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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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7년 전쟁
2.3. 전쟁 이후


1. 개요


러시아군 원수. 7년 전쟁 시기 프리드리히 대왕조른도르프 전투에서 격돌한 인물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페르모르는 1704년 9월 28일 프스코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코틀랜드와 독일계 리보니아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1720년에 러시아군에 입대했고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 뮈니히 장군의 부관으로서 단치히 공방전에 참가해 두각을 드러냈다. 또한 1736년부터 173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역시 뮈니히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활동했고, 1740년에 비브로그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741년부터 1743년까지 핀란드에서 스웨덴군을 상대로 한 모든 군사 작전에 참가했다. 1746년, 페르모르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그는 건설 위원회 의장 직을 맡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궁 건설을 지휘했다. 1751년, 페르모르는 핀란드군 사령관이 되어 노브고로드 정부의 군사 집무를 수행했다.

2.2.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페르모르는 스테판 표드로비치 아프락신 원수 휘하의 군단장으로 배치되었다. 1757년 8월 30일, 페르모르는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에서 제1 사단을 이끌고 아군을 습격한 프로이센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10월 28일 아프락신 원수가 옐리자베타 여제의 허락 없이 멋대로 철수해 버린 죄로 경질되자, 페르모르는 그를 대신해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758년 초, 페르모르는 동프로이센 침공을 개시했다. 그해 3월 엘빙(현재 엘블롱)과 또온(현재 토룬)을 공략한 그는 그 공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제국 백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후 동프로이센의 총독으로 임명된 페르모르는 그해 7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브란덴부르크로 진군했고 8월에 쿠스트린을 포위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후방으로 접근해오자, 페르모르는 포위를 풀고 쿠스트린에서 10km 동남쪽으로 떨어진 조른도르프로 가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했다.
그해 8월 25일, 페르모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과 조른도르프 전투를 치렀다. 페르모르는 이 전투에서 경직된 지휘로 일관했으며 도중에 후방으로 달아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전선에 복귀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18,500명에 달했고 2,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12,800명을 상실해 전체 전력의 1/3 이상을 손실했다. 페르모르는 전투가 끝난 후 폴란드로 철수했고,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큰 피해를 안긴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페르모르는 1759년 전역에서 이렇다할 공세 작전을 감행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다 원수 직책을 박탈당하고 장군으로 강등되었고 러시아군의 전반적인 지휘관을 표트르 세미노비치 살티코프에게 양도했다. 그해 7월 27일, 페르모르는 카이 전투에서 중앙 보병 제1 전선을 지휘했으며 8월 12일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도 중앙의 보병 제1 전선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1760년 살티코프가 총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난후, 페르모르는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부울린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잠시 총사령관의 역할을 맡았다.

2.3. 전쟁 이후


7년 전쟁이 끝난 후, 페르모르는 스몰렌스크 총독을 역임했으며 1764년엔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768년, 그는 정계를 떠나 자신의 소유지에 은거했고 1771년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