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요(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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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鷹'''
1. 제원
2. 개요
3. 함생
3.1. 건조
3.2. 운용
3.3. 최후


1. 제원


  • ||기준배수량||||15,400톤||
  • ||전장||||166.5m||
  • ||최대폭||||21.9m||
  • ||출력||||52,000마력||
  • ||속력||||23노트||
  • ||항속거리|||| 18노트로 8,358해리||
  • ||무장||||12.7cm 고각포 4기, 25mm 3연장 기총 8기 수동폭뢰투사기 1문(8개)||
  • ||승무원||||587명||
  • ||탑재기(계획)||||함상 전투기18기, 함상 공격기 6기||
  • ||기공일자||||1938년 2월 5일||
  • ||진수일자||||1938년 12월 9일||
  • ||준공일자||||1939년 5월 31일 (아르헨티나 마루로써 완성)||
  • ||취역일자[1]||||1943년 11월 23일||

2.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개조항공모함이자 경항공모함 카이요(海鷹).
이전에는 다이요와 같은 급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으나 다이요는 일본우선(NYK)에서 보유한 닛타마루(新田丸)급 화객선을 개장한 항공모함으로 근본이 다르기에 같은 급으로 분류할 수 없다. 닛타마루급과 본함의 모체인 아르헨티나마루는 추진 기관, 배수량, 전장 등 모든 성능이 달라 준동형선박이라 할 수도 없다.

3. 함생



3.1. 건조


원래 1939년 취항한 오사카 상선의 남미항로 화객선이었던 아르헨티나마루(あるぜんちな丸)였으며, 자매선으로는 브라질마루(ぶら志゛る丸)가 있다.[2][3] 설계 당시 우수선박건조조성시설에 의해 지원금을 교부받아 향후 항공모함 등으로 전력화 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당시 일본-남미 항로는 일본우선과 오사카상선 간의 협약에 의해 오사카상선이 독점하는 황금노선이었다. 주로 브라질로 가는 일본인 이민자들이 이용했지만, 향후 외국인 관광객을 일본에 유치하기 위해 서비스의 향상에 고심하여 설계된 선박이었다. 당시 중일전쟁이 한창이었기에 사치품의 민간 이용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일본의 힘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힘을 보여 주자'''라는 목적 아래에 사치스러운 실내 장식의 조달을 지원해 '''국책 호화 여객선'''으로 불리었다. 승무원을 미소년으로 채용하여 응대에 있어 고객을 만족시키려 노력하고, 취항 당시 '''수영장에서의 낚시 대회'''등 선상 행사의 유치에도 충실했다. 또한 이 선박은 오사카상선이 운용한 최대급의 선박이어서[4] 관서지역에 아르헨티나마루를 수용할 민간상선용의 드라이독이 없어서 하리마 조선소에 새로운 드라이독을 건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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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마루.
당시의 정책이었던 우수선박건조조성시설의 지원금 교부 조건에 의해[5] 선체와 스크류 등의 수조모형실험을 거쳐 선체저항이 최대한 없도록 세심하게 선박이 설계되었으며, 디자인 측면에서도 이전의 여객선들과는 달리 곡면의 부드러운 디자인을 채택하였다. 당시 세계에서 유래가 없던 11기통 선박용 디젤엔진을 채택해 시속 21.5노트를 내는 등, 국제기준에서 우수한 호화여객선으로 꼽혔다. 하지만 전쟁으로 돌입하고 있던 국제 정세와 브라질의 이민 제한 정책에 의해 이민자 수가 감소해 삼등석과 화물선창을 줄이고 일등선실을 무리하게 늘려 복원력에 이상이 발생, 400톤의 안정기를 선체 하부에 설치하는 등 상선으로는 상업운항에서 손해를 본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우수선박건조조성시설에 의해 지원금을 교부받는 것은 해군에의 강제징용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오사카상선 내에서도 채산성이 없는 선박을 건조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으나 결국 두 척이 건조되어 오사카상선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 개전에 따라 1942년 5월, 특설수송함으로 징용되어 병력을 운송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함에 따라 항공모함의 부족이 발생해 아르헨티나 마루와 브라질 마루를 항공모함으로 개장할 것이 입안되었다. 이에 따라 두 선박은 일본으로 회항하는데, 자매함 브라질 마루는 귀환 중 미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어 아르헨티나 마루만 1942년 12월부터 개장공사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항공모함으로 운용하기에는 속력이 느리다는 점이 지적되어 카게로급 구축함의 증기 터빈 기관으로 주 기관을 환장하여 속력을 23노트로 끌어올렸다.

3.2. 운용


잠수함 탐색 등에 호위항모를 투입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일본군은 경항공모함은 일부 사용해도 호위항공모함의 제대로 된 운용을 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 용도는 항공기 수송함이었으며, 가끔 97식 함상 공격기를 탑재하고 선단 호위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전황이 악화되면서 1945년 무렵부터는 인간어뢰병기 가이텐의 항모표적 훈련함으로 쓰이는 막장스러운 말년을 보낸다.

3.3. 최후


1945년 7월 시고쿠 사다 곶에서 미군이 부설한 자기기뢰에 접촉해 항해불능의 피해를 입고, 구축함 유우카제에 예인되어 오오이타현 벳푸만에 좌초. 4일 뒤의 구레 군항 공습으로 배수펌프를 작동할 수 없게 되어 방치되었다. 전후 1948년에 해체되었다.

[1] 항모로써 취역한 시기[2] 오사카상선은 여객선에 자사의 선박이 취항하는 국가나 도시의 이름을 따 붙였다. 이 이름들은 전후 남미 이민선으로 건조된 두 척의 여객선에 다시 붙게 된다.[3] 일본의 선박명은 가타카나 표기를 하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척의 선명은 히라가나로 표기된다.[4] 오사카상선과 그 후신인 MOL은 1981년까지 이보다 더 큰 여객선을 운용하지 않았다.[5] 전시 항공모함이나 고속의 병력 수송선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항공유 탱크와 엘리베이터, 대공포좌 등이 어디에 설치될 것인가를 미리 고려해 설계해야 했으며, 고속성을 위해 선체모형과 스크류의 모형실험을 의무화했다. 또한 외국인 선원의 채용을 금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