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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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6년 5월 14일 ~ 9월 7일 이탈리아 토리노 요새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사보이아 공국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일소시켰다.
2. 배경
1705년,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해 4월에 니스를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사보이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이자 북이탈리아의 핵심 요충지인 토리노 요새를 공략한다면, 사보이아 공국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서 프랑스의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완전히 굳히고 오스트리아 남부 일대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사보이아 공국을 구하려 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쉽사리 토리노 요새를 포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06년 4월 19일, 방돔 공작은 외젠이 1706년 초에 본국으로 돌아간 뒤 아직 이탈리아에 복귀하지 않은 틈을 타 칼치나토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했다.(칼치나토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갑작스런 적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뒤늦게 복귀한 외젠은 병사들을 재정비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사이, 방돔 공작은 토리노 요새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1706년 5월 토리노 요새를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 이리하여 스페인 왕위 전쟁의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토리노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총사령관: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 부사령관: 푀이야드 공작 루이 도뷔송
- 병력: 48,000명
3.2. 오스트리아-사보이아 공국 연합군
- 사보이아 공국 총사령관: 사보이아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사부아 공자 외젠
- 병력: 사보이아 공국 정규병 10,500명 + 민병대 4,000명 + 오스트리아군 30,000명
4. 전투 경과
루이 14세와 참모들은 토리노 공방전이 벌어지기 몇년 전부터 토리노를 공략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보방은 포 강 동쪽의 요새화된 고지를 먼저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3주 안에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그 후엔 도시를 장악한 뒤 요새를 함락시키자고 주장했다. 반면 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군 총사령관 방돔 공작과 부사령관 푀이야드 공작 루이 도뷔송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포 강 동쪽 언덕에 설치된 요새는 적에게 원활한 보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공략하려 했다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게 자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토리노의 외곽에 위치한 옛 성곽을 충분한 대포를 통해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토리노 공략에 대한 프랑스 장성들간의 의견 대립이 쉽사리 끝나지 않는 동안, 사보이아 공국은 토리노 방비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포 강 동쪽 언덕 위의 요새들을 최신식으로 개조해 방비를 더욱 튼튼히 했고, 옛 성곽 주변에 소규모 보루들과 외루벽을 설치해 구식화된 성곽의 약점을 해결했다. 또한 토리노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본인이 요새 수비를 진두지휘했고, 반드시 토리노를 사수하고야 말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민병대 4천 명이 정규군 10,500명과 합세해 토리노 요새에 들어가 각 구역을 철통같이 경비했다. 루이 14세는 첩보를 통해 적의 이같은 방비를 확인했지만 방돔 공작과 푀이야드 공작이 그 정도 쯤은 감안했을 거라고 여기고 그들의 의견에 따라 토리노의 옛 성곽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1706년 5월 12일, 푀이야드 공작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리노 시의 북쪽 평원으로 진군했다. 이후 그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고 도라 강을 건너기 위해 세 개의 부교를 건설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적이 부교를 건설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약간의 병력과 대포를 동원해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고 5월 16일엔 기병대를 파견해 포 강을 건너 프랑스군 극 좌익을 급습하게 했다. 푀이야드 공작은 이러한 적의 작전에 대응하느라 부교 건설이 차질을 빛자 그의 진영 앞의 참호가 완비될 때까지 도라 강 도하를 연기하기로 했다. 이윽고 참호 건설이 완료되자, 그는 22일 도라 강을 건넜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기병대를 보내 이들을 훼방놓으려 했지만, 적이 토리노 남쪽의 포 강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몽칼리에리로 후퇴한 뒤 프랑스군이 포 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기로 했다.
푀이야드 공작은 포 강을 건너기 전에 토리노 시를 완전히 에워싸기로 했다. 5월 27일, 그는 토리노 시로부터 약 1,100m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또한 6월 2~3일 밤에 4,000명의 노동자들이 토리노 시로부터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2,200 m 길이의 제1 전선을 건설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요새 포대에 대응하기 위해 박격표 12문을 설치하고 그 아펭 두 개의 작은 요새를 건설했다. 제1 전선 건설이 순조롭게 완료되자, 프랑스군은 뒤이어 토리노의 옛 성곽을 보호하고 있는 보루들을 향하는 3개의 참호를 건설하고 이들을 잇는 두번째 전선을 건설했다. 또한 프랑스군은 제2 전선에도 도시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은 포대를 설치했다.
한편 푀이야드 공작은 다에스테잉과 게르치 장군에게 7천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치바소에서 포 강을 건너 토리노의 남쪽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들은 6월 14일 밤에 진군을 개시해 다음날 가소노로 행진했다. 이후 푀이야드 공작은 친히 4천 기병대를 이끌고 바르다시노와 스콜제, 몽탈레로 진군했고, 다에스테잉 장군은 16일 저녁 카스티노 까지 진군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적의 의도를 눈치채고 일부 수비대를 토리노의 남쪽 일대에 설치된 몽칼리에리 요새로 보내 가능한 오랫동안 버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몽칼레이리 요새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펠스 장군 휘하 오스트리아군은 적이 접근해오자 철수해버렸고, 이 때문에 몽칼리에리 요새는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고립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당초 토리노 요새에 남아서 병사들을 지휘하려 했던 계획을 버리고 본인이 기병대를 이끌고 토리노 외곽으로 빠져나간 뒤 프랑스군을 외부에서 괴롭히면서 외젠의 오스트리아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6월 17일 필리프 폰 다운 장군에게 요새 수비를 맡긴 후 토리노를 떠났고, 이틀 후인 6월 19일 몽칼리에리 요새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서 토리노는 프랑스군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었고 외부와의 연락망도 끊어졌다. 이후 프랑스군은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붓는 한편 제 3의 전선을 건설하기 위해 꾸준히 요새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요새 수비군은 약 100명 이상의 보병대와 소수의 기병대로 구성된 특공대를 편성해 전선을 건설하고 있는 적을 끊임없이 훼방놓게 했다. 또한 요새에 편성된 대포들은 적 포대를 향해 사정없이 포격을 가했고, 요새로 접근하는 적 병사들을 향해서도 가차없이 포격했다. 프랑스군은 하루에만 8,300발에 달하는 포탄을 쏴댔지만 토리노 요새의 성벽을 파괴하는 데 실패한 반면, 수비대가 하루에 발사한 4,500발의 대포는 적 포병대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혀 6월 30일 무렵엔 프랑스 포병대가 고작 대포 30문만 운영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대가 쏜 포탄은 토리노 시에 떨어져 많은 건물들을 파괴했고, 토리노 시는 매일 밤 3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피해를 복구해야 했다.
한편, 푀이야드 공작은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가 토리노를 빠져나와 자신들의 배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역으로 그를 체포해 토리노 수비대의 전의를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6월 21일 체라스코에 도착한 뒤 적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스투라 강 건널목을 선점한 뒤 적이 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적 기병대가 다른 곳에서 강을 건넜다는 걸 알게 되자,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급히 잘 요새화된 쿠네오로 피했다. 푀이야드 공작은 사보이아 공작이 쿠네오로 피했다는 걸 알게 되자 분견대를 파견해 쿠네오를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쿠네오에 500명의 기병대와 약간의 용기병만 남긴 뒤 나머지 기병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해 포위망을 돌파했다. 푀이야드 공작은 사보이아 공작을 추격하려 했지만 때마침 방돔 공작이 플랑드르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새 지휘관으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부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푀이아드 공작은 부하들에게 사보이아 공작을 계속 추격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새 총사령관을 만나러 토리노로 돌아갔다.
7월 7일 막심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제3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군은 토리노의 옛 성곽을 지키고 있는 보루와 외루벽들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수비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수비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저항했고, 보루를 내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일부러 화약에 불을 붙이고 떠나 프랑스군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프랑스군은 이 모든 저항을 뿌리치고 성곽 주변의 모든 보루와 외루벽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3천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많은 병사들이 탈영했다. 이후 프랑스 포병대는 토리노의 옛 성곽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공병대는 적의 격렬한 공격을 무릅쓰고 제4 전선을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사부아 공자 외젠은 칼치나토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복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이 토리노를 포위했을 때 26,000명의 보병과 2,800명의 기병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적이 4만의 보병대와 8천 명의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명백히 부족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방돔 공작이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요새를 구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막기 위해 철저히 방비하고 있었기 떄문에, 외젠은 섣불리 토리노로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월 말 방돔 공작이 루이 14세의 지령에 따라 플랑드르 전선으로 가면서 프랑스군의 방비가 느슨해졌고, 오스트리아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외젠은 약 3만 6천명의 보병대와 6천 명의 기병대를 확보했다. 외젠은 이제 충분한 전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토리노 구원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7월 5일, 외젠은 바디아로 이동해 그곳에서 아디제 강을 건널 태세를 보였다. 그러자 프랑스군은 마시에 병력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외젠은 즉시 바테 장군의 분견대를 동쪽으로 50km, 떨어진 로타노바로 급파했고, 바테 장군은 7월 6일 선발대와 함께 기습적으로 아디제 강을 건너 보르고포르테에 도착한 뒤 급히 그를 저지하려 달려온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7월 7일 루시아에 진군한 바테는 마시의 프랑스군을 위협했고, 결국 수비대는 다리를 부순 후 철수했다. 외젠은 공병대를 동원해 다리를 건설하게 하면서 바테에게 비앙코 운하를 건널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12일, 바테는 비앙코 운하가 스코티코 지류와 합류하는 지점인 피존에서 비앙코 운하를 도하한 후 재빨리 부교를 건설했다. 이후 그의 뒤를 따라온 외젠은 부교를 건너 포 강을 향해 진격하면서 베로나 근처에 6,500명의 병력을 남겨 적의 역습을 저지하게 했다.
7월 17일, 오스트리아군은 폴젤라로 진군한 후 400명의 기병대의 역습을 저지하고 야전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다리를 신속하게 건설하고 이를 통해 포 강을 건넜고 곧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의 군대와 합류했다. 한편 7월 18일 북이탈리아의 프랑스군 본부에 도착한 오를레앙 공작은 푀이야드 공작에게 토리노에 20개 보병 대대를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을 수습해 스트라델라로 진군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외젠의 군대에게 접근하면서 메다비 장군에게 15개 보병 대대와 15개 기병 대대를 이끌고 민치오를 지키게 했다. 그러나 막상 외젠이 접근해오자, 오를레앙 공작은 아군을 상대로 수차례 승전을 거둔 명장과 싸우는 것에 중압감을 느껴 군대를 만토바, 오스티글리아, 미란돌라, 카르피, 과스탈라, 모데나, 레지오 등지에 분산시키고 자신은 40개 보병대대와 15개 기병대대 만을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섰다.
한편, 푀이야드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으로부터 토리노 공격을 중단하고 스트라델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자 격분했다. 그는 지금까지 고생해가며 토리노 공략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와서 공격을 중단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어쩔 수 없이 푀이야드 공작이 알레산드리아와 토르토나의 방어선을 보강하고 50개 이상의 기병대를 파견하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푀이야드 공작은 토리노의 옛 성곽에 대한 공세를 끈질기게 감행해 8월 초 4번째 전선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토리노의 옛 성책 공략은 얼마 남지 않은 듯했고, 푀이야드 공작은 바르세유에 10월 말까지 토리노를 공략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때까지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만 명이 넘었고, 필리프 폰 다운 장군의 지휘를 받는 수비대는 여전히 끈질기게 저항했으며, 토리노 주민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적의 포격으로 붕괴될 위기에 몰린 방벽들을 보강하는 데 앞장섰다.
이 무렵, 외젠은 적이 자신과 싸우는 걸 주저하는 걸 보고 토리노로 곧장 진군하기로 했다. 먼저, 그는 티롤과의 연락망 및 보급로를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 8월 2일 카르피를 포위 공격해 8월 5일 함락시키고 코르레지오를 뒤이어 공격해 하루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8월 9일 레지오로 진군한 외젠은 5일 간의 공성전을 치룬 끝에 8월 14일 함락시켰다. 이렇게 해서 보급로 및 연락망을 완전히 확보하는 데 성공한 외젠은 8월 15일 토리노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진군하는 동안 정찰대를 꾸준히 파견해 적이 역공을 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지를 관찰하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외젠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8월 31일 빌라스텔론까지 진군했다.
이때 오를레앙 공작은 과스탈라 근처의 숙영지에 머무르며 카르피와 레지오가 공략되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푀이야드 공작에게 이제라도 요새 공격을 중단하고 군대를 수습해 외젠의 진군을 저지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50개 이상의 기병대대를 파견했던 푀이야드 공작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오를레앙 공작은 단독으로라도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8월 24일 기병대를 파견해 알레산드리아와 발첸차 사이에서 적의 진군을 저지하도록 하고 세네테레 장군 휘하의 10개 보병대대로 하여금 알레산드리아의 방비를 보강하게 했다. 또한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토리노로 서둘러 진군해 8월 31일 푀이야드 공작과 합류했다.
9월 2일, 외젠과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토리노와 그 주변 지역을 살펴볼 수 있는 수페르가 언덕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봤다. 외젠은 붕괴 직전인 요새에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는 것보다는 프랑스 전선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군이 아군이 동쪽에서 공세를 집중할 거라고 믿고 거기에 방비를 강화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본대가 프랑스군 포위망 동쪽으로 진군해 적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비롯한 강력한 분견대를 포위망 북서쪽으로 우회하여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진군을 개시, 적의 간혈적인 역습을 격퇴하고 도라 라피리아와 사투라 디 란조 사이에 진영을 설치했다. 이때 외젠은 장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편, 오를레앙 공작은 8월 31일에 푀이야드 공작과 합세한 뒤 9월 5일까지 토리노 요새를 향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또다시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공략이 좌절되자[1] , 오를레앙 공작은 긴급 회의를 소집해 오스트리아군과 회전을 벌일 지, 아니면 적이 아군의 방어선으로 진격하는 걸 기다려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푀이야드 공작과 마르생 백작 페르디낭 장군은 방어선을 편성하고 적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를레앙 공작과 다른 장성들은 그랬다가는 요새 수비대와 오스트리아군에게 협공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일부 병력으로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결로 했다면 오를레앙 공작의 주장이 관철되었을 테지만 마르생은 이를 막았다. 그는 루이 14세가 자신에게 "사령부 사이에 이의가 있을 경우 그대가 군대의 행보를 결정하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왕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방어선에 머무르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그들은 이미 절반쯤 격퇴되었다."
9월 7일, 오스트리아군은 토리노 요새 구원을 위한 총공세를 감행할 태세를 갖췄고 프랑스군 역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방어선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좌측의 군단을 맡았고, 외젠은 우측의 군단을 맡았다. 한편 프랑스군 측에서는 오를레앙 공작과 마르생 백작은 방어선 중앙 군단을 지휘했고, 데스탱 장군은 우익을 맡았으며, 생 피에몽테 장군은 좌익을 지휘했다. 푀이야드 공작은 토리노 외곽의 동쪽 언덕에 알베르고티 장군 휘하 보병 40개 대대를 편성했고 40개 대대와 대부분의 기병대를 포 강과 도라 사이에 배치해 자신이 직접 이끌었으며, 20개 보병대대와 17개 기병 대대를 도라 강과 슈투라 사이의 평원에 배치시켰다.
오전 10시, 오스트리아군의 전면 공세가 개시되었다. 외젠과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최전선에 나아가 적진을 자세히 살피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포병대에게 적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악착같이 저항하면서 전황은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는 사전에 계획된 대로 프랑스군의 북서쪽으로 기동한 뒤 세 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했지만 적군의 거센 저항에 막혀 모조리 실패했다.
그러던 중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가 지형을 정찰하기 위해 파견한 헝가리 기병들이 돌아와서 프랑스군의 전선이 슈투라의 오래된 둑까지만 이어지고 슈투라와 오래된 둑 사이의 상당한 영역에 프랑스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에 사보이아 공작은 후사르 4개 분대와 척탄병 수 개 부대를 이끌고 그쪽으로 진격해 프로이센군이 네번째 공세를 준비할 무렵 프랑스군의 측면에 도착했다. 사보이아 공작의 이같은 기동은 프랑스 우익 부대를 경악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가뜩이나 탄약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적이 난데없이 측면에 나타나자 전의를 상실하고 프로이센군의 네번째 공세에 그대로 허물어졌다.
토리노 요새 수비군 지휘관 필리프 폰 다운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마침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요새에서 출격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요격했고 요새의 포병대는 적진을 향해 대포를 쏘며 호응했다. 프랑스군은 우익이 붕괴된 데 이어 요새 수비군까지 나서서 자신들을 협공하려 하자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퇴각하기로 결심하고 생 프레몽트 장군에게 아군의 후미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이후 프랑스 좌익은 루생토 다리를 건너 퇴각했고 루생토 보루를 점거하고 있던 프랑스군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생 프레몽트 장군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매우 당황한 나머지 중앙군과 우익군이 아직 퇴각하기도 전에 루생토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 바람에 졸지에 도라 강을 건널 수 없게 된 프랑스군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 어떻게든 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거센 공격을 가해 이를 저지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반치글리아 다리 쪽으로 도주했는데, 기병대 대부분은 반치글리아 다리를 건너 달아나는데 성공했지만 보병대는 그렇지 못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도라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건너려 하다가 익사했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피네롤로를 향해 퇴각했고, 외젠과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토리노 시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토리노 공방전은 오스트리아-사보이아 공국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프랑스군은 토리노 공방전에서 가공할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아군의 사상자가 1,500~2,000명이며 5천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지만, 학계는 이를 축소보고라고 간주하며, 실제로는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상실했을 것으로 본다. 토리노 공방전에 투입된 프랑스군 병력이 4만 8천 명인 것을 감안한다면, 북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군은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마르생 백작 페르디낭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후 전투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며칠 만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오를레앙 공작 역시 부상을 입었다. 반면 오스트리아-사보이아 공국 연합군의 사상자는 8,200여 명이었다.
프랑스는 토리노 전투 후 더이상 북이탈리아 전선을 유지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707년 3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와 밀라노 협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눈 밀라노와 만투바에 대한 지배권을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허용받았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1만 병력을 스페인령 나폴리로 파견해 별다른 저항 없이 점거했다. 이로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1] 이때 소규모 프랑스 척탄병들이 성벽 밑에 땅굴을 파서 도시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벌였다. 그들은 사보야드 갱도에 진입한 뒤 갱도의 입구를 지키던 사보이 병사들을 사살하고 갱도를 통해 도시에 진입하려 했다. 이때 갱도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던 광부 피에트로 미카(Pietro Micca)는 지상에서 갱도로 내려가는 입구의 문을 걸어잠갔다. 척탄병들이 문을 부수려 하자, 그는 화약통 2통을 문 앞에 설치한 뒤 동료더러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했다. 이윽고 척탄병들이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약통은 폭발했고, 척탄병들은 대부분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또한 계단은 이때의 폭발로 인해 며칠 만에 무너졌다. 이때 몸을 피하지 않고 문 앞에 있던 미카는 중상을 입고 얼마 안가 사망했다. 오늘날 미카는 토리노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토리노 시내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