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1. 개요
2. 과정
3. 한일기본조약의 체결
4. 같이보기




1. 개요


한국일본은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조인함으로써 수교하였다.

2. 과정


미국의 주도하에[1]1951년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의 교섭은 14년 동안의 회담 개최와 결렬 다시 개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양국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1964년 3월 정부가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데모대가 중앙청에 몰려가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부는 학생데모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꾸준히 한일회담을 추진한 결과 1965년 6월 22일 한ㆍ일 양국정부는 세계 외교사에서 전례가 드문 이승만 정부 이래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정상화 교섭을 마무리 짓고,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 사이에 '한일 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그해 7월 14일 민주공화당의원들이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조약과 제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비준동의안'을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하자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은 의원직사퇴서를 제출하며 맞서는 등 여야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결국 8월 14일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의결되었다.

3. 한일기본조약의 체결



한일기본조약은 7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조약의 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다.
이 기본조약에 의하여 한-일 양국은 외교, 영사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 및 그 이전에 양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은 대한민국한반도에 있어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2]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양보가 크게 논란을 빚었다
특히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는 일제 강점하 피해자 보상 문제에 갈등 요인으로 남아있다.

4. 같이보기


[1] 당시 베트남 전쟁이 가시화되어 동북아의 공산진영에 대항하는 구도를 설립하려 양국에 하루빨리 하라며 압박하였고 8억 달러는 일본에 강요해 온 것이며 반대 여론을 경청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결여된 가장 큰 요인이다.[2] 일본의 과거사 사죄 미흡은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