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관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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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관렬(韓灌烈)
생몰
1892년 12월 18일 ~ 1950년 1월 14일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읍 북촌리
사망지
경상남도 함안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관렬은 1892년 12월 18일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읍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배하기 위해 이찬영(李讚榮),한종순,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1],강기수(姜琪秀) 등과 함께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뒤 이들과 함께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알렸다.
3월 19일 정오, 그는 이찬영,이희석 등의 주동자들과 함께 인근의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후 곧 하산하여 봉성동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오후 2시, 3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경찰주재소로 행진했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 몽둥이, 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했다. 또한 경찰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들이 응하지 않자 구타했다. 이후 군중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했다.
이후 군중은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파괴했다가 마산 중포대병력 16명과 현지 경찰 연합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한관렬은 일시 피신했지만 결국 체포되었고, 1921년 8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요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지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함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한관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건병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