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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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중년 시절
1. 소개
2. 생애
2.1. 소꿉친구 미렐라 프레니
2.2. 쓰리테너 콘서트
2.3. 사망
2.4. 스캔들
3. 평가
4. 음악적 성향
5. 명반과 영상물
6. 여담
6.1. 한국과의 인연
7. 이름


루치아노 파바로티 주연의 영화 '죠르지오의 사랑(1982)'의 엔딩부를 장식한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1]

1. 소개


'''Luciano Pavarotti'''[2] 1935년 10월 12일 ~ 2007년 9월 6일
이탈리아 모데나 출생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 3대 테너(The Three Tenors)라고 불렸다. 파바로티 사후에는 남은 도밍고와 카레라스에게는 더 이상 그러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남녀 성부(part, 聲部) 통틀어, 그 유명한 엔리코 카루소 이후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악가이다. 그가 불렀던 '네순 도르마'[3]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있고, 워낙 목청도 크고 빼어난 고음으로 유명했던 데다가 특유의 친근한 인간미도 한몫 했기 때문이다.
음반도 많이 남겼으며, 대부분 데카에서 녹음[4]했다. 미렐라 프레니, 조앤 서덜랜드, 몽셰라 카바예와 커플로 이뤄진 것이 많고, 대부분 좋은 평을 받는다.

2. 생애



2.1. 소꿉친구 미렐라 프레니


그는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형제가 없어 외롭게 자랄 것 같지만 외롭지 않게 자랐는데, 미렐라 프레니 문서에서도 얘기했지만,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프레니와 같은 모데나 출신이며, 둘은 소꿉친구 관계에,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자란 젖남매 간이다.[5] 후에 프레니의 모친이 되는 잔나 아르첼리(Gianna Arcelli)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고, 부친 엔니오 프레니(Ennio Fregni)는 이발사의 조수라는 별볼일 없는 직업을 가진 남자였다. 잔나 아르첼리가 프레니를 낳게된 것은 1935년 2월 27일. 아이를 낳은 잔나 아르첼리는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으려다 우연히 담배공장에서 겨우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공장에서 아르첼리는 아델레 파바로티(Adele Pavarotti)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저절로 친해졌다. 하지만, 아르첼리는 일 때문에 너무 바쁜 나머지 딸내미 프레니에게 젖을 먹여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유모에게 갓난아기였던 프레니를 맡기게 되고, 프레니는 그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된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면서 아이를 보육원이나 동네에 사는 유모에게 맡기는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흔한 현상이었는데, 이는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추구했던 복지 정책 중 하나였다.
그리고, 프레니가 태어난 같은 해에 아델레 파바로티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때는 10월 12일,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탄생이었다. 파바로티 역시 프레니와 같은 유모에게 맡겨졌고, 둘은 그 유모의 젖을 먹고 같이 자라게 된다. 어린 시절 같은 스승에게 성악을 입문한 둘은 훗날 세계적인 성악가로 거듭난 뒤에도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라 보엠에서의 호흡은 역대 최고의 미미와 로돌포라는 찬사를 받는다. 라보엠은 프레니와 파바로티가 가장 선호하는 레퍼토리[6]인데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였으니 환상의 조합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고 파바로티와 프레니가 출연한 음반은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2.2. 쓰리테너 콘서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에게 '''세계 3대 테너'''라는 별명을 준 콘서트다. 1988년 백혈병을 완치한 카레라스가 자신이 설립한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좋은 호응을 얻었다. 도밍고와 파바로티는 카레라스의 재기를 기념하는 목적으로 다시 공연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전야제날,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 유적에서 주빈 메타의 지휘로 공연을 갖는다. 세계 최정상의 테너 셋이 모인 이 공연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데카에서 출시한 공연 음반은 클래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다.

이후 월드컵 전야제마다 공연을 열게 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다시 주빈 메타의 지휘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열렸고 보다 이벤트 성향이 강해지며 인기를 얻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파리에서 월드컵 전야제를 기념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공동개최를 기념하여 2001년 6월 22일에 서울에서, 2002년 전야제 날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연을 갖는다. 다시 의기투합하여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공연을 열 것임을 선언했지만, 2006년에 파바로티에게 췌장암이 발병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 쓰리 테너 콘서트는 2005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있었다.
수많은 비평가들에게 쓰리 테너 콘서트는 '''하나의 성대한 쇼에 불과하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지만, 쓰리 테너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쓰리 테너 콘서트를 통해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쓰리 테너 콘서트는 하락세를 타던 클래식 음반 판매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쓰리 테너 콘서트를 모방한 공연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성이 증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쓰리 테너 콘서트가 비록 성대한 쇼에 불과한 콘서트라는 평은 있을 지언정 많은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인 '일부 계층만이 향유하는 고상한 취미'라는 인식으로 인한 진입 장벽을 허물고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사랑 받는 음악으로 되돌렸다는 데 큰 공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2.3. 사망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나와 열창한 것이 마지막 무대였다. 바로 최악의 암이라는 췌장암을 앓았기 때문인데, 초기라도 완치되기가 힘든 췌장암이 이 때는 이미 말기에 달해 있었다. 때문에 제대로 공연하지 못해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항목에 나오듯이 사실은 이 무대에 나와 립싱크를 했다. [7] 그래서 수개월 후의 2006 독일 월드컵 전야제에서 쓰리테너 콘서트도 이루지 못했다. 토리노의 마지막 무대에서 파바로티가 지은 표정은 마치 머지않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리라는 것을 예감한 듯 애달프고도 섭섭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격에 찬 표정이었다.
이후 파바로티는 미국으로 가 수술을 받았지만 종양이 곳곳으로 퍼져 더는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2006년 10월 들어선 혼수상태가 찾아오고 정신도 혼미해진 채로 병실에 들어갔다가, 해를 넘기고 2007년 9월 미국에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71세.

2.4. 스캔들


1961년 9월 30일 아두아 베로니와 결혼하여 세 딸을 얻었다. 1962년에 로렌차가, 1964년에 크리스티나가, 1967년에는 막내 줄리아나가 태어났다. 하지만, 무수한 바람을 피웠고 아내인 베로니는 참았으나 2003년 12월,파바로티는 35살 연하이던 개인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염문을 뿌려 결국 이혼하고 만다. 만토바니는 쌍둥이를 낳았으나 오래가지 않아 아들은 죽고 딸인 앨리스만 살아남았다.
이때문에 파바로티가 죽자 베로니와 세 딸과 만토바니와 앨리스 사이 재산 분배로 논란이 컸다. 파바로티가 남긴 재산은 미국에 있는 1500만 달러(약 157억원)의 재산을 포함해 모두 3억 유로(약 4943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파바로티는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중 두 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첫 유언장에서는 이탈리아 법에 따라 그의 재산을 분배하되 절반은 두 번째 부인인 만토바니에게 주고, 나머지는 딸들에게 나누는 것으로 돼 있다. 다음에 작성한 유언장에는 파바로티의 미국 내 자산을 만토바니에게 주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파바로티의 친구들은 “만토바니가 유언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나기 전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며 “그런 상황을 이용해 유언장을 허위로 작성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때문에 이탈리아와 미국 경찰이 수사하는 등, 재산 분배 논란이 거셌다.

3. 평가


파바로티의 일생이 상세히 정리된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인물 파바로티편

4. 음악적 성향


흔히 파바로티 하면 1990년 로마에서의 첫 시작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공연이 있었던 일명 '쓰리 테너 콘서트'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뒤에 무대에 섰던 거대한 자선 콘서트, '파바로티와 친구들 시리즈'의 각종 영상물 속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그의 진가는 최고로 목소리가 싱싱했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에 녹음한 도니체티와 벨리니, 그리고 로시니베르디의 몇몇 작품이 속하는 벨칸토 오페라 음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당시 함께했던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그녀의 남편인 지휘자 리처드 보닝, 이 세 멤버의 드림팀이 결성된 뒤 오페라 음반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다.
이후로 목소리에 원숙미가 더해지고, 벨칸토 오페라의 영역에서 벗어나 베르디의 중후반기 오페라와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도 몇몇 작품에선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다. 파바로티의 라이벌 격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워낙 목소리 관리를 잘 한 것으로 유명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비교를 받는 측면이 있었지만, 생전에 파바로티도 이미 전성기가 지났을 나이에도 꽤나 좋은 목소릴 들려줬다고 평가 받는다.[8] 그를 대표하는 오페라로는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베르디의 <리골레토>,<가면무도회>, 푸치니의 <라 보엠> 등을 들 수 있겠다. 커리어 초기의 파바로티는 밝고 낭랑한 음색과 함께 고음을 훌륭히 소화했기 때문에 높고 어려운 음역과 기교가 난무하는 도니체티나 벨리니의 오페라가 그의 기량을 펼치기에 적합했다. 보다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표현과 가창력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들을 섭렵하게 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사실 파바로티는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 중 '사랑의 묘약 中 남몰래 흘리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라 보엠 中 그대의 찬손 (Che gelida manina)' 등으로 더 유명한데 확실히 여러 리사이틀에서 자주 불렀던 '네순 도르마'가 남긴 인상이 대중들에게는 더 컸었던 모양이다. 리릭 테너였던(Tenore Lirico/테노레 리리코) 파바로티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바로 대중들이 그의 노래를 들었을 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부르기 까다로운 고음이든 음악적인 표현을 살리기 어려운 프레이즈든 워낙 수월하게 부르는 가창력을 선보였기 때문인데 오죽하면 이것이 몇몇 성악 팬들 간의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슨 노래든 너무나 쉽게, 마치 기계마냥 부르는 것 같다고 한다. 파바로티 이전까진 보통 리릭 테너, 리리코라 하면 물론 그냥 듣기엔 좋으나 여리여리하고 예쁘기만 한 미성의 테너라는 이미지가 강했다.[9] 파바로티 역시 천부적인 미성의 소유자였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만의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쳐 노래할 때 있어 힘 있고 우렁찬 성량과 남성다운 선과 표현력을 가진, 보통의 리리코 규격 외의 테너가 될 수 있었다.[10] 덕분에 그의 목소리엔 웅장함과 더불어 아름다운 울림과 서정적인 표현력이 공존할 수 있었고, 단순히 리릭 테너의 배역에서 그치는 게 아닌 더 무겁고 많은 힘이 요구되는 스핀토와 드라마티코의 배역도 소화할 수 있었다. 소릴 여리게 내야 하는 부분은 여리게 표현하고, 강하게 내야 하는 부분은 강하게 표현 해주는 그런 것에 있어서 그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기 파바로티와 친구들에서 다른 가수와 함께 할때 어느 장르를 부르든 간에 매우 자연스럽게 들린다.
다만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계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프랑스어로 된 오페라 전곡 녹음으로는 연대의 딸이 유일하고, 독일 쪽 오페라는 아예 전멸이다.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 이도메네오란 작품을 연주한 적이 있긴 한데, 이태리어로 작곡된 오페라다.(...) 도밍고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과는 대조적이랄까...
이태리어 외에 다른 언어로 쓰여진 오페라 아리아나 그 밖의 성악곡들은 간혹 리사이틀 때 몇 곡 부르는 정도였다.
그래도 웬만한 이태리 작곡가들의 오페라나 가곡, 칸초네[11] 등은 전부 레퍼토리에 섭렵해 놓았다. 언어의 제약이 없었더라면 레퍼토리가 얼마나 늘어났을 진 모르는 일.
또한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노래를 부를 때도 상당히 밝고 경쾌한 곡들을 불렀으며, 3테너 공연 중 'O Sole Mio'에서도 실수를 만회하는 아주 재치있는 기교를 사용. 청중들은 물론 같이 공연을 했던 2명의 테너들마저 즐겁게 만들었다. (물론 영상을 찾아 본다면 도밍고와 카레라스도 그에 화답한다.) 유튜브 영상[12] 하지만 이러한 찬사 속에 그늘진 면 또한 존재하고 있긴 한데, 일단 오페라 가수에게 있어 가창력과 음악성 못지않게 중요한 연기력이 좋지 못했다. 연기력을 따지자면 플라시도 도밍고가 훨씬 돋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파바로티의 뚱뚱한 체구와 그에 따른 몸짓에서 나오는 연기는 뭔가 어설픈 면이 있었다. 가창이야 물론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확실히 무대를 통해 객석에서 보이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그가 노래하는 멋진 오페라 속 남주인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는 것, 그리고 상기했던 단점을 압도적인 가창력 하나로 커버할 수 있었을 만큼 그의 노래가 최고라는 점은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이견이 있기 힘들 것이다.

5. 명반과 영상물


말년의 대표적인 앨범은 바로 <파바로티와 친구들>. 크로스오버 장르의 앨범으로 3번째부터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자선 공연이 되었다. 라이브 무대의 실황을 그대로 녹음한 앨범. 세계유명 가수들이 참가한 만큼 환상적인 들을거리를 제공. 토리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기도 했었다. 함께한 가수들의 면면만 살펴 봐도 하나같이 쟁쟁한 멤버들인데, 대표적인 인물들 몇몇만 꼽아 봐도 엘튼 존[13], 스팅, 본 조비,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 보노, 마이클 볼튼, 보이존, 스파이스 걸스, 스티비 원더, 안드레아 보첼리, 주케로, 비비 킹 등 하나같이 초호화 출연진이다. 주케로는 이 공연의 개근 출연자. 파바로티와 매우 친하다고.
출연 가수들이 모두 파바로티의 출연 제안을 반겼던 것은 아니다. 거장 파바로티와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 가수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보스니아편 앨범의 미니 책자에 적혀있다. 치프턴스의 리더 패디 몰로니는 3주간 파바로티의 스토킹성 추적에 결국 백기를 들고 모데나 콘서트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보노는 곡은 써주겠지만 노래는 못부른다고 했지만 파바로티가 기습적으로 아일랜드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방송국 스탭들을 데리고 와서 할거죠?라고 역습을 날리는 바람에 같이 노래까지 부르게 되었다.
마이클 볼튼은 파바로티와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못하고>(흔히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라는 제목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를 열창하는데 클라이맥스인 '빈체로~!(Vincero/승리하리라!)'부분에서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 주어 파바로티가 놀랐다고. 이후 볼튼은 파바로티와 성악무대를 여러번 같이 하기도 했다. 미트로프 또한 파바로티와 <Torna a Surriento/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르는게 공포스러웠다고 회고. 그렇지만 무대는 최고였다.

6. 여담


배우 이제훈의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인 파파로티에서 극중 이제훈의 역할인 주인공 장호에게 성악을 하고 싶게 만든 계기가 된 인물이다. 물론 극중에서 그 계기가 되는 노래는 역시 네순 도르마.
생전에 마세라티 자동차를 좋아했다. 1963년에 처음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첫 차는 2도어 쿠페인 마세라티 세브링이였다. 이후에도 쭉 마세라티 차량을 탔다고...
체격이 상당히 좋은 편인데 180cm의 키에 전성기때 체중은 180kg이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엔초 페라리와 돈독한 관계였다고 한다.
배우 박상면의 전용 성대모사 레퍼토리다. 몬데 그린으로 "위도 아래도 보지마. 옆에만 봐~!" 라고 불러주는게 특징.
한 손에 흰 손수건을 들고 양팔을 펼친 특유의 무대 포즈가 유명하다. 뚱뚱한 몸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켜 체구의 단점을 가리는 전략이라고 한다.

6.1. 한국과의 인연


다른 3대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에 비해서 한국을 방문, 공연한 일은 매우 적었다. 그나마 이루어진 방문에서도 그다지 좋은 인상은 받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예를 들면 전성기 중인 1993년 내한공연을 하던 중에 관객들이 시끄럽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음향기기에 문제가 생긴 일에 대해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얘기들을, 파바로티가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14]
이보다 앞선 1977년 내한공연 때는 파바로티가 당시 묵고 있었던 조선호텔에서, '''보일러의 소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강력히 항의해서 호텔 측의 추가 서비스를 받아내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보일러 시설 가동음이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 건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관실 안에서 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고 지은 고급 호텔 특성상 "어지간히 청력이 민감하지 않은 이상'' 감지하기 힘들었다는 것.

7. 이름


의외로 이름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착각하는 이름으로는 파파로티, 바파로티, 빼빼로티, 파배로티, 빠바로티, 파빠로티, 파마로티, 배배로티 등. 하지만 위 제목처럼 파바로티가 맞다.
개그콘서트에서 윤성호가 파바로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를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이름은 '''빠박로티'''(....).

파바로티의 일대기를 다룬 론 하워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가 2020년 1월 1일 개봉하였다.

[1] 'Vincero (승리하리라)' 부분을 첫 번째는 15초, 두 번째는 18초를 끄는데, 리리코테너로서 스핀토에 가까운 톤으로 고음역을 이만큼 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2] 국립국어원의 이탈리아어 표기세칙에 따르면 '루'''차'''노 파바로티'로 표기되어야 하지만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관용을 존중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로 표기가 규정되어 있다.[3]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에 나오는 남주인공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로 이탈리아어 표기는 'Nessun dorma'. 해석하면 '아무도 잠들지 못하고'가 되겠다. 국내에선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4] 물론, EMI나 DG에서도 출시된 음반들이 여럿 있다. EMI에서는 상대역이 미렐라 프레니로 나온 피에트로 마스카니친구 프리츠,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한 1992년도 라 스칼라 극장 실황 녹음인 돈 카를로, 그리고 오페라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무티와 함께 한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이 있으며, DG에서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인 가에타노 도니제티사랑의 묘약,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이 있다.[5] 정확히는 '''젖동생'''이다. 파바로티가 프레니 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기 때문이다.[6] 자존심이 강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프레니의 미미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7] 본래 올림픽에서는 대부분 음향사고의 문제를 막기위해 립싱크를 한다. [8] 사실 파바로티는 1935년생, 도밍고는 41년생으로 둘은 6살 차이가 난다. 세상 어떤 직업이 나이의 영향을 안 받겠냐만은 특히나 몸이 악기인 성악가는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질수록 점점 노래하는데 무리가 가고, 쇠퇴기가 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동세대를 살았던 그들의 경우 똑같이 좋은 목소릴 유지하기에는 파바로티가 좀 더 불리한 조건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도밍고가 사실은 1934년생으로, 오히려 파바로티보다도 1살이 더 많다는 얘기가 있다. 클래식 팬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이긴 한데, 이게 정말이라면 아직까지도 오페라 가수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도밍고가 정말 존경스러우면서도 불가사의할 지경이다.[9] 물론 파바로티 이전에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한 독일의 전설적인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처럼 리릭 테너로서의 파워풀함을 보여준 예외도 있긴 했지만.[10] 이 과정에 있어서는 최고의 황금 콤비였던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11] 보통 나폴리 민요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성악곡의 한 분류. 우리말로 딱 '이거다' 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노래인데 마치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 불려지는 유행가 같은 느낌이라면 좀 비슷할지도? 가곡과 민요의 미묘한 경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12] 36초 정도에 파바로티가 실수를 하고 다음 파트에서 재치를 부리는데 곧바로 두 테너들이 화답을 한다. 같은 곡을 2번 불러서 바로 눈치 챘겠지만 도밍고 파트를 부르는 실수를 했고 자기 파트에서 일부러 길게 끄는 재치를 날려주신다.[13] 엘튼 존과 듀엣으로 부른 Live Like Horses는 1996년 12월에 싱글로 발매되기도 했다.[14] 클래식 성악 무대는 객석에서 앙코르(앵콜)를 외치지 않는 이상, 조용히 듣는 게 에티켓이다. 대중가요 무대의 단체 제창과 같은 열띤 호응은 소음으로 간주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