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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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죽 반죽선(合竹 斑竹扇).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엄재수 작품.
합죽선(合竹扇)은 부채의 일종으로 대나무의 겉껍질로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만든다.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인 접선(摺扇)의 일종이며 대나무의 겉대 두 쪽을 맞붙여 살을 만들었다 하여 합죽선이라 부른다.
접선 중 가장 품격이 높은 부채로 일반 접선[1] 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나무의 겉껍질 두 쪽을 민어부레풀[2] 로 붙여 하나의 살을 만드는 이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다. 현재는 접부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명사라 접부채라면 그냥 '합죽선'이라고 통칭하면서 일반 접선과 구분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하다. 혹시라도 합죽선을 구입하고 싶을 때는 '전주 합죽선'이라고 직접 말해주어야 한다.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여 조선시대에는 각 공정별로 육방(六房)이라는 곳을 두어 각 공정 별 전문가로 하여금 공정을 처리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서 전통 합죽선의 경우 숙련공이 부채 하나 만드는데 약 100일이 소요된다고.
부채는 본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데 쓰지만, 합죽선에는 산수화(山水畵)·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려넣어 미술적 또는 골동품적 가치를 지니는 수도 있다. 물론 근래 생산되는 합죽선의 대다수는 공장제.[3] 일부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합죽선은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굉장히 비싸다.
특산지는 전주. 전주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맛돌이와 맛순이도 이 합죽선과 태극선을 기본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흔히 오해하기 쉬운 것 중 하나로 합죽선을 접고 펴는 쥘부채 그 자체로 생각하기 쉬운데, 합죽선은 조선 후기에 발생한 수많은 접부채의 한 종류일 뿐이다. 접고 펼 수 있는 쥘부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화견문지에는 왜선(倭扇)이라는 단어로 등장하며, 고려도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쥘부채가 언급된다.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물에는 첩선(疊扇, 貼扇), 혹은 접선(摺扇)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합죽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4]
여하튼 접부채 중 고난이도의 기술이 들어갔다거나 희귀한 재료로 부채를 만들면 한 가족이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5][6][7]
신분에 따라 제약도 심해서 왕족은 50개 속살, 사대부 이상은 38개 속살을 쓸 수 있었으며 그 이하는 살 수가 낮았고 평민은 칠접선이나 합죽선 같은 고급 접부채를 쓰지 못해 일반 접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 자는 고리에 부채 전용 노리개인 선추를 달지 못했다. 이처럼 접부채를 보면 신분을 대충 알 수 있다고 하니 현대로 치면 손목시계 정도일까.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 시대에 이르러 접부채는 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겉대를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질로 말아 싼 대모선이 등장했고 당시에는 구하기 매우 힘든 물소의 뿔로 만든 외각선 및 내각선, 전주 특산품인 반죽(斑竹)을 이용한 반죽선 및 이대선, 삼대선 등 부채의 종류 또한 굉장히 다양해졌다. 시간이 더 흘러 양반들이 부채를 이용해 자기를 과시하는 게 지나쳐 대밭이 황폐화되고 평민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조정에서는 부채의 살 수를 줄이고 합죽을 하지 말 것, 크기는 어느 정도 이하여야 할 것 등을 고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합죽선이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합죽(合竹)이라는 단어가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정조실록 18년 11월 27일이며, 대나무 부채에 대한 폐단을 논하며 외각(外角), 합죽, 칠지(漆紙)를 금하자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른 문헌도 합죽이라는 단어가 실려 있으나 해당 문헌을 기록한 시기는 거의 대부분 영정조 시대 근처다. 합죽선 유물이 주로 발견된 연대 또한 이와 비슷하므로 적어도 그 이전부터 합죽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어느 연구 자료에는 합죽선은 오골선(吳骨扇) 혹은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듯하다. [8][9]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해진 부채의 미가 일제강점기 때 값싼 부채의 보급으로 찾는 이가 줄어들고 양반 계층이 몰락하여 맥이 잠시 끊겼다.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정책도 한 몫 했다. 선비 정신이 깃들여 있는 우리나라 접부채를 일제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인들은 글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기술을 전승하기 때문에 그 화려했던 기법들은 이러한 연유로 전부 사라지고 왜소한 부채들만 남게 된다.
해방 후 몇몇 장인들이 다시 합죽선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나 잃어버린 기법들을 복원하지 못해 그저그런 부채들만 만들다가 자동기계의 도입과 베이클라이트 같은 신소재의 등장으로 부채의 가격은 획기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채의 품질은 매우 조악해졌고 그 와중에 옛 것을 찾아 제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서 서술하였지만 합죽선은 6개의 제작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리고 그 공정을 담당하는 곳을 '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육방'이다. 육방에서 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
초조방 -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낸다.
정련방 - 민어의 부레를 삶아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여 살을 만든다.
낙죽방 - 속살과 변죽(겉대)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는다.
광방 - 광을 내고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도배방 - 부채의 종이를 붙인다.
사북방 -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인 사북으로 부채를 머리를 고정한다.
조선시대 합죽선은 겉대를 대나무 마디로 장식한 다절선이 보통이었다. 재료를 얇게 가공해 겉대를 말아싼 기법을 채용한 합죽선도 있지만 일반적이진 않으며 대개는 합죽선이 아닌 칠접선 유물에서 보여진다. 요즘 장인들은 칠접선과 합죽선의 기법을 적절히 섞어 더욱 화려한 부채들을 선보인다.
다절선(多節扇) - 합죽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겉대에 마디가 많은 부채. 근래 시판되는 합죽선의 99.9%가 이에 해당한다. 마디 수가 많을 수록 고가로 치지만 이것은 맹종죽이라고 하는 대나무의 일종으로 변죽을 만들면서 생긴 경향으로,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맹종죽은 마디가 많이 생기며, 매우 무른 성질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열을 가해 겉대를 굽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펴지려는 성질 때문에 오래 쓰면 부채의 변죽이 다시 직선으로 돌아가면서 모양이 흐트러지는 단점이 있다. 대체적으로 많이 생산되는 물건인 만큼, 장인에 따라 그 품질이 천차만별이며, 조악한 품질의 합죽선은 대나무의 결이 거꾸로 일어나 손에 찔리기도 한다. 다만 맹종죽보다 훨씬 견고한 분죽대로 만든 합죽선은 유물처럼 오래 사용해도 흐트러지지 않고 정갈하다.[10] 다만 이 쪽은 마디 수가 적다는 취향 문제가 있기도 하다.
반죽선(斑竹扇) - 전주의 특산품인 반죽(斑竹)으로 만든 부채. 이 대나무는 겉대가 마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처럼 얼룩덜룩한 것이 특징이다. 중국에도 반죽이 있으나 그 무늬가 국산과는 다르다. 왕실에 진상한 특산품이라고 하며 현재 유물이 존재하며 만기요람에 해당 기록이 존재한다.[11]
외각선(外角扇) - 겉대에 뿔을 사용한 부채. 보통은 소뿔을 이용하여 우각선(牛角扇)이라고도 한다. 한우의 뿔은 짧아서 쓰기 힘든 탓에 물소의 뿔을 쓰는데 조선시대에는 물소의 뿔이라는 재료가 워낙 희귀하다보니 아무나 쓰지 못했다. 주로 장군 등의 무신(武臣)이 썼다고 한다. 앞서 서술한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에 해당 내용이 등장한다.
내각선(內角扇) - 겉대 안쪽에 뿔 및 기타 재료를 덧댄 부채. 현재 유물이 존재한다. 이 내각은 선두까지 이어져 있어 겉대의 모양새를 잡아 주는 역할도 한다.
나전선(螺鈿扇) - 겉대에 흑칠을 한 뒤 나전을 붙여 만든 부채. 유물이 존재하며 해당 유물에는 끊음 기법으로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라고 씌여 있다.
대모선(玳瑁扇) -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만든 부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모홍접선(玳瑁紅摺扇)이라는 유물이 존재한다. 부채 중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며 주로 문신(文臣)들이 썼다고 하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가 워낙 귀한 재료라서 이것을 부채에 올리면 왕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이라 제대로 자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2]
화각선(華角扇) - 겉대에 뿔을 사용하였으나 뿔 안 쪽에 정교하게 그림을 그렸다. 유물이 존재하나 해당 유물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으며, 재료 또한 진짜 소뿔이 아닌 플라스틱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당시에는 플라스틱을 발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귀한 재료였을 것이다.
대륜선(大輪扇) - 별선(別扇)의 일종으로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햇볕가리개 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백접선(百摺扇) - 문헌에 등장하는 정확한 명칭은 오십죽백첩선(五十竹白貼扇)이며[13] 오십살백접선으로도 부른다. 왕의 직계만이 쓸 수 있었으며 살 수가 50개인 부채를 가리킨다. 말로만 전해진 전설 속의 부채였으나, 2015년 그 유물이 첫 공개된 바 있다. 처음에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돈 많은 양반들도 썼다고 하며, 공개된 유물은 왕이 신하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접선이 합죽선이라는 근거는 없다. 유물에서는 속살에 옻칠한 칠접선으로 발견되며 문헌에서는 합죽이라고 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피선(魚皮扇) - 문헌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물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다소 기이한 부채. 최근 몇몇 선자장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작했다. 가오리나 상어의 껍질로 만든 어피선은 굉장한 단단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어두선(魚頭扇) - 선두의 모양이 물고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끝이 약간 뾰족하다.
사두선(巳頭扇) - 선두의 모양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어두선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선두의 끝이 약간 뭉실하다.
승두선(僧頭扇) - 선두의 모양이 스님(중)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승두선은 그 특유의 둥그런 모양 덕분에 펴지는 각도가 좁은 부채일 때 비교적 손이 편안하다고 한다.
최근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무형문화재들이 접부채에 대한 특징을 정리하는 중이다. 조선시대 말기 이전까지의 합죽선은 겉대에 마디대 치장을 하였고 속살에 옻칠한 칠접선은 겉대에 말아싸기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로 가면서 이 기법들이 혼재되어 칠접선 기법이 합죽선에도 적용되곤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중인 갓피홍지합죽선이 그 좋은 예이다.
1. 구입
합죽선은 손에서 가지고 노는 쥘부채이므로 가급적 인터넷 쇼핑몰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좋다.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부채를 부칠 때 과도한 힘이 들어가 오히려 더 더워질 수 있으며 가지고 노는 재미가 없다. 공방, 하다못해 지업사 같은 곳[14] 에서라도 내 손에 맞는 부채를 직접 쥐어 보고 구입하기 바란다. 또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값어치가 올라가나 공방에서는 그림을 그려 주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림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물어보자.
다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값이 쌀 수록 품질 또한 조악해진다. 특히 수공예품은 더더욱 그러하다. 합죽선은 종이만 교환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기물이므로 오래 쓸 것 또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된 작품을 구매하고 싶으면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작품 구입을 문의하면 되나, 가격은 상상 이상이므로 신중을 요한다.
2. 관리
민어부레풀로 속살을 접합하였으므로 비를 맞히면 민어부레풀이 떠서 못쓰게 된다. 비를 맞히지 말아야 하며 또한 겨울에 보관 시 부채 앞 끝을 고무줄로 감아 오동나무 상자 등에 보관하면 좋다. 종이가 찢어졌다 하여 냅다 버리지 말고 공방에 가서 종이를 교환하자. 대략 5천원이면 교환할 수 있다.
속살 한두개가 쪼개졌다 해도 그 부분만 뺄 수 있으니 이 또한 공방에 가 보자.
떨어뜨리면 부채가 상하므로 관리에 주의를 요하며 부채를 펼 땐 소리꾼들[15] 처럼 부채 끝을 잡고 떨어뜨리듯 쫙 펼치면 종이가 매우 빨리 상한다. 펼칠 땐 점잖게, 접을 때도 조용히.[16][17]
주머니에 넣으면 주머니의 안감이 부드러운 경우 부채 속살의 나뭇결이 거꾸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가방 안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자.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을 선자장[18] 이라고 한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128호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각 부분의 기능보유자[19] 는 다음과 같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 2015년 선자장이 중요 무형문화재 128호로 등록된 이후 김동식씨가 처음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엄재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계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 박인권[20]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문헌에는 부채 종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있을 뿐 그 상세한 모양새는 기록에 없으며, 근래에 발견된 유물들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무형문화재들이 고증 오류를 빚곤 한다. 특히 삼국시대, 고려시대 합죽선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21] , 이 시대의 복원 합죽선이라고 판매하는 합죽선들은 고증이 되지 않은 물건들이다.[22] 따라서 복원품 및 재현품이라는 부채를 구매할 때에는 반드시 그 원형 유물이 존재하는 지 확인하고 구매하도록 하자.
또한, 특정 쇼핑몰들이 스스로를 홍보하는 과정이 지나친 나머지 동종업계의 사람들을 공격 및 소송을 남발하거나 블로그 글들을 신고하며, 위키 문서를 훼손하는 일 따위 등도 자행하고 있다 (본 문서도 업계 사람에 의해 몇 차례의 반달리즘이 가해졌다)
본 항목은 쥘부채의 일종인 ‘합죽선’에 대한 설명인데, 어째서인지 ‘쥘부채’조차도 이쪽으로 리다이렉트되도록 되어 있다. 당연히 논리상 오류이고, ‘쥘부채’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으므로 리다이렉트는 취소되어야 하고, 쥘부채 항목은 따로 만들어져야 한다.
합죽 반죽선(合竹 斑竹扇).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엄재수 작품.
1. 합죽선이란?
합죽선(合竹扇)은 부채의 일종으로 대나무의 겉껍질로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만든다.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인 접선(摺扇)의 일종이며 대나무의 겉대 두 쪽을 맞붙여 살을 만들었다 하여 합죽선이라 부른다.
접선 중 가장 품격이 높은 부채로 일반 접선[1] 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나무의 겉껍질 두 쪽을 민어부레풀[2] 로 붙여 하나의 살을 만드는 이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다. 현재는 접부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명사라 접부채라면 그냥 '합죽선'이라고 통칭하면서 일반 접선과 구분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하다. 혹시라도 합죽선을 구입하고 싶을 때는 '전주 합죽선'이라고 직접 말해주어야 한다.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여 조선시대에는 각 공정별로 육방(六房)이라는 곳을 두어 각 공정 별 전문가로 하여금 공정을 처리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서 전통 합죽선의 경우 숙련공이 부채 하나 만드는데 약 100일이 소요된다고.
부채는 본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데 쓰지만, 합죽선에는 산수화(山水畵)·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려넣어 미술적 또는 골동품적 가치를 지니는 수도 있다. 물론 근래 생산되는 합죽선의 대다수는 공장제.[3] 일부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합죽선은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굉장히 비싸다.
특산지는 전주. 전주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맛돌이와 맛순이도 이 합죽선과 태극선을 기본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2. 합죽선의 역사
흔히 오해하기 쉬운 것 중 하나로 합죽선을 접고 펴는 쥘부채 그 자체로 생각하기 쉬운데, 합죽선은 조선 후기에 발생한 수많은 접부채의 한 종류일 뿐이다. 접고 펼 수 있는 쥘부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화견문지에는 왜선(倭扇)이라는 단어로 등장하며, 고려도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쥘부채가 언급된다.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물에는 첩선(疊扇, 貼扇), 혹은 접선(摺扇)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합죽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4]
여하튼 접부채 중 고난이도의 기술이 들어갔다거나 희귀한 재료로 부채를 만들면 한 가족이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5][6][7]
신분에 따라 제약도 심해서 왕족은 50개 속살, 사대부 이상은 38개 속살을 쓸 수 있었으며 그 이하는 살 수가 낮았고 평민은 칠접선이나 합죽선 같은 고급 접부채를 쓰지 못해 일반 접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한 자는 고리에 부채 전용 노리개인 선추를 달지 못했다. 이처럼 접부채를 보면 신분을 대충 알 수 있다고 하니 현대로 치면 손목시계 정도일까.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영조 및 정조 시대에 이르러 접부채는 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겉대를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대모)의 등껍질로 말아 싼 대모선이 등장했고 당시에는 구하기 매우 힘든 물소의 뿔로 만든 외각선 및 내각선, 전주 특산품인 반죽(斑竹)을 이용한 반죽선 및 이대선, 삼대선 등 부채의 종류 또한 굉장히 다양해졌다. 시간이 더 흘러 양반들이 부채를 이용해 자기를 과시하는 게 지나쳐 대밭이 황폐화되고 평민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조정에서는 부채의 살 수를 줄이고 합죽을 하지 말 것, 크기는 어느 정도 이하여야 할 것 등을 고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합죽선이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합죽(合竹)이라는 단어가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정조실록 18년 11월 27일이며, 대나무 부채에 대한 폐단을 논하며 외각(外角), 합죽, 칠지(漆紙)를 금하자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른 문헌도 합죽이라는 단어가 실려 있으나 해당 문헌을 기록한 시기는 거의 대부분 영정조 시대 근처다. 합죽선 유물이 주로 발견된 연대 또한 이와 비슷하므로 적어도 그 이전부터 합죽선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어느 연구 자료에는 합죽선은 오골선(吳骨扇) 혹은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듯하다. [8][9]
조선 후기 이후 화려해진 부채의 미가 일제강점기 때 값싼 부채의 보급으로 찾는 이가 줄어들고 양반 계층이 몰락하여 맥이 잠시 끊겼다.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정책도 한 몫 했다. 선비 정신이 깃들여 있는 우리나라 접부채를 일제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인들은 글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기술을 전승하기 때문에 그 화려했던 기법들은 이러한 연유로 전부 사라지고 왜소한 부채들만 남게 된다.
해방 후 몇몇 장인들이 다시 합죽선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나 잃어버린 기법들을 복원하지 못해 그저그런 부채들만 만들다가 자동기계의 도입과 베이클라이트 같은 신소재의 등장으로 부채의 가격은 획기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채의 품질은 매우 조악해졌고 그 와중에 옛 것을 찾아 제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제작 공정
앞서 서술하였지만 합죽선은 6개의 제작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리고 그 공정을 담당하는 곳을 '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육방'이다. 육방에서 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
초조방 -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낸다.
정련방 - 민어의 부레를 삶아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여 살을 만든다.
낙죽방 - 속살과 변죽(겉대)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는다.
광방 - 광을 내고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도배방 - 부채의 종이를 붙인다.
사북방 -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인 사북으로 부채를 머리를 고정한다.
4. 합죽선의 종류
조선시대 합죽선은 겉대를 대나무 마디로 장식한 다절선이 보통이었다. 재료를 얇게 가공해 겉대를 말아싼 기법을 채용한 합죽선도 있지만 일반적이진 않으며 대개는 합죽선이 아닌 칠접선 유물에서 보여진다. 요즘 장인들은 칠접선과 합죽선의 기법을 적절히 섞어 더욱 화려한 부채들을 선보인다.
다절선(多節扇) - 합죽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겉대에 마디가 많은 부채. 근래 시판되는 합죽선의 99.9%가 이에 해당한다. 마디 수가 많을 수록 고가로 치지만 이것은 맹종죽이라고 하는 대나무의 일종으로 변죽을 만들면서 생긴 경향으로,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맹종죽은 마디가 많이 생기며, 매우 무른 성질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열을 가해 겉대를 굽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펴지려는 성질 때문에 오래 쓰면 부채의 변죽이 다시 직선으로 돌아가면서 모양이 흐트러지는 단점이 있다. 대체적으로 많이 생산되는 물건인 만큼, 장인에 따라 그 품질이 천차만별이며, 조악한 품질의 합죽선은 대나무의 결이 거꾸로 일어나 손에 찔리기도 한다. 다만 맹종죽보다 훨씬 견고한 분죽대로 만든 합죽선은 유물처럼 오래 사용해도 흐트러지지 않고 정갈하다.[10] 다만 이 쪽은 마디 수가 적다는 취향 문제가 있기도 하다.
반죽선(斑竹扇) - 전주의 특산품인 반죽(斑竹)으로 만든 부채. 이 대나무는 겉대가 마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처럼 얼룩덜룩한 것이 특징이다. 중국에도 반죽이 있으나 그 무늬가 국산과는 다르다. 왕실에 진상한 특산품이라고 하며 현재 유물이 존재하며 만기요람에 해당 기록이 존재한다.[11]
외각선(外角扇) - 겉대에 뿔을 사용한 부채. 보통은 소뿔을 이용하여 우각선(牛角扇)이라고도 한다. 한우의 뿔은 짧아서 쓰기 힘든 탓에 물소의 뿔을 쓰는데 조선시대에는 물소의 뿔이라는 재료가 워낙 희귀하다보니 아무나 쓰지 못했다. 주로 장군 등의 무신(武臣)이 썼다고 한다. 앞서 서술한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에 해당 내용이 등장한다.
내각선(內角扇) - 겉대 안쪽에 뿔 및 기타 재료를 덧댄 부채. 현재 유물이 존재한다. 이 내각은 선두까지 이어져 있어 겉대의 모양새를 잡아 주는 역할도 한다.
나전선(螺鈿扇) - 겉대에 흑칠을 한 뒤 나전을 붙여 만든 부채. 유물이 존재하며 해당 유물에는 끊음 기법으로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라고 씌여 있다.
대모선(玳瑁扇) - 바다거북의 일종인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만든 부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모홍접선(玳瑁紅摺扇)이라는 유물이 존재한다. 부채 중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며 주로 문신(文臣)들이 썼다고 하나,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데기가 워낙 귀한 재료라서 이것을 부채에 올리면 왕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이라 제대로 자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2]
화각선(華角扇) - 겉대에 뿔을 사용하였으나 뿔 안 쪽에 정교하게 그림을 그렸다. 유물이 존재하나 해당 유물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으며, 재료 또한 진짜 소뿔이 아닌 플라스틱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당시에는 플라스틱을 발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귀한 재료였을 것이다.
대륜선(大輪扇) - 별선(別扇)의 일종으로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햇볕가리개 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백접선(百摺扇) - 문헌에 등장하는 정확한 명칭은 오십죽백첩선(五十竹白貼扇)이며[13] 오십살백접선으로도 부른다. 왕의 직계만이 쓸 수 있었으며 살 수가 50개인 부채를 가리킨다. 말로만 전해진 전설 속의 부채였으나, 2015년 그 유물이 첫 공개된 바 있다. 처음에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돈 많은 양반들도 썼다고 하며, 공개된 유물은 왕이 신하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접선이 합죽선이라는 근거는 없다. 유물에서는 속살에 옻칠한 칠접선으로 발견되며 문헌에서는 합죽이라고 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피선(魚皮扇) - 문헌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물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다소 기이한 부채. 최근 몇몇 선자장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제작했다. 가오리나 상어의 껍질로 만든 어피선은 굉장한 단단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어두선(魚頭扇) - 선두의 모양이 물고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끝이 약간 뾰족하다.
사두선(巳頭扇) - 선두의 모양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어두선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선두의 끝이 약간 뭉실하다.
승두선(僧頭扇) - 선두의 모양이 스님(중)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승두선은 그 특유의 둥그런 모양 덕분에 펴지는 각도가 좁은 부채일 때 비교적 손이 편안하다고 한다.
최근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무형문화재들이 접부채에 대한 특징을 정리하는 중이다. 조선시대 말기 이전까지의 합죽선은 겉대에 마디대 치장을 하였고 속살에 옻칠한 칠접선은 겉대에 말아싸기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로 가면서 이 기법들이 혼재되어 칠접선 기법이 합죽선에도 적용되곤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중인 갓피홍지합죽선이 그 좋은 예이다.
5. 합죽선 구입 및 관리 요령
1. 구입
합죽선은 손에서 가지고 노는 쥘부채이므로 가급적 인터넷 쇼핑몰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좋다. 내 손에 맞지 않으면 부채를 부칠 때 과도한 힘이 들어가 오히려 더 더워질 수 있으며 가지고 노는 재미가 없다. 공방, 하다못해 지업사 같은 곳[14] 에서라도 내 손에 맞는 부채를 직접 쥐어 보고 구입하기 바란다. 또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값어치가 올라가나 공방에서는 그림을 그려 주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림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물어보자.
다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값이 쌀 수록 품질 또한 조악해진다. 특히 수공예품은 더더욱 그러하다. 합죽선은 종이만 교환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기물이므로 오래 쓸 것 또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된 작품을 구매하고 싶으면 무형문화재가 직접 제작한 작품 구입을 문의하면 되나, 가격은 상상 이상이므로 신중을 요한다.
2. 관리
민어부레풀로 속살을 접합하였으므로 비를 맞히면 민어부레풀이 떠서 못쓰게 된다. 비를 맞히지 말아야 하며 또한 겨울에 보관 시 부채 앞 끝을 고무줄로 감아 오동나무 상자 등에 보관하면 좋다. 종이가 찢어졌다 하여 냅다 버리지 말고 공방에 가서 종이를 교환하자. 대략 5천원이면 교환할 수 있다.
속살 한두개가 쪼개졌다 해도 그 부분만 뺄 수 있으니 이 또한 공방에 가 보자.
떨어뜨리면 부채가 상하므로 관리에 주의를 요하며 부채를 펼 땐 소리꾼들[15] 처럼 부채 끝을 잡고 떨어뜨리듯 쫙 펼치면 종이가 매우 빨리 상한다. 펼칠 땐 점잖게, 접을 때도 조용히.[16][17]
주머니에 넣으면 주머니의 안감이 부드러운 경우 부채 속살의 나뭇결이 거꾸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가방 안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자.
6. 무형문화재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을 선자장[18] 이라고 한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128호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각 부분의 기능보유자[19] 는 다음과 같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 2015년 선자장이 중요 무형문화재 128호로 등록된 이후 김동식씨가 처음으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엄재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계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 박인권[20]
7. 문제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문헌에는 부채 종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있을 뿐 그 상세한 모양새는 기록에 없으며, 근래에 발견된 유물들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무형문화재들이 고증 오류를 빚곤 한다. 특히 삼국시대, 고려시대 합죽선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21] , 이 시대의 복원 합죽선이라고 판매하는 합죽선들은 고증이 되지 않은 물건들이다.[22] 따라서 복원품 및 재현품이라는 부채를 구매할 때에는 반드시 그 원형 유물이 존재하는 지 확인하고 구매하도록 하자.
또한, 특정 쇼핑몰들이 스스로를 홍보하는 과정이 지나친 나머지 동종업계의 사람들을 공격 및 소송을 남발하거나 블로그 글들을 신고하며, 위키 문서를 훼손하는 일 따위 등도 자행하고 있다 (본 문서도 업계 사람에 의해 몇 차례의 반달리즘이 가해졌다)
본 항목은 쥘부채의 일종인 ‘합죽선’에 대한 설명인데, 어째서인지 ‘쥘부채’조차도 이쪽으로 리다이렉트되도록 되어 있다. 당연히 논리상 오류이고, ‘쥘부채’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으므로 리다이렉트는 취소되어야 하고, 쥘부채 항목은 따로 만들어져야 한다.
8. 관련 문서
[1]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는 '오죽선' 역시 바로 이런 일반 접선이다.[2] 이 민어부레풀을 어교(魚膠)라고 하며, 동물의 뼈나 가죽으로 만드는 아교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3] 다만 제품의 특성상 그 역시도 공장제 '수공업' 형태로 대량생산되는 것이다.[4] 무형문화재 고 이기동 선생의 말에 따르면, 어느 기녀를 사랑한 스님이 있었더란다. 신분이 신분인만큼 언제 한번 툭 터 놓고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머리 흔들어 쉬 털어 버릴 수도 없는 연정.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 늘 곁에 두고 그녀인 듯 기릴 물건을 낳으니 바로 접었을 때 모양이 여인의 자태가 되는 합죽선이라고 한다. 출가한 후에도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한 수양이 덜 된 대사가 외로운 수행 중의 노리갯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신빙성이 별로 없는 내용이다. 합죽선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부채 기술이 녹아든 정교한 물건이고 스님 한 사람이 뚝딱 하고 만들 만한 물건이 절대로 아니다.[5]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10월 24일 을유 1번째기사에 '허침이 아뢰기를, "갓(笠)을 꾸미는 데 모두 금은(金銀)을 쓰니, 그 값이 거의 면포 4, 5동(同)에 이르고, 선자(扇子; 부채) 값이 또한 8, 9동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알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성종 때의 대신 허침이 왕자들의 사치를 고발하는 대목인데 실록에는 부채라고만 되어 있고 합죽선이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왕자들이 극도로 사치스런 소재로 부채를 만들어 자기 부를 과시했거나 아니면 왕이 직접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 허침이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합죽이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합죽선에 대한 묘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6] 전북 무형문화재 엄재수 선자장의 말에 따르면, 성종 시절 면포 8, 9동의 가격은 대략 백미 3섬, 즉 240kg 정도 된다고 한다. 게다가 이 접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더욱 뻥튀기가 되어 황금으로 거래한다고 한다.[7]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 6월 25일 정사 1번째 기사에 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지금 좌무위(左武衛)에게 회답으로 준 물건을 보건대, 일본 물건과 값을 비교하면, 3, 4분의 1에 불과하오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에 박한 것 같습니다. 더욱 광초(光綃)는 가치가 면포 8, 9필에 해당하며, 부채는 비록 중국에서도 1자루 가치가 황금 2냥쭝에 준하니, 그 값이 지극히 중한데, 지금 호조에서는 광초 1필을 면포 2필에 준하고, 부채 5자루를 정포 5필에 준하였으니, 실로 이는 너무 가볍습니다. 비록 본값에 준하지는 못할지라도 절반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광초 1필에 면포 5필로 준하고, 부채 1자루에 포자 1필로 하여 다시 마감하여 아뢰라." 고 하였다.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접부채의 가격은 접부채가 화려해지는 조선 후기가 아닌 조선 초기에도 비쌌다.[8] 엄재수. "한국 전통 부채의 역사적 고찰 및 디자인 접근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주대학교, 2019. 전라북도 [9] 일본 도쿠가와시대에 이 조선골선을 모방하여 부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증거 자료만 조금 더 뒷받침된다면 합죽선의 최초 등장 시기는 1600년대 혹은 그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가볼 수 있다. [10] 조선시대 마디대 합죽선 유물의 겉대에는 맹종죽이 없고 전부 분죽대를 썼다. [11] 오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사십죽백반첩선(五十竹白斑貼扇) 등으로 나오는데 여기의 반(斑)이라는 글자가 바로 반죽을 의미한다. [12]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9월 24일 병신 2번째기사, 이때에 홍치기가 대모(玳瑁)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尹游)에게 선사하였으므로 서명형이 논핵하였는데, 사문하자 마침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홍치기라는 사람이 정말 대모선을 만들지 않았는지, 대모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는 지는 정확히 모르는 일. [13] 백첩의 백(白)은 종이가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흰 종이임을 의미한다. 일백 백(百)이 아니다. [14] 합죽선 공방은 절대 다수가 전주에 위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합죽선을 사기 위해서 '전주에 가야만' 한다면 그건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전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전주 합죽선을 공급하는 곳은 존재한다. 대표적인 곳이 언급한 지업사나 필방 같은 곳이다. 물론 그런 곳에서는 싸구려 중국산도 있으니 주의. 명확하게 '전주 합죽선 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안그러면 가끔 오죽선 비스무리한 퀄리티의 중국산을 내오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 아무래도 공방보다는 입고 수량이 적다보니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다는 것도 단점은 단점. 다만 후자의 경우, 애초에 '맞춤 상품'으로 나오던 것이 기성품화 되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15] 당연한 말이지만 옛날의 소리꾼들이 썼던 부채는 합죽선이 아니다.[16] 물론 펴고 접는 것은 자기 취향이다. 어디까지나 '오래 쓰고 싶을 경우'에 한한 문제. 본인이 세게 펴고 싶다면 세게 펴라. [17] 근데 애초에 접었다 펴는 물건의 특성상, 자주 접었다 폈다하면 일찍 상하는건 마찬가지.[18] 조선시대에는 육방에 해당하는 각 공정을 전부 능숙히 해낼 줄 아는 사람을 선자장(扇子匠)이라고 불렀다. 선자장은 각 육방에 있는 공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부채 제작 작업을 총괄했다. 육방 중 하나라도 공정을 할 줄 모른다면 선자장이 아닌 선자(扇子)라고만 불렀다.[19]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무형문화재에서 그 보유자 - 속칭 인간문화재 - 에 대해서, 공예 분야의 겨우 '기능보유자'로, 공연분야의 경우 '예능보유자'로 칭한다.[20] 이전 무형문화재 선자장이었으나 아들인 박계호씨에게 계승한 이후로 명예보유자로 지정되었다.[21] 고려시대 이전에 합죽선이 없다는 주장에 힘이 많이 실리고 있지만, 유물이 없어서 그렇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22] 복원품인데 무슨 부채를 복원했는 지 모르면 근본 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