛다시비빔밥등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추장은 한국인의 주식인 밥과 잘 어울리는 자극적인 맛으로 입맛을 돋워주는 반찬이다. 물론 맵고 짜고 자극적인 맛 때문에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반찬이기도 하지만, 다른 반찬 없이 고추장만으로 한끼 때우는 것도 아니고 야채+양질의 단백질+적절한 소식으로 균형맞춘 식단에 더한다면 적절히 입맞을 돋워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52] 영조와 비슷한 인물이 서양에도 하나 있는데 바로 로마 제국의 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이다. 아우구스투스도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고, 특히 위장이 안좋아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려 식도락을 즐긴 당시 문화와 달리 끼니마다 간단하게 챙겨먹는 소식을 했다. 그 소식 덕에 허약체질에, 격무에 시달렸음에도 아그리파, 드루수스같은 유력 후계자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며 꿋꿋하게 살아남아 76세까지 장수했다.[53] 둘 모두 '''소론의 초기 영수'''들이다.[54] 애초에 영조가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한 것도 경종조의 역모에 연루된 자신을 신원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한 것인데, 노론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천의소감을 자파의 의리를 세우는 데 써먹으려하니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55] 깨진 유리 조각에 죄인를 꿇리고 꿇린 무릎 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 고통을 최대한느끼게 하는 형벌[56]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57]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흠을 내어 먹물로 죄를 쓰는 형벌[58] 죽은 죄인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시신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는 극형[59] 주리를 트는 형벌[60] 다만 근본적인 제한은 아니어서 흥선 대원군 때에 와서야 전면적인 철폐를 한다.[61] 재미있게도 이런 영조의 많은 성과들은 주로 젊은 시절에 집중되었고, 노년기에 이르러선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많지 않은 특징을 보인다.[62] 재위 기간(1724년 ~ 1776년)을 포괄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63] 대표적으로 병마절도사 윤구연인데 이 사람은 역사책에서 말하는것처럼 술을 마시다가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소지하고 있는 술단지에서 알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즉결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는 굉장히 억울한 것이 금주령을 막 반포했을시 1타자로 본보기로 보이려고 일부러 이랬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파를 막론하고 신하들이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사형을 만류하며 변호하자 되려 그 사람들을 파직시켰을 정도. 결국 나중에 금주령이 느슨해진 이후에 은근슬쩍 윤구연은 복위된다. 물론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복위되었다고 되살아나는 건 아니고 직위만 원래대로 돌아온 것. 사실 이 사건만 보면 아무리 전제군주제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독재에 가까운 면모가 보인다. 애초에 영조 성격이 원래 이런 것도 있지만...[64] 정조는 즉위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쿨하게 씹었다.[65] 대신에 술을 완전히 금지하지 않고 약술은 마실 수는 있었다.[66] 다만 현대인과 당시 사람들의 식사량을 생각해보면 현대 기준으로는 그다지 소식이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민족의 식사량 참고. 게다가 정작 영조가 좋아하던 음식은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 고추장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빼박 사치스러운 요리.[67]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궁중 한정.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 행사 땐 가체를 착용했다. 또한 가체 금지령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시행 시간은 7년 밖에 못되어 실패했기에, 나중에는 가체를 다시 허용했다.[68] 근데 이게 사실이라면 생각이 없다라고 봐야한다. 분명히 즉위 도중에 구리와 '''주석'''은 수입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이런 지시를 내린걸 보면... 영조가 괜히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는게 아니다. 최소한 금과 은은 당시에 조선에서 채굴이 가능했다.[69] 임금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일. 사실 여기에 고문도 포함된다.[70] 다만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조는 다른 왕들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심지어 재위한지 30년이나 되는데도 역모가 일어났으니 더욱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커질만도 했다.[71] 특히 솔잎주는 당시엔 비싼 고급술이었다.[72] 참고로 주석은 알루미늄 이전에 호일로 쓰던 생각보다 비싼 금속이었다.[73] 현대로 치면 푸아그라, 캐비어를 선호하면서 자기가 검소하다고 언플한 셈. 심지어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는 21세기인 현재에도 비싼 음식재료다. 그나마 흔한 고추장마저 이 시기에는 비교적 덜 흔했다.[74] 사육신세조를 수양대군이라는 군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이라든가,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폭군이나 암군을 즉위 이전의 군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것은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법 유구한 전통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보편적으로 평가가 나쁜 폭군 내지 암군이었거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까려면 충분히 깔 여지가 많은 인물들을 묘호가 아닌 군호로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영조).[75] 군호도 아닌 (본명)를 대놓고 부르는 이성계이방과, 이방원 같은 사례도 있긴 한데, 이 경우는 이들을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고려의 신하'와 '조선의 왕'이라는 그들의 두 가지 상반된 정체성 중 '고려의 신하' 쪽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실제로 태조정종, 태종은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으며 조선의 임금이 아닌 고려의 신하로서도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인만큼)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명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저 셋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임금의 휘를 '이X', '이XX' 식으로 대놓고 부르는 경우에는 얄짤없이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인 것으로, 해당 인물을 묘호는커녕 군호로 불릴 자격도 없는 자, 다시 말해 '''연산군이나 광해군만도 못한''' 쓰레기로 취급하는 극도의 멸칭이다. 더군다나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묘호는 꽤나 잘 알려져 있는 반면, 휘는 피휘문제로 인해서 해당 글자가 봉인되어버리는 불편을 최소화해주기 위해서 일부러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이는 소위 벽자로 지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76] 1689년의 기사환국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77]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78] 문종(고려)이 이런 케이스다. 정종(고려 10대)이 죽기 하루 전에 선양(線陽)해 즉위했다.[79] 평안도 출신 김신달리 형제의 후손으로, 정황기 만주에 편입되었다. 조선 사신들 말마따나 뿌리는 잊지 않았는지 조선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편의를 많이 봐줘서 명사 편찬 과정에서 인조반정이 찬탈 내지 반역으로 기록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는 이 사람의 종손으로, 이 가문은 가경 연간에 만주식 성인 긴기야씨를 사성받는다. 종손인 김간 역시 건륭 연간 많은 업적을 남긴 권신이어서 청사고 열전에 이름이 오를 정도의 강건성세 네임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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