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
1. 개요
편강렬은 구한말 ~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892년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마을에서 태어난 편강렬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그만두고 '토왜복수'를 외치며 16세에 이강년의 의병대에 들어간다. 거기서 선봉대장을 맡은 편강렬은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다. 1년 후 전국의 의병들이 모여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편강렬도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후 편강렬은 신민회에 가입한다. 황해도 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105인 사건이 일어났고, 거기에 휘말려 2년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편강렬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출옥 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소수의 결사대로 항일운동을 벌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편강렬도 동료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여 3월 15일부터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그 계기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생 편덕렬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파견했으며, 구월산 주비대를 조직하여 황해도에서의 독립운동 지원과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활동한다. 그러나 일제가 이 사실을 알고 비상경계령을 내려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여 편강렬은 다시 체포당해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2]
다시 출옥한 편강렬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 와중에 가족들은 흩어지고 운영하던 점포도 채권자에게 넘어가 기반이 아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한번 기반을 다지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양기탁, 강진지, 남정 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해 단장이 된다. 의성단은 무장 독립 투쟁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 단원을 모아 무장하고 국내에 진입할 계획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24년 250명의 단원이 모인 의성단은 창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60여명의 일본 경찰들과 군인을 살상하는 전과를 세운다. 그리고 만철병원을 습격하고, 7명의 단원을 이끌고 펑톈에서 시가전을 벌인다.
이 일이 알려지자 일제는 의성단 토벌을 제1급 사건으로 두고 진압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편강렬은 유유히 빠져나가고 '아사홍행 아생홍사'라는 조롱의 글귀를 남긴다.[3]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으며, 편강렬은 이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1924년 7월에는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논의하고, 1924년 8월[4] 1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군자금을 모집 겸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한 '통일회'를 조직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다. 그러나 이를 파악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결국 체포당하고 만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끌려가고 1925년 3월 30일 7년형을 선고받고 다시한번 각종 고문을 당한다. 재판장에서 대소를 하는 등 정신은 굴하지 않던 편강렬이지만 2년여간의 혹독한 고문과 수감생활에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1926년 9월 29일 엉망진창인 몸을 이끌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자 가난한 생활에 병원에 더는 입원할 수 없었던 편강렬은 다시 만주로 이동한다.
가족들은 일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자고 하였으나 편강렬은 왜놈에게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끝내 거부한다. 그 후 1929년 1월 16일 만주 땅에 묻되 광복 이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3. 기타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다.
1926년 9월 26일 동아일보자에 그가 옥중에서 쓴 시가 남아있다.
양양한 압록강수 밤낮으로 흘너가는 곳 어데이뇨
유유한 나의 심사
너를 따라 거지업다
외외한 금수봉아
흘립천장 놉히서기
깁흔 담장안 너 그러워
탄식하는 너의 녯 주인
창공에 밝아 잇는 저 명월
아- 누구를 위하여서!
교교히 벗치엿는 창공에
깁흔 한은
망국혼이 늑기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버서라
사랑하는 너를 질길소냐?
4.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3~2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