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곤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승곤은 1881년 1월 28일 평안남도 평양부 하수구리에서 한경홍(韓慶洪)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86년부터 한문을 수학했고, 1902년에 평양 시내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03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1907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2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장로회 목사 안수를 받고 1912년 평양 산정현 교회 제1대 담임 목사로 부임해 1916년까지 목회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3년에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와 로스앤젤레스 한인감리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1917년 12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에 가입하였고, 1920년 흥사단 의사장(議事長)에 선임되어 의사부를 이끌었고 1921년에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922년과 1923년에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흥사단 이사부장으로 선임되어 1926년까지 복무하였다. 1925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흥사단 대회에 참여해 흥사단 이사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1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열린 흥사단 제17차 뉴욕 대회에서 대회장을 맡았으며 1936년 1월 1일에 열린 흥사단 제22차 북미 중서부 대회의 대회장을 맡았다. 또한 그 해 5월 17일에 개최된 북미대한인국민회(北美大韓人國民會) 총회에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 정부 재정 후원 문제와 항일 독립운동 세력 규합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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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6년 국내로 귀국하여 수양동우회 동지들과 교류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경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41년 11월 최종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 뒤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7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한승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