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프랑수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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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 해군
3.2. 프랑스 해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10월 21일 카프-프랑수아 항[1] 인근의 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맞붙은 해전.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봤으나 승자를 가리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2. 배경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7년, 영국 해군 준장 존 무어는 토머스 프랭클랜드 해군 소장으로부터 서인도 제도의 무역로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정했다. 이후 영국 상선들을 호위하고 있던 존 무어는 가을 무렵 프랑스군이 아이티 제도의 카프-프랑수아에서 유럽행 호송선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아서 포레스트 대위의 분견대를 파견했다. 한편 프랑수아 쿠르생 대위는 호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함대를 이끌고 아이티에 도착했다. 그는 아이티의 현지 함대와 합세한 뒤 호송선단을 프랑스까지 호위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10월 21일 아침 영국 함대가 카프-프랑수아 항구로 접근해오자, 쿠르생 대위는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바다로 출격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 해군


  • 사령관: 아서 포레스트 대위
  • 전열함 3척
- 어거스타: 대포 60문. 아서 포레스트 대위 지휘.
- 드레드노트: 대포 60문. 모리스 서클링 대위 지휘.
- 에든버러: 대포 64문. 윌리엄 랭던 대위 지휘.

3.2. 프랑스 해군


  • 사령관: 프랑수아 쿠르생 대위
  • 전열함 4척
- Intrépide: 대포 74문, 쿠르생 대위 지휘.
- Sceptre: 대포 74문. 클레베우 대위 지휘.
- Opiniâtre: 대포 64문 몰리우 대위 지휘.
- Greenwich: 대포 50문, 푸클트 대위 지휘.
  • 프리깃함: 3척
- Outarde: 대포 44문
- Sauvage: 대포 32문
- Licorne: 대포 32문

4. 전투 경과


10월 21일 아침, 아서 포레스트 대위는 카프-프랑수아 항구로 접근하던 중 프랑스 함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출격한 것을 목격했다. 프랑스 함선이 전투를 신청하는 의미로 예포를 쏘자, 그는 이에 응하는 뜻으로 대포를 쏘게 한 뒤 그의 함선인 어거스타호에서 회의를 열어서 함장들을 소집했다. 이에 모리스 서클링 대위와 윌리엄 랭던 대위가 어거스타호에 오자, 포레스트는 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자, 신사 여러분. 저들이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나온 것을 보시오.

이에 서클링이 답했다.

제 생각에 저들을 실망시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랭던도 이에 동의하는 발언을 했고, 포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음과 같이 말하며 토론을 끝냈다.

좋소. 다들 배로 돌아가시오.

그후 양군 함대는 전투를 개시했다. 영국 함대는 서클링 대위의 드레드노트호가 선봉에 서고 포레스트 대위의 어거스타 호가 중앙에 섰으며, 랭던 대위의 에든버러 호가 후위에 섰다. 당시 프랑스 함선들의 규모는 영국 함선들보다 컸으며 대포도 영국군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수적 열세와 화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항해술을 발휘해 적의 포격을 회피하면서 전면에 있는 적 함선에게 포격을 집중했다. 그 결과 Intrépide, Sceptre, Greenwich호는 큰 손상을 입고 2시간 30분만에 전투를 중단하고 항구로 철수했다. 하지만 영국 전열함 3척 역시 적의 압도적인 포화를 완전히 회피하지는 못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다.
오후 6시경, 양측은 전투를 중단했다. 프랑스 함대는 항구로 귀환했고 영국 함대는 자메이카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카프-프랑수아 해전은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 함대는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어거스타 호는 9명의 사망자와 2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드레드노트 호는 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으며 에딘버러 호는 5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한편 프랑스 함대는 Intrépide, Sceptre, Greenwich호가 큰 손실을 입었으며, 사상자는 500~6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후 쿠르생 대위는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한 뒤 호송선단을 이끌고 프랑스 해안으로 향했는데 영국 함대는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쿠르생 대위의 함대가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폭풍우를 만났고, Opiniâtre호와 Greenwich호, 그리고 프리깃함 Outarde호가 난파되었다.
포레스트 대위의 영국 함대는 비록 적 호송선단을 궤멸시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분전해 적 함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이 중 드레드노트 호의 선장 모리스 서클링 대위는 호레이쇼 넬슨의 숙부로, 넬슨은 어릴 때부터 숙부를 존경하며 그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종종 주변인들에게 "10월 21일은 우리 집안의 행운의 날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는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궤멸시키는 대공을 세운다.
[1] 현재의 아이티 공화국 카프아이시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