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세미노비치 살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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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군 원수. 7년 전쟁 시기 카이 전투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섬멸시켰다.
2. 일생
살티코프는 1700년 경 러시아 남서부의 니콜스코예 마을에서 세묜 안드레예비치 살티코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첫 애인인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살티코프의 먼 사촌이며 안나 이바노브나와도 혈통이 이어졌다. 그는 1714년에 프랑스로 가서 1733년까지 해군 훈련을 받았고 1733년에 귀국한 뒤 백작 작위를 부여받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1759년 우유부단한 행보로 일관하던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가 총사령관 직책에서 경질된 뒤 새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살티코프는 5만여 군대를 이끌고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하여 7월 23일 카이 전투에서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29,400명을 격파했다. 그리고 8월 초에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18,500명과 합세했으며 8월 12일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 5만여 명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자살이나 퇴위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지경에 몰렸다. 그러나 살티코프는 17,700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를 입은 데다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다가 라우돈 남작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더이상 공세를 가하지 않고 폴란드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후 그는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로로 원수에 임명되었다.
1760년 총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난 살티코프는 1763년 5월 15일 모스크바 방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771년 9월, 그는 모스크바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자신의 영지인 마피노로 피신해버렸고, 그가 없는 동안 9월 16일 모스카바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격노한 예카테리나 2세는 그해 11월 13일 그를 경질시켰다. 이후 1772년 1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