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들스틱(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배경
2. 목소리
3. 구 배경
3.1. 유니버스 이전
3.2. 유니버스 이후
3.2.1. 종말의 순간까지


1. 장문 배경


옛날, 아주 오랜 옛날, 바닷가 탑에서 젊고 어리석은 마법사가 스스로 조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세상에 소환했다. 마법사의 앞에 나타난 것은 기록상의 역사보다도 오래된 존재였다. 별 하나 없는 광대한 밤하늘보다 어둡고, 세상이 잊으려 무던히 노력하던 생물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마법사와 생물, 탑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프렐요드에서는 아이들이 불 가에 모여 앉아 괴물 이야기로 서로를 겁주곤 한다. 이야기 속 괴물은 아무렇게나 방치된 얼음 속 무덤에서 깨어나 투구, 방패, 털가죽, 나무가 뒤엉킨 채 휘청거린다. 빌지워터에서는 술 취한 선원들이 자그마한 외딴 산호섬에 홀로 서 있는 존재에 대한 목격담을 나누곤 하는데, 이 섬에 다가간 자는 살아서 돌아온 일이 없다고 한다. 타곤 지역의 오래된 전설에는 넝마 차림을 하고 속삭이는 공포의 존재에게서 유일한 즐거움을 훔친 여명의 아이가 등장하는가 하면, 녹서스 병사들은 외로운 농장 일꾼이 흉년으로 미움을 사 까마귀밥으로 던져진 뒤 악마가 되어 돌아왔다는 설화를 즐겨 이야기한다.
인간을 닮은 형상으로 이곳저곳에 나타나며 무시무시한 공포를 몰고 다니는 존재에 대한 전설은 데마시아, 이쉬탈, 필트오버, 아이오니아, 슈리마 등 룬테라 곳곳에서 수많은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며 다듬어지고 각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는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피들스틱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고대 괴물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지금까지는 말이다.
점점 커지는 공포와 불안에 이끌려 데마시아 내륙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수도와 수백 미터의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지방들은 단 며칠 만에 모두가 대피해 고요했다. 오래된 도로를 지나는 여행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국경 지대를 순찰하러 떠난 경비대는 소식이 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안전한 길가 주점에 돌아온 생존자들은 제 얼굴을 긁어대며 기이한 까마귀와 이상한 소리, 구부정한 허수아비 형상을 한 채 죽은 자의 목소리를 빌려 까악대는 공포의 존재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대부분은 추방된 마법사들 짓이라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누명을 씌우는 일이 빈번한 반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훨씬 참담했다. 바닷가 탑의 젊은 마법사 설화처럼, 무언가가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원시 인류의 경고가 시간이 흘러 소문으로, 신화로, 전설로 바뀌다 마침내 단순한 우화로 남겨졌을 만큼 오랜 세월 간 세상에서 사라졌던 악의 존재였다. 너무도 이 세계와 동떨어진 나머지, 현대의 어떤 마법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오래되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생물이었다. 동물들조차 누군가 그 이름을 발설하면 불안에 떨 정도였다.
그 존재의 부활로 인해, 모두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던 또 다른 이야기가 내륙 지방에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형태도, 의식도, 자신이 내재하는 세계에 대한 자각도 없으며,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모습을 막연히 본떠 변화하는 사악한 존재의 전설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공포를 가져오고, 창세의 끔찍한 첫 비명과 함께 태어났으며, 악마가 악마로 불리기 전부터 존재해온 악마였다.
이 역시도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피들스틱은 실존한다.

2. 목소리


''열 명의 위대한 왕이 열 개의 위대한 왕좌를 차지했고''
''아홉 개의 왕관이 아홉 명의 머리를 장식했다.''
''남은 한 명은 그들의 무덤에 흠집을 냈고''
''까마귀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었다.''
— 데마시아에서 전해지는 옛 시,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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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바드 영감이 오래된 벌꿀주에 잔뜩 취했을 때 일이지. 그는 옛날에 전투에 나가서 도망치기 바빴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골드윌드 외곽에 있는 오두막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네. 이웃에 살던 친절한 다빌이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 노친네 힘이 어찌나 센지. 온몸으로 버티는데 문은 꼼짝도 안 하고, 그 와중에 무섭다느니, 새들이 쪼아 대서 죽을 것 같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더군. 술 때문에 죽으면 모를까, 아무도 영감 얘기를 믿지 않았어. 그리고 술에서 깨도록 하루만 두면 나아질 줄 알고 다들 돌아갔지.
그런데 하루도 안 지나서 일이 터지더군.
첫 번째 비명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어. 마치 허바드 영감의 가슴 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였지. 두 번째 비명은 더 끔찍했어. 쇳소리처럼 날카롭고 사람의 소리가 아닌 듯한 그 비명에 결국 제빵사의 아내가 외쳤어. "마법사다!" 그때부터 상황은 난장판이 됐지.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은 무기를 들었고, 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촌구석이긴 했지만 시장은 사람들을 마을 회관에 모아서 창문을 판자로 막았어. 자네는 수도 없이 봐 왔던 광경이겠지. 겨울 발톱 부족이 북부 지역을 공격한 뒤로 사람들은 마법의 '마' 자만 들어도 까무러치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날 골드윌드에서 있었던 일은 훨씬 끔찍했지.
못 믿겠다고?
직접 확인해 봐. 지금 골드윌드는 사라지고 없으니까.
다빌에 관해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군. 다빌은 첩자였어. 야만인들에게도 신의가 있으니 프렐요드와 강화 조약을 맺자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었지. 아무튼 다빌은 국왕을 섬기며 슈리마와 푸른 불꽃 제도에서도 활동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어. 우리가 살던 서부 내륙은 축복받은 땅이야. 끽해야 번식기가 끝나고 떠돌아다니는 칼날부리나 노상강도만 아니면 위험할 일은 없었거든. 하지만 다빌은 진정한 위험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빠릿빠릿한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민병대를 조직해 마법사를 처치하려고 했지.
계획은 간단했어. 해가 뜨면 군대식으로 두 명씩 순찰을 도는 거야. 그리고 우리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지. 국왕 폐하와 조국을 위해, 데마시아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날이 밝기도 전에 한 가족이 사라졌어.
다섯 명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거야. 집은 쑥대밭이 됐고 우리 안의 가축들은 전부 죽어 있었어. 문은 전부 안에서 잠겼고 창문에는 걸쇠가 걸렸지. 말 그대로 사라졌더군. 시장이 회의를 소집했는데 일꾼 두 명이 안 들어왔어. 다빌이 부르자 뭔가가 대답했지. 비슷하긴 했지만, 일꾼들의 목소리는 아니었어. 억지로 단어는 제대로 발음하는 것 같았는데, 녹슨 새장이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
사람들은 두려워했어. 한 사람이 흥분해서 칼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지. 뒤따라 나갔던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어. 대장장이는 앰버펠에 가서 경비병을 데리고 오겠다며 말을 타고 나섰지만, 옛길 중간쯤 갔을 때 말이 날뛰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지. 그리고 뭔가가 대장장이를 끌고 갔어. 다빌이 괜찮은지 소리쳐 묻자 끔찍한 목소리로 대답하더군. 앰버펠에 가서 경비병을 데리고 오겠다고.
다빌이 다시 묻자 똑같이 대답했어. "옛길로 앰버펠에 가서 경비병을 데리고 오겠소."
목소리는 뭔가 이상했어. 마치 머리에 바늘이 꽂히는 것처럼 끔찍한 느낌이었지.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나랑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더군. 부모는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안고, 집 쪽으로 뒷걸음질 치거나, 냅다 줄행랑을 놓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것은 사람의 정신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한낮에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목소리였어. 우리 몸속에서 뭔가를 뽑아 간다고 할까?
그때 한 여자아이가 말했어. 밭에 허수아비가 있던 자리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봤다고. 말이 안 되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우리는 그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
밤이 되자 마을의 집 절반이 문을 걸어 잠갔어. 집 안에서 사람들은 속삭이고, 중얼거리고,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렸지. 별 이상한 얘기를 다 하더군. 뱀, 번개, 어둠, 좁혀드는 벽, 칼, 바다 같은 것들 말이야. 웃다가 또 비명을 지르다가, 다들 미쳐 버린 것 같았어. 마치 끔찍한 존재와 함께 방 안에 갇힌 듯했지. 그야말로 악몽이었어.
그때 불이 꺼지기 시작하더군. 판자로 문과 창문을 막은 집 안에서 불빛이 하나둘씩 사라졌지. 목소리도 점차 잦아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어. 대장간만 빼고 말이야. 그곳에서 뱀, 번개, 어둠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더군.
가엾은 다빌은 민병대를 이끌고 들어갔어. 나도... 함께였지. 양손에 칼과 등불을 쥐고 있었지만, 어디를 보든 그림자뿐이었어.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 잘 몰라. 얼굴 비슷한 게 보이더군. 그 얼굴은 다빌 앞에 서서 나를 뒤돌아봤지만, 다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지. 마치 나한테만 보이는 것 같았어. 삐딱하게 기울어진 그 얼굴은 삼베로 뒤덮여 뒤틀려 있었고, 녹슨 이빨이 나 있었지. 그 뒤로는... 거대한 형체가 보였어. 가느다란 다리 위로 수백 마리의 검은 새가 작년에 숲에 버린 새장에 갇혀 있었어. 그리고 눈이 보였지. 수도 없이 많은 눈이.
지금 골드윌드에 남은 사람은 없어. 뒤따라 탈출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유일한 생존자지. 마을에서 도망치는데 비명은 점차 잦아들고, 진홍색 빛이 옥수숫대 사이로 뿜어져 나왔지.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역겹게 들려 오고, 돼지와 말이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질렀어...
그리고 까마귀!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됐을 거야! 하지만 까마귀가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것들은 연기와 불로 만들어졌다고! 진짜가 아니란 말이야. 진짜일 리가 없어...
까마귀는 그 목소리를 따라갔어! 깊게 울리는 그 목소리! 모르겠어? 모르겠—
맙소사... 다빌! 난 다빌을 버렸어! 그 끔찍한 허수아비한테 당하도록 그냥 도망쳤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었어! 신이시여, 분명 날 따라왔을 거야. 내 공포를 느끼고, 내 존재를 아는 순간부터 절대로 놓아 주는 법이 없지. 절대로 그—
무슨 소리지?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려?
...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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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 배경



3.1. 유니버스 이전


전쟁 학회의 동쪽 건물 끝에는 '소환실'이라는 방이 있다. 피들스틱은 거기서 거의 20년 동안 묵묵히 홀로 서 있었다. 먼지로 뒤덮여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엔 타오르는 에메랄드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한줄기 빛만이 희미하게 피들스틱을 비춰줄 뿐이었다. 종말의 예고자 피들스틱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빗자루처럼, 보초를 서고 있는 말라깽이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리그의 소환사는 모두 피들스틱을 두려워했다. 동시에 소환사들은 그의 과거를 통해 정말 중요한 교훈 하나를 마음속 깊이 아로새기곤 한다. 전장에서는 '규범'을 준수할 것!
수십 년 전, 자운에서 온 강력한 룬 마법사 이스트반은 제 5차 룬 전쟁이 끝날 무렵 리그 최초의 소환사 중 하나로 임명되었다. 룬 전쟁에서의 끔찍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과거의 방식에 젖어 있던 이스트반은 리그의 행동 규범을 점점 더 많이 어기기 시작했고, 결국엔 폭주하는 자신의 마법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신을 소환실에 봉인한 그는 금지된 의식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이계 공간 소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날 자운을 대표하는 챔피언은 소환사의 협곡에 출전하지 않았다.
소환실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소환실 문을 두드려 봐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소환실을 살펴보려고 들어간 수련생들의 몸뚱어리는 이계의 낫에 의해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따라 들어간 사람들 중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조차 공포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까마귀와 죽음에 대해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 이스트반조차도 제어할 수 없었던 악의 존재는 리그의 소환사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사람들은 소환실로 이어지는 모든 출구를 봉인하고, 파멸시킬 수 없는 존재를 최소한 가둬놓기만이라도 할 수 있길 바랐다. 그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무 형상을 한 이 이상한 존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환실에 침입한 미련한 사람들을 제거할 때를 제외하고는...
리그 의회는 소환실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피들스틱을 리그의 처형자로 삼기로 했다. 피들스틱은 정의의 전장에 불려 나와 있을 때는 소환 규범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소환실 안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으며 잘 벼려진 낫은 다가오는 누구든 베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공포 그 자체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직 까마귀의 울음소릴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다.

3.2. 유니버스 이후


피들스틱은 섬뜩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는 허수아비로, 방심하고 있는 사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다가와 날카로운 낫을 휘두른다. 마을에 기근을 불러왔다는 누명을 홀로 외로이 뒤집어 쓴 사나이었던 피들스틱은 황폐한 들판에 손발이 묶인 채 버려져 굶어 죽었다. 흉포하게 자신의 시체를 뜯어먹은 까마귀 덕분에 되살아난 피들스틱은 무시무시한 까마귀 떼와 함께 하늘을 뒤덮는 깃털과 피에 물든 부리로 상대를 절명시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포에 떠는 희생자를 바라보며 희열을 느낀다.

3.2.1. 종말의 순간까지


도적떼는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말에 짐을 싣고 있었다. 나이람은 마지막 짐의 버클을 말에 매었다. 짐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단도와 눈여우의 털가죽, 소금에 절인 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전리품이 꽤 무거워 나이람은 말을 타지 않고 끌어서 은거지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미네쉬가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나이람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걷고 있나?” 미네쉬가 물었다.
“말에게 잘 해주면 은혜를 갚게 마련이지.” 나이람이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시장에 가서 더 나은 말로 바꾸는 게 어때? 등이 그렇게 굽어서야 제대로 탈 수도 없겠는걸.”
“됐어. 이래봬도 꽤 튼튼한 녀석이라고.” 나이람의 대답에 미네쉬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동굴 은거지 앞의 황무지에 다다랐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가며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휑한 바람에 썩은 잎줄기와 빽빽한 잡초가 흔들렸다. 곰팡내 나는 건초더미가 전장의 주검처럼 여기저기 흩트려져 있었다. 누더기와 짚으로 대충 엮은 흉물스런 허수아비 하나가 그 버려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 두 짝을 다리 삼아 서있는 허수아비의 누더기 옷이 바람에 나부꼈고 한쪽 팔에는 녹슨 낫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도적떼는 들판을 가로질러 거친 수풀로 들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날카로운 이빨처럼 종유석이 늘어선 동굴 입구였다.
나이람은 동굴 입구에 말을 매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높다란 천장 아래, 동료들이 모여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진 사내, 라이밀이 나이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람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오늘 건진 가장 값진 전리품을 더듬어보았다. 정교한 체인에 매달려 붉게 빛나는 부적이었다.
이 목걸이를 처음 본 순간을 그는 떠올렸다. 마차의 창문에 늘어뜨린 고급 자수 커튼 너머, 목걸이는 귀족 여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나이람과 라이밀은 도적떼가 다가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차를 세웠다. 이미 나이람의 도적떼는 주변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대는 곧 함정이란 걸 알아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병사들은 나이람과 라이밀, 동료들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다. 나이람은 마차로 들어가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여인은 꼭 쥐고 말을 듣지 않았다. 고집 센 여인은 숨겨뒀던 칼로 저항했지만, 나이람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처치하고 목걸이를 낚아챘다.
그 순간처럼 나이람은 부적을 손에 꼭 쥐었다. 부적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 내니 달빛에 보석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입구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자 나이람은 목걸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여물에 쥐라도 있나 보지?” 나이람이 말했다.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뛰는 걸 거야. 겁 많은 녀석들…” 라이밀이 답했다.
“그림자가 아니야. 사나운 새라고. 무시무시한 까마귀님이시지!” 미네쉬가 말했다.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검은 새 한 마리가 동굴로 들어와 머리 위로 날아갔다. 새 울음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치고 나이람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나는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앉을 곳을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 동굴 속은 침묵에 잠겼다.
갑자기 엄청난 수의 까마귀가 까악까악 소리를 내지르며 동굴 속으로 물밀 듯 날아들어 왔다. 까마귀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에 습격 당한 도적떼는 비명을 질렀다. 새까만 갈고리발톱이 나이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이람은 새를 집어 던졌다. 이미 어깨에 큰 상처가 난 뒤였다.
나이람은 바닥에 엎드려 동굴 입구로 기어나갔다. 바깥에선 까마귀 떼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뒤덮고 보름달 빛을 가리고 있었다. 동굴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울려 퍼져 나왔다.
고개를 들자 라이밀이 휘청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숨은 붙어 있었지만 어떻게 당했는지 끔찍한 몰골이었다. 나이람은 동굴 밖 거친 수풀 사이로 황급히 기어나갔다. 새 떼 따위에게 목숨을 내줄 순 없었다.
수풀 너머 들판 끄트머리에선 까마귀 떼가 무언가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흉물스런 허수아비는 흉포한 까마귀 떼를 감싸듯, 양팔을 넓게 벌리고 서 있었다. 삐죽삐죽 길게 찢어진 입은 웃고 있었다. 녀석의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까마귀 떼의 공격에 사람들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그때 허수아비가 갑자기 몸을 휙 돌리더니 나이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은 녹색으로 이글거렸다. 겁에 질린 나이람은 황급히 몸을 세워 수풀 사이를 지나 황무지로 질주했다. 등 뒤로 녀석이 기다란 다리를 휘저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썩은 건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이람은 뒤를 흘깃 보았다가 코앞까지 따라온 허수아비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녀석은 나이람이 첫 건초더미에 다다르기도 전에 낫을 휘둘러 나이람을 넘어뜨렸다. 겁에 질려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된 나이람은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일어서려 애썼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다시 쓰러졌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팔과 무릎으로 기며 그 악몽의 화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녀석의 다리가 등을 짓눌렀고 나이람은 움직일 수 없었다.
괴물은 몸을 숙이더니 나이람의 머리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녀석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늘한 공포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썩은 영혼의 악취가 코를 찔러 숨이 막혔다.
“내 들판에 발을 들였겠다…” 축축한 무덤 흙을 입에 물고 있기라도 한 건지, 허수아비는 웅얼댔다. “여기서 자라는 건 모두 내 것이다.”
날카로운 부리와 갈고리발톱을 세운 까마귀 떼가 나이람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