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기조
1. 개요
프랑수아 기조는 프랑스 19세기 정치인이자 역사가이다. 1836년부터는 프랑스 최고 문호들의 모임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멤버였다.
2. 생애
님의 신교도 (칼뱅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부친 앙드레는 변호사였고 1794년 프랑스 혁명이후 공포정치 때 지롱드 당을 지지해 산악파에게 숙청당했다. 루이필리프 치하의 7월 왕정때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었고, 이후 1840년부터 1848년까지 국무총리직(Chef du gouvernement)을 맡았었다. 복고왕정 때는 공화주의자 의원으로써 샤를 10세의 정치에 반대하는 의원들과 함께 221의원들의 청원서 (Adresse des 221)을 작성했었고, 7월 혁명을 주도했다. 하지만 새로 수립된 7월 왕정에서는 온건 공화파(Résistance)로 분류되어 진보공화파와 (Mouvement) 사회주의자들의 진보적 요구사항들을 묵살했다. 진보공화파들은 보유재산으로 제한되어 있던 선거인단을 늘릴 것을 요구했으나 기조 내각은 이를 거부했고, 2월 혁명에 불을 붙인다.
3. 정치적 사상
기조는 예나 지금이나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반동적인 정치를 도입한 인물로 기억된다. 비록 7월 혁명을 이끌고 샤를 10세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인권의 보호자로써 자처했었으나, 총리로 임명된 1840년 이후부터는 결정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여러분의 권리를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시고, 스스로의 삶을 윤택하게 하시고, 함께 프랑스를 더욱 도덕적인 나라로 만듭시다. (1843년 3월 2일)
그는 위계가 확실하나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갈망했다. 그는 중산층[1] 이 안정적인 사회적/경제적 발판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기조는 귀족들이나 태생의 혜택을 받는 이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반대하는 실력본위주의자인 점과, 본인 또한 칼뱅주의 부르주아 계층의 집안 출신인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7월 왕정 교육부 장관 시절 빈민층에게 무상 초등교육을 지원하는 기조 법(1833년 6월 28일)을 통과시켜, 사회적 유동성을 장려하고, 소수에 불과했던 중산층의 형성을 공고히 해 이들을 7월 왕정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이렇게 형성되고, 민주주의와 같은 이념에 적대적인 중산층에 의해 선출된 엘리트가 움직이는 정부를 이상적인 정부라 여겼다. 왕권신수설이나 국민 주권의 국가가 아닌 이성에 의해 제어되는, "이성 주권 (Souveraineté de la raison)의 나라"를 모토로 삼았다. 왕 루이필리프는 기조와 이런 정치관을 공유했고, 반대파는 기조가 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업신여겼다.
4. 평가
아돌프 티에르에 비해서는 반대파를 다루는 능숙함이 떨어지고, 몰레에 비해서는 유연함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본인이 정립한 독트리네르 (Doctrinaires) 사상의 창시자이자 이를 적용하는데 선두에 선 실행자였으나, 신념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수구적인 정치의 아이콘으로 전락했다. 특히 후대의 평가가 박했는데, 후대 정치인들은 그를 "파렴치한 물질주의자"라고 경멸조로 부르기 일쑤였다. 그가 동시대 정치인들에 비해 포용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나, 뚜렷한 윤리관을 지닌 청렴한 칼뱅주의자였으니,반대파들의 이런 비난은 정확하지 않다. 반대파의 이런 발언은 기조 본인의 청렴함이랑은 무관하게 부패했던 그의 내각인사들에 근거한다. 기조의 성격 또한 그의 청렴함만큼 무미건조했고, 정책 도입의 효율을 중시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의도치 않게 동료 정치인들로부터 사람이 차갑고, 인간적이지 못하고, 권위주의적이라는 오명을 샀다.
[1] 현대적인 의미의 중산층, 즉 급여를 받는 샐러리맨이나 자영업자들이 아닌 상당한 부를 축적한 계층을 칭하는, 소위 부르주아 계층에 더욱 가까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