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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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과 함께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부흥을 놓고 다투던 세 계승자 왕조 중 하나로, 당시에도 이미 이피로스(에페이로스)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지방을 부르던 용어에 가까웠으므로 자신들이나 유럽인들은 로마(Romania) 친왕국이라고 불렀다.[3] 한때는 제국의 제 2수도라 불리던 테살로니키를 탈환하고, 트라키아 깊숙히 진군해 칭제를 눈앞에 두던 국가였으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라틴 제국의 삼면 공격에 쪼그라들고 결국 니케아 제국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번국으로 남게 된 국가.
2. 성장
1205년, 4차 십자군의 준동 속에서 이사키오스 2세의 친척이었던 앙겔로스 왕조의 일원이자 두카스 왕조의 외손인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가 제국 서부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그(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는 멸망해가는 제국의 새로운 노아이다. (나우팍토스 대주교 요안니스 아포카우코스)[4]
그는 알렉시오스 1세의 모계 후손이기도 해서 말하자면 앙겔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세 황족의 피가 모두 흘렀기에 자신을 콤니노스 두카스로 칭했다. 이게 참칭이나 억지는 아닌 것이 당시 그리스식 전통으로는 아버지의 가문명만을 성으로 쓰는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중 더 고귀한 가문을 성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원래 성인 앙겔로스[5] 보다는 훨씬 더 명망높은 콤니노스와 두카스를 강조한 것이다. [6]
그는 동로마 제국 서부 테마들의 총독이었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일련의 군사활동을 통해 로마 제국의 유민들을 이끌고 라틴 제국의 봉신왕, 보니파키우스를 향한 저항을 계속했다. 미하일은 아르타 지방을 거점으로 옛 이피로스 대부분과 알바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으며, 피난민이 모여든 이오안니나, 앙헬로카스트로등을 사비를 들여 구휼하고 요새화했다. 1205년 말 그는 디라히온과 나우팍토스의 라틴 세력을 압박해, 주변 지역을 점령했으며, 그리스 북부에서 살아남은 로마 유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제국 서부에 남은 로마의 유민들과 패잔병, 피난해 온 귀족들[7] 은 미하일을 지지했다. 당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빠져나온 사람의 최소 절반 이상은 이피로스로 도망쳤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
미하일은 동로마의 유민들에게 친왕(데스포티스), despotes)이라는 칭호로 불리기 시작했다.[8] 사실 그는 스스로를 친왕이라고 명칭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친왕이라고 부른 것은 로마의 유민들 뿐만이 아니라, 라틴 제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라틴 제국과 테살로니카 왕국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그는 이미 로마인들의 땅의 정통 황제인 라틴 황제에게 종속된 영주 중 하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피로스의 통치자 미하일도 초창기에는 영토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테살로니키 왕국의 보니파키우스와 보두앵 황제의 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더 이상의 서유럽 원정을 저지하기 위해 교회 통일의 명목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원조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디라히온에 세워놓은 가톨릭 대교구에 이피로스를 종속시킬 것을 주장했고, 결국 가톨릭과의 화해는 봉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209년, 알렉시오스 3세가 이피로스로 망명해오자, 발칸 인근에 거주한 로마의 유민들 사이에는 이피로스 친왕국이 곧 멸망한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항구 도시 두라초와 코르푸를 함략시킨 이후 이피로스와 싸워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의 미하일에 대한 압박을 멈췄고, 테살로니키 왕국과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을 압박하는 데에만 전념하는 중이어서 제국 수복의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2.1.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의 영토 확장
친왕 미하일은 1210년부터 라틴 제국과 맺은 강화조약을 폐기하고 테살리아 일대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테살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왕국은 1207년 보니파키우스가 전사하고 나서, 왕국은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의 공격으로 인해 약해진 상태였다.[9] 기회를 잡은 미하일은 테살리아의 라틴 귀족들과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도모코스에서 패퇴시켰다. 여기서 그는 제국을 유린한 라틴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로마인들에게 부흥을 이끌 새 군주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도모코스의 라틴 영주들을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는 교황에게 파문을 맞는 명분이 되었고 라틴 제국의 새 황제 앙리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리아까지 겨우 12일 만에 당도하는 기염을 토했다. 라틴 제국의 빠른 진격에 미하일은 라틴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불가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앙리는 불가리아와 이피로스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트라키아에서 계속되는 불가리아의 압박과 니케아 망명 왕조의 테오도로스 1세의 견제를 막기 위해 점령지를 되찾지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앙리는 아나톨리아 전선으로 복귀해 린다쿠스 강변에서 니케아 제국군을 대파함으로 승리를 얻기는 했지만, 이피로스의 동진을 막을 여력은 없었다.
2.2.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그러나 이피로스의 동진은 옛 동맹인 불가리아 제국에게 막히기 시작했다. 불가리아는 테살리아의 영토를 이피로스가 아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 했고, 현재의 상승세를 보았을 때는 충분히 가능하기도 했다. 불가리아의 남하는 로마의 유민들도, 라틴 정복자들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년까지 싸우던 두 군대는 1211년, 펠라고니아에 모여 불가리아인들을 격파했지만 거대한 적을 앞에 둔 일시적인 동맹이었다. 바로 다음해부터 1214년까지, 미하일은 제국을 갈가리 유린한 라틴 군주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코린트 만에 있는 섬들과 도시들은 아직도 로마 유민들의 손에 있었는데, 살로니아 군주 토마스 1세가 이들을 공성하자, 미하일은 코린트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출정하였다. 미하일은 토마스 1세를 전사시키고, 살로니아는 곧 부흥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1212년 토마스 1세의 아들 토마스 2세가 프랑크 지원군과 함께 살로니아를 되찾았다. 하지만 1212년이 나쁜 소식으로만 점철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하일은 라리사와 디미트리오스의 라틴 영주들을 궤멸시키고 이곳에 정교회의 깃발을 다시 꽂았으며, 그를 지원한 그리스 귀족 멜리세노스 가문에게 두 지역의 방위를 맞겨 지배를 공고히 했다. 승세를 탄 그는 1213년에 디라히온을, 1214년에는 코르푸를 점령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의 전폭적 지원과 튼튼한 요새를 뚫고 거둔 귀중한 승리였다. 또한 그는 알렉시오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1세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국에서 독립한 알바니아 공국들을 토벌해 북방에서도 영토를 넓혔다.
2.3. 로마 유민들의 인도자가 떠나다
그의 빛나는 전성기는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그는 안티파트레이아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암살당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이자 니케아 제국에서 관직을 하고 있던 테오도로스에게 이피로스를 상속할 것을 명했다. 이피로스는 이제 미하일의 이복형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경쟁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처음 5년간은 니케아 제국에 희망을 걸었다. 실제로 그는 님파이온에서 테오도로스 1세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라틴 제국과의 싸움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214년부터의 니케아 황제의 행보는 테오도로스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와 그가 정통으로 생각했던 황제 테오도로스 1세가 님파이온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오히려 제국 부흥의 기치를 건 트라페준타 제국과의 싸움만에 열중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배신 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10]
그에게는 제국 부흥이라는 야망이 있었고, 이복형의 암살로 인해 1214년에 이피로스의 주인이 되자, 곧 그 야망을 실현시킬 힘 또한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니케아 제국에서 이피로스로 건너가 독립을 천명했다. 그는 동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그는 형 대에 이피로스 친왕국에 복속된 알바니아의 토후들과 관계를 개선해 북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북방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세르비아 공국과의 적대를 멈추고 동맹을 선언했다. 그러기 위해 테오도로스는 자신의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를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만자의 여동생과 결혼시키고, 형이 진행하고 있었던 세르비아령 제타에 대한 공격 또한 멈추는 화해의 제스쳐를 보냈다. 스테판 네만자도 계속해서 강성해지는 불가리아를 억제할 동맹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브를 미하일의 외조카, 안나와 결혼시키려 하는 등, 서로에 대한 우의를 다졌다.[11] 그는 북방이 정리되자 마케도니아로 손을 뻗었다. 불가리아 차르 보릴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귀족들이 세오도로스를 반기며 성문을 여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흐리드와 펠라고니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부 그리스의 패권을 손에 쥐었고, 대교구가 있는 오흐리드를 차지했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를 들고 있는 니케아 제국보다는 못해도 정교회권에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내정의 기반이 다져지자 테오도로스가 눈을 돌린 곳은 테살로니키 왕국. 니케아와 불가리아를 상대하느라 피폐해지고 라틴 제국 황제가 바뀌는 틈을 타서 테오도로스가 친정에 나선 이피로스군은 단숨에 테살로니키를 무너트리고 땅을 회복했다. 이로써 테살로니키, 마케도니아, 이피로스를 확보한 이피로스는 1217년 라틴 제국의 새 황제 피에르가 알바니아로 공격해오는 것을 사로잡는 개가를 올렸다. 새로이 테살로니키 제국을 칭하고 황제로 자칭한 테오도로스는 1225년 콘스탄티노플의 관문인 아드리아노플까지 점령했다.
1230년 테오도로스는 서방에서 용병을 끌어들여 8만 대군을 모아 불가리아를 기습해 들어갔다. 이 정도 규모면 낙승이라 생각했는지 처자식들까지 거느리고 도중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전진하던 그는 클로코트니차라는 작은 마을에서 뜻밖의 기습공격을 당한다. 이피로스의 침략 소식을 들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가 불과 수천 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이피로스군의 진군거리 세배를 달려 기습해온 것이다. 이때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이피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불의의 기습과 교묘한 포위 전술에 말려든 이피로스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테오도로스는 도망도 못가 포로가 되었고 그의 동생 마누일만이 소수의 호위군을 대동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12]
4. 이피로스의 쇠퇴
불가리아에게 간신히 도망친 마누일은 허울만 남은 테살로니카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선대 이피로스 친왕 미하일의 서자, 미하일 2세는 작은아버지를 부정하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주가 되었다. 7년 뒤 전통대로 눈을 뽑힌 채 풀려난[13] 테오도로스가 동생 마누일을 쫓아내고 자기 자식에게 테살로니키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종이호랑이 테살로니키 제국을 버리고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군주직을 인정받았다. 미하일 2세는 니케아 제국의 봉신으로써 처음으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주(가 되었다. 이 주종 관계는 결혼 동맹으로 공고해지는가 싶었는데 니케아의 팽창이 확연해지고 동맹을 성사시킨 니케아 제국 황제의 손녀가 요절하면서 상황은 또 뒤바뀌었다.
이제 라틴 제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과 손을 잡은 이피로스 군주국은 1259년 새로운 동맹들과 함께 니케아 제국에게 패한다. 전투의 세부상황은 기록이 부족해서 알 수 없지만 미하일 8세는 동맹 사이의 불신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자 이피로스의 입지는 애매해졌다.
5. 멸망으로 가는 길
한때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이피로스가 몰락한 뒤 로마 제국의 제위에 오른 니케아 제국 출신의 왕조는 일단 자신들의 우위만 확실하다면 굳이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를 멸망시키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혼 동맹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2세와 그의 뒤를 이른 니키포로스는 시실리 왕국을 비롯한 라틴 세력과 로마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나폴리가 로마 제국의 해군에게 패한 상황에서 나폴리의 봉신을 자처하거나 친 로마 정권을 새로 수립하면서 라틴계를 추방한 뒤에 뜬금없이 그리스 전부를 정복하겠다고 하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이후 로마 제국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가 로마 제국이 내전으로 권력다툼을 하게 되자 자기들끼리도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가 친로마계, 친라틴계로 나뉘어 내분을 일으켰다.
1343년, 세르비아의 왕 스테판 두샨은 한때 로마 제국의 영토로 복귀했던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고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스테판 두샨이 죽자 이들은 또 다시 떨어져 나와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가 내분을 일으켰고 주변 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이에 각기 분리독립했으나 테살로니키는 1393년, 이피로스는 1479년 각기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6. 데스포티스
데스포티스(δεσπότης, despotes)는 친왕, 전제군주, 군주, 주인 등으로 번역된다. 데스포티스는 주군이라는 의미이고 중세 로마 시기에는 황족에게 주어지는 호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초대 미하일 1세도, 테오도로스 1세도 스스로를 데스포티스라고 불릴 권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자칭한 적은 없다. 나중에 미하일 2세가 니케아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데스포티스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데스포티스는 어떤 지역에 붙은 명칭이 아니라 그냥 궁정에서의 타이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피로스를 이피로스 친왕국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도 스스로를 이피로스 친왕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동시대에는 그저 로마 제국이라고 했을 뿐이다.
7. 역사보기 틀
[1] 에페이로스라고도 쓰지만, 이는 이 시대로부터 거의 1500년 전의 고전식 발음이고, 이 국가가 존재할 당시에는 이미 현대처럼 이피로스라고 발음되었다.[2] 창건자가 두카스 왕조이었기 때문에 두카스의 깃발을 썼다.[3] 물론 정통 니케아 제국이 보았을 때는 이피로스의 독립 번국에 불과했겠지만...[4] 이피로스로 피난온 서부 속주의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칭송받았다. 적에게 너무 잔인한 면은 있었지만, 신민들에게는 난세의 명군이었다.[5] 하급 귀족이었던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가 알렉시오스 1세의 4녀인 테오도라 공주와 결혼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신흥 가문이었다.[6] 사실 당대 명문가들 간에 계속된 정략결혼으로 동로마 망명정부 수반들 전원, 그리고 상당수의 망명 귀족들이 두카스, 콤네노스 가문과 서로 친척지간이었고 촌수도 가까웠다.[7] 그 중에는 실명한 뒤 퇴위당한 알렉시오스 3세도 있었다. 미하일이 직접 몸값을 내고 데려온 것.[8] 그가 친왕이라는 칭호를 스스로 선포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알렉시오스 3세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던 적이 있었기에 친왕 작위를 제수했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피로스가 친왕을 선포한 것은 그 후 3대 뒤였다.[9] 칼로얀은 1207년에 쿠만족에게 살해당했으므로, 더이상 테살리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10] 물론 니케아 황제였던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는 라틴 제국과 전쟁을 끝내고 트라페준타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트라페준타의 메가스 콤니노스들은 옛부터 니케아를 정통으로 보지 않고 조지아와 함께 삼키려 들었으며, 앙리 황제는 니케아가 끝내 이겨보지 못한 위협적인 적이었으니...[11] 세르비아와 이피로스 로마인들의 사이에는 족보가 복잡해졌다. 처음에 라도슬라브와 혼담이 오갔던 사람은 미하일의 여동생 테오도라였는데, 테오도라는 스테판 네만자의 아내 유도키아의 사촌이었으므로 이 둘의 결혼은 촌수가 너무 가까운 근친혼이라 하여 정교회 대주교들이 반대했다. 결국 라도슬라브가 테오도라의 딸 안나와 결혼하는 것으로 촌수 문제는 마무리되었다.[12] 마누일은 이반 아센의 사위였다.[13] 딸을 이반 아센과 결혼시키면서 복귀를 허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