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현경

 


太玄經[1]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이백의 유명한 시인 협객행(俠客行)과 함께 새겨져 있는 의문의 무공이며 협객행과 전대 무림을 뒤흔드는 소재이다. 협객행의 시구 풀이는 다음과 같다.
趙客縵胡纓, 吳鉤霜雪明.
조(趙)나라 협객들이 거친 갓끈(胡纓)을 늘어뜨리니,
오구검(吳鉤)의 칼날이 서릿발처럼 빛나네.
銀鞍照白馬, 颯沓如流星.
은빛 안장에 빛나는 백마
바람을 가르며 치달리니 유성보다 빠르네
十步殺一人, 千里不留行.
열걸음에 한 사람씩 해치우고
천리를 나아가도 거칠것이 없어라.
事了拂衣去, 深藏身與名.
일을 마치면 훌훌 옷을 털며 떠나니
몸과 이름을 깊이 숨기네
閒過信陵飮, 脫劍膝前橫.
한가로이 신릉군(信陵君)에게 들러 함께 술을 마시니
마음놓고 검을 풀어 무릎위에 걸쳐놓는다.
將炙啖朱亥, 持觴勸侯贏.
(신릉군은) 고기를 구워 주해(朱亥)를 먹이고,
잔(觴)을 들어 후영(侯贏)에게 권하네.
三盃吐然諾, 五嶽倒爲輕.
술 석잔에 (신릉군의 가신이 되겠다는) 응낙을 하니
오악(五嶽)을 뒤집는 일이 오히려 가볍다네.
眼花耳熱後, 意氣素霓生.
술에 취해 눈은 아롱거리고, 귀까지 붉어지면
의기가 흰 무지개(素霓)처럼 뻗쳐나네.
救趙揮金槌, 邯鄲先震驚.
조(趙)나라를 구하려 쇠망치(金槌)를 휘두르니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이 먼저 놀라 진동하였네.
千秋二壯士, 烜赫大梁城.
천추에 길이 남을 주해(朱亥)와 후영(侯贏)은
(위나라의 도읍인) 대량성(大梁城)의 이름을 떨쳤네.
縱死俠骨香, 不慚世上英.
설사 죽는다해도 협객의 기개(俠骨) 향기로우니
천하의 영웅들에게 부끄럽지가 않다네.
誰能書閤下, 白首太玄經.
누가 천록각(天祿閣)아래로 몸을 내던질 것이며,
백발이 되도록 태현경(太玄經)을 지을까.
이 무공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협객도의 용도주와 목도주는 작품으로부터 40년전 서로 동업하여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돈과 제자들을 모으던 와중에 우연히 지도 한 장을 얻는다. 지도 안에는 남해의 어느 이름없는 섬에 엄청난 무공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 섬을 찾아내어 협객도(俠客島)로 명명한다. 정작 섬 안에서 18일이란 오랜 시간이 걸려 무공이 새겨진 석실을 발견한다. 석실은 총 24개로 협객행의 총 24구의 시구와 주석과 함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마지막 백수태현경(白首太玄經)[2]이 새겨진 24번째 석실은 해독이 거의 불가능한 과두문자(蝌蚪文字)[3]로 구성되어 있다.
용도주와 목도주는 원래 이 무공을 익혀 천하를 지배할 야심이 있었으나 그림대로 각자 무공을 익히다가 둘 다 잘못 익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해적선 한 척을 잡아서 똑똑하다 싶은 해적 6명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고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모두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문자를 잘 아는 선비들을 모아 무공을 익히게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용도주와 목도주는 머리를 짜내다 천하무림 최고수인 소림사의 묘체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소림사 대문앞에서 이레동안 농성해서 폐관수련에 들어간 묘체대사에게 무공 복사본을 보여준다. 묘체대사는 당장 수련을 중지하고 무당파 장문인 우차도장을 불러내어 협객도로 갔지만 3개월 만에 둘 다 이견차를 보인다. 그리하여 천하의 고수들을 불러모아 집단지성의 힘으로 무공을 풀어내고자 하여 고수를 끌어온 것이 상선발악령의 시작이다.[4] 그러나 40년 동안 150명이 넘는 고수들을 끌어왔지만 결과는 별 진전이 없었다.
이 무공의 진실은 과두문으로 새겨진 태현경의 본 뜻은 경맥과 혈도의 방위를 과두문의 모양으로 속여서 기록한 것이었다.[5] 그리고 모든 석벽의 시구와 주석은 오히려 사람들을 낚는 낚시로 이를 참조하거나 문자를 알면 절대 무공을 익힐 수 없도록 창안자가 고안한 것이다.[6] 익히는 방법은 석파천(石破天)처럼 아예 문자를 일절 모르는 까막눈이 그림 안에 숨겨진 무공 운용법을 발견해야 제대로 익힐 수 있다.[7]
무공의 내용은 경공, 검법, 내공, 권법 등을 망라한 종합 무공이며 각 시구마다 해당 무공이 대응되어 있다. 무공의 창안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묘사가 없으나 무공을 접한 이들의 말로 당대 고금제일을 논하기에 손색없이 평가된다. 그리고 용도주는 창안자의 뜻은 사람들이 이 무공을 쉽게 익히기 꺼려했거나 혹은 문자 깨나 아는 사대부들을 혐오해서 무공으로 낚시질 했다고 추측한다. 즉 김용은 한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자 이데올로기의 통렬한 조소를 태현경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 엄밀히 말해서 이 무공의 이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태현경은 24구의 협객행 시구 중 일부분일뿐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편하게 태현경으로 부르며, 김용 선생도 태현경이 뭔지 알아먹으니 정식 명칭이라 해도 상관없을 듯 싶다.(...)[2] 재미있는 점은, 이백은 이 구절로 한나라의 문인인 양웅(揚雄; BC 53∼ AD 18)을 대차게 깐 것이다. 양웅은 어떤 사건에 휘말려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중, 옥리(獄吏)가 체포하려 접근하자 서각(書閣) 아래로 뛰어내려 죽을 뻔하였다. 세상 물정에 이같이 어두워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왕망에 빌붙어 어용지식인으로 비난받은 주제에, 말년에까지 우주의 원리를 연구하여 『태현경(太玄經)』 을 저술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은 말이다. 이런 역사적 고사를 아는 독자는 태현경 신공의 진실이 뭔지 눈치채며 감탄할 수밖에 없다. 김용이 왜 신필(神筆)로 불리는 이유에 손색없다.[3] 춘추전국시대에 죽간(竹簡)에 옻을 묻혀서 쓰는 서체의 고문(古文)을 말한다. 서사(書寫) 도구가 아직 발달되기 전 대나무 끝을 쪼개서 거기에다 칠액(漆液) 같은 것을 찍어 글자를 쓴 경우, 그 글자 획의 처음은 칠액이 많이 묻어 뭉툭하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게 마련이다. 모양이 마치 올챙이(蝌蚪)와 흡사해서 과두문이라 한다. 공자의 생가와 1995년 8월 저장성(浙江省) 시앤쥐셴(仙居縣) 등지에서 기묘한 과두문이 발견되었다. 일부를 제외하면 아직 해독되지 못한 미지의 문자로 당연히 협객행 시대에서도 아는 이들이 거의 전무할 것이다.[4] 30년전부터 첩자들을 보내 천하 무림인들을 모조리 뒷조사를 한 뒤에 10년 주기마다 상선벌악부를 돌렸다. 그리고 제안을 거부한 방파중에 죽어 마땅한 악행을 저지른 문파를 골라 몰살시켰다. 몰살당한 문파중에 겉으로만 정의로운 척 하며 은밀하게 악행을 저지른 문파가 많았기 때문에 협객도가 오해받은 것이다.[5] 과두문이 마치 올챙이처럼 보이는 형상이라 이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문자라던지 과두문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은 문자인 과두문으로 읽어 오해했기 때문에 낚은 것이다.[6] 굉장히 교묘한 방법으로 모든 이들은 문자를 알기 때문에 문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읽게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림의 내용 자체가 협객행의 시 구절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석하는 주석에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문자의 필획도 제멋대로라서 필획 구분을 아는 사람이면 낚여버린다.[7] 단순히 그림만 보고 따라하면 익힐 수 없다. 은안조백마(銀鞍照白馬)의 경공술의 경우 말이 질주하는 그림에서 하단의 구름에 경공심법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무공마다 난이도가 달라서 어떤 것은 두어시간, 어떤 것은 20일에 하나를 익히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