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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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ir Georg Solti, KBE.[1] 1912년 10월 21일~1997년 9월 5일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로열 코벤트가든 오페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1953년에 독일(서독) 시민권을, 1972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헝가리식으로는 '''숄티 죄르지'''(Solti György)이며 헝가리 본명은 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이다. [2]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도 퍼스트 네임은 George가 아닌 독일식 Georg를 계속 이름으로 사용했다. 실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죠지 숄티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고, 게오르그 솔티에 가깝게 발음해주는 경우도 있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조지 숄티라고 발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게오르그 솔티라고 표기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발음 문단을 참고한다.
그래미 어워드 역대 최다 수상자로, 총 31회의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생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버르토크(Béla Bartók), 베이네르(Weiner Leó), 도흐나니(Ernő Dohnányi) 등에게 사사했다. 1930년대에 헝가리 국립가극장(Hungarian State Opera)에서 조수(répétiteur)로 일했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런던으로 건너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한 시즌 만에 그만두고 스위스로 건너가서 종전 때까지 벼텼다. 지휘자로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피아니스트로 돈벌이를 했다.[3]
하지만 종전 후에는 완전히 팔자가 뒤바뀌었는데 독일의 거장지휘자들이 대거 연주 금지된 덕분에 1946년 일거에 유서깊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연주금지가 풀린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귀환하자 숄티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다시 크나퍼츠부슈에게 돌아갈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1951년에는 처음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빙되어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를 지휘했다.
1952년에 결국 뮌헨 국립가극장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시립 가극장(Frankfurt City Opera)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숄티는 9시즌 동안 지휘했다. 한편 조국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솔티는 앞으로 평생 헝가리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1953년에 서독 시민권을 취득했다.
1950년대 후반 DECCA의 간판 지휘자 중 한명으로 낙점되면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여러 녹음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진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음반계에 큰 이정표를 세웠고 게오르그 솔티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영국의 로열 코벤트 가든 오페라(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재직기간 동안 코벤트 가든 오페라의 명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솔티는 작위를 받기 몇 개월 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맡은 기간 동안에도 시카고로 이사하지 않고 런던에 살았으며 시카고에서는 호텔에만 머물렀다.[4] 1971년에 코벤트 가든 오페라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극장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기적으로 지휘했다.
1969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22년간 장기재직했다.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 시절은 솔티에게나 시카고 심포니에게나 리즈 시절이라 할 수 있는데, 솔티는 나중에 상임지휘자에서 스스로 물러날 즈음에 이르러 시카고 심포니는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했다. 다만 시카고 심포니 재임 초기에는 코벤트가든 등 기존에 예약되어 있던 스케줄 때문에 솔티가 시카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는데 이 때문에 수석객원지휘자직을 신설하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영입하였다. 솔티는 일부러 자신과 다른 스타일의 지휘자인 줄리니를 선택하여 오랜 설득 끝에 그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줄리니는 솔티와는 대조적인 스타일의 지휘자였기 때문에 이 영입은 시카고 심포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솔티는 줄리니의 후임으로도 자신과 대조적인 성향의 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방대한 양의 음반녹음을 남겼다. 솔티는 시카고에서 재임기간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직을 맡기도 했지만 교향악, 관현악 음반 녹음은 거의 전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이루어졌다. 오페라는 오페라에 익숙한 빈 필 등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와 녹음했지만 1976년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녹음에 시카고 심포니를 처음 기용했다. 이후에도 솔티는 바그너나 베토벤 피델리오, 베르디 오텔로 등 관현악의 비중이 큰 오페라 녹음에서 시카고 심포니를 기용했다. 1991년 숄티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집권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상임지휘자직을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1972년에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나 악단 경영진측과 갈등 끝에 1975년에 사임했다. 나중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렌보임과 정명훈이 잇달아 곤욕을 치루고 물러났을 때 솔티는 "파리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바렌보임과 정명훈을 두둔하기도 했다. 특히 솔티의 후임으로 파리 오케스트라에 취임하여 장기간 재임했던 바렌보임의 융화력을 높이 사서 나중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후임에 앉히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았다. 런던 필 재임기간 동안에는 에드워드 엘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추가하였다.
1983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빙되어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지휘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1976년 야심차게 준비했던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자[5] 차기 프로덕션의 지휘자로 솔티를 섭외했다. 솔티는 바이로이트측에 여러가지 까다로운 요구를 했는데, 특히 연출 측면에서 과감하게 솔티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연주의 연출로 제작하기까지 했다.
또 솔티는 오케스트라의 호른 파트를 시카고 심포니 단원들로 대체하려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호른수석인 베를린 필의 게르트 자이페르트 등이 반발하여 역풍을 맞기도 했다. 또 타이틀 롤인 지크프리트역의 라이너 골트베르크(Reiner Goldberg) 등과도 갈등을 일으켰는데, 결국 골트베르크가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고 급히 만트레트 융(Manfred Jung)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준비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던 1983년 링은 프리미어 이후에 역시 논란에 휩싸였는데, 특히 피터 홀의 보수적인 연출은 보수적인 관객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진보적인 평론가들에게는 혹평을 받았다.[6] 또 교체된 타이틀롤인 만트레트 융에 대해서도 혹평이 있었다. 솔티의 지휘 자체는 직전 프로덕션의 피에르 불레즈가 워낙 말아먹은 바람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기대했던 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다는 평이었다. 결국 1983년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바이로이트 출연이 되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객원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4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미국의 젊은 음악도들을 위한 "Solti Orchestral Project"를 진행했고 이는 동영상과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7]
1995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1997년에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3. 데카와의 파트너쉽
영국 클래식 레이블 데카와 평생에 걸친 파트너쉽을 지속했다. 데카와 계약을 맺은 것은 여러가지로 숄티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데카가 처음에 그와 계약을 맺은 것은 유명 연주자나 성악가의 반주자로 기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피아노 반주자는 음반 표지에 이름이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솔티는 데카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일하면서 컬쇼 등의 프로듀서에게 자신의 지휘 열망을 열심히 피력했다. 이를 계기로 솔티는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데카는 거액을 들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독점 계약을 맺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 필의 주요 지휘자들은 대부분 DG 소속이었다. DG 소속이었던 칼 뵘은 빈 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였고 빈 필과 무척 녹음하고 싶어했지만 데카와 빈 필의 독점 계약 때문에 1970년 이전에는 녹음을 할 수 없었다. 숄티는 데뷔 초창기에 아직 빈 필의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받은 적 조차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빈 필과 가장 많은 녹음 세션을 갖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8] 하지만 초기 녹음 세션에서 빈 필을 통솔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9] 숄티의 공격적인 해석과 비전통적인 지휘법에 대해 특히 노장 단원들의 반발이 있었고 일부 단원들은 녹음 세션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때문에 한동안 숄티의 빈 필 녹음세션은 비정예 멤버로 꾸려졌다.
1958년부터 1965년에 걸쳐 진행된 숄티와 빈 필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세계최초로 스테레오로 녹음[10] 된 니벨룽의 반지 전곡 음반사에 남을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64년의 신들의 황혼 세션은 BBC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 데카의 놀라운 녹음기술과 화려한 성악진 등으로 엄청난 화제와 성공을 거둔 녹음 프로젝트였다.
이 녹음은 원래 한스 크나퍼츠부슈를 기용하려 했으나 크나퍼츠부슈가 워낙 녹음에 비협조적인 지휘자였기 때문에 결국 이 녹음 세션은 숄티에게 돌아왔다.[11]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휘자 경력이 일천했던 숄티가 이런 대작 녹음에 기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상당수 존재했는데, 경쟁사인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이 녹음이 50장도 팔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반지 세트는 출시 후 현재까지 약 1,800만장이 팔려, 클래식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버르토크 녹음이 유명하다.
4. 이름의 표기와 발음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조지 숄티, 고 클래식 음악가 정보는 게오르그 숄티 혹은 솔티를 사용한다. KBS 클래식 FM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에 따라 게오르그 숄티라고 읽을 때도 있고 조지 숄티라고 읽을 때도 있다. 국내 로컬/라이선스 기획 박스셋의 이름은 솔티시모이다. 여기서는 "게오르그 솔티"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조지 숄티라고 발음한다. 낙소스 비디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에서도 그 발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게오르크 숄티라는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를 쓴다.
영미권 클래식 라디오 진행자를 위한 발음 가이드에서는 게오르그 숄티와 조지 숄티가 병기돼있다.
엄밀히 말하면 게오르그냐 조지냐 라고 물으면 둘 다 맞다고 보면 되지만, 솔티냐 숄티냐 라고 물으면 숄티가 맞고 솔티는 틀린 표기라고 봐야 한다.
S에 /ʃ/ 발음이 적용되는 이유는 Solti가 헝가리어로 된 성씨기 때문이며, 이것이 솔티가 되려면 헝가리어 특성상 Sz가 되어야 한다. 예) George Szell(조지 셀). 여기에 대한 설명은 헝가리어 문서에 자음 문단에도 있다. 그래서 각 국가 위키피디아에서 이름에 대한 IPA표기는 없어도 성에 대한 IPA표기가 있는 것이다.
5. 기타
다른 유명 지휘자들도 그렇지만, 솔티 역시 자신이 맡은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엄격함을 주문,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그의 특징과 대머리를 빗대어 '괴성을 지르는 해골'(screaming skull)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경화의 젊었을때 성질이 꽤 한가락 한 모양이라 여러 지휘자, 피아니스트들하고 수도 없이 싸웠다고 직접 말한 적도 있는데 그중 솔티와의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리허설 중에 솔티가 정경화에게 "거길 왜 그렇게 연주하느냐" 라는 말에
정경화가 욱 해서 대드는 바람에 욕설이 오고가며 싸웠다고 한다. 서로가 한 말은 "한국잡년", "빌어먹을 독재자" 등.
지옥의 묵시록의 OST로 사용된 발퀴레의 기행이 DECCA 레이블에서 발배된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한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이다, 브리지트 닐슨이 발퀴레를 맡았다.
동시대의 유명 지휘자들이 대부분 메이저 레퍼토리는 암보 연주를 선호했지만 솔티는 반드시 악보를 놓고 지휘했다. 이 밖에 악보를 꼭 지참하는 유명 지휘자로는 마리스 얀손스와 리카르도 무티 등이 있다.
[1] 1971년 명예 KBE훈장을 받았고, 1972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KBE로 전환되어 기사작위도 같이 받았다.[2] 숄티라는 이름은 헝가리의 도시인 숄트에서 나왔다. 편의상의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3] 이 당시 데카에서 발매된 녹음들 중 게오르그 쿨렌캄프의 반주를 맡아서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이 남아있다.[4] 카라얀이 34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도 베를린에서는 호텔에서만 머물렀던 것과 비슷하다.[5]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하고,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은 엄청난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는데 토마스 만 등의 해석을 근거로 근대시대로 설정한 셰로의 연출은 모순점으로 논란이 일었다. 때문에 이 프로덕션은 프리미어 이후 연출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이 작품을 처음 지휘해봤던 불레즈의 지휘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불레즈의 지휘 역시 프리미어 이후 템포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프로덕션은 마지막해인 1981년에 녹음, 녹화되어 음반 및 영상물로 출시되었다. 많은 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평가는 다소 나아진 편이다.[6] http://www.wagneropera.net/RW-Performers/Georg-Solti.htm.바이로이트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 중 하나로 기록됨., The disastrous Peter Hall-Georg Solti 1983 Bayreuth Ring is an exception. But it was so badly thought out, mishandled, and mismanaged on every front that it were better had it never been attempted.. 피터 홀과 게오르그 솔티의 재앙과도 같은 반지. 다시는 이런 시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함. http://www.nytimes.com/1983/08/01/arts/opera-premiere-of-solti-hall-gotterdammerung.html 숄티의 프로덕션은 성공적이지 못해..가까스로 막을 내림[7] 해당 음반은 데카에서 발매된 "The Carnegie Project". 다만 일회성 기획으로 끝나서 아쉬운 점이 없지않아 있다.[8] 한국의 지휘자 정명훈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정명훈 역시 정식으로 빈 필의 정기연주회에 초빙된 적은 없지만, DG가 아시아시장을 위해 그를 밀고 있었기 때문에 빈 필과 녹음 세션을 가질 수 있었다.[9] 실제로 빈필과 숄티의 녹음중 명연이라 할 것은 별로 없다...[10] 세계 최초의 스테레오 반지 녹음은 아니다. 세계 최초는 55년도 카일베르트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실황. Testament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솔티 반지는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 정도 되겠다.[11]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크나퍼츠부슈는 녹음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프로듀서 존 컬쇼가 결사반대했다.[12] 월터 레그는 일부러 녹음 세션이 진행되던 비엔나로 가서 데카 스태프들과 우연히 만난 척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