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필리프
1. 개요
프랑스의 마지막 왕.[1]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왕조[2] 의 왕이며,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조제프의 아들이다. 루이 13세의 6대손으로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5대손이다.[3] 오를레앙 왕조는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 부르봉 직계 후손이 끊긴 후에는 방계 가문 중 최선임 가문으로 프랑스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다. 사실 족보상으로는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형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펠리페 5세의 후손들인 보르본 왕조가 부르봉 종가가 되어야겠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 자격을 포기했기 때문에 해당사항에 없었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자손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는 루이 14세와 정부 몽테스팡 후작 부인 사이의 사생아 루이 알렉상드르의 손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빠가 20세에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루이필리프 도를레앙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773년에 출생하였다. 태어나면서 발루아의 공작(duc de Valois) 작위를 받았고, 이어 샤르트르의 공작(duc de Chartres) 작위를 받았다.
2.2. 혁명 시대
아버지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를 따라 그 아들인 루이 역시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파로 가담했다.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가 스스로 귀족임을 부정하고 '평등한 자(에갈리테)'를 자칭하자, 아들인 루이필리프 역시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 에갈리테 피스)'이라 불리게 된다.
혁명 프랑스 공화국에서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1790년에는 자코뱅 당에 들어가기도 했다.
2.3. 망명 시대
1792년,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당하자, 1793년에 스위스로 망명한다. 지리학, 수학, 현대문학 교사를 하면서 박봉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17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1795년에서 1796년에는 북유럽, 1797년에서 1799년 동안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망명했다. 1801년에서 1807년까지는 영국 런던 교외에서 살았다.
망명 시대의 루이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친척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왕위와 권력을 노린 아버지와 함께 혁명에 가담했고 심지어 아버지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다른 부르봉 왕가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부르봉 가문에서는 오를레앙 가문을 종가[4] 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망명 생활 중 나폴리의 공주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했는데 문제는 아말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5] 의 언니로 그것도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는 데 있었다. 여동생이 처형되자 당시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평생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했던 카롤리나는 여동생의 원수의 아들[6] 과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2.4. 귀국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퇴위하고 나서야 루이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왕정 복고로 프랑스 혁명으로 재산을 잃은 귀족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다. 루이필리프는 이 법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대대로 물려받아 오던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의 작위와 많은 재산을 되찾고, 아버지의 저택이던 팔레 루아얄까지 다시 얻었다.
혁명에 가담했으면서도 아버지의 쿠데타 음모 때문에 망명까지 했으나, 루이필리프의 성향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후원하고 왕정 복고와 함께 혁명 이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는 복고주의에 반대하였다. 대귀족임에도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했으며, 자신의 자녀들 역시 일반 고등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처신 덕분에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 동안 루이필리프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높아졌고, 인기를 바탕으로 그는 샤를 10세로부터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2.5. 즉위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이 발발하여 복고 왕정은 무너져 내렸다. 샤를 10세는 퇴위하는 한편 손자 앙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프랑스 하원은 샤를 10세의 퇴위만 받아들이고 대신 루이필리프를 왕으로 선포하여 7월 왕정이 수립된다. 이때, 이전부터 쓰던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이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의회로부터 왕위를 받은 루이필리프는 스스로 시민들에게 옹립되었다 하여 '시민왕'을 자처했으며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의 즉위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각국의 군주들은 '폭동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즉위 과정에서 있었던 1832년 6월 봉기는 레 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유명한 그 혁명이다.
2.6. 치세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진행하였다. 1830년에 알제리에 출병하여 알제리를 병합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1831년 프랑스 외인부대를 만들게 된다.
멕시코에 압력을 걸고, 아편전쟁으로 굴복당한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포함외교를 걸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를 점령했다.
그리고 '''조선'''에도 간섭하려 한 적이 있다. 1846년과 1847년(헌종 13년)에 걸쳐서 루이필리프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을 시켜 프랑스 해군을 보내 기해박해에서 프랑스 신부들을 죽인 일을 항의하고 조선을 개항하려 했었다. 이는 불과 십수년 후에 일본에서 벌어진 쿠로후네 사건과 매우 흡사했다. 그런데 되레 프랑스 해군 함정들이 죄다 암초에 좌초, 수백의 승조원들은 충청도에 고립된 채 떨고 있다가 상하이에서 빌린 배를 타고 돌아갔다. 자세한 것은 쿠로후네 사건 문서 참고.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도입했으며, 귀족의 세습 제도를 폐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루이필리프는 망명 생활 도중 영국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1840년엔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무덤을 지금의 앵발리드로 이전케 하였다.(Retour des cendres) 자신이 이전 부르봉 왕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라 평가되고 있다. 이 대형 이벤트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몇 년을 다룬 영-프 합작영화 <Monsieur N>(2003)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심 나폴레옹을 불편히 여기고 이장을 주저했던 왕정은 나폴레옹의 관과 이를 보기 원하는 민중을 기피했다. (영화 <Monsieur N>과 달리) 실제 관은 커다란 영구차에 숨겼고, 파리를 제외한 도시는 모두 피했으며, 앵발리드의 예식에는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했다. 그나마도 왕정쪽 정치인들은 굉장히 산만하고 무성의한 분위기였다고.
이에 반해 민중은 프랑스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이 옛 군복을 꺼내입어 황제를 맞았고 구경꾼도 40만이나 밀집하였다. 그들은 제1제정에 대한 향수를 자극받았으며, '순교자 황제'에게 무례히 구는 왕정에 분노했다. 왕실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꾸민 이벤트는 역으로 왕정과 민중의 단절만 드러냈다. 이는 왕정의 권위를 상처 입히고 나폴레옹 신화를 강화한다.
2.7. 퇴위
1848년, 공화파들의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퇴위하였다. 그 뒤에 샤를루이나폴레옹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1852년 쿠데타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루이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마지막 군주이자 황제는 나폴레옹 3세.)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클레어몬트에서 지내다가 1850년 8월 26일 사망했으며 클레어몬트에 묻혔다.
이후 그의 자손 장 도를레앙이 현재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수장으로 정통 후계자로서 장 4세를 칭하고 있지만 왕정복고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3. 평가
비만과 여러 성인병에 시달리고 리더쉽의 부족으로 비판받았던 루이 18세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극단 왕정주의적 (Ultraroyaliste) 포지션을 고수했던 전대 왕 샤를 10세에 비하면, 제법 정세도 읽을 줄 알고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던 왕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프랑스 국민들을 데리고 난세에 18년이라는 독보적으로 긴 기간 동안 군림했으니, 군주로써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7월 혁명 이후, 공화주의라는 엄연한 대안이 있는 상황에서 루이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그가 상당히 인기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1. 치세에 대한 평가
오를레앙 가문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은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부터 있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이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호감을 느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얼마나 그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오를레앙 공작가는 앙시앵 레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대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기묘한 전략을 유지했다. 아무튼 정통 부르봉 왕가에 대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전략적인 입장도 있었던 듯.
조상의 생각처럼 앙시앵 레짐 문제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에 대한 루이필리프의 대안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프랑스에 이식하자는 것이었다. 이 '오를레앙 공에 의한 입헌군주정'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 시기 하나의 대안으로서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 복고 왕정 시대부터 오를레앙 가문 지지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자였다. 사실 부르봉 복고 왕정의 첫 국왕인 루이 18세의 경우 입헌파를 밀어주고 왕당파를 내각에서 배제하는 등 꽤 중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7] 다음 왕인 샤를 10세는 구체제에 가까운 면모를 보였기에 여러모로 자유주의와 맞지 않았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나파르티즘은 "민주주의를 내거는 권위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8] 그러므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를레앙 공이 이상적인 정부를 만들어, 질서를 지키는 한편 관용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중도적인 대안이었다.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입헌군주정 공화제를 선호하였으나 그 반면에 전면적인 민주주의 도입은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골수 왕당파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부르봉 왕조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공화정 정부는 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왕당파의 폭발을 막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모순을 지속적으로 안고 있었다. 또한 소위 '프랑스의 영광'을 건설한 나폴레옹 신화에 기초한 나폴레옹 지지자, 보나파르티즘 역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 체계에서는 막기 어려웠다. 실제로 후일 보나파르티즘을 내세운 나폴레옹 3세는 7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론적으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법정 인구(pays legal)' 25만명(실제 유권자는 17만명 정도)을 유권자로 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국정에 적용했다. 이들은 중산층의 대표자인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구에서 빠진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가 특권 계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의 왕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루이필리프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이념들 가운데서 나름대로 '중도주의'의 위치에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주의보다는 한 발자국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이기는 했지만, 루이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골수 왕당파에게는 찬탈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외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보여져 '폭동왕'이라고 폄하당했다.[9]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후손으로 프랑스의 최고 적통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루이필리프를 매우 증오해서 망명 시절 만나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헌왕정을 지지한 중도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완전한 공화정을 추구하는 진성 공화파, 프랑스 제1제국을 지지한 보나파르트파는 각기 자기네 꿍꿍이대로 왕정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
3.2. 인간적인 면모
치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루이필리프 본인은 선량하고 너그러운 문자 그대로의 신사였다. 루이필리프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 뭐 '왕으로 모시자'고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있을 정도이니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매력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도 루이필리프를 높게 평가했다.
그의 두상이 서양배와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의 문장도 배라고 조롱했지만 루이필리프는 대범하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얼마나 대범한지 서양배 머리의 왕을 그린 만평도 나돌아도 멀쩡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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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평. 배머리로 데포르메되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심지어 궁궐 벽에 배를 그리면서 왕을 조롱하는 부랑아들과 같이 배를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금화까지 쥐어주면서 '''이 금화에도 배가 새겨져 있다'''고 농담까지 해주었다.[10]
그의 대인배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일화로 왕을 몰아내려던 1832년 봉기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에 파리의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 반역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재미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루이필리프는 살려고 의사들을 찾아간 환자들을 의사 손으로 단두대에 보내는 그따위 비인도적인 처사가 어디 있느냐며 반역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전의 부르봉 왕조의 국왕들과는 다르게 사생활이 깨끗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애인이나 총희를 둔 바도 없으며 항상 자신의 아내하고만 잤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를 자랑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을 초대해 자신의 침실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1835년에는 나폴레옹 제국의 병사였다가 전역 이후에 생활고 때문에 각종 절도 행각을 벌여 10년을 복역한 코르시카 출신의 주세페 마리오 피에스키란 사람이 가석방 후에도 계속되는 감시와 생활고 때문에 분노하여 루이필리프와 정부 각료들에게 특수제작된 25개의 총신이 달린 총을 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국왕이 부상당했고 왕의 말이 죽었으며 에두아르 모르티에 원수를 비롯하여 17명의 고관이 살해당했다. 물론 피에스키는 체포되었고 이후 처형되었지만 사건 당시 루이필리프는 자신도 이마에 총알이 스쳐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피에스키의 사정을 듣고 몹시 가슴아파하며 '''나 하나만 다쳤다면 사면을 해줬을 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4.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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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 1782년 4월 26일 ~ 1866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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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페르디낭 필리프 : 1810년 9월 3일 ~ 1842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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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루이즈 : 1812년 4월 3일 ~ 1850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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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마리 : 1813년 4월 12일 ~ 1839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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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루이 : 1814년 10월 25일 ~ 1896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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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녀 프랑수아즈 : 1816년 3월 26일 ~ 1818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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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녀 클레멘틴 : 1817년 3월 6일 ~ 1907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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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프랑수아 : 1818년 8월 14일 ~ 1900년 6월 16일
프랑스 해군에 투신해 해군 대장까지 진급한 제독으로, 아버지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후 37년간 1886년까지 복무했다. 미합중국 해군사관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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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 샤를 : 1820년 1월 1일 ~ 1828년 7월 25일 - 왕위요구자인 앙리 5세가 동갑이자 15촌 조카이다. 참고로 모계로 보면 샤를의 어머니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앙리 5세의 어머니인 카롤리네의 고모니 5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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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 앙리 : 1822년 1월 16일 ~ 1897년 5월 7일. 콩데 공작 루이 앙리 드 부르봉[11] 이 죽은 후 콩데 가의 상속자로 지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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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 앙투안 : 1824년 7월 31일 ~ 1890년 2월 4일. 이사벨 2세의 여동생에게 장가가서 에스파냐의 갈레리아 가 창설. 참고로 두 부부는 모계로 보면 5촌, 부계로 보면 14촌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7대손인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은 장 4세라 칭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고 있다.
[1] 마지막 '''군주'''는 황제 나폴레옹 3세이다.[2]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 루이필리프의 1대 왕조[3]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의 장남이다.[4] 부르봉 직계가 단절된 이후로 살리카 법 원칙상으로는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의 일원인 루이스가 루이 20세로 자칭하며 종가라고 주장하고 있다.[5] 독일어식으로는 마리아 안토니아.[6]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평등한 필리프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왕실 가족의 처형에 일조했다.[7] 하원은 소선구제였기에 당연히 왕당파로 도배되었으나, 상원은 왕이 임명하는 세습직임에도 불구하고 옛 귀족보다는 나폴레옹의 옛 관료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즉 루이 18세는 민중의 의지에 반대해서까지 의도적으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심지어 열받은 왕당파 쪽에서 왕은 의회 다수파에게 내각 구성을 위임해야 한다며 의회주권론을 주장하고, 이에 당황한 입헌파는 왕은 헌장에 위배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8] 물론 백일천하 시기 나폴레옹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인 '자유제정' 때문에 보나파르티즘도 어느 정도 인기는 있었다.[9] 사실 이는 당연한데, 후대의 빌헬름 1세도 범게르만주의에 입각해서 ‘아랫것들’이 바치는 독일 제국 황제 직위에 기겁을 하며 받기를 거부했었다.[10] 당시 프랑스 동전엔 여느 유럽 군주국들이 그렇듯 재위중인 군주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11] 망명자 군대를 만든 루이 조제프 드 콩데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