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아 공자 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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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양모 기사단 복장의 외젠.
야콥 판슈펜(Jacob van Schuppen) 작, 1720년경
'''Eugenio von Savoy''' (본인의 서명)
독일어: Prinz Eugen von Savoyen
프랑스어: Eugène de Savoie
이탈리아어: Principe Eugenio di Savoia
영어: Prince Eugene of Savoy
(1663년 ~ 1736년)
1. 개요
2. 이름에 대해
3. 생애와 활동
4. 전쟁 목록
5. 매체
6. 기타


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이탈리아 북부와 스위스 제네바 지방을 다스렸던 사부아 가문[1] 출신이다. 합스부르크 역사상 최강의 공적을 쌓은, '''유럽사에 길이길이 남을 불세출의 명장''' 중 한 명. 흔히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때의 맹활약만 알려져 있는데 '''대 튀르크 전쟁의 활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헝가리를 통째로 안겨준 공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2] '''유럽사 전문가들은 루이 14세가 외젠을 군에 기용하지 않은 것을 항우한신을 중용하지 않은 것과 맞먹는다고 평할정도다. '''

2. 이름에 대해


유럽사에서 영어권 서적 번역본을 많이 접하기 때문에 프린스 유진(Prince Eugene)으로도 알려졌고 독일어권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 사부아의 외젠(Eugène de Savoie) 등 여러 이름이 있는데, 전부 같은 사람이다(...). 본인이 서명에 사용한 이름은 Eugenio von Savoy였다. 이탈리아 혈통에도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에우제니오(Eugenio)'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사용했지만, 독일식 귀족 명칭인 von을 썼고, 성은 영어식으로 Savoy라고 쓰는 등 역시 혼란스럽다. 그가 실제로 활동했고 거주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즉 오이겐 공이라고 불리었다.
애초에 근대 이전에는 국적이란 개념이 약했고 특히나 통치가문이나 왕가는 신분에 따라 국제결혼(?) 풍습에 작은 나라 통치가문은 큰나라에서 복무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국적이나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자체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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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니오 혹은 유진 혹은 오이겐 혹은 외젠의 가계
아버지 외젠모리스는 사부아 왕가의 후손이고 어머니 올림피아 만치니는 리슐리외에 이어 프랑스 재상이었던 마자랭 추기경의 조카다. 핏줄을 더 거슬러 가면 외젠의 선조 중에 펠리페 2세 딸도 있었고, 이후 경력과도 관련되지만 그의 형제 중 하나도 합스부르크 쪽에 복무하고 있었다. 더 촌수를 넓혀 따지면 그의 멘토를 한 바이에른 선제후도 있기도 했다. 외젠이 구직 활동할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세도 이런 관계들을 보고, 나중에 프랑스와 맞붙게 되면 사보이 공국을 끌어들일 꿍꿍이도 있었기에[3] 잘 대접하고 자리를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적에 대한 정체성이 어쨌든 간에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이 참여한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를 소개할 때 합스부르크 제국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소개되고 있다.

3. 생애와 활동


파리에서 태어나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자랐는데, 몸이 건장하지도 않고 썩 잘 생긴 편도 아니라 성직자 준비를 하다가 19세 때 군인이 되기로 하여 가문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자신이 자란 궁정에서 루이 14세에게 직접 군인이 되게 해달라고 청원하지만 거절당한다. 루이 14세가 "그렇게 무례하게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면 알 만 하다. 루이 14세도 그럴 만 한게 외젠의 어머니 올림피아 만치니가 독살 스캔들 추문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자식까지 좋아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형이 오스트리아에서 이미 복무 중이기도 했다. 게다가 슬프게도 거절 이유가 바로 '''못생겨서'''(...). 루이 14세가 내 곁에 두기엔 못생겼다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밖에서 자리를 알아보다 합스부르크의 군인이 되었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성장한 궁정 귀족이 루이 14세에 자리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나중에 프랑스의 적으로 최고위 지휘관이 된다고만 하면 이상해 보이지만, 사보이 공국은 좀 미묘한 위치이긴 한데 신성 로마 제국 권역에 속할 때도 프랑스의 영향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의 일부냐 하면 그건아닌 독립된 통치국이라서 외젠은 법적이나 관습적으론 엄밀하겐 유럽 왕족과 같은 신분이었다. 물론 통치가문의 방계 후손들은 작위나 지참금이 떨어지기 때문에 신분을 유지하려 성직이나 군인이 되는 경우가 흔하긴 하지만 원래 외젠이 어릴 적 자란 데가 파리였을 뿐이라고 이해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의 친척 형제들 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 관계자가 많았는데, 이미 오스만 제국과 대적하며 신성로마제국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 역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며 비텔스바흐 가문이 언제나 그랬듯이 기회만 있으면 합스부르크를 누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야심을 가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도 있었다. 1683년부터 복무를 시작한 외젠은 초기에는 태도가 건방지다는 소리도 듣긴 했으나 계속 상관들과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복무 10년 정도 지났을 때에는 야전 사령관 자리까지 올랐다.
대 튀르크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 1700년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된다. 여기서 외젠은 프랑스에 비해 그다지 앞서지 못하고 본국의 지원도 잘 오지 않지만 그런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공을 세워나가고, 1702년 1월 31일/2월 1일 크레모나 전투에선 대담한 야간 습격을 결행하여 프랑스군 사령관을 사로잡는 등 명성을 올렸는데, 하지만 프랑스군이 퇴각하거나 와해되거나 하지는 않아 완전히 성공하진 못하였다. 이후 8월 루차라 전투에선 피해를 더 많이 입혔음에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계속 버틸 수가 없어진 외젠은 1703년 1월에 비엔나로 돌아간다. 하지만 크레모나와 루차라의 전공으로 외젠의 명성은 꽤나 높아졌다.
외젠은 1703년 6월에 신성 로마 제국 전쟁 평의회의 새 수장이 된다. 얼마 전까지 보급과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험 때문이었는지 가능한 현장 지휘관이 쓸 돈과 물자를 전달하고, 군기를 잡고, 영향력보다는 공훈에 따라 진급과 영예를 주는 등 군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를 내렸다. 그 후 북이탈리아로 돌아가 토리노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프랑스가 북이탈리아 전선을 포기하도록 강요했으며,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함께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릴 공방전 등 숱한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712년 존 처칠이 경질된 후 영국이 전쟁에서 이탈한 후엔 드냉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한 뒤 이제까지 확보한 요새들을 도로 내주고 플랑드르로 철수한 뒤 프랑스군과 대치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이런 업적 때문인지 그 나폴레옹 1세조차 '내 승리의 비결은 별 게 없다.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세, 구스타프 2세, 사부아 공자 외젠, 튀렌 자작[4](의 전쟁기록)을 읽고 또 읽을 뿐.'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할 정도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게 늙어 죽을 때까지 거의 노인학대를 당하면서 오랫동안 복무했는데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아서 그가 하사받은 많은 재산과 그 돈으로 지은 건축물은 고스란히 오스트리아에 남았다. 특히, 그의 소유물이었던 벨베데레 궁전과 그 안에 있는 미술품 컬렉션은 비엔나 필수 관광코스에 들어가는 명물이다. 어릴 적엔 동성애 취향소리도 나왔는데 군인이고 신분에 맞는 결혼 상대를 고르긴 어려워서 못 간듯 하다. 물론 죽기전 20여 년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여성과 동거하며 부부처럼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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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결국 후손없이 사망해서 친척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상속자가 바로 수도원에서 늙어가고 있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공주였다. 그녀는 사부아수아송 백작 루트비히 토마스의 딸이었다. 젊은 시기엔 나름 부유하게 살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집안이 망하면서 빈곤에 허덕였고, 아무도 빈털털이 신세인 그녀와 결혼하려 하지 않자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삼촌 외젠이 사망하면서 52세의 나이에 돌연 외젠이 남긴 200만 점에 달하는 유물과 성들을 비롯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에 그녀는 수도원 생활을 포기했고 1738년 4월 17일에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작 요제프 프리드리히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물려받은 재산을 마음껏 탕진했다가 1752년 남편에게 버림받았고, 결국 1763년 11월에 80세의 나이로 토리노에서 가난에 허덕인 채 사망했다. 궁이나 기타 외젠의 재산들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여인으로부터 사들여 보존하고 있다.
참고로 프린스 칭호 때문에 왕자로 착각하거나 공작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통치가문의 후손의 특권으로 쓰는 호칭일뿐 작위는 아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사부아 공작(Duke of Savoy)의 4대손이기에 공자(公子)로 쓰는것이 맞을듯 하다.
현재 그의 궁이었던 벨베데레 궁전에 가보면 그의 초상화가 벽면 가득 차지하고 있는데 나름의 미화를 거친 후인데도 잘생겼다는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위인이기 때문에 평가가 좋다고. 그 곳에서는 오이겐 공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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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 목록



5. 매체


엠파이어: 토탈 워 오스트리아 팩션의 주력 장군으로 나온다. 문명 4문명 5에서도 '사보이아의 외젠'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장군으로 나온다.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합작 TV 드라마 <마리아 테레지아>에서도 등장한다.[5] 여기서는 '호프부르크 궁전보다 벨베데레 궁전이 더 크다'는 언급이 나오면서 그가 오스트리아 황궁의 실세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중에는 '여자가 왕이 되면 이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마리아의 계승을 반대하고 로트링겐 공과의 결혼을 무산시키려는 악역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그의 생각은 상당부분 현실화됐고 마리아에게 진짜 능력 있는 충신인 킨스키를 찾아가라고 조언하는 등 진심으로 오스트리아의 미래를 걱정한 충신이다.

6. 기타


마리아 테레지아의 혼인 상대로 프리드리히 2세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적 문제로 인하여 진지하게 논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6]
독일어권에서는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나치 독일 크릭스마리네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그 외에 1차 세계대전 영국 모니터함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테게토프급 전함 2번함에도,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해군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세리에 콰트로(Quattro)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두카 다오스타급 2번함 이름으로도 쓰였다.(이때는 이탈리아식으로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선정한 명장 100위에도 포함 되었다.
[1] 훗날 이탈리아 왕국 통치 왕가인 사보이 왕가이다.[2] 같은 시기 라이벌인 프랑스 왕국이 라인강 방면으로 진출해서 한뼘만한 땅을 얻기 위해 무지막지한 저항에 부딪치는 동안 합스부르크는 이 양반 덕분에 거의 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통째로 얻었다(...)[3] 당시 사보이 공작이 외젠의 6촌이었다.[4] 이상 나폴레옹 1세가 꼽은 7대 명장 [5] 참고로 이 드라마는 체코에서 시청률 40%를 넘었다고 한다.[6] 만에 하나라도 둘이 혼인하면서 '''합스부르크-호엔촐레른 왕가(...)'''가 탄생했다면 프랑스보다 더한, 유럽 각국의 공공의 적이 됐을 수도 있다. 유럽에서 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군대와 그 운영체계를 가진 프로이센과 물량이 받쳐주는 오스트리아가 뭉쳤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