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나퍼츠부슈

 

Hans Knappertsbusch (1888.03.12 – 1965.10.25)

독일의 지휘자. 리하르트 바그너, 안톤 브루크너 등의 정통 독일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스케일이 크고 과감하게 템포 루바토를 구사하는 거장풍의 해석으로 유명하다.
독일 엘버펠트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고 쾰른 음대에서 프리츠 스타인바흐에게서 지휘를 사사했으나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 그러나 이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일하면서 한스 리히터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1922년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는 나치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사상에도 동조하지 않았고, 곧 뮌헨(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계약이 깨지고 독일에서 추방당해 연주를 금지당한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빈 국립 오페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빈 음악축제와 잘츠부르크에서도 연주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4년에 '신의 축복을 받은 자' 리스트에 등재되면서 군인 징집을 면제당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다시 뮌헨에 돌아와 지휘했고, 꾸준히 빈과 바이로이트에서 객원 지휘를 한다. 1951년에는 전쟁이 끝난 후 처음 열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처음으로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했다[1]. 이 때 데카에서 존 컬쇼를 필두로 한 녹음진이 와서 실황녹음했다가 잡힌 음질에 경악해 게오르그 솔티와 함께 스튜디오 녹음을 하게 된다.[2] 그러나 1951년과 1962년에 녹음한 파르지팔은 녹음 후 발매되었고 최고의 음반 중 하나로 꼽힌다.
이외에도 브루크너 음반을 후대에 제자들이 편집한 악보로 연주하기로 유명한데[3] 예를 들어 베를린 필과 녹음한 교향곡 9번에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뢰베판으로 연주한 것을 들을 수 있다.
지휘자가 된 초반엔 무대나 지휘대에 서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당시 캐리커쳐가 나 돌았을 정도. 싫어했다기 보다는 무대에 서는 것이 부끄러웠다. 푸르트벵글러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푸르트벵글러는 무대에 서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더 높아졌다고 한다,

[1] 이 해 바이로이트 축제의 오프닝은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다.[2] 이 때 컬쇼는 '신들의 황혼' 부분에는 감명받아 녹음 편집을 끝냈지만 음반으로 나오지는 않았다.[3] 개정판이라고 부른다. 개정판은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브루크너의 곡을 대중들에게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개정한 것들인데, 브루크너의 의도가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대부분 잘 채택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