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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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테오도로스 2세(Θεόδωρος B')
'''휘'''
테오도로스 바타지스 라스카리스(Θεόδωρος Βατάτζης Λάσκαρις)
'''생몰년도'''
1222년 ~ 1258년 8월 18일
'''재위기간'''
1254년 11월 4일 ~ 1258년 8월 18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치세
2.2.1. 내치
2.2.2. 외치
2.3. 최후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망명국인 니케아 제국의 3대 황제. 나름 재능이 있었지만 심한 간질로 인해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 끝내 자기 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지 못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테오도로스는 1222년 태어났다. 그는 요안니스 3세의 외아들로, 즉위 이전인 1241년 요안니스 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황을 따라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과의 전쟁, 라틴 제국을 상대로 한 원정에 참전하면서 군사 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던 1254년 12월 3일 사망하면서 새 황제로 즉위했다.

2.2. 치세



2.2.1. 내치


테오도로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니키포로스 블렘미데스에게서 교육을 받아 문학, 신학, 과학에 관해 방대한 문헌을 집대성할 만큼 지적인 군주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서 간질을 물려받아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간질은 그의 판단력을 손상시켰고 힘을 소진시켰으며, 신체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약점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대한 강력하고 무자비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불신했던 그는 그들을 최대한 무시하고 그 대신 평범한 가문 출신의 소규모 관료 집단에 의지했다. 특히 게오르기우스 무잘론과 그의 두 동생인 테오도로스와 아드로니쿠스는 테오도로스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총대주교로 엄격한 금욕주의자인 아르세니우스를 임명한 것은 교회의 큰 반발을 샀을 뿐더러 로마와의 통일을 꾀하던 아버지의 정책을 허물어버리는 결과를 야기했다.

2.2.2. 외치


테오도로스 집권 시기, 이슬람 세력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 제국을 위협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이슬람 세력을 걱정할 필요 없이 불가리아 제국과 라틴 제국 전선에 집중했다. 먼저 불가리아 제국의 경우, 그는 1255년부터 1256년까지의 원정을 개시해 강화 조약을 유도했다. 1256년 불가리아 제국 차르 미하일 아센이 살해되고 이듬해에 콘스탄티노스 티크라는 귀족이 차르 자리를 계승한 뒤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또한 요한니스 바타체스의 딸 마리아와 에피루스 군주 미하일 2세의 아들 니키포로스와의 결혼을 성사시켜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과의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에페이로스와의 결혼 협상 도중 막바지에 결혼 조건으로 두라초와 세르비아를 요구했다. 이에 미하일 2세는 격분하여 테살로니카 공격을 준비했고 그의 선동으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마케도니아도 며칠 뒤에 가담했다. 신하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는 그를 싫어했고 이미 1256년 초에 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이때문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셀주크 투르크 측으로 피신해서 술탄의 기독교 용병들을 지휘하여 몽골군과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로스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받고 소수 병력을 맡겼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소규모의 병력으로도 용감히 싸워 두라초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에페이로스의 공세를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하일은 에페이로스군이 테살로니카의 성문에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니케아에 소환되어 파문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

2.3. 최후


1258년. 테오도로스는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간질로 인한 병사로 여겨지지만,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맏아들 요안니스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테오도로스는 게오르기우스 무잘론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죽은 지 불과 아흐레 뒤에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의 추모식 때 귀족들은 무잘론과 그의 형제 한 명을 주제단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몸을 난도질해버렸다. 곧이어 궁정 혁명이 일어났고, 귀족들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감옥에서 석방시켜 게오르기우스가 맡으려 했던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