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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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의 국왕.
아랍어: حمد بن عيسى آل خليفة‎
영어: Hamad bin Isa Al Khalifa
1. 개요
2. 인권유린


1. 개요


1950년 1월 28일 생 (74세) 으로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할리파[1]1971년 독립한 바레인의 첫 에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에미르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에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렸다.
2020년 말 오랫동안 총리를 맡고있던 삼촌이 죽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총리로 지명했다.

2. 인권유린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군주일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런 일은 1999년까지 일어났다.[2]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에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다. 그 이후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가 나타난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 불꽃의 항쟁이 번지면서 바레인에도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자세한 사항은 아랍의 봄에서 바레인 항목부분을 참고.)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군인들을 총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때 바레인 군경은 실탄을 발포하여 진주광장[3]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광장은 처참한 폐허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군이 제일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그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아예 광장과 중앙의 진주탑을 없애고, 그곳에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그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시키고 있어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간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 왕실가문은 친미독재라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외면을 당해서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고 결국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 사태로 인해 독재자를 방조했다며 비난을 듣는다.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가혹한 고문을 했다는 게 밝혀졌다.[4] 2014년부터 국왕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천만원)로 강화했다.#
하지만 아랍 독재자들이 다 그렇듯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있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한다. 게다가 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던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식 반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꿈꾼다는 게 함정. 그리고 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시리아를 보면 알 것이다.
[1] 1933년 6월 3일 ~ 1999년 3월 6일[2] 이 때 바레인 왕실 가문들이 시민들을 억압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있다. 다만 1990년대 바레인의 경우는 개혁을 원한 시민들만 있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시아파들과 좌파, 자유주의자들도 나타나는데 이들 중 헤즈볼라나 과격한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나타나면서 테러까지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나왔을 수는 있지만 또 다른 문제점이라면, 죄 없는 시민들까지 탄압당했다는 게 문제.[3] 수도인 마나마에 있는 광장. 여기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4] 2011년 대규모 시위 이전 2010년에도 국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