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코렐리

 

1. 개요
2. 생애
3. 트리비아


1. 개요


Franco Corelli
1921년 4월 8일(이탈리나 앙코나) ~ 2003년 10월 19일(이탈리아 밀라노)
마리오 델 모나코와 그 시절 쌍벽을 이뤘던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스핀토 or 드라마틱 테너.
184cm의 위너였으며 늘씬하고 잘생긴 사기캐이자 단 한순간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천재+노력파로, 압도적이고 시원시원한 고음에서는 소름이 안돋고 배길수가 없었다

2. 생애


그의 집안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직계부모만 그러하고 친할아버지가 성악가 였고 친형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바리톤이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며 삼촌 두명이 전문적인 가수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배를 건조 하는 사람이였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코렐리는 직업을 갖기 위해 볼로냐 대학에서 해상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음악과 성악을 공부하여 콩쿨에 나가보지만 탈락한다.
그래도 심사위원들이 성악공부는 계속해 보라고 독려하여 형처럼 대학을 때려치우고 페사로 음악원에 들어가 성악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험난한 그의 발성탐구여정이 시작되는데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가 가르침하에 망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독학하기 시작하고 성악교사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니 성악가에겐 질병이니란 표현을 써댄걸 보면 어지간히 열받았던 모양. 독학하면서 당시 이름을 날리던 멜료끼 창법을 배운 학생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멜료끼 창법을 전수받았고 멜료끼로부터도 직접 몇번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가수들의 앨범을 듣고 따라하고 연구하면서 자신만의 창법을 확립했고 결국 콩쿨에 나가 우승하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30세였다.
1951년 여름 30세의 늦은 나이에 피렌체 극장에서 주관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그해 가을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하게 된다. 원래는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으로 데뷔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석달간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해당 배역을 리허설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비제의 카르멘의 돈 호세 역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지방 극장에서 출연하며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로마에서 데뷔했고 1953년부터 로마 극장의 주역 테너로 계약하여 1958년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에 데뷔하였고 이후 스칼라에서 여러 역할을 섭렵했다.
또한 빠르게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1957년 빈 국립 가극장에 아이다 라다메스 역으로 데뷔했고, 같은 해에 토스카 카라바도시 역으로 런던 로열 코벤트 가든에도 데뷔하면서 유럽의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 연이어 데뷔했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의 시카고 리릭 오페라와 샌 프란시스코 오페라에도 초청되어 미국에 데뷔했다.
1961년 1월 일 트로바토레 만리코 역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이후 그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1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1962년에는 라 스칼라 무대에 다시 섰고, 카라얀의 부름을 받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일 트로바토레 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활동무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중심으로 인근 미국 동부의 필라델리아, 보스턴 등으로 좁혀지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 관리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이었던 만큼 대서양을 오가며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보다 한 곳에 정착하며 컨디션을 유지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60년대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위주로 활동 반경을 줄였기 때문에 의외로 음반 녹음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60년대에 스테레오 녹음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오페라 분야의 음반 녹음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녹음은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가수들은 화려했지만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고, CBS, RCA[1] 등 미국의 메이저 음반사들이 오페라 녹음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많은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2] 실제로 60년대 그가 남긴 음반은 가끔 유럽에 갔을 때 이루어진 것이 많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수많은 공연에 출연했으며, 1974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이따금씩 콘서트, 리싸이틀을 가졌다.
또한 은퇴 뒤에는 뉴욕에서 성악 교사로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정작 코렐리 본인은 성악 선생들을 경멸했고 주로 독학으로 스스로 연습하고 터득했던 점과 비교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3. 트리비아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평하기로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고 데뷔할 때는 목소리가 좀흔들리는 편이였으나 단 한순간도 더 나아지는 것을 멈추지 않아 위대한 테너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천부적인 실력과 남자남자 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무대공포증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무대 오르기 직전에 보면 스태프가 그를 강제로 무대로 밀어버리거나
그의 아내가 계속 달래가면서 할 수 있다며 한참을 응원해 주어야 겨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며
지휘자에게 요구하는 디테일한 사항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무대에 오를때마다 항상 전 공연을 녹음해서 공연을 마치고 난 뒤 지치고 힘들어도
꼬박꼬박 챙겨들었는데 소리가 잘 나왔으면 기뻐서 잠을 못자고 소리가 안좋으면 우울해서 잠을 못이뤘다고 한다

[1] RCA는 자체 오페라 녹음을 추진하는 대신 DECCA와 제휴하여 데카가 녹음한 오페라 음반들을 미국에서 RCA 마크를 박고 출시했다.[2] 1970년대 이후 제임스 레바인이 나타나 메트 오케스트라를 집중 조련하여 메트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어 1980년대 후반 이후 들을 만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