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브루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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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 Bruckner'''
'''본명'''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출생'''
1824년 9월 4일
(오스트리아 제국 안스펠덴)
'''사망'''
1896년 10월 1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직업'''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음악교육가
1. 개요
2. 생애
3. 창작 성향
3.1. 극렬 개정 매니아
3.2. 판본: 개정판과 원전판
3.2.1. 개정판(Revised version)
3.2.2. 원전판(Original version)
4. 사생활과 관련한 에피소드들
4.1. 증명서 수집광
4.2. 시골 촌뜨기
4.3. 엄한 교육가
4.4. 독신
5. 사후의 재평가
6. 주요 작품들
6.1. 교향곡
6.2. 관현악
6.3. 실내악
6.4. 관악합주
6.5. 피아노
6.6. 오르간
6.7. 종교음악
6.7.1. 대규모
6.7.2. 소규모
6.8. 세속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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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클래식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2. 생애


린츠 근교의 시골 마을 안스펠덴에서 교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을 부모에게 배웠고, 11살 때는 아버지의 사촌에게 통주저음파이프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술집에서 댄스음악을 연주하다가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는 바람에 안톤이 13살 때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가세가 급히 기울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계 압박을 줄이기 위해 안톤을 린츠 근교의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가톨릭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기숙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3년 동안 수도원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오르간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원장 미하엘 아르네트의 주선으로 린츠의 교원양성학교에서 본격적인 교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린츠의 유력 이론가인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에게 화성학대위법도 배웠다.
1841년에 1차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보헤미아 근처의 벽촌 빈트하크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턱없이 적은 급료에다가 성격이 지랄맞았던 교장이 학교 수업 외에 텃밭의 농사일이나 교회 관리 등 과외 업무까지 떠맡긴 탓에 대단히 빡센 일과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교장과 언쟁이 빚어지는 바람에 교구 학교들을 장학사 자격으로 시찰하고 있던 수도원장 아르네트로부터 징계성 전근 조치를 받았는데, 말이 징계였지 실제로는 더 좋은 조건과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2번째 부임지인 크론슈토르프에서는 대체로 널럴한 조건으로 교직을 맡았고, 여가 시간에 계속 음악 수업을 받거나 친구들과 조직한 합창단에서 지휘를 맡는 등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1845년에는 2차 교원 임용시험을 통과하고 모교인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수도원에서는 교사 외에 오르가니스트로도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브루크너가 처음 가지게 된 음악가로서의 공식 직함이었다.
1855년에는 당대 음악이론 교육의 1인자였던 지몬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1861년까지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엄격하게 다시 배우면서 완벽한 이론가로 탈바꿈했다. 제히터의 이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보다 10살 어렸던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키츨러가 극장 상연에 열의를 보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키츨러와 공부하던 시기부터 브루크너는 교사 대신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혀 종교음악 외에 피아노곡이나 가곡, 실내악 등 세속음악의 창작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고, 수업 말기에는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후 전 생애 동안 창작에 매진하면서 바그너빠의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었는데, 당시 바그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브람스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이런 이유로 개갈굼을 당하거나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브루크너가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물론 자작 교향곡이나 여타 작품들의 공연이 계속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적었던 자신감을 더욱 억누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실패는 자작곡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개정판을 낳게 되었다. 오히려 브루크너는 작곡 보다는 오르간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고, 1869년과 1871년에는 각각 프랑스영국의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할 만큼 본좌급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곡가로서 브루크너가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현악 5중주를 전곡 초연한 1885년에 가서였다. 이어 교향곡 제7번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어 교향곡으로서는 첫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동안 실패했던 작품들도 점차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유명세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으로도 이어졌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고 만년에는 집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었던 탓에 브루크너는 점차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됐고, 1894년 후반에 빈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개최한 이후로는 공적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조차 힘겨워했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벨베데레 궁전의 부속 건물이었던 단층 주택을 새로 제공했다. 창작은 계속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제9번은 3악장까지만 완성되고 4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다(9번 교향곡의 저주). 사후 유해는 유언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대성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3. 창작 성향


생애 란에 잠깐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척 근면한 성격의 작곡가였다. 중년 이후 평생을 매달린 교향곡의 경우 1곡을 마치고 몇 달만에 다음 곡을 작곡할 정도로 텀이 짧은 편이었을 정도다.
교향곡 외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종교음악에 열의를 보였는데, 다만 교향곡만큼의 집중도는 없었다. 번호 붙은 3곡의 대규모 미사곡도 주로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썼고, 그 이전의 작품들은 별로 언급될 기회가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브루크너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종교음악의 가치를 무턱대고 깎아내린 괴벨스 이하 나치 또라이들 마냥 취급해서도 절대 안되는 분야다.
린츠 시절부터 극렬 바그너빠를 자처한 작곡가였지만, 바그너에 대한 관심은 주로 관현악법이나 대담한 화음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였다. 실제로 브루크너는 바그너처럼 오페라를 작곡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바그너 오페라의 줄거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동료 바그너빠들을 뻘쭘하게 만들기도 했다.[1] 뮌헨에서 발퀴레가 초연됐을 때는 공연 모습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된다면서 아예 박스석에서 커튼을 쳐놓고 음악만 듣기도 했다.
다만 바그너에 대한 빠심은 기본적으로 평생을 가도 변함이 없었고, 교향곡 제3번은 아예 바그너에게 헌정한 곡이었다. 교향곡 제7번에서는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바그너 튜바' 라는 금관악기 네 대를 관현악 편성에 추가했고, 이후 9번까지 계속 차용한 바 있다.[2]
11곡의 교향곡은 브루크너 음악의 이해를 위한 필수요소로 버티고 있는데, 동시대 작곡가들과 대등하게 놓고 보기도 뭣하고 낭만주의 사조의 흐름에 놓기도 애매한 탓에 지금도 이런저런 떡밥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리를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올리는 바로크풍 스타일에 오르간의 음향을 종종 모방하기까지 하는 등 아주 독특한 양식을 구축한 탓에, 대중적 호소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 있다.
이런 탓에 브루크너 음악을 좀 더 대중화시키려고 한 후배나 제자들이 바그너풍 사운드로 마구 뜯어고친 악보가 유통됐는데, 여기에 브루크너가 별 저항을 보이지 않은 것도 '브루크너=대책없는 바그너빠' 라는 반대파의 매도에 한몫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소년 시절부터 음악이론을 들입다 판 작곡가답게 복잡한 형식이나 구조를 작품에 도입하고 있어서 많은 지휘자나 연주가들의 머리에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데, 다만 무조건 이론에만 벌벌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중기 이후 교향곡들의 경우 마지막 4악장에서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만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고 있고, 미완성작인 9번 교향곡의 3악장 클라이맥스에서는 무려 일곱 개의 다른 음정들을 한꺼번에 울리게 하는 불협화음 효과까지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곡가만큼 '반복의 묘미' 를 살린 인물도 없다고 할 정도인데, 한 가지 음형을 내놓으면 곧바로 버리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심할 때는 1분 가량을 그 음형만 계속 반복해가며 음악에 추진력을 싣는데, 아예 '브루크너 시퀀스(동형진행)' 라는 단어가 존재할 정도다. 거의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같은 음형을 최대한 세게 연주하는 물량 공세(튜티)도 가끔 나오는데, 클라이맥스 대목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4분음표 2개와 셋잇단 4분음표 3개로 구성되는 '브루크너 리듬' 이나, 초기 교향곡들인 00, 1, 0번과 중기의 6번 4곡을 제외하면 모든 교향곡이 안개낀 듯한 작은 음량으로 시작하는 '브루크너 오프닝', 잘 나가다가 갑자기 모든 악기가 일제히 쉰 뒤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는 '브루크너 휴지' 도 독특한 기법으로 회자되고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워낙 각각의 규모가 크고 음향이 장중한 탓에 관현악 편성도 무척 크리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악보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00번부터 6번까지는 표준적인 2관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고, 7번에서 바그너 튜바 4대가 추가되면서야 편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8번에서는 3관 편성으로 목관악기 숫자가 늘고 하프가 더해졌고,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이 3악장 클라이맥스에서 연주된다.[3] 특히 금관악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말러보다 편성은 작지만 오히려 더 장대한 음향을 낸다.
특히 금관악기의 역할 때문에 이러한 인상이 강한데, 실제 연주에서도 금관악기 연주자들의 삑사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오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브루크너 음악이기도 하다. 오르간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사운드를 모방하기 위해 금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교향곡 제5번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러한 용법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3.1. 극렬 개정 매니아


브루크너 만큼 자작곡을 미친듯이 뜯어고친 작곡가도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인데, 실제로 그가 남긴 곡들 중 개정을 거치지 않은 곡들이 별로 없을 정도다. 교향곡의 경우에도 아직 듣보잡으로 취급받는 00번이나 0번, 중기의 이색작인 6번 등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두세 개의 버전이 있는데, 그것도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공연과 출판이 매우 어려웠던 현실에 기인했다. 브루크너는 1868년 빈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나 브람스와 한슬릭 등 브람스파의 집중 견제로 초연과 출판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향곡 3번이었다. 사실 브루크너는 교향곡 3번 이전에는 그다지 개정을 하지 않았었다.
브루크너는 1873년 교향곡 3번을 완성하고 초연을 위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교섭에 들어갔으나 가까스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초의 리허설 후 곧바로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후 브루크너는 빈 필과 주변의 지적 상황을 반영하여 작품을 개정하여 다시 빈 필과의 연습에 들어갔고 빈 필은 또다시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 브루크너는 또다시 개작에 들어갔다. 교향곡 3번은 초연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을 몇차례나 반복했다. 결국 빈 필과 최초로 리허설을 한지 무려 3년반만인 1877년말에야 가까스로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파의 방해 속에 가까스로 진행된 이 초연은 엄청난 대실패를 겪었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초연하기 전에도 지휘자나 악단과 연습이나 시연 혹은 악보만 보여줬을 때 뭔가 비판을 받았다면 즉시 뜯어고칠 태세를 갖췄을 정도다. 브루크너의 소심한 성격으로서는, 크던 작건 자작에 행해지는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크너를 위시한 바그너빠를 인정사정 없이 악평하기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같은 이들의 날선 혹평도 이런 개정 작업이 계속되는데 일조했지만, 때로는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개정을 하는 안습 상황도 있었다. 특히 교향곡 제8번의 경우, 초연을 부탁한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가 곡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하며 공연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자살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브람스파의 방해로 출판조차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음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의견을 대폭 반영하여 수정한 후 출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개정을 거친 곡들은 대개 원숙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에, 브루크너의 개정 작업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좀 더 많다고 평가된다. 많은 지휘자들이나 관현악단들이 최종적으로 개정된 악보를 사용해 연주와 녹음을 하고 있다. 특히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4번, 8번은 개정작업으로 인해 작품이 크게 개선, 향상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정작업이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어서, 곡에 따라 판본 간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1번, 3번 교향곡이 그런 경우인데, 1번의 경우 말년(1891년)에 행한 개정이 오히려 곡의 개성을 죽였다는 견해가 있어 개정 이전의 1877년 판본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그러나 만년에 개작한 판본의 원숙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그너 작품의 악상 인용과 헌정 시도, 초연의 대실패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3번의 경우, 판본 문제가 가장 복잡하다. 크게 3가지 판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년에 개작한 1890년판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만 그 이전의 1877년판을 선호하는 지휘자도 적지 않다. 여기에 미개정판인 1873년판이 1970년대에 출판된 이후 이 판본에 대한 지지도 크게 늘었다. 3번 교향곡은 개정을 거치면서 관현악법이나 전개가 자연스러워지고 원숙해진 점도 있지만, 청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2악장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삭제가 이루어져 작곡가가 의도한 원래 아이디어와 작품의 아름다움이 크게 훼손된 안타까운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교향곡 제9번도 이런 개정 작업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

3.2. 판본: 개정판과 원전판


브루크너 교향곡 만큼 판본 문제가 복잡한 작곡가가 없다. 브루크너 교향곡은 자신이 직접 대규모 개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전 그리고 사후에까지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판본 문제가 복잡하다.

3.2.1. 개정판(Revised version)


브루크너 교향곡들은 브루크너 생전에 제자들의 손에 의해 검열 및 수정을 거친 후 출판되었다. 스승의 곡이 세상의 외면을 받자 대중들이 좀 더 스승의 곡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소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판본들을 개정판(Revised version)이라 부른다. 브루크너 본인에 의한 것이 아닌 타인들에 의해 개정되었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이러한 개정판에 브루크너 본인의 의중이 어느정도 포함되었는지는 미스테리다. 일반적으로 제자들이 브루크너의 작품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하겠다는 과잉충성심으로 개작을 시도했고,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브루크너는 제자들의 개정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만 최근에 미국의 음악학자 코르스트베트 등은 교향곡 4번의 개정판에 브루크너 본인이 깊숙히 개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르스트베트의 주장은 일관성이 부족할 뿐더러 자신의 판본을 팔아 저작권을 챙기려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개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자의 이름을 따서 샬크판, 뢰베판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출판사 이름을 따서 구트만판, 레티히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개정판(Revised version)들은 9번을 제외하고 대부분 작곡가 생전에 출판되었으며 1934년 원전판이 처음 등장할 때까지는 브루크너 교향곡의 유일한 출판 악보였다.
그러나 1934년 지크문트 하우제거가 9번 교향곡의 개정판(뢰베판)과 원전판(오렐판)을 한 연주회에서 동시에 연주하여 충격을 준 이후 개정판(뢰베판)의 정당성에 큰 의문과 비판이 가해졌으며, 원전판인 하스판이 속속 간행되면서 개정판은 빠른 속도로 사멸했다. 사실 1934년에 큰 파문이 발생한 계기가 된 9번 교향곡의 개정판(뢰베판)은 유일하게 작곡가 사후에 출판된 악보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많았다. 작곡가 사망 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제한적인 개작이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곡은 일단 작곡가 생전에 출판된 것이 때문에 사실 9번 만큼 문제가 크지는 않다. 유명곡인 4번, 5번, 8번을 제외하면 개정판(Revised version)이 원전판과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4번의 개정판은 최근 코르스트베트가 브루크너가 직접 인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논란 중에 있다(교향곡 4번 항목 참조).

3.2.2. 원전판(Original version)


제자들의 교정을 제거하고 브루크너가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기증한 자필 악보를 바탕으로 간행한 악보들이다. '''하스판''', '''노바크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비판교정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브루크너는 만년에 자신의 자필악보들을 대거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이 악보들은 제자들의 손을 거치기 전, 브루크너 본인의 순수한 작품을 담고 있다. 이미 제자들의 손을 거친 악보가 출판된 마당에 브루크너가 만년에 자신의 자필 악보를 기증한 것은 후세를 위해 자신의 원작을 남기기 위한 브루크너의 의도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자필악보를 바탕으로 1930년대에 빈 국립 도서관장인 로베르트 하스와 그의 동료인 오렐, 외저 등에 의해 원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하스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하스가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하스판의 편찬도 중지되었다. 이후 노바크가 새로 편찬한 원전판이 '''노바크판'''이다. 노바크판 편찬이 완료되면서 브루크너 원전판 편찬도 거의 완료되었으나 이후에도 추가적인 자료 발굴 등으로 간헐적인 편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4. 사생활과 관련한 에피소드들


독실한 신자라는 점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데, 빛과 그림자마냥 다소 이해하기 힘들거나 너무 평범해 보일 정도의 성격과 생활 습관도 갖고 있었다.

4.1. 증명서 수집광


어릴 적부터 가난에 시달려서인지 자신의 신분이나 경력을 증명하기 위한 증명서를 받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유명했는데, 고해성사를 충실히 받았다는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교원이나 강사 임명장, 높으신 분들이 내린 상장이나 훈장 등 모을 수 있는 것은 다 모았다. 심지어 제히터나 키츨러에게 받은, 학위와는 인연이 없는 사적인 레슨을 마칠 때에도 '수업을 마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료증을 써달라' 고 부탁해 받아내기도 했다.

4.2. 시골 촌뜨기


브루크너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으로 활동 거점을 옮긴 것은 40대 중반에나 가서였는데, 린츠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독한 오스트리아 고지 사투리와 절망적인 패션 감각으로 인해 사교계와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빈에서 브루크너가 무시당한 것도, 바그너빠라는 요인 외에 이러한 시골뜨기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컸다.
다만 일반적인 향락이나 쾌락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고, 어릴 적부터 술집에서 알바를 위해 줄곧 춤곡을 연주한 탓에 의외로 춤은 잘 췄다고 한다. 교향곡들의 스케르초 악장에서도 이런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서, 브루크너만의 개성으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4.3. 엄한 교육가


작곡가로 성공하기 이전에 브루크너를 먹여살린 2가지 스킬이 오르간 연주와 음악교사였는데, 특히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있었던 경험 때문에 이론 교육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했다고 한다. 빈 대학에서 강사로 있을 때는 제자들의 과제물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사소한 오류라도 발견되면 따끔하게 지적했고, 고전적인 이론의 틀을 준수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다만 제자들이 졸업 후 자신들이 쓴 작품을 보여줄 때에는 너무 이론에 치우친 것을 오히려 비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브루크너 자신도 가끔 화성학이나 대위법의 이론을 거스르는 일탈을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제자들인 페르디난트 뢰베와 프란츠 샬크는 졸업 후에도 브루크너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단 개정판 양산이라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4.4. 독신


브루크너는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연애 에피소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연애 대상으로 삼은 여자들이 모두 10대 소녀들이었기 때문인데, 40~50대의 촌스러운 아저씨가 파릇파릇한 여중생과 여고생들에게 '나랑 사귀어주지 않겠나?' 라고 들이대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
물론 이렇게 세련되지 못한 구애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브루크너가 음악적으로 받은 비판과 더불어 소심남의 기질을 평생토록 버리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5. 사후의 재평가


브루크너의 음악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음악계의 논쟁 떡밥으로 등장했지만, 논쟁이 격화될 수록 음악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1930년대에는 제자들이 멋대로 개정한 악보 대신 브루크너의 자필보에 의거한 공식적인 원전판 악보들이 간행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브루크너 음악을 바그너화하던 관행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4]
하지만 동시에 나치의 득세로 인한 브루크너 음악의 곡해도 진행되었는데,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바그너빠였다는 기질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키면서 독일 음악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선전에 허구헌날 휘둘리게 되었다. 프로 관현악단들 뿐 아니라 나치 친위대돌격대 산하 음악대도 정치 집회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했고, 친나치 어용 음악학자들에 의해 브루크너 음악과 반유대주의를 억지로 끼워맞춘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초기 편집자였던 로베르트 하스도 1933년에 주화입마하면서 나치에 입당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입당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신나게 까였고 브루크너 협회는 물론이고 교직에서도 강제 은퇴당해 야인으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5] 물론 하스의 브루크너 작품 편집이 사료에 기반한 객관성 보다는 하스 자신이 소위 '영적인' 면으로 접근한다며 여러 판본을 뒤섞어 모호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신이 가필까지 하는 등 비학문적이었다는 점이 하스판에 대한 중요한 비판의 준거로 사용되고 있지만, 하스의 나치 전력 역시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랬던 탓에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에서 잠시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보이콧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바그너와 달리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천명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얼마 가지 못했다.
정치적 논란보다도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개성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과정이 상당히 험난했다. 브루크너 작품들의 사후 재평가라는 것도 오랫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같은 독어권 국가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말 드물게 연주되었다. 음반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더디게 나왔는데, 당시 한 면에 4분 30초 정도까지만 수록할 수 있었던 SP 레코드의 한계 때문에 브루크너 교향곡 한 곡을 취입하려고 해도 6~8장의 음반이 필요했다. 이렇게 녹음 작업에 몇 배의 돈과 노력이 필요한 데다가 브루크너 음악 자체도 독어권만 벗어나도 인지도가 대단히 떨어지던 상황이라,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많은 음반사들이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의 제작을 꺼려했다. 그나마 교향곡 중 가장 인기있는 축에 속하는 7번은 1924년에 오스카 프리트 지휘의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이, 1928년에 야샤 호렌슈타인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전곡 녹음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해 최소 두 종류의 음반이 유통되었지만, 나머지 교향곡들은 전곡이 아닌 상대적으로 짧은 3악장 스케르초 정도만이 찔끔찔끔 나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 오픈릴 테이프와 이 테이프를 사용하는 녹음기인 마그네토폰이 독일에서 실용화되면서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테이프들이 자료실에 쌓이기 시작했고, 나치 집권 후 브루크너 교향곡에도 바그너의 오페라 못지않은 애정을 보여준 히틀러와 여타 나치 고위층 인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텔레풍켄이나 엘렉트롤라 같은 독일 음반사들이 돈을 듬뿍 들여 오이겐 요훔과 카를 뵘 등의 지휘로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본격적으로 녹음하기 시작했다. 종전 후인 1953년 1~2월에는 스위스의 지휘자 폴크마르 안드레에가 빈 교향악단을 지휘해 빈 교통방송국(RAVAG)에 사상 최초로 교향곡 1~9번 아홉 곡의 방송용 테이프 녹음을 남겨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955~62년에는 독일 지휘자 한스 로스바우트가 자신이 상임 지휘자로 재직하던 바덴바덴 남서방송 관현악단과 남서독일방송에서 마찬가지로 브루크너 교향곡 1~9번 전곡 녹음을 시도했지만, 1번 한 곡을 남겨둔 상태에서 로스바우트가 사망해 2~9번 8곡만 녹음되었다.
그러나 2장 정도면 브루크너 교향곡 1곡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수록 시간이 훨씬 길어진 LP가 음반 포맷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1950년대 후반 이후에도 브루크너 교향곡의 연주와 상업용 음반 녹음은 독어권 바깥에서는 상당히 드문 편이었다. 이웃나라 프랑스만 봐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브루크너 교향곡들은 거의 연주된 적이 없다. 70년대 말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다니엘 바렌보임이 교향곡 9번을 연주하기 위해 무려 15회나 리허설을 한 것만 봐도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이 얼마나 생소하고 난해한 곡으로 여겨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1960년대 이후 음반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브루크너 작품도 서서히 세계적으로 저변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까지만 해도 브루크너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메이저 음반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녹음하길 꺼려하는 레퍼토리에 속했다. 지휘자 왕국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1960년대말에 오이겐 요훔의 지휘로 세계 최초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다. 당시 DG에서는 요훔 말고도 카라얀, 뵘이 브루크너를 녹음하길 원했지만, DG에서는 많이 팔리지도 않는 브루크너를 중복 녹음하길 꺼려했기 때문에 카라얀은 영국 음반사 EMI[6]에서 뵘도 마찬가지로 영국 음반사 데카[7]에서 브루크너를 녹음해야만 했다. 브루크너 교향곡 0번을 포함한 전집도 60년대 하이팅크, 70년대 아사히나 다카시의 전집이 0번을 포함해 출반되는 방식 아니고서는 단독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 연주 빈도도 높아지고 음반들도 많이 쏟아져 나오면서 영화드라마에까지 인용될 정도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다.[8][9] 2000년대 후반에는 교향곡 제5번이나 제7번을 퓨전 재즈로 편곡해 연주하는 시도까지 나온 바 있다.
아시아에서는 클래식의 인기가 높은 일본에서 무시무시한 보급률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재 브루크너 교향곡의 가장 많은 음반을 출반한 지휘자도 일본인인 아사히나 다카시(朝比奈隆)다. 자신이 무려 50여 년 동안 음악 감독으로 있었던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무려 3차례나 1~9번 교향곡 선집을 만들었고, 이외에도 NHK 교향악단과 도쿄도 교향악단, 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해 여러 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60년대부터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꾸준히 연주해왔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는 일본에서 브루크너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열린 교향곡 7번 공연은 하스판으로 연주하고도 노바크에게 호평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브루크너 교향곡을 매우 자주 무대에 올려 대중화에 이바지한 아사히나가 2001년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일본의 브루크너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상태인데, 도쿄도 교향악단은 후술할 엘리아후 인발을, 도쿄 교향악단은 위베르 수당을 상임 지휘자로 초빙해 브루크너 교향곡 연속 연주회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음반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도 도쿄 교향악단은 조너선 노트를 음악 감독으로 영입해 브루크너 공연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한국에서는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보급이 다소 늦은 편이었는데, 1971년에 국립교향악단(현 KBS 교향악단)이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홍연택의 지휘로 교향곡 8번을, 1973년에 국립극장 개관 기념 음악회에서 4번을 초연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90년대 들어 브루크너 교향곡의 연주 빈도도 제법 늘어났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급작스럽게 붐을 일으킨 말러에 비하면 공연 빈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특히 연주상의 길이나 난이도 때문인지 대표작인 제8번의 공연이 당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1년에 홍연택이 8번을 초연한 이래 2번째로 우리나라에서 동곡이 연주된 것은 2002년 도이체 융에 필하모니 내한공연이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이동호 지휘의 제주도립교향악단(구 제주 시립 교향악단)이 한국 최초로 교향곡 11곡 전곡을 완주하고 그 실황녹음들로 세계에서 5번째의 전집 CD를 내놓았다. 현재 11곡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들은 엘리아후 인발과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 게오르크 틴트너, 이동호, 마르쿠스 보슈, 시모네 영, 게르트 샬러 8명뿐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진귀한 기록인 셈이다.[10]
제주도향 이후에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뒤이어 1~9번 연속 연주회를 진행했고, 해당 악단의 수장이었던 임헌정이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이임한 뒤 2014~16년 동안 다시 1~9번 연속 연주회를 개최했다.[11]이외에도 박은성이나 금노상, 정치용 같은 오스트리아 유학파 지휘자들도 곧잘 공연하고 있다. 다만 곡들의 연주 시간이 꽤나 길고 다른 낭만주의 시대의 곡들보다는 자극적인 요소가 적은 편이라,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지루함을 참지 못해 나가는 청중들도 종종 보이고 있다(…).[12]
2017년 6월에는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서울 시향과 KBS 교향악단이 차례로 브루크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할 예정이어서 주목되고 있다.[13] 2019년 11월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내한 공연을 열고 교향곡 제8번을 연주했고 2021년 초에는 안드리스 넬손스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9번을 연주할 예정으로 외국 오케의 내한공연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이 연주되는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6. 주요 작품들



6.1. 교향곡




6.2. 관현악


3개의 관현악 소품&행진곡 D단조 (1862)
서곡 G단조 (1862~63)

6.3. 실내악


현악 4중주 C단조 (1862)
현악 4중주를 위한 론도 C단조 (현악 4중주 4악장의 대체 악장. 1862)
현악 5중주 F장조(1879)
현악 5중주를 위한 간주곡 D단조 (현악 5중주 2악장의 대체 악장. 1879)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저녁 하모니’
3대의 트롬본을 위한 2개의 에큘레
현악 4중주를 위한 스케르초 G단조

6.4. 관악합주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 E플랫장조 (1865)

6.5. 피아노


추억 A플랫 장조
환상곡 G장조
피아노 소품 E플랫장조
4개의 랜서 카트리유 C장조
네 손을 위한 6개의 카트리유 D장조
피아노 소품 ‘스테리아마커’ G장조
한 가을 저녁의 조용한 묵상 F샤프 단조
네 손을 위한 3개의 작은 소품
피아노 소나타 G단조
왈츠 E플랫 장조
왈츠 C장조
폴카 C장조
마주르카 A단조
미뉴에트 C장조
미뉴에트와 트리오 G장조
행진곡 D단조
안단테 E플랫 장조
에튀드 G장조
반음계 연습곡 F장조
주제와 변주곡 G장조
4개의 환상곡

6.6. 오르간


푸가 D단조
후주곡 D단조
전주곡 E플랫 장조
4개의 전주곡 E플랫 장조
전주곡 C장조
안단테 D단조
전주곡과 푸가 C단조

6.7. 종교음악



6.7.1. 대규모


레퀴엠 D단조 (1849)
마니피카트 B플랫장조 (1852)
장엄미사 B단조 (1854)
축전 교성곡 '주님을 찬양하라(Preiset den Herrn)' (1862)
혼성 8부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시편 112 B플랫장조 (1863)
미사 제1번 D단조 (1863~64)
미사 제2번 E단조 (1866)
미사 제3번 F단조 (1867~68)
테 데움 C장조 (1881~84)
시편 150 C장조 (1892)

6.7.2. 소규모


독창과 오르간을 위한 코랄 '저 마지막 밤들에(In jener letzten der Nächte)' (1848)
혼성 5부합창과 세 대의 트롬본을 위한 시편 114 (1852)
혼성 7부합창을 위한 찬가 '마리아를 찬미하나이다(Ave Maria)' (1861)
혼성 4부합창과 세 대의 트롬본을 위한 봉헌송 '처녀들은 왕 앞에(Afferentur regi)' (1861)
혼성 4부합창을 위한 찬가 '입을 열어(Pange lingua)' (1868)
혼성 4부합창을 위한 층계송 '이 곳은 거룩한 성전(Locus iste)' (1869)
테너 독창, 혼성 4부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응답송 '아름다우신 마리아여(Tota pulchra es Maria)' (1878)
혼성 8부합창을 위한 층계송 '의로운 이의 입은(Os justi)' (1879)
혼성 4부합창을 위한 층계송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Christus factus est)' (1884)
혼성 4부합창을 위한 층계송 '예수의 지팡이(Virga Jesse)' (1885)
혼성 8부합창과 세 대의 트롬본, 오르간을 위한 층계송 '보라, 대사제로다(Ecce sacerdos magnus)'[14] (1885)
혼성 4부합창을 위한 찬가 '왕의 깃발(Vexilla regis)' (1892)

6.8. 세속 합창


남성합창과 금관합주를 위한 '게르만족의 행렬(Germanenzug)' (1863-65)
헬골란트 (1893)

[1] '발퀴레' 에서 보탄이 브륀힐데를 마법의 불 속에 가두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자 '왜 저 여자가 저렇게 되는 겁니까?' 라고 옆에 있던 청중에게 물어봤다고 한다.[2] 튜바라고는 해도 구조와 주법은 호른에 가까운 악기고, 8번과 9번에서는 5~8번 호른 주자들이 바그너 튜바로 악기를 바꾸어 연주하라고 지시하고 있다.[3] 전작인 7번의 2악장에도 두 타악기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브루크너 자신의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4] 그렇다고 무단 개정판들이 완전히 도태된 것은 아니다. 몇몇 지휘자들은 원전판을 기본으로 쓰면서도 무단 개정판에서 더 효과적인 대목이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5] 전후 오스트리아의 미적지근한 나치 잔재 청산 움직임과 맞물려 오스트리아에서 1938년의 합방(안슐루스) 이전 나치에 입당한 이들은 같은 시기 독일의 나치 입당자보다 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금까지도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 것도 비합법 정당에 불법 가입했다는 이유 때문이다.[6] 1970년 브루크너 교향곡 4, 7번 녹음.[7] 1970, 73년 브루크너 교향곡 3번, 4번 녹음.[8] 한국에서는 KBS의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교향곡 제7번의 2악장이 삽입된 바 있다.[9] 은하영웅전설에서는 말 아데타 성역 회전에서 뷰코크의 전사후 제국군제독들이 기립으로 경의를 표하는 씬에서도 나온다. 6분 30초 이후[10] 다만 시판품이 아닌 악단에서 활동 기록용으로 자체 제작한 비매품이고, 악단 측에 직접 주문해야 소량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상업화의 움직임은 없는 상황.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3번 이전의 작품들은 습작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경향이 있으며, 실제로 그다지 인기도 없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대가인 여러 지휘자들도 00, 0번은 물론, 1, 2번도 아예 연주하지 않거나 녹음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위에 언급된 6명의 지휘자들이 브루크너 교향곡의 절대 권위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11] 임헌정 입장에서는 첫 완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천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 당시에 건강 문제로 1, 2번은 다른 지휘자가 맡았다.[12] 5번이나 8번 교향곡의 경우 평균 연주 시간이 75~80분 가량이다.[13] 무슨 곡인지 설명하자면, 1악장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라인하르트가 죽어가는 키르히아이스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나오는 음악이다. 또한 2악장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비장함이 감도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3악장은 역시 은하영웅전설에서 로이엔탈이 란테마리오 회전에서 미터마이어, 비텐펠트 등과 결전을 벌일 때 나오는 음악이다.[14] 한국 가톨릭에서는 '보아라 우리의 대사제'라고 번역한다. <가톨릭 성가> 304번으로 수록되어 있고,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서 입당성가로 불린다. 들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