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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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해군의 영웅으로,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할 때 트라팔가 해전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7] 를 무찌르고 전사한 명장이다.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를 공격할 생각을 포기하고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가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기점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당시 적수가 없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봉쇄한 드문 군인이다.[8]
2. 생애
1758년 11명의 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넬슨은 1770년 12세에 해군에 입대했다. 외삼촌이 함장으로 있는 HMS 레조너블(Raisonnable) 함의 조타수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다만, 뱃사람이면서도 멀미로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그 뒤에는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프랑스 혁명정부의 함대와 싸우는데 앞장 섰다. 1794년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섬을 점령했으나, 이때 오른쪽 눈을 잃는 첫 부상을 당한다.
1797년에는 존 저비스 제독 휘하에 들어갔고 스페인 해군을 상대로 벌어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는데[10] 넬슨이 저비스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함선인 캡틴 함[11] 을 변침시켜 스페인 함대의 집결을 저지한 덕택에 영국 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직접 함상 전투에 뛰어들어 스페인 함대의 산 니콜라스 함[12] 와 산 호세 함[13] 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넬슨의 행동은 엄연한 항명이었지만 넬슨의 항명 덕분에 승리했으므로 아무도 넬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넬슨은 영국 해군에서 9번째로 높은 청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넬슨은 두 번째 부상을 당한다. 넬슨은 테세우스 함을 배정받아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오른팔에 복합 골절상을 입는다.[14][15] 넬슨은 오른팔을 절단했고 5달 가까이 임무를 쉬어야 했다. 넬슨 스스로도 오른팔을 잃고 꽤 절망한 모양인지 노트에 '나는 이제 끝났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넬슨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여 이집트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는다. 비록 나폴레옹을 붙잡지는 못했지만 넬슨은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17] 이 전공으로 넬슨은 나일의 남작(Baron Nelson of the Nile)[18] 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넬슨은 나폴리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나폴리 국왕이 하사한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 해군 서열 7위인 적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Red), 해군 서열 6위인 청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Blue)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쳐 영국의 몰타 점령 문제를 계기로 두 번째 무장 중립 동맹[19] 이 결성되었다. 참가국은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이었는데 문제는 러시아였다. 이 당시 영국은 발트해를 통해 동유럽으로부터 곡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변덕스러운 러시아의 차르 파벨 1세가 영국 선박들이 발트해를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덴마크도 러시아에 동조했다.
영국 정부는 하이드 파커 경이 지휘하는 함대[20] 를 덴마크로 보내 무력 시위를 하도록 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함대는 영국 함대와 비교하면 수도 적고 훈련도도 낮았지만 해안 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어서 손을 쓰기가 까다로웠다. 때문에 전투는 치열한 포격전으로 점철되었다. 한편 넬슨은 이번 작전에서 엄청나게 애를 먹고 있었다. 지휘관인 파커 경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돌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는 넬슨과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넬슨이 보기에 공격을 조금만 지속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파커 경은 깃발 신호를 보내 넬슨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파커 경이 깃발 신호로 퇴각을 재촉하자 참다 못한 넬슨은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대고 부관에게 말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덴마크는 영국에게 굴복했고 무장 중립 동맹은 깨졌다.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의 차르는 시해당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의 승리로 자작에 서임되었다.''''(깃발)신호가 보이지 않는구만.''''
한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 본토를 침공할 대규모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불로뉴 항에 상륙정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겁한 영국 정부는 넬슨을 파견해 불로뉴 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고 넬슨은 저돌적인 성격답게 불로뉴 항의 프랑스 함선들을 탈취할 작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넬슨의 작전은 실패했고 영국 함대는 물러나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에만 주력했다.
불로뉴 항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숨고르기 목적으로 1802년 3월 25일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한다. 두 국가 사이의 충돌이 잠시 완화되자 넬슨은 본국으로 돌아가 여행을 즐겼고 요양차 버밍엄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은 1803년 5월 18일을 기해서 무효화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넬슨은 새로운 기함으로 빅토리 함[21] 를 받았고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라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인 툴롱의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22][23]
아미앵 조약이 무산되자 프랑스는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불로뉴에 전력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고 병력 수송 함대를 호위할 인물로 빌뇌브 제독을 선택한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게 봉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전략적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24]
이런 상황에서 전공에 목말랐던 넬슨이 대형 사고를 저지른다. 넬슨은 자신이 맡고 있던 툴롱의 봉쇄망을 느슨하게 해 프랑스 함대를 유인하는 계책을 썼는데 이게 잘못되어 툴롱을 빠져나온 프랑스 함대를 아예 농쳐버린 것. 당황한 넬슨은 급히 프랑스 함대를 뒤쫓았으나 결국 붙잡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위해 함대를 반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해군성에서는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풀고 탈출한 빌뇌브 함대를 잡아 족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영국 함대들이 봉쇄를 풀고 사라지자 프랑스 함대는 항구에서 기어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슨의 실수 덕에 프랑스 해군은 전력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했으나[25]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영불 해협을 향해 항진하지는 않았다.[26] 지휘관인 빌뇌브는 결전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한편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격멸할 기회[27]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소극적인 자세 탓에 실패했고 답답해진 영국 해군성은 넬슨을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빌뇌브가 함대를 끌고 카디즈에 틀어박히자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28] 불로뉴의 군대를 오스트리아 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빌뇌브에게 지중해를 통해 나폴리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빌뇌브가 움직이지 않자 분개해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빌뇌브의 후임으로 카디즈에 파견한다. 당황한 빌뇌브는 급히 카디즈를 출항했고 트라팔가 곶에서 넬슨이 이끄는 27척 전열함 규모의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된다.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찔렀으나 전투 도중 프랑스 해군 전열함 르두터블 함의 마스트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했다.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HMS 빅토리 함에 넬슨 제독이 총에 맞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는데, 위치는 후갑판의 타륜 앞부분이다. 허파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힌 총탄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죽어갈때 군의관에게 자신의 치료 대신 다른 부상자의 구호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남겼다고 한다. 관련 기록화에서는 갑판에 쓰러진 넬슨 주위에 여러 장교들이 모여서 임종을 지키는 모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넬슨은 부상을 입은 직후 곧바로 하갑판의 부상자 수용실로 이송했다. 그리고 르두터블 함과의 교전이 워낙 치열해서 사상자가 속출한터라 도저히 장교들이 임종을 지킬 여유도 없었다.
유언으로 '신께 감사드린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유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말 잘 받아 적었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 '내 할머니가 자네보단 키스를 잘하겠네' 둘 중 하나라고 한다.실제로 저 공식적인 유언을 남긴 이후 넬슨 제독은 몇번이나 자신의 말을 받아 적었는지 확인했고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도 깨어나서는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 운운한 건, 죽기 직전 빅토리의 함장 하디(Thomas Hardy)[29] 에게 키스해 달라고(작별인사를 뜻함) 한 다음 하디 함장이 키스하자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의 시체는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에 담겨 7일 만에 영국에 도착했는데, 이때 당시 럼주가 그의 피에 의해 붉게 물든 일화에서 따와 붉은색 럼주를 '블러디 럼'이라 부르게 된다. 참고로, 그 때 당시 그 럼주는 '''애도의 의미로 사람들이 나눠마셨다든지, 선원들이 몰래 럼을 빼 마시느라'''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통 안에 럼주는 남아있지 않았고 시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다. 넬슨의 시체가 급행으로 런던까지 이동할 때 부패를 막으려 럼주에 담겨 보내진 건 맞다. 그러나 럼주만 넣은 게 아닌 '''장뇌와 좀약'''을 잔뜩 넣고, 거기에 관이 놓인 메인 마스트 밑에서 해병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했다.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 중 하나가,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의 시체는 본국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지낸다는 점이다.[30] 이 때문에 전사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장하는 것이 원래 관례였지만 넬슨의 경우 유언 때문에 수장하지 않고 본국으로 시체를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특히 넬슨의 장례식은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명의 수병들이 참석했다. 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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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략전술 특징
넬슨의 군사적인 장점과 단점을 꺼내자면 단연코 과감함과 저돌성이 나올 것이다. 넬슨은 지휘권이 없을 때조차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일례로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은 넬슨이 멋대로 스페인 함대의 침로를 가로막아 대승한 전투다. 비록 승리를 가져왔으나 넬슨의 이러한 행동은 명백히 규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도박이 성공해서 더 좋은 결과를 불러왔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만 봐도 이때 넬슨 휘하의 장병들은 맨 먼저 스페인 전열함 2척을 나포할 수 있었다.
또한 넬슨은 휘하 함장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다.[31] 넬슨은 늘 함장들에게 작전에 얽매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재량권의 부여와 넬슨 특유의 과감함+저돌성이 가장 빛났던 승리는 다름 아닌 아부키르 만 해전이다.
이 당시 프랑스 함대를 이끌던 프랑수아 브뤼예 제독은 전열함 13척을 난공불락인 위치에 줄지어 배치해놓았다.[32] 이곳은 포함과 해안 포대의 보호까지 받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만약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와 똑같은 숫자의 전열함으로 정석이자 유일한 공격 방법인 횡대 항해를 시전했을 경우 전투는 영국이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승리하거나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정이 단 하나의 닻만 내리고 있다는 부분을 주목했다. 더불어 함정과 모래톱 사이에 일정 정도 개방된 물길을 발견하였다.[33] 난공불락 요새의 약점을 파악한 함장들은 넬슨의 지시를 기억하며 물길 속을 파고들었고 여러 함정이 그 뒤를 따랐다.
영국 함대의 대담한 기동은 곧 승리를 불러왔다. 들어가는 중간에 함선 한 척이 좌초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다른 함정들은 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 함대가 발포를 시작하자 프랑스 함대는 마치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포격을 받게 됐다. 방어적인 배치가 오히려 움직임을 틀어 막는 독이 된 셈이다. 그리하여 우선 횡대를 이뤘던 3척의 프랑스 함정이 박살났다. 120문의 함포를 탑재한 프랑스의 오리앙(L'Orient) 호는 아주 강력했으나 불행하게도 갑판 위 일부 페인트 통에 불이 붙어 화약고가 폭발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될 무렵,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 3척을 제외한 모두가 항복했다. 또한, 나머지 3척 중 2척은 도망갔고 1척은 좌초된 뒤였다.
심지어 함선의 피해를 제외하고 봐도 영국 측은 사상자가 천 명도 되지 않은데 반해 프랑스 측은 포로까지 합하면 최소 수천에서 최대 1만에 달하는 피해를 봐야 했다. 해전만 따졌을 때 그저 방어만 하는 상대를 이토록 압도적인 차이로 박살낸 경우는 전례가 드문 일이니 만큼 넬슨의 재량권 부여와 저돌성이 얼마나 큰 군사적 재능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덧붙여 나일 강 전투의 여파는 몇몇 역사가들이 트라팔가르 전투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길 정도라고...[34]
4. 성격
뛰어난 능력에 비해 굉장히 모난 성격이었는데 공격적이고 욕쟁이라는 별명을 듣을 정도로 기분나쁜 독설을 거침없이 하여 적이 많았으며 인간적으로는 결점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시칠리아 섬의 반왕당파 반란에 개입했고 거기서 벌어진 학살극에 연관되었다는 것과 후술할 엠마와의 추문이다.
여성편력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넬슨과 내연관계이던 해밀튼 여사(엠마 해밀튼)는 유부녀로 넬슨의 상관인 윌리엄 해밀튼 경의 '''부인'''이었는데, 넬슨을 아끼고 그 가능성을 높게 본 윌리엄 해밀튼은 자기 후배이자 부하가 와이프와 사귀는 것을 묵인했을 뿐더러 심지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다. 해밀튼 경의 임종 때에도 엠마와 넬슨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지켰고, 때문에 처음부터 해밀튼 경은 엠마를 아내로 삼기보다는 사교계에서의 추문으로 곤란해진 엠마를 보호[35] 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만 결혼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36] 이는 영화로도 나올 만큼 유명하며, 그녀와 나눈 연서가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말이 좋아 로맨스지 막장 드라마. 위에 언급된 유언 중에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 넬슨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37][38] 이건 실현되지 못했지만...
5. 대한민국에서 이순신과 비교
대한민국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침략자를 막아낸 해군 영웅이라는 점에서 이순신과 자주 비교된다. 또한 넬슨도 이순신처럼 자살설이 있는데, 이 자살설의 원인이 저 여자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저 여자와의 불륜때문에 정치적으로 입지가 위태로웠고 계속 그녀와 딸을 지키기 힘들 거라 생각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무모하게 작전을 해서 죽을듯이 싸웠다는 것.
이순신 장군과 넬슨 제독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것까지 겹친다. 게다가 일설에 의하면 본인이 총에 맞자 "내가 다쳤다는 걸 알려서는 안 된다.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이순신의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함선 질이 앞섰던 것처럼 넬슨의 영국군도 프랑스군보다 앞섰던 부분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포수. 보통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보다 훨씬 강력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 함선은 영국 함선과 비교해도 딱히 꿀리지 않았고 오히려 몇몇 함선은 영국 함선보다 스펙상 앞섰다. 단지 영국 수병의 숙련도가 프랑스 수병의 숙련도를 압도했을 뿐.[39] 조선의 경우 판옥선 자체는 세키부네보다 강력했지만 수병끼리 비교에서 적에게 밀렸던 부분(백병전 한정)과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참고로 노량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 모두 공격측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넬슨이 둘 다 전사했으니 어찌보면 이것조차 똑같이 아이러니한 결말을 맞이한 셈.
다만, 이순신과 넬슨의 전사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우연히 적탄을 맞아 전사한 것이지만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마치 저격수한테 자신을 좀 쏴 달라는 수준의 행동으로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 개요 부분에 있는 넬슨의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넬슨은 군복을 훈장과 메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 화려한 복장 때문에 넬슨이 저격수들에게 노려질 것을 염려한 참모들이 넬슨에게 수수한 군복을 입을 것을 권했지만 넬슨이 거절했다고 한다.[40]
이처럼 넬슨과 이순신의 대표적인 차이점을 찾자면 전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가 타인에게 있는가 정도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사망한 원인은 넬슨과 달리 자신의 실수라고 볼만한 부분이 딱히 없으니...
군사적 능력 이외의 부분에서 차이점을 찾자면 윗선의 명령을 대하는 자세 정도가 나온다. 이순신은 상부의 어이없는 명령에도 어떻게든 따르는 구색 자체는 갖췄으나[41][42][43] , 넬슨의 경우 거의 매회 전투마다 명령 불복종이 섞여 있을 만큼 제멋대로였다. 심지어 몰타 포위전 때는 헤밀튼 여사와 만나지 말라는 상부의 (정확히 말하면 헤밀튼이 있는 팔레르모로 돌아가지 말라는)명령을 무시하고 그냥 사랑을 나누러 갔다고... 그 외에도 명령 불복종이 계속되어 상부와의 관계가 굉장히 나빴고 오죽했으면 지휘관인 키스 자작이 "헤밀튼 여사는 이미 충분히 함대를 지휘했으니 이제 그만해라."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할 정도였다. 특히 계속된 월권 행위와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넬슨은 군 생활동안 상부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44]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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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직전에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말을 남긴 것도 유명하다. 이건 직접 입으로 한 말은 아니고, 깃발 신호로 전 함대에 알린 것. 신호의 편의를 위해서 깃발 신호에 자주 쓰는 단어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England 'confides that(...)", "할 것이라고 자신한다(믿는다/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보낼 생각이었으나, 깃발 신호 단어집에 'confides'라는 단어가 없어서(...) 한자 한자 일일히 스펠링하기에는 번거로웠고, 이 최후의 격려 문구를 보낸 직후 바로 작전지시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부족해서 대신 들어간 것이 '예상한다'라는 뜻의 'expects'(문맥상 의미는 바란다/기대한다).
넬슨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인 'duty'도 깃발신호로 보내야 했지만, 이것도 'confides'처럼 신호집에 축약 깃발이 없었고, 대체할만한 단어도 없어서 일일히 한 철자씩 깃발을 올렸다. 그래서 위의 신호기가 'd u t y'라고 하나씩 올라와 있는 것이다. 출처]
두 단어의 뉘앙스가 상당히 다른데, 전자는 장병들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만, 후자는 일단 이런 식의 문장은 잘 안쓰므로 어색하고, 조금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느낌마저 든다.[45] 하지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깃발 신호에 익숙했던 장병들은 당연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들었고, 이 위엄돋는 문구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압도적인 승리와 넬슨 제독의 전사라는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우러져서 전설이 되었다.
두 단어의 뉘앙스가 상당히 다른데, 전자는 장병들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만, 후자는 일단 이런 식의 문장은 잘 안쓰므로 어색하고, 조금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느낌마저 든다.[45] 하지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깃발 신호에 익숙했던 장병들은 당연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들었고, 이 위엄돋는 문구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압도적인 승리와 넬슨 제독의 전사라는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우러져서 전설이 되었다.
- 넬슨도 한 때 하프페이 함장으로 지냈다. 1789년 영국 해군이 평시 편성으로 전환되어 지휘할 함선을 배정받지 못해 몇 년 간 급여를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예비역이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스 해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793년 아가멤논 호의 함장 직책을 배정 받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 그가 노예 무역의 옹호(적극적 지지, 방관)자였다는 점에서 넬슨 동상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출처 실제로 넬슨이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는 점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은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영국 사회에서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가 쓰여진 뒤 약 3년 뒤,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의 여파로 비록 영국 본토는 아니지만 바베이도스에 있는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 그의 유산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부러움을 준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가보면 그의 동상이 그의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호의 돛대 높이와 같은 55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서서 영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그가 최후를 맞았던 HMS 빅토리 함과 관련된 것들도 매우 잘 보존이 되어있다. 현재 HMS 빅토리 함은 트리팔가 해전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영국 포츠머스의 히스토릭 독야드에 있는 드라이 독에 영구보존되어 있으며, 내부는 당시 해군 장병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박물관 함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놀랍게도 또한 근처의 건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돛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점[46] 도 전시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는 위키러라면 영국에 갔을 때 한 번 보고 오자. 이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는데 HMS 빅토리 함은 입장권 하나로 단 한 번만 입장이 가능하다. 즉, 입장했다가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위해선 표를 다시 사야 한다. 그외 몇몇 시설도 이와 동일한 제한이 걸려 있다.
참고로 HMS 빅토리 함은 아직도 비록 명예직에 가깝지만 영국 해군의 함적에 남아있다. 미 해군 역시 1797년에 건조된 자국의 대형 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을 현역함 명부에 남겨두고 있다. 차이라면 빅토리는 영구적으로 정박 상태로 묶여 있지만 컨스티튜션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항해 가능 상태로 남아 있는 '진짜 현역함'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HMS 빅토리 함은 아직도 비록 명예직에 가깝지만 영국 해군의 함적에 남아있다. 미 해군 역시 1797년에 건조된 자국의 대형 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을 현역함 명부에 남겨두고 있다. 차이라면 빅토리는 영구적으로 정박 상태로 묶여 있지만 컨스티튜션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항해 가능 상태로 남아 있는 '진짜 현역함'이라는 것이다.
- 눈과 팔을 잃은 것을 포함해서 이상할 정도로 군 생활 동안 중상이 많았다. 오른쪽 눈을 잃었고, 중상으로 인해 오른팔을 자르기까지 해야 해서 흉한 외모가 되고 만다. 나일강 해전에서도 프랑스 해군의 포탄에 이마를 맞아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상을 입어 응급 치료를 받아야 했다. 또, 위에도 써 있지만 넬슨은 건강도 좋지못해 남은 왼쪽 눈마저 시력이 나빠졌으며, 멀미를 하는 체질이었다. 이런 주제에 끝까지 해군으로 살고 해군으로 죽었으니 어쩌면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 넬슨 사후 태어난 폴란드 태생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 작가인 조셉 콘래드(해양 문학의 걸작 The Nigger of the Narcissus를 집필했다)는 영국 해군의 어떤 영광도 넬슨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고 넬슨을 극찬했다. 실제 조셉은 영국 출신은 아니지만 영국으로 귀화해서 영국 해군 장교가 되기도 했었다.
- 2002년 영국의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투표에서 무려 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장군, 제독으로 한정하면 1위로써 말버러 공작보다 높은 순위임은 물론 동시대 나폴레옹을 물리친 진짜 주역인 웰링턴 공작조차 넘어서는 순위라고 한다. 영국인들이 넬슨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는 부분. 여담으로 이 순위의 1위는 윈스턴 처칠이 뽑혔다.
- 모국인 영국에서는 넬슨 남작(1798년) 작위를 받았다가 1801년 자작으로 승격되었고, 양시칠리아 왕국에서는 1799년에 무려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é)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작위를 물려줄 적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넬슨 백작으로 업그레이드된 작위와 함께 양시칠리아의 브론테 공작위도 형 윌리엄이 계승하게 된다. 다만 브론테 공작위는 여성 승계가 가능해서 현재 두 작위는 각각 다른 사람이 보유하고 있다.[47]
7. 대중매체에서
- 수잔 손탁의 "화산의 연인들"은 엠마와 넬슨의 연애담을 그린 작품.
- 프랑스 영화 "아우스테를리쯔 대전투"에서는 앞 부분에 잠깐 나온다. 보통의 초상화 이미지와는 달리[50] 외팔이에 외눈안대를 한 좀 흉측한 모습...
- 소설 혼블로워의 주인공 혼블로워는 넬슨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 토탈워 시리즈에서는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 일단 대영제국 고유 유닛으로 HMS Victory가 나왔다가,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 본인 등장. 능력치는... 캐사기적이다 별이 하늘을 찌르는 능력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122문 1급함 을 타고 있어서 전함 몇개는 다 쌈싸먹는다. 그러다 죽으면 영국은 꿈이고 희망이고 없다. 그나마 유럽 캠페인에는 테크를 끝까지 올릴 수 있기에 성능좋은 전함을 조합해서 넬슨의 함대를 격파할 수 있지만 이집트 캠페인에는 올릴 수 있는 테크가 제한되어 명함조차 못내밀 소형 전함밖에 못뽑아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이 게임에서 셋밖에 없는 최고급 능력치의 제독으로 등장. 여담으로 나머지 둘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님이시다.
- 테메레르에서는 간간히 이름을 비치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사망이 오보로 나온다. 적 용이 돛에 불을 붙여 돛에 깔렸는데, 이때 훈장이 가슴에 눌어붙게 된다. 그리고 본토를 침공한 프랑스군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함대를 이끌고 철수하는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중 배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테메레르에게 노에제 옹호하고 용들을 함부로 대한다면서 비;판 받는다.
[1] 64문 3등급 전열함. 넬슨이 정식 함장 자격으로 처음 부임한 함선이다. 넬슨은 개인적으로 아가멤논 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2] 74문 3등급 전열함.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넬슨의 전함이었다.[3] 74문 3등급 전열함.[4] 74문 3등급 전열함. 아부키르 만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함선이며 영국 함대의 기함이었다.[5] 74문 3등급 전열함. 영국-덴마크간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전함.[6] 80문 3등급 전열함.[7] 이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 전쟁을 벌일만큼 원수진 일이 없었지만 나폴레옹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코가 꿰인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영국 해군을 압도하기 위해 스페인 해군도 동원했다.[8] 다만 이것은 넬슨과 나폴레옹의 병과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넬슨은 어디까지나 해군이었고 나폴레옹은 뼛속까지 육군이어서 해전에서 어떤 작전과 전술을 펼쳐야 하는지 잘 몰랐다.[9] 넬슨이 적함 장교로부터 칼을 건네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해전에서의 항복 의례였다.[10] 영국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15척, 프리깃 5척이었고 스페인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24척, 프리깃 7척이었다. 다만 스페인 함대는 뭉치지 않고 2개의 함대로 분산되어 있었다.[11] 이 당시 영국 함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74문 3등급 전열함이다.[12] 80문 3급 전열함.[13] '''112문 1급 전열함.'''[14] 오늘날 골절상은 수술을 통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수술 개념이 없었다. 골절상을 당하면 무조건 그 부위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고 마취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15] 영어 관용구 중에 'Bite the bullet(입에 총알을 물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당시 골절로 인해 절단 수술을 할 때 마취 없이 총알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만큼 이 당시의 절단 수술은 위험하고 또 고통스러웠으며 심지어 수술 후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사망하는 사람도 비일비재했다. 넬슨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16] 그림에서 넬슨이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전투 중 적탄을 이마에 맞아 가죽이 벗겨지는 부상을 당해서 그렇다. 하지만 비교적 작은 부상이었으므로 붕대를 감고 곧바로 다시 전투를 지휘했다.[17]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전멸당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고 프랑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집트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탈출하는 굴욕을 당한다.[18] 다만 이 호칭은 넬슨의 전과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영국 정부의 방침이 총사령관이 아닌 인물은 남작 이상의 작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하여서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다.[19] 첫 번째 무장 중립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을 견제하고자 결성되었다.[20] 전열함 12척, 프리깃 5척 규모였다.[21] 새로 건조한 것이 아니고 퇴역하다시피 한 함선을 전면 수리해서 재취역시킨 것이다.[22] 이 당시 영국 해군은 함대를 동원해 프랑스의 항구들을 모조리 봉쇄함으로써 프랑스 함대가 한 곳으로 뭉치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프랑스 함대의 수준이 허접이라고 해도 일단 뭉치면 위협적인 전력이 되기 때문.[23] 또한 영국 해군은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으나 그만큼 지킬 영역이 많았고 함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함대에 봉쇄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유럽에 함대 전력을 집중시킬 여력이 있었다.[24] 영국 함대의 봉쇄망은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만했다. 저비스 제독은 1801년 영국 해군성에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군이 영국 본토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걔네들이 바다를 통해서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ㅋㅋㅋ''''라고 썼다.[25]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해군의 전력까지 흡수해 트라팔가 해전 즈음에는 전열함만 33척 규모인 대함대가 되었다.[26] 빌뇌브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카디즈(Cadiz) 항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27]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이 지휘한 피니스테라 곶 해전.[28] 영불 해협은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인 해협 함대(Channel Fleet)가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전함의 호위 없이 병력을 실은 수송선만으로 상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29] 넬슨은 빅토리 함에 탑승하기는 했으나 함대의 총 지휘관인 '제독'이고 빅토리 함 자체를 책임지는 함장은 하디였다.[30] 이 때문에 한때 영국에게 점령당했던 거문도에 영국 수병의 묘가 남아 있다.[31] 이건 사실 넬슨만의 군사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이 당시 영국 해군의 방침이 그랬다.[32] 함대의 전열 한 쪽은 해안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무리해서 파고들다가는 함선이 모래톱에 좌초할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전열의 한 쪽 면은 아예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33] 전열함 1척이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다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가 이 틈을 파고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34] 이전 서술에서는 넬슨이 물길을 파고들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골리앗(HMS.Goliath) 호의 함장이었던 폴리(Thomas Foley)의 현장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넬슨이 탄 뱅가드 호(HMS.Vanguard) 호는 해안선 반대편에서 전투를 벌였다.[35] 사실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동안 미녀다. 넬슨 사후에도 인기가 끊이지 않아 여러 남자들이 얽혔다고...[36]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밀턴 경이 보호하고자 했던 대상은 엠마가 아니라 조카였던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이라는 인물이다. 그레빌은 명문가의 자손이며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시 엠마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빌은 어차피 신분이 낮은 엠마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돈도 궁해서 부자집 딸과 결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동거하던 엠마가 거추장스러워지자, 그레빌이 자신의 삼촌인 해밀턴 경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결혼 당시 엠마는 26세이고 해밀턴 경은 60세(...)였으며, 평생 해로했던 부인과 사별한 이후였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었으며, 조카를 위해 엠마를 떠안은 해밀턴도 엠마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엠마가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던 것이다.[37] 문제는 엠마 해밀튼이 낭비벽도 심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도벽까지 있는 판이었다. 결국 몇 번의 사기에 당하고 과소비로 중년기에는 말 그대로 알거지로 살다가 죽게 된다. 보통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넬슨의 유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해밀튼 경의 유산이나 넬슨 개인이 준 재산도 꽤 많았다. 그저 엠마의 낭비벽이 엄청난것이 문제였지... 레이디 해밀튼에선 알코올 중독으로 거지가 된 엠마를 그려서 논란이 됐었다.[38]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는 고모들이 데려다 키워서 엄마처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만 하층민으로 태어나 순전히 타고난 미모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랐던 엄마의 미모를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아버지 넬슨의 외모만 물려받아서 외모 문제로 좀 구설수에 시달렸다.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굉장히 못생긴 걸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고 평범한 외모였는데 어머니가 워낙 소문난 미인이어서 후대에게까지 구설수가 되고 있다. 어머니 엠마는 호레이샤가 15살 때 사망했는데 호레이샤는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모 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니 애정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부인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어쨌든 호레이샤는 동네 목사와 결혼하여 조용히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지금까지 그녀의 자손은 이어지고 있다.[39] 그래서 영국 해군은 프랑스, 스페인 함선과 마주치면 격침시키기보다 나포해서 쓰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40] 사실 수수한 군복을 입었어도 위험한 것은 여전했다. 당시 영국 해군 관례 상 장교 이상은 전부 배 후미 갑판 위에 있어야 했다. 직접적으로 선원에게 노출됨으로써 사기의 저하를 막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41] 다만 불합리한 명령들은 항상 자연스럽게 거부했다.[42] 다만 이것은 조선과 영국의 국가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선은 쿠데타로부터 잉태된 나라였기 때문에 병권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견제를 일삼았다. 이순신이 윗선의 명령을 따르는 '구색'이라도 갖추지 않았으면 당장 그 선조와 조정이 '''이것을 뭐라고 받아들였겠는가'''.[43] 영국은 유능한 장교들을 우대했으며 이들에게 최대한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당시 영국은 국왕 조지 3세가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를 통해서 통치하는 구조였으므로 선조가 임금으로 군림하는 조선과는 사정이 달랐다.[44] 이전 서술에서 넬슨이 옥살이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근거가 필요한 부분이고 월급이 반으로 깎인 것은 영국 해군성에서 평시에 장교들에게 지급되는 월급을 반으로 깎아 재정 절약을 도모한 하프 페이(Half-Pay) 제도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보직 해임은 '해임'이라기보다 본인이 자진해서 보직을 '반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툴롱에서 빌뇌브 함대를 놓쳤을 때). 다만 넬슨이 '평민' 출신이었기에 전과에 비해서 항상 부족한 보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45] confide를 쓴 경우에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믿는다."가 되어 신뢰의 표현이 된다. expect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당연히)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라는 뜻이 되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강경한 뉘앙스가 있다.[46] 포어 탑세일이며 HMS 빅토리 함에 달린 돛 중 두 번째로 큰 돛이었다.[47] 제3대 브론테 공작때 서로 분리되어 현재 제4대 브릿포트 자작 알렉산더 넬슨 후드가 당주이다.[48] 노골적인 영국 찬양과 전쟁 참가 독려로 고립주의 당시의 미국에서는 대단한 비판을 받았다.[49] 영화에서는 뉴비라서 대부분 원거리 촬영이 많았다[50] 로렌스 올리비에도 주로 안대 대신 의안 연기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