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커타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2월 4일 영국군과 벵골 토후국군이 캘커타(현재 콜카타)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 영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캘커타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2. 배경
1690년 캘커타에 교역소를 설치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후 세 개의 작은 마을을 구입하고 도시로 확장하는 한편 윌리엄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1717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 제9대 황제 파루크시야르로부터 벵골 전역에서의 세금 면제 해택을 부여받았다. 이후 캘커타는 동인도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번영을 누렸고 대량의 무역품이 캘커타에서 갠지스 강을 따라 인도 전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756년 20세의 나이로 벵골의 나와브(태수)로 부임한 시라지 웃 다울라는 영국인들이 벵골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벵골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윌리엄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병력을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요새를 계속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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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고가 무시당하자, 시라지는 1756년 6월 16일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윌리엄 요새로 진격했다. 코끼리 50마리를 포함한 5만에 달하는 병력과 화포 50문을 갖춘 그의 대군은 윌리엄 요새를 완전히 포위했고, 결국 6월 20일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중과부적임을 인지하고 백기를 들었다. 시라지는 이들을 윌리엄 요새 내의 지하감옥 '블랙홀'에 가뒀다. 당시 요새 사령관이었던 존 스파이나 홀웰은 훗날 <블랙홀에서 숨이 막혀 비참하게 죽어간 영국 신사들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그에 따르면 146명의 포로가 18피트(5.5m) x 14피트(4.2m) 크기의 좁은 방에 갇혀 지내다가 질식상태에 빠져 대부분이 사망하고 23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좁은 방에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로는 훨씬 적은 인원이 들어갔을 것이며 사상자 수도 적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당시 영국인들은 그의 증언을 믿고 시라지의 만행에 분노했다. 이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인 병사들과 세포이 용병대를 파견해 윌리엄 요새를 탈환하게 한다. 이리하여 1757년 2월, 벵골 토후국의 군대와 영국군이 캘커타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사령관: 로버트 클라이브 중령
- 병력: 2,000명, 대포 7문
- 영국인 병사 600명
- 유럽인 용병 650명
- 세포이 용병 600명
- 포병 100명
- 유럽인 용병 650명
- 세포이 용병 600명
- 포병 100명
3.2. 벵골군
- 사령관: 벵골 토후국 나와브 시라지 웃 다울라
- 병력: 약 50,000명
- 보병 15,000명
- 기병 18,000명
- 대포 40문
- 코끼리 50마리
- 기병 18,000명
- 대포 40문
- 코끼리 50마리
4. 전투 경과
1757년 1월, 로버트 클라이브 중령이 이끄는 군대는 캘커타에 접근했다. 이에 시라지는 2월 2일에 캘커타 앞에 진을 치고 적과 대결할 준비를 갖췄다. 클라이브는 적의 규모가 거대한 것을 보고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야습을 감행하기로 한다. 그는 2월 4일 새벽에 야음을 틈타 적진으로 다가가서 적의 포대를 제압한 뒤 도시 동쪽 모퉁이에 있는 외곽 방어구 안에 위치한 아미칸드의 정원으로 빠르게 밀고 들어가서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시라지를 체포해서 승부를 빠르게 결정짓기로 했다.
2월 4일 새벽 2시, 클라이브의 군대는 야습을 위해 적지로 향했다. 유럽인 용병대는 한 부대에 집결되었고, 세포이 용병대의 절반은 전면, 나머지 절반은 후면에 배치되었다. 포병들은 6개의 야전 대포를 가지고 뒤를 따랐고, 선원들은 탄약들을 운반했다. 한편, 시라지의 군대는 도시 외곽 방어구역과 습지 및 소금 호수 사이의 평원에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시라지의 측근인 미르 자파르 칸은 소규모 기병사단과 함께 아미칸드의 정원과 가까운 도시 외곽 방어 구역 안에 진을 치고 있었고 정원 울타리 안에는 나하브 경호를 위한 특별 보디가드로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 무굴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포들은 큰 길 남쪽에 놓여져 있었다.
새벽 3시, 클라이브의 영국군은 적의 포대를 향해 접근했다가 시라지의 척후병들과 조우했다. 영국군이 그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고 폭죽을 터트리자, 이들 척후병들은 황급히 퇴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폭죽을 터트리던 중 불꽃이 세포이 몇몇에게 옮겨붙었고, 이로 인해 세포이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클라이브가 이들을 수습하는 데 시간을 오래 잡아먹어버린 것이다. 그후 가까스로 세포이들을 진정시킨 클라이브는 진군을 재개했지만, 이미 적은 영국군이 기습해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라지를 체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도 클라이브는 행군을 강행했지만 아미칸드 정원으로부터 몇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소규모 기병대가 그들의 우측면을 공격했다. 이때 안개가 껴서 1m 거리도 보이지 않자, 클라이브는 전군에 행군을 중단하게 한 뒤 공격을 가해오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개시하게 했다. 이 일제사격은 적 기병대를 무력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 짙었기 때문에, 클라이브는 적의 포병 진지의 위치를 지나쳐버렸고 아미칸드 정원 역시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벵골 토후국 군대 역시 안개가 심하게 꼈기 때문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에 클라이브는 계획을 변경하기로 하고 아예 적진을 들이치기로 결심한다. 오전 8시경, 영국군은 둑길에 도달했으나 안개는 여전히 짙었다. 클라이브는 적이 두 개의 중포가 있는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통로에 바리케이드를 친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으나 짙은 안개를 헤매던 영국인 병사들이 사정권 안에 든 세포이 용병대를 적으로 오인하고 발포하는 바람에 부대 전체가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이때 벵골 토후국 군대는 두발의 대포로 포격을 가해 몇몇 유럽인들과 세포이들을 사살했다.
클라이브는 이런 상황을 보고 다시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이번엔 윌리엄 요새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군대의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서 영국군이 자신들보다 훨씬 적다는 걸 확인한 벵골 토후국 군대가 추격해오자, 클라이브는 일단 자신의 진영으로 후퇴한 뒤 진영으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무작정 적의 진영으로 쳐들어왔던 벵골 토후국 군대는 무자비하게 도륙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리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한 클라이브는 병력을 이끌고 윌리엄 요새로 향했고, 정오 즈음에 요새 탈환에 성공했다.
5. 결과
캘커타 전투에서의 영국군 전사자는 유럽 용병대 27명, 선원 12명, 그리고 세포이 18명이었다. 또한 70명의 유럽 용병대와 12명의 선원, 그리고 35명의 세포이들은 부상을 입었으며, 파이 대위와 브리지스 대위, 그리고 클라이브의 개인 비서인 밸처 씨가 전사했다. 반면 시라지의 군대 손실은 보병 600명 사상, 기병 500명 사상에 달했다. 이후 영국군은 2월 4일 저녁 적의 진지에서 400m 이내까지 대담하게 진군해 무력시위를 벌인 뒤 요새화된 진지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시라지는 영국에게 캘커타를 돌려주고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며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시라지는 영국의 위협을 영구히 제거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군을 축출하기로 결의한다. 이리하여 영국군과 벵골-프랑스 연합군은 6월 23일 플라시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