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중문화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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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를 막음으로 해서 좋은 문화는 못 들어오고 나쁜 문화만 스며 들어와서 '''폭력, 섹스''' 무슨 이런 범죄의 문화들이 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 김대중, 국민들을 설득하는 연설에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며 더 이상의 문화 쇄국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김대중, 한일정상기자회견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
- 김대중, 업무 보고 중에서.
'문화' 두 글자만 씌우면 아무거나 문화적으로 장식되는 양 착각하면서 진실로 아끼고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는 막상 설 자리가 없다. 대를 잇지 못해 사라져가는 인간문화재를 아쉬워할 여유조차 없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면 일본은 차라리 부러운 면을 많이 갖고 있다. '''대중문화로 돈을 몽땅 버는 사람은 돈 때문에 치켜세우고, 오랜 전통문화를 새로 가꾸는 사람은 문화적 자존심의 발양으로 우대하는 풍토'''가 그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도 그런 '이중성'을 수입했으면 싶다. 대중문화를 상품화하는 노하우를 배우고 끝끝내 자기 것을 세우고 지키려는 노력에도 더 주목했으면 한다.
- 경향신문 1998년 10월 16일자 최일남 칼럼 <상품으로서의 日 대중문화>
1. 개요
국민의 정부부터 참여정부까지 1998~2004년 6년 동안 4차에 걸쳐 이어진 일본 대중문화[2] 수입 허용 정책. 지금이야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현지 분위기를 살린 외국 음식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등 사실상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3] 의아할 수도 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문화는 왜색이라 하여 양성적으론 금기시되고 있었다.[4]
이러한 가운데 김대중 정권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국민들을 향한 설득 이후 일본 문화는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한다. 굳이 일본 문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극단적인 혐일주의자가 아닌 한 좌우 가리지 않고 인정하는[5] 김대중의 업적이다. 동시에 노무현의 업적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 노무현 대통령은 방일 당시 출연한 한 일본 방송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초난강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묻자 국가가 문화 분야에 간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의 정책 설명은 이곳을 참조.
2. 초기 인식
2.1. 외교적 측면
1945년 8.15 해방 뒤부터 1998년 10월 이전까지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 문화말살정책까지 시행해서 우리 문화를 지우려고 했으니 문화만 놓고 봐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한일 간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광복 이후 20년이 지난 1965년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되었으며,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견해 차이와 국민들의 반발이 엄청나게 벌어졌을 만큼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도 높았다. 그래서 국교 수립 이후 정치/경제적으로는 일본과 친밀해졌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학자 이성환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문화교류와 관련된 양국의 입장은 한일 양국 간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양국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협상과정'이라고 잘 일컬어지는데, 이는 같은 식민피해자인 대만이나 동남아 각국이 1950년대부터 일찍 일본과 교류한 것만 봐도 이는 예외적인 모습이었다. 그만큼 두 나라와의 갭은 너무 컸던 것이었다.
이정식 교수는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시기 한일협정 실패 이유로 협상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원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해 짓밟힌 국민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정신적 화해'를 거론했는데, 한국은 일본에 대해 정신적/도덕적, 통합적, 동양적이었으나, 일본은 법적/실용적 입장을 취하며 단편적이며 서구적으로만 보았다. 그런고로 한국인은 인간의 고통과 모욕감을 논한 반면, 일본인은 그러한 식민지배가 한국에 가져다 준 물질적 혜택을 거론한 것이다.[6]
그런고로 한일협상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는데,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구보타 간이치로(1902~1977)의 망언과 한국 국민을 노예상태로 규정한 1943년 카이로선언으로 대표되는 양국 간의 갭이 1950년대 한일협상을 난관에 봉착하게 만든 것이다. 이 협상에서 일본 측은 물질적 피해만을 강조하며 법률적 접근을 시도한 반면, 한국 측은 정신적 피해만을 강조하며 도덕적 측면을 강조시켰다. 이용희 교수 역시 일본에 대한 저항이 전통적 왜노관(倭奴觀)-상무적 후진문화로 보는 멸시에서 호랑(虎狼)과 같은 수구관이 첨가되어 그 위에 우리보다 앞선 근대국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인이 겹쳐 민족적 대립의 콤플렉스가 형성되었다고 같은 맥락에서 얘기했다.[7]
이런 민족적 정체성의 손상은 자연스레 일본 식민지배 반성과 사과의 요구로 이어지며,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왜색 지우기와 일본 문화유입 금지 조치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런 인식 구조 하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한국인의 대일 거부감이란 국민정서의 상징이자 일본에 대한 민족적 거부 심리의 최후의 보루'[8] 로서 정착해 왔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인식변화가 없는 한은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 유입은 아주 곤란했던 것이다.
1963년 2월 13일에 개최된 예비교섭 문화재관계 제1차 회의록 요약본 2페이지에 의하면, 한일회담 당시 문화재관계회의 교섭과정에서 문화교류에 대한 한-일 간 입장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문화재소위에서 한국은 1905년 이후 식민지배 시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 반환만을 전제로 했으나, 일본 측은 문화재 반환을 계기로 문화교류를 협정해 문화개방을 촉진토록 요구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문화재 교류 의무는 없으나, 문화협력의 견지에서 문화재 인도를 고려한다는 일본 측 입장과 문화교류보다 식민지 약탈문화재 반환이 선결과제라고 하여 반환문화재 품목의 목록제출을 요구하는 한국 측 입장이 맞섰던 것이었다.
재차 일본 측은 문화재 품목 목록과 문화협력 문제를 병행해 토의하고 의정서를 채택하자는 식으로 문화재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9] 결국 양국의 입장을 절충하여 1965년에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선언에서 양국은 문화교류에 대해 가능한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적 규정을 두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문화재를 되찾아 손상된 민족문화를 회복한다는 의도를 지닌 반면, 일본은 문화재를 반환하는 대신 한국이 일본문화의 유입을 허용토록 하는 전제조건이 깔려있었던 것이었다.
국교 정상화에 즈음해 한국이 일본 문화를 강력히 막아왔던 것에는 신생독립국으로서의 사정 역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근대 민족국가 성립 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식민지 동화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민족말살정책을 뼈아프게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민족문화 복원이 큰 과제로 놓여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방 뒤에 전개된 반일 이데올로기 정책은 민족문화 복원을 위해선 민족문화 말살하려 했던 일본 문화는 무조건 안된다는 식이었다. 또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문화 개방은 일본 문화의 일방적 수용으로 직결될 위험이 된다는 현실도 고려되었을 수도 있다.
그 증거로 한일협정 이후인 1965년 6월 28일 대통령비서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문물 대량 유입 문제점으로 '국내문화 활동 위축과 문화주체성 약화, 가치판단성 기준 동요' 등을 들며 문화재 자체의 대비책과 정부입법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고, 1966년 3월에 정부는 <국교정상화에 따르는 일본의 정신적 침투에 대한 여론>이라는 보고서에서 "일본 문화 도입으로 정신적 피해를 초래할 일본의 독소문화에 휩쓸릴 위험이 있음을 우려함으로써 일본의 퇴폐적 저급문화 및 정신적 침략을 받게 될 일본풍 종교에 대해 경계한다"고 강한 우려를 표했다.
2.2. 각계의 반응
이렇게 위에서부터 일본 문화 개방에 난색을 보이는 가운데, 당시 대학가도 1964~65년 6.3 항쟁 및 한일협정 반대투쟁, 1984년 전두환 방일 반대 투쟁에서 볼 수 있듯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10]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좌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해 사회적 반대가 심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운동권에서는 종속이론에 근거하여 매판자본 및 일본 종속화 비판, 외세 배격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달가워 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수입차 역시 한국 시장에서는 거의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다.
광복회 등 호국보훈 단체와 순국선열 유족회 등 애국 성향 단체들 역시 과거 35년간 한반도를 장악 및 지배하여 한민족을 고압(苦壓)으로 몰아간 왜놈들의 저질적이고 침략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 분야에 식민지를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반대했다.[11] 거기에 독도 영유권 및 재일교포 차별 문제까지 해결되지 못한 마당에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우려가 있었는데, 일본에게 국가 재정의 반(半)을 파탄시킬 정도로 돈을 퍼줄 대가가 있느냐는 의견도 나왔다.[12] 당시는 일본어를 쓰거나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주의깊게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종교계의 반대도 심했는데, 가령 천주교와 개신교계의 경우 제암리 학살사건이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앞장서서 일본 문화를 배척하는 편이었다.[13] 특히 당시 '낮은 울타리' 같은 잡지에서는 대놓고 "일본 문화는 마귀적인 우상 숭배 문화이니 죽어도 들여올 수 없다."는 논지의 글도 있었다.
또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성균관 등 유교 및 유림계[14] 도 반발하며 한민족을 말살하고 유교 문화까지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조상들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나마 불교계는 대일 교류의 역사가 꽤 됨에도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15]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종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성적인 컨텐츠가 당대 한국보다 훨씬 활성화되었던 데다가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이러한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대해 심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본의 방송국들 대다수가 민영방송이었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민영방송들은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내보냈다.[16] 민영방송이 신문사와 겸업을 하고 있어서[17] 이러한 심의 강화 움직임에 대해 대응을 하였던 것. 거기에다가 이러한 심의 움직임에 대해 문화계 내부의 반발이 강해서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부터는 범죄 관련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면서 심의가 강화되어가고 있지만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폭력성이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만화 가운데서도 이런 폭력성이나 선정성이 심각한 만화들도 꽤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는 저질 문화'라는 통념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된 컨텐츠가 아니더라도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일본을 다룬 영화가 수입 단계부터 불허되거나 수입했어도 개봉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64년 동아일보는 일본 문화가 유입되는 당시 상황을 미국이 일본을 서부극으로 장악했듯, 일본이 한국에 가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침략 형태"라며 이러다간 "한국의 얼은 머지않아 일본화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주로 중상류 계층에겐[18] "그들은 TV를 통하여 일본화되어 가고 있다"거나 "뒷골목에는 일본의 저속한 잡지가 유통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기사.
해당 기사를 읽어보면 대중문화 자체보다도 여러 일본어 잔재들이 살아나고 일본 음식과 수입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등 전반적인 일류 현상 자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기만 해도 이런 일본산들이 판치지 못했는데, 자유당 말기와 장면 내각부터 이런 흐름이 완화되더니 박정희 정부 들어 심해졌다며, 정부도 이에 당황했는지 제재 강화를 고려하고 있다는 공보부 장관의 말로 기사가 마무리된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1967년에 한일문화교류 협정을 추진하려고도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자 무산시킨다.
이는 일본 문화가 아니더라도 주로 일제, 국산을 막론하고 만화,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당시 부정적인 사회 인식도 한몫했는데, 1948년 수필가 양미림의 <만화시비>와 염상섭의 <만필의 만화시기> 등과 같은 활자 문학인들의 만화 비판, 그리고 간윤의 만화 검열제 등으로 만화를 '비교육적 저질문화' 취급하며 만화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어린이날에 어느 나라 작품이건 상관없이 만화책들을 모아 '''불량만화'''라면서 태우는 행사 같은 것도 있었고, 심지어 1980년 8월에는 <방송자율정화방안>의 일환으로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을 실시한 바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만화와 애니를 주 문화 산업으로 키워나가던 일본 문화 같은 걸 개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만화, 특히 일본 만화가 주로 폭력에 포악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고 노출 장면도 잦다는 악평이 있어 일본 문화가 저질 문화로 인식되어 온 것도 더해졌다. 그리고 이런 편견 때문인지 2000년대 초만 해도 건전한 수준의 전연령용 및 아동용 컨텐츠가 들어오면 '''"이게 일본 만화였어?!"'''라고 놀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여파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던 구로사와 아키라, 미후네 토시로 등 일본 영화인들, 일본에서 많이 활동한 덩리쥔 등은 유독 한국에서만 대중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상태로 20세기가 지났다.
3. 인식의 변화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문화뿐만 아니라 일본에 관한 소식 자체를 객관적으로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별로 없는 시기이다 보니 수입이 허가된 일부 아동급 애니메이션 등을 제외하곤[19] 케이블도 없던 시절 한국 지상파 TV 방송을 타는 것이 제한된[20] 많은 일본 문화들은 성인급으로 가면 알만한 정보가 많이 차단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도 한국내에 음성적으로 들어온 일본 문화로 인해 개방 이전이지만 특히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나 대도시인 서울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 현지에 비해 시기는 늦지만 유행하는 패션이나 음식 같은 것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문화와 무관하게 일본 제품은 품질을 인증받아 좋은 제품으로 취급되기도 했고. 다만 당시 정서상 일본 문화에 심취한 마니아는 퇴폐 문화를 즐기는 날라리나 오타쿠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고, 불법물 관련해서 경찰서를 다녀오는 일도 있는 등 개인이 뭔가 주체적으로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보니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 문화가 굉장히 왜곡되어 접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여러모로 사회적 시선이 고울리 없었던 것이다.
허나 위의 칼럼에서 보듯이 이렇게 정치권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과 다르게 1990년대 접어들어선 사회 개방 분위기나 서서히 늘어나던 PC 보급과 함께 일본 문화가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특히 대도시 지역 청년층들 사이에서는 이미 일본 문화가 알게 모르게 소비되는 중이었다.그렇다. 일본문화개방을 우리는 법적으로 승인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본문화가 경계둑 너머 갇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미 그 둑은 무너졌고 그 검은 안경을 눌러쓴 일본문화가 어두운 통로를 거쳐 서울의 샹들리에 불빛에 버젓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청담동의 어느 카페를 가보라, 그곳은 결코 서울의 카페가 아니다. 일본 그림 아래 일본식 쇼트컷을 한 일본 패션의 여자와 남자가 일본 노래에 푹 젖어 차를 마시고 있다. 물론 10대들이 태반이다. 청담동 뿐만이 아니다. 명동에는 금지된 가요 음반과 금지된 잡지가 줄을 이어 널려 있다. 10대보다 더 어린이들의 놀이대상인 만화 비디오도 거의 일본 것이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찾아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길을 걷노라면 쉽게 눈에 띄는 것들이다.
- 경향신문 1994년 3월 5일자 정동칼럼 <이미 둑을 넘어온 일본문화(신달자 글)>
참고로 일본 문화의 보편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던 1960~70년대엔 일본의 대중문화인 일본 만화, 영화는 주로 일본 문물에 관심이 많고 일본어가 가능한 지식인 계층이나 일본 출판물을 입수할 수 있던 중상류층들이나 소비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21]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쯤 되자 상황이 점차 바뀌게 된다. 1970~80년대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해외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한국이라 할지라도, 무역업을 하거나 여러 이유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곧잘 일본 물건들을 사서 들여오고 있었고,[22] 보따리 장수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어느정도는 해외 상품이 들어왔다. 남대문 중국 대사관 앞에는 해외서적 서점이 꽤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비록 몇 달 지난 것이어도 일본의 논노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잡지를 사서 볼 수 있었고, 'Burrn!' 매거진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락덕후들도 이러한 상점들을 드나들었다.[23]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몇달 지난 잡지가 들어오는 등[24]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만 그래도 사서 볼 사람들은 다 사서 봤다. 더군다나 잡지사, 출판사 등에서 돈벌이용으로 일본서적들을 무단으로 베껴서(...) 출판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문화가 어느정도 펴져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도 보고 즐길 만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라도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25]
게다가 부산은 쓰시마 섬에서 넘어오는 일본 TV와 라디오[26] 전파가 잡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역도 부산/경남이었다.[27] 1980년대쯤 되면 한국이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일본 노래가 다운타운[28] 에선 대놓고 유행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이 시기를 1차 일본문화 붐으로 보기도 한다. 나이트 클럽에서는 콘도 마사히코나 C-C-B, P-MODEL, 안전지대, 마츠다 세이코, wink, 엑스재팬, 나가부치 쯔요시 등의 노래가 알게 모르게 울려퍼지기도 했고, 명동과 이태원의 음악 다방에는 자칭 일본음악 애호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웹툰작가 seri처럼 카드캡터 사쿠라 등 NHK <BS 아니메극장> 류 애니를 접하면서 입덕한 경우도 있다. 다만 부산 시민들 사이에선 1980년 7월에 '일본 TV 안 보기 운동' 같은 걸 벌이기도 했고 1984~86년경에는 정부가 일본방송 침투에 대해 대책안을 세우려고 했으나,[29] 실효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일본 문화가 싫다고 해도 가전제품은 일제가 좋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사실 그 시대에 좀 산다는 사람들치고 소니나 내쇼날, 워크맨에 껌뻑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30] . 이러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세운상가, 용산 전자상가 등지에서 일본 상품이 유통되면서 덩달아 일본 문화 컨텐츠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한국의 빽판 전통에 힘입어, 1980년대에는 복제판 레코드와 테이프가 유통되었고 1990년대에는 복제판 CD나 비디오 등이 유통되었다. 만화책도 이미 1951년 서봉재 화백이 그린 <밀림의 왕자(소년 케니야)>를 시작으로 해적판(...)이 들어와서 성행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대해 논의해 보자면, 이러한 일본 대중문화들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오타쿠 문화는 주로 고소득층 소비자들의 문화였다. 이는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오타쿠는 고급문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중반 세운상가와 청계천을 유령처럼 떠돌던 1세대 오타쿠들의 이야기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31]
그리고 한국 내에서도 외국 애니를 접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32] 보다 일본, 미국에서 애니 수입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이유 때문에 수입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지상파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합작 애니메이션인 황금박쥐가 TBC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TBC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기 시작했고, KBS와 MBC에서도 이를 따라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뾰로롱 꼬마마녀 같은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당대의 방송심의에 따라서 방송사들이 왜색 분위기, 또는 일본어 서체가 있거나 일본적인 성격이 짙은 부분은 모두 삭제 및 영상편집기술이 빈약했던 당시에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로 대충 수정하는 방법으로 배제, 지명 같은건 도쿄→서울, 요코하마→인천, 오사카→부산, 교토→경주, 고베→마산 등으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하고 캐릭터 이름 역시 모두 한국식으로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보다는 한국식 이름으로 고치면서 일본 애니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지만 TV에 방영된 덕에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친숙해지는 데 기여하긴 했다.[33]
물론, 이에 대하여 자국 산업 육성 등한시 같은 문제 제기도 많았지만, 방송사 내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던데다가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가 상당히 돈이 드는 일이라 방송심의가 엄격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방영되었고, 오히려 국산 TV 애니메이션 제작, 방영이 1987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34] 그나마 이것도 올림픽 + 시청료 거부 운동의 영향 덕택이었다. 제작 계획 자체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
애초에 이때는 이런저런 검열하고 수입에도 일정부분 제한을 가하거나 수입금지 딱지를 붙였던 시절임에도 애니메이션 쿼터제 같이 국산 애니메이션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의외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 더 그렇다. 정부 부처 지원으로 영화 애니메이션을 지원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무턱대고 지원해 준 것도 아니었다. 각종 민원에도 TV애니메이션의 제작이 꽤나 오랜기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그나마 독재의 끝에 다달아서야 겨우 제작에 나선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기간 동안 당시 정부 부처에서 직무를 유기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당대에 이런저런 검열이나 독점 만화출판사 비호 등으로 국내 만화가들의 창작을 제한시킨 행태를 생각해 보면 의외의 행보였다.
거기에 금지에도 불구하고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만화 캐릭터, 작품[35] , J-POP 등에 대해서 표절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J-POP 표절 사례는 일본문화 개방 직전인 1990년대에 극에 달했는데 단적인 예로 이 시절 최고의 그룹이던 룰라는 자신들의 대표곡인 천상유애가 하필 일본가요 표절곡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36] 그 외의 내용은 표절/공식 판정, 빽판, 클로버 문고, 다이나믹콩콩코믹스, 홍수철 등의 문서 참조.
이전까지 유능한 싱어송라이터였던 홍수철은 일본가요 하나를 아주 대놓고 표절해서 히트를 치다가 표절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요계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매장 당했다. 만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서, 학습 만화의 대표주자 중 한명이었던 이원복도 초기작에서 치바 테츠야의 작품들을 표절한 바가 있다. 또 위성방송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 성인방송(...) 시청을 목적[37] 으로 디렉TV재팬이나 스카이퍼팩트의 수신기(셋톱박스)를 밀수입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무조건적인 차단은 오히려 음성적인 부작용을 키워 나라 망신만 시킬수도 있다는 역설에 따라 개방의 필요성도 요구되기 시작한다.
게임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는 콘솔 게임이든 오락실 게임이든간에 일제 위주였고, 1987년에 국산게임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도 한동안 제대로 성공한 게임이 나와주지 못한 탓에 2010년대까지도 여전히 콘솔 게임은 일본산 게임의 점유율이 높다. 1992년 폭스 레인저가 성공하고 국산게임이 본격적으로 양산된 이후로는 국산게임의 점유율이 올랐지만 오락실이나 콘솔게임은 여전히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으며, 국산게임이라고 해도 일본게임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작품들이 많았다. 19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국산게임의 점유율이 올라가게 되었고, 2000년대 와서는 한국과 일본의 게임수요 방향이 달라지게 되면서 국산게임의 점유율이 일본게임을 월등히 앞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문화개방을 거듭 요구했는데, 사실 한국이 식민지배의 기억을 근거로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을 막아온 반면, 일본은 반대로 그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더 열을 쏟게 된다. 한 예로 일본측은 1972년에 '국제교류기금'을 세우고 1987년에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를 세워 대외 문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80년대 이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닌 '경제대국이자 국제화된 일본'이라는 대외 이미지 세탁에 열을 올림으로써 전범국이 아닌 '새로운 일본'을 대외적으로 소개해 과거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으려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이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용/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대중문화의 문화외교적 특성'을 발견해냈다. 그 예로 일본 인기드라마 <오싱>은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각국은 근대사의 고난과 가족애 등을 일본과 공유함으로써 근대 일본제국 시절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해 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특성은 1987년 대만(중화민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도 나타났다.
위와 같은 일본 문화의 확산을 배경으로 하여 1988년 5월에 영국을 방문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런던 연설에서 '세계에 공헌하는 일본'을 실현하기 위한 3개 정책 중 하나로 국제문화교류를 역설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5년간에 걸친 <국제문화교류 행동계획>을 발표하는 등 문화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한국에선 1980년대 초반부터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1981년 한일의원연맹 제9차 합동회의에서 '문화교류기금 설정'이 합의된 이래 1983년 12월부터 2~3년마다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는데, 일본은 한일정상회담 등의 기회를 이용해 틈만 나면 한국에 대해 일본문화 개방을 요구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억을 지닌 국민감정을 앞세운 한국 정부의 반대로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83년 1월 한일경협 차관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일본 총리대신으로서는 한국을 처음으로 국빈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문화적 국경을 없앨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는 "국민적 기반에 입각한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식으로 공동성명에 반영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3월, 양국은 외무장관회담에서 민간 중심 기구 '21세기한일위원회' 발족에 합의하고 8월에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문화개방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다음해 5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재일 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 개선 문제와 한국인 원폭피해자 치료/요양기금 지원 문제, 북-일 관계개선 추진 시 사전협의 등에 합의하면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언급되었다. 이후 1990년 3월 제4차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에서도 일본은 대중문화 개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UR과 WTO, 그리고 정보화와 시장개방으로 대표되는 국경 없는 세계, 이른바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정부도 무조건 문화 쇄국주의로만 나갈 수 없게 된 것. 그런 연유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사회/학문적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92년에 노태우 정부는 일본의 영화와 음악 개방 의사를 밝혔고, 1994년 1월 31일 공로명 주일대사가 "일본의 대중문화를 음성적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양질의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이제 일본영화, 음악들의 수입을 적극 검토할 시기가 됐다."라고 얘기를 꺼냈다. 이듬해 2월에 이홍구 국무총리 역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필요성을 시사해 문화개방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992년 일본 중의원의 PKO법안 통과로 인한 군사대국화 우려를 비롯해 1995년에는 와타나베/시마무라 망언 사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김영삼 대통령의 한중정상회담 회견 발언("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그리고 독도 영유권 문제와 1998년 한일 어업협정 파기 문제로 국민들간의 반일(反日) 감정이 짙어졌다.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나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운동권이나 호국 보훈단체들은 일본 상품들이나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일본 문화개방을 언급했고, 대통령 당선 이후 실제로 일본문화 개방에 박차를 가했다. 1998년 4월에 문화관광부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공식 확인하고, 5월 13일 '한일문화교류 정책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식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김대중 정부 발족 이후 한일관계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일본 정부와 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덴노가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KBS, MBC)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1998년도 방일 이후 정상화된 한일관계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30억 달러 차관 도입도 구체화시키면서, 마침내 양국 합의하에 일본 대중문화가 1차 개방이 되면서 만화와 4대 국제 영화제 수상 영화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4. 본격적인 한일 대중문화의 개방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일본 문화 대개방을 함에 따라 일본 문화가 한국에 급속도로 유입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후 태어난 한국 청소년 및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때마침 퍼진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 문화나 일본에 관한 내용을 좀 더 효율적으로 접하고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1차 개방은 영화, 비디오, 만화 중 일부를 즉시 개방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삼았다.
이후 계속해서 합의를 거쳐서 조금씩 더 유입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한일간에 마찰이 발생하면 개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1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당시 수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38] 로 인해 개방이 전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에 맞춰서 애국 및 호국단체 등에서는 일본 저질문화 퇴출운동 및 대국민 서명운동을 통해서 일본 문화 전면개방 및 수입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한일관계가 경색 국면을 벗어나자 다시 개방은 재개된다.
4.1. 현재 개방 범위 요약
- 영화 : 전면 개방
- 극장용 애니메이션 : 전면 개방
- 음반 : 전면 개방
- 게임 : 전면 개방
- 공연 : 전면 개방
- 비디오 : 영화 및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개방 범위에서 개방
- 비디오 개방이 영화 및 극장용 애니메이션 + 방송(영비법상의 등급분류 절차를 받지 않음)으로 한정되다보니, 넷플릭스와 같은 비디오 전용 배급업자가 일본산 비디오(넷플릭스의 경우, 주로 TV 시리즈의 형태이다)를 영화로 우회 심의받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 방송 : 다음 분야는 개방되지 않았다.
- 케이블TV, 위성방송
- 15세 이상 및 19세 이상 시청가 드라마
- 버라이어티 쇼, 토크쇼
- 코미디
- 국내 영화상영관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화 및 극장용 애니메이션
- 지상파 방송
- 드라마
- 버라이어티 쇼, 토크쇼
- 코미디
- 일본어 가창의 경우, 국내에서 열리는 일본 가수의 공연을 중계하는 것 또는 일본 가수가 국내 방송에 출연해서 부르는 노래는 허용되나 이 두 경우 외의 것은 불허됨.
- 일본어 뮤직 비디오
- 국내 영화상영관에서 개봉되지 않은 영화
- 극장용 애니메이션
- 케이블TV, 위성방송
4.2. 영화
4.2.1. 개방 이전
영화의 경우 한때 일본색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일본 업체가 제작 스태프로 참여해도 일본 영화로 간주되어 상영이 거의 불가능했다.
- 공작왕(1989) - 애초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만화 원작인 데다가 일본인 감독과 스태프진이 다수 참여했으며, 일본 배우도 2명이나 주연으로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초 국내 개봉이 관계법상 불가능했으나 원표와 글로리아 입을 주연으로 개작한 홍콩판이 종로 허리우드 극장(현 허리우드클래식극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개봉 성공했다.(당시 홍콩판을 상영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걸고 개봉했다.)
- 미완의 대국(未完の対局, 1987) - 중일 합작으로 만들어진 바둑 영화. 양국에서 이렇다할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고. 수입사 한진흥업은 법정 소송까지 가며 수년간 심의 요청을 받아내려 했으나 일본인이 스태프로 공동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입 불가. 소송 도중인 1988년 5월에 수입사가 들여오지 못해 일본 대사관에서 상영한 기록이 있다.
- 아키라(1988) - 국내 배급사인 세라양행에서 "폭풍소년"이라는 제목으로 홍콩 영화로 속여서 개봉했다.
- 파워레인저 더 무비(1995) - 해당 작품은 미국 사반 엔터테인먼트에서 공룡전대 쥬레인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며 감독이고 스태프진, 출연진이 하나같이 미국인인 데다가 멤버들이 수련하는 무도가 태권도인 점에서 국내 상영에 문제될 것 없는 작품이나, 원전이 일본 작품인 데다 토에이가 제작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내 상영관까지 확보된 상태에서 수입 불가.
- 세번 건넌 해협(1995) - 하하기키 호세이의 동명의 소설[39] 을 원작으로 하여 베테랑 감독 고야마 세이치로가 메가폰을 잡아 한국계 일본인 배우 미쿠니 켄타로와 인기 가수 겸 탤런트 미나미노 요코를 주연으로 출연시킨 이 작품은, 일제 시대 징용으로 끌려 갔다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뒤 해방을 맞았으나 한일 양국 어디를 가도 배척을 당하는 한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주제로 했고 장훈 등의 재일교포 유명인사들이 제작비를 후원한 영화였으나, 문화체육부의 일본 국적 영화 수입불가 방침으로 인해 국내 개봉은 물론 11월 6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예정된 시사회조차 무산.
- 벽안의 나비부인(My Geisha, 1962)#: 미국 영화사가 제작했지만, 출연한 미국 영화배우가 게이샤로 분장해 일본 풍이 느껴져 개봉 논란.기사 1963년 12월 31일 중앙극장 개봉.
- 8월 달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 일본 배우가 출연하고 배경이 일본이어서 왜색이 짙다고 상영 허가 보류. 후에 공보부가 상영을 허용했는데, 미국의 원조 정책을 그린 영화로 왜색으로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 세기상사주식회사 수입·배급, 1963년 8월 24일 대한극장 개봉. 그러나 국내에서 찾기 어려웠던 일본 풍경이 관객의 호기심을 끈 덕분에 흥행에 성공했다.
- 해병 동경에 가다(Marines, Let's Go, 1961)#: 왜색 문제로 상영 허가가 보류되었다가 재허용되어 개봉. 동아일보는 "8월 15야의 다집"이 왜색 논란이 일었던 상황을 소개하며, 이 영화(해병 동경에 가다)에 비하면 건전한 편이라고 말했다.기사 1963년 8월 3일 단성사 개봉.
- 요술소년(少年猿飛佐助, 1959)#, #: 일본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이자,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두 번째 영화. 완전한 일본 영화임에도 개봉된 이유는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미국 MGM을 통해 영어 자막이 탑재된 수출판을 구입해왔기 때문. 수입사는 MGM 제공(MGM이 미국 내 배급했다는 의미)이라고 써있으니 미국 영화라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개봉 성공. 1963년 12월 7일 대한극장 개봉.
- 흑선(1958)#
- 굿바이(원제: 사요나라)
- 밤의 세계(1962)#: 밤문화를 다룬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1963년 1월 1일 대한극장 개봉.
- 행복한 고독#
- 동경비가#
- 검은 장갑#
- 귀국선#
4.2.2. 개방 이후
미디어캐슬과 박수엔터테인먼트가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98년 10월 20일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영화의 경우 공동제작 영화(20% 이상 출자 등 영화진흥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와 한국 영화인이 감독이나 주연으로 참여한 경우), 일본 배우가 출연한 한국영화, 세계 4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수상작들에 한해 개방했다. 이에 따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 한·일 공동으로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 등이 개방되었다. 비디오물(VHS, DVD 등)은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만 비디오 출시를 허용하였다. 정작 영화인들이 우려했던 '시장 10% 잠식' 우려는 기우가 됐는데, <하나비>와 <카게무샤>는 흥행이 부진해 3주 만에 극장가에서 내려갔다. 당시 저조했던 관객층마저도 중/장년층이 절반이 넘었고, 예상 고객인 젊은층들은 전쟁 장면을 기대했다가 지루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1999년 9월 10일 제2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전체관람가 영화로 확대(애니메이션 제외)되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대표적인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이 정책의 영향으로 한국에 정식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외 다수의 영화가 국내에 상영됐고, 2000년 6월 27일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으나, 그러나 2001년 7월 12일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논란으로 정부가 개방 일정 중단을 선언했다.
여파가 가시지 않은 2004년 1월 1일에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고, 2007년에 일본 문화 수입 제한과 관련 규제 조치를 철폐함에 따라 이로써 2007년부터 일본 영화, 음악, 게임등의 정식 교류가 이루어졌다.[40]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4.3. 만화
1999년 이후 한국판 뉴타입이 창간 및 발행된 시기이자 일본판 라이트노벨 역시 발행될 수 있게 되었다.
해적판이 아닌 정식 발매는 1989년 12월 아이큐 점프의 드래곤볼이 시초였다. 1991년 3월 1일부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외국만화 사전심의 확대를 실시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일본만화 정식수입의 길을 열어놓자 12월에 창간한 소년 챔프는 슬램덩크로 이에 맞섰다.[41]
간윤의 외국만화 사전심의제가 실시되어 일본 만화가 사실상 개방되자 만화 검열제에 의한 표현의 자유 제한에 일본만화 해적판의 무차별 유입으로 하도 허덕이던 토종 만화계가 위기를 맞음으로써 한국만화가협회(이하 만협)가 이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4월 2일에 서울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만협 역사상 첫 대외행사인 '만화심포지움: 일본만화 수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해 당국의 만화 정책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했다. 이 행사에서 이현세 화백이 발제한 <작가의 입장에서 본 우리나라 만화의 취약점>을 필두로 이희재 화백이 <왜 우리에게 일본 만화가 문제인가>란 요지의 발제를 했고, 만화평론가 손상익도 <현 심의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뒤이어 1992년 5월에 만협은 일본만화가협회 측의 자료 협조를 받아 280쪽 가량의 <일본만화 불법복제 자료집>을 내서 그간 우리 만화계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 온 음성적인 일본만화 베끼기 행태를 처음으로 고발했고, 그해 11월 3일부터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협 주도로 만화가 및 관련 인사 3백여 명이 모여 '불법만화 추방 캠페인'을 여는 한편 1993년 4월에 불법복제 만화 제작업체 15개소를 검찰 등 당국에 고발하여 불법 일본만화 추방운동을 거듭하였으나, 일본만화의 끊임없는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외국만화 사전심의제 역시 일본만화 개방으로 잘못 받아들인 대다수 만화 출판인들이 국제저작권협정상 저작권 계약이 불필요한 1987년 10월 1일 이전 발행분을 중점적으로 내려는 등 부작용이 나와 얼마 못 가 중단된 바 있었다.
1998년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자 일본 출판만화의 수입 제한이 완화되어 그간 번역을 전제로 했던 제한적 수입에서 벗어나 일본 이름 그대로 번역해 판매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에 맟춰서 대원씨아이가 일본 카도카와 쇼텐과의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서 1999년 6월 한국판 뉴타입을 창간하게 되었으며 광화문 한복판에도 뉴타입 창간을 알리는 현수막도 내걸렸다. 한국판 뉴타입은 1999년 7월호를 시작으로 2015년 6월호를 끝으로 종간될 때까지 16년간 발행하였다.
또한 국내 대형전문서점 최초로 영풍문고가 종로점 매장에 '''만화서적 전문코너 개설'''을 통해서 일본 및 한국만화 판매를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발로 교보문고, 반디앤루니스가 동참하게 되었다. 이전에만 했어도 만화책은 일본만화는 물론 한국만화도 홍대 한양툰크 같은 소매서점에서만 어렵게 살 수 있었던 편이었다. 사실 영풍문고도 이전에는 만화책을 판매한 적은 있으나 지금같이 전문코너에서 전시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비소설 코너의 구석진 작은 규모의 서가에서 진열하는 방식'''으로 판매하였다.
4.4. 게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와 한국닌텐도가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케이드 게임업계와 함께 일본 게임업계의 주류산업을 담당했던 비디오 게임업계는 '수입선 다변화 품목'의 규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일본 게임의 수입이 힘든 상태였다.[42] 수입선다변화품목은 외국과의 경쟁시 한국이 극도적으로 불리할수밖에 없는 산업분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에 해당되는 분야의 외국산 수입을 규제하는것과 비슷한데, 한국에서의 수입선다면화품목 관련 법규가 실질적으로는 대일수입규제책의 일종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일제 자동차[43] 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일본제 공산품 역시 수입규제 대상이었다. 물론 수입규제대상에 일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 한국경제가 수출에 목매달던 무역국가였다는 것도 감안해야한다.
하여튼 이 때문에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일본제 게임기(3~4세대 콘솔)가 몇몇은 정식 계약으로 한국에 정발되었지만 상당수는 북미판 기계를 우회수입하는 것에 가까웠다.[44] ]가 Nuon 기술로 만든 게임기 엑스티바로 최초 시판했다가 흥행하지도 못해 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탓에 전부터 일제 게임을 직접적으로 구하는것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 1995년,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우리 나라 비디오게임 업계사상 최악의 흑역사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음비법의 개정에 따라 게임 소프트웨어도 법적으로 '비디오물'에 포함됨과 동시에 '''정품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웃지못할 사태[45] 가 벌어졌고, 이에 따라 경찰이 오면 정품인데도 마약을 거래하듯이 눈치보며 거래를 해야 했고, 용산의 보따리상들이 주도하는 정품 블랙마켓시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정품조차 경찰이 단속하니 어차피 불법복제도 같은 불법이니 복제본을 쓰자는 논리가 통용되어 정품시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남아있는 정품도 슈퍼 패미컴의 파이널 판타지 6가 20만원, 플레이 스테이션의 파이널 판타지 7[46] 이 27만에 유통되는 시대가 온 상황이었다.[47]
결국 정품 시장은 북미 시장이 강세인 패키지 게임만 양성화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인터넷 시대로 가면서 온라인 게임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도 덤. 그나마 일본에서 제작된 몇몇 PC 게임은 왜색이나 선정성 문제가 없다면 한국어화를 거쳐 수입되기도 했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나 가이낙스의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 니혼 팔콤의 이스 이터널 등이 이 당시에 한국어화를 거쳐 국내에 소개된 인지도 있는 일본산 PC 게임들이었다.
그러던 와중 2000년 6월 27일, 3차 개방에서 게임의 개방도 통과되면서 정식으로 게임이 유통되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이때는 일본어로 된 게임은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2003년 9월 16일 4차 개방에서 완전 개방되면서 정식으로 일본어로 된 게임이 발매되기 시작했다.[48] 개방 직후에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강희원 대리는 "3차 개방 때 일본어로 제작된 게임 소프트웨어 수입이 허용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을 우회공급해 왔다"며 "게임 시장이 개방되면 일본에서 새 게임을 출시한 후 한국 상륙까지 3개월 가까이 벌어지던 시차가 줄어들고, 한글판 게임의 동시 제작도 가능해지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기대를 내비췄다. 이렇듯 업계도 개방에 호응하면서 일본어 음성/자막 게임이 활발히 수입되면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에는 BEMANI 시리즈를 언급할 수 있는데, 국내 수입 초기에는 아래에 서술될 음악 부분의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의상으로 일본어 보컬곡은 삭제되고 미디음으로 대체되었다. 게임에 따라서 곡이 아예 삭제되거나(ex: Ultimate power, DM Powerful MIX, ありがとね。) 또는 보컬만 삭제되거나(ex: 正論, 시리토리, 밤비나, 愛のしるし, MISS YOU 등) 영어보컬판이 있는 경우 그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ex: LUV TO ME) 현재는 개방 단계가 바뀌어서 일어 보컬곡도 무사히 수록되어 있다.
그 외 KOF 97~99의 경우 일본어로 된 음성을 대부분 기합소리 내지는 무음으로 교체된 기판도 있었다.
4.5. 음악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락카페, 롤러장, 디스코장 같은 곳에서 암암리에 뮤직비디오나 음악감상이 이뤄졌고, 역시 형레코드 같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일본 뮤지션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1988 서울 올림픽 때 소녀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게스트로 공연하긴 했지만 일본 뮤지션의 음반발매나 공연은 전무했다.
그런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 일본 뮤지션이 합법적으로 공연한 적은 있었는데, 바로 티스퀘어나 카시오페아와 같은 연주밴드들이 정식 공연을 했었다(티스퀘어는 1994년, 카시오페아는 1996년). 한편으로는 (씁쓸한 일이지만) 티스퀘어나 카시오페아처럼 국내 공연 초연 이전에 이미 국내 방송사에서 BGM으로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알게 모르게 이런 노래들도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개방 이후로도 영향을 줘서 초기에 연주밴드 음악이 많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방 당시에도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 기자 김갑식은 1998년 12월 26일자 기사에서 음악 개방 시 일본음악저작권협회로부터 저작권료 폭탄을 맞을까봐 걱정했다.
2차 개방에서 처음으로 2천석 이하의 소규모 공연이 허가되었으며, 3차 개방에서 좌석 제한이 철폐되었고, 4차 개방에서 음악 매체의 판매가 허락되었다. 다만, 여전히 지상파에서 일본 음악을 방송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아직까지도 일본어가 방송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방송법으로 일본어를 방송하는 것이 절대로 금지되어 있지가 않다. 애초부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진행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일본 음악이 금지라면 뉴스라던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일본어가 방송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야하며 처음부터 일본어로 된 단어 자체가 방송되지 않아야 되고 한국어 더빙판으로 번역되어서 방송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J-POP의 인기와 관심도가 낮아서 그렇게 많이 방송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프로듀스 48에서 내꺼야 (PICK ME) 2절에서 일본어 가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 일본어 가사로 나오네?"'''라고 신기하다면서 놀라는 경우도 꽤 있었다.
타블로가 꿈꾸라에서 m-flo의 노래를 선곡하는 등 엄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어로 가창된 유명 J-pop 곡들이 송출되고 있다. 신해철이 과거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일본 노래를 틀었다가 경고를 먹기도 했다.[49] 다만, 일본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어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나 영어로만 부른 곡들은 문제없이 나오고 있다.[50] 국내 방송에서 수많은 일본 음악이 BGM으로 삽입되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도 전에 SBS에서 카드캡터 체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준 적이 있다. 카드캡터 체리 3기가 인기리에 무사히 종영되고, 마지막에 엔딩곡이 흘러나오는데, 원작과 동일하게 'platina' 3기 오프닝 일본어 원곡 앞부분이 약 10초 정도 그대로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 PC통신 애니메이션관련 동호회에서는 난리가 아니었다.
다만, 비디오로는 공윤이 놓친 건지 종종 일어판 노래가 나오곤 했다. 1993년 무빅스 비디오로 2편까지만 출시한 아르슬란 전기 애니메이션은 일어판 엔딩영상에 일어판 노래가 하나도 안 자르고 심지어 엔딩에 일어 자막, 제작진 자막까지도 하나도 안 잘리고 모두 나왔으며 버블검 크라이시스트러스트판 비디오에서도 배경 노래에 작긴 해도 일본 노래가 분명히 나왔으며 1994년에 나온 아랑전설 애니메이션 금문영상 출시판에서도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일어판 노래는 그대로 나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사례가 있었다.[51]
4.6. 방송
애니맥스 코리아 개국의 시초가 되었고, 광복 65년만에 한일 애니메이션 동시방영 채널 애니플러스가 개국하게 되는[52] 시초가 되었다.
방송에서도 일본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일본 영상물이 방영될 수 있다. 근데 일본어로 된것은 안 튼다. 이게 일본어 영상물 팬 수가 적어서 지상파 방송에서 안 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즉, 일본어 자체를 지상파에서 트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2013년 유행으로 번진 진격의 거인 관련 뉴스를 지상파에서도 보도 했는데 오프닝의 일본어 가사는 절대 안 틀었으며[53] Bad Apple 스톱 모션 패러디물을 '소개'했을 때에도 BGM을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Bad Apple 패러디물인데 정작 그 노래를 안 틀다니? 이런 방식으로는 패러디 제작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54]
가끔씩 일본어 노래가 쓰이는 경우도 있으므로 전면 금지하고 있다기보다는 방송계에서는 웬만하면 일본어가 들리는 음악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어가 방송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케이블방송/오디오 채널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일본어 음성을 아무런 제약없이 틀 수 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시방영을 모토로, 일본 컨텐츠를 원판 그대로인 유지한채 자막을 입히거나 약간의 편집만 하는 케이블 방송국인 애니플러스가 들어섰고, 애니맥스 코리아도 이에 따라 한일동시방영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방송 분야 개방으로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분야는 울트라 시리즈, 가면라이더 시리즈, 슈퍼전대 시리즈[55] , 그 외 기타 등등의 특촬물, 그리고 아동층을 대상으로 한 애니들이다.
4.7. 코믹월드 등 일본식 동인축제 상륙
코믹월드가 1999년에 첫 시작을 하게 되었던 계기이자, 에스이테크노(델리타 한국법인)가 국내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56]
축제면에서는 1999년부터 일본 동인축제를 본딴 코믹월드가 서울에서 처음 시작하게 되었고 일본의 만화용품 브랜드 델리타가 한국법인인 에스이테크노를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국내에서는 코믹월드 이전에 만화 동아리인 ACA 전국만화동아리연합이 존재해 있었으나 지금의 코믹월드 같이 상업적인 형태는 아니었고 만화 매니아들 사이에서 즐겨왔던 단순 만화축제라 일반인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개방 이후 1999년 5월에 서울에서 1회 서울 코믹월드가 서울 동대문에서 첫 개최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최초로 코미케식 상업성 만화행사가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로 온리전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5. 개방 여파와 현황
5.1. 업계 등지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 전후로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의 영향과 중복되면서 일본 문화 콘텐츠가 대중적인 컨텐츠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오덕후들이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처음 개방 정책이 나왔을 때는 일본 문화에 의해 국내 문화가 잠식될지 모른다는 우려섞인 시선도 제법 많았지만, 이러한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출판 만화 시장과 애니메이션 시장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다수의 영역이 마이너리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예로 영화 시장의 경우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실사 영화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작품은 대중문화 개방 직후 개봉한 러브레터인데 이 영화의 관객 수는 약 115만 명 수준이며, 이후 러브레터의 흥행 실적을 넘은 사례가 없다. 2003년 이후 거의 매년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에 비하면 아무래도 초라해 보이는 실적이다.
오히려 역으로 일본에서 한류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일본 대중문화(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의 영향력이 쇠락한 영향이 컸다. 그렇게 2천년대 초중반 한류 배우들이 떴다면,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턴 K팝으로 불리는 보이, 걸그룹들이 일본 가서 히트치고 있는 실정. 이는 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봐도 자국 대중매체의 점유율이 높은 편에 속하는 국가인 점과도 무관치 않아보인다.
다만 애니메이션 같은 산업분야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에 자생적인 시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꼴이니 영향이 없지 않았다.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이어온 탄압과 투자지원제도의 미비로[57] 기반이 매우 부실해 있었던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본문화에 완전히 잠식되어서 뽀롱뽀롱 뽀로로 같은 아동 대상 컨텐츠를 제외하고는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이는 상술했듯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유입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미 한국 스스로 '만화는 나쁜 것'이라며 자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을 스스로 찍어 누르고 있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워버린 케이스라 일본 애니메이션 탓을 할 수는 없다.
한편, 출판만화 시장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다른데, 초창기 아이큐 점프나 챔프 같은 잡지가 창간될 시기만 하더라도,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대형 일본 만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국 작가들의 만화로 채워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잡지 대부분을 일본 만화가 잠식하던 때가 아니었다. 다만 그 이전부터 해적판 만화책은 이미 1952년 서봉재 화백의 <밀림의 왕자>부터 암암리에 존재했으며, 한국 만화계에 좋은 의미로든 좋지 않은 의미로든 꽤나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2000년대에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완전히 붕괴된 것이 가깝다.[58] 또한,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에 따른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및 만화가 기소, 이후 광랜이 보급되고 퍼져나간 불법 스캔본이 널리 퍼지면서 잡지만화시장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에 반비례하면서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웹툰과 학습만화가 성장하고 작가진들 대다수가 학습만화나 웹툰계로 이전한 상태다. 심지어 임달영 화백의 예처럼 해외에서 오히려 성공하는 사례도 있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계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으로 노골적인 표절 대신에 포맷이나 아이디어를 돈 주고 사오는 일이 정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적판 만화책이나 복제 비디오 등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보였으나, 그 자리는 마루마루를 위시한 불법스캔 만화와 무단 업로드된 애니 동영상이 해적판의 악명을 물려받았다.
2004년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 개방에 전진은 없는 상황. 5차 개방에 대한 논의가 2011년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의하여 벌어졌으나 유야무야되었다. 애초에 인터넷으로 접할건 다 접할 뿐더러 문화 개방을 통해 양국 모두 상당한 발전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관계로 개방 자체에 별로 큰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즉 더 이상 정부쪽에서 문화 개방을 위해 힘쓰지 않아도 문화 교류의 범위와 규모가 자동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
2010년대 중후반까지 한일양국의 정세는 냉랭하지만, 문화 분야에선 이미 상당부분 교류가 있었다. 한국의 뮤지션이나 아이돌이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하거나 TV출연으로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되었으며, 이에 미치진 못하지만 한국 현지에서도 일본가수의 내한공연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선 케이블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을 정식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콘솔게임 시장에서도 수 많은 일본 게임들이 한글화를 통한 정식발매가 이뤄진데다 모바일을 통한 일본 온라인 게임의 한국내 서비스까지 가능해졌다.
그 외에 양국의 문학작품들이 출간되어 작가들의 낭독회나 강연을 통한 교류도 넓어지는 실정이다.
5.2. 어린이 및 청소년
사실상 일본 문화, '''특히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주 소비층'''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및 청소년(이른바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은 전 세대인 '헐리우드 키드'의 후예로, 미국식 부와 자유를 향유한 전 세대와는 달리 일본 대중문화 산업의 오락적 기능에 철저히 함몰된 행동적 특성을 보인다. 그런고로 월트 디즈니나 마블 코믹스 같은 수천억 원짜리 미국 만화와 미국 애니메이션은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별 공감을 주지 못했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이 2000년에 쓴 <망가 vs 만화>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 상륙기인 1970년대에 알음알음 생겨나다가 1980년 컬러TV 방송 개시와 VTR 보급에 힘입어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집마다 안방극장을 통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면서 이 땅의 어린이들은 '변신 합체'니 '건담'이니 하는 것에 새로운 꿈과 환상을 접했다.
또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선대 세대들보다 먼저 드래곤볼이나 세일러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 등으로 이어지는 '애니판 환상특급'에 빠르게 적응하는 면역 체계를 갖추어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던 편이었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청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에겐 일본 애니는 일상 속에 속속들이 숨어 있다.
또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의 좋고 싫음의 표현은 명확하다. 아무리 토종 애니나 만화일지라도 일명 노잼이면 고개를 젓는다. 과거 헐리우드 키드들이 그토록 열광한 만화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나 애니 <홍길동>에서 열광했던 애국심 넘치는(?) 감상 따위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길이 없다. 일본의 <마징가 Z>를 흉내낸 <로보트 태권 V>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면 조금도 흥이 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일본 애니에 물들지 않은 순수 토종 애니 <아마게돈>이 흥행에서 망한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재패니메이션 키드들은 만화나 애니를 얘기할 때 월트 디즈니, 마블 따위를 입에 담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토종 만화나 애니를 거론하는 등의 문화 정체성조차 내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로 달달 외워왔던 얘기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든지 이 작품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화제 뿐이다.
또 손상익의 저서 <망가 vs 만화>에 의하면, 해당 세대의 특성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첫째'''. 다수의 공감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몰입한다. 그건 고도성장기였던 1980년대 3저 호황과 맞물려 탄생한 'ME 세대'의 광범위한 출현과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사회의 공통 덕목'이란 건 없다.
'''둘째'''. 이들은 일본의 '''역사적 속성'''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그걸 '''일본이 만들어내는 대중 문화'''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며 "역사를 잊었는가? 일제의 문화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라는 추상적인 민족주의적 생각이 아닌 완전히 둘을 별개의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35년을 경험한 건 그때 어른들이 잘못해서 당한 일일 뿐, 그들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부모가 사 준 소니 워크맨으로 영어 회화를 익혔고, 어렵게 구한 일본 만화책 원본을 구해다 일본어를 습득하였다.
'''셋째'''. 그들은 활자 문화보다 영상매체에 익숙한 감성세대들이며, 문어체 작문보다는 구어체 글쓰기에 더 익숙하여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글짓기에까지 '~하고요'가 아니라 '~하구요'로, '삼촌'을 '삼춘'으로 쓰는 만화체 대화 어법이 이들에겐 표준어로 굳어져갔다. [59]
'''넷째'''. 이전 세대인 헐리우드 키드에 비해 엄청난 분량의 대중문화 매체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런고로 나름의 정보 선별과 국제화 감각도 갖춘다. 당위성보다는 보편성, 애국심보다는 세계 시민적 속성이 강하다.
이후 2000년대 온라인 문화의 급속적인 발달로 그동안 TV에서 한국적 분위기로 수정되어 나왔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렸을 때부터 봤던 선배 세대들과는 달리 이후 세대들은 TV뿐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결과 고질적인 불법 업로드 및 다운로드 유행과 토렌트 등의 등장으로 이때를 계기로 이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XXX를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한다면''' 드립과 한국 성우 까대기 현상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60]
문화개방 이전만 했어도 지금 같이 컴퓨터가 아닌 TV로만 볼 수 있었고, TV로 봐도 대부분 한국 성우진의 육성녹음으로 나오고 한국적 분위기로 대폭 수정한 개정판으로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보면 문화개방이 사실상 '''그 동안 봐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알고 있던 작품들이 사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오해를 풀어내게 된 계기도 되었지만[61] 대신 그 옛날 YWCA 아줌마처럼 돌변한 철부지 일부 청소년들의 더빙까가 극성을 부리고 국내 성우진들이 사실상 명예훼손을 당하게 되는 계기를 방도하게 되었다는 단점도 가졌는데 이것은 사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폐해에서 나온 것이다.
할리우드, 알앤비, 소울, 힙합, 패스트푸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문화 등 서구문화, 홍콩 영화 등에 밀려 한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일본의 문화가 1990년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을 계기로 어느정도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일반화하긴 애매하지만 점차 일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6. 개방 이후 반일정서가 약해졌는가?
선대 청소년들이 서구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다면 그 당시 청소년들은 일본문화 개방 및 온라인 문화의 발달로 그 동안 한국에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본문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증가하게 되었고, 온라인에서 일본여행 등을 다녀왔던 후기 등만 봐도 대부분 청소년들이 댓글을 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세대가 단순히 일본 칭찬 정도에 그쳤다면, 이 세대부턴 일부에서 국까적 성향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해서 갖은 일본 찬양 및 한국 혐오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양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일본에 대한 우호도는 예전보단 감소한 추세이다. 이는 2006년을 기점으로 생겨난 미드 열풍과 이전부터 꾸준히 흥행하던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이후 게임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그동안 인지도가 낮던 북유럽이나 독일[62] 등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대폭 늘어난 영향도 있다.[63] 고로 개인 사이의 우정이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 친근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정치/역사적으로는 아직 앙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1990년대 일본 문화 개방을 전후 해 일본 문화를 접한 당시 청년 층이었던 70~80년대생 사이에서도 일본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보다 더 심한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한 단계 더 나아가 혐일 성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64] 해당 세대 내에서 그런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소수의 담론으로 취급되며, 주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정치와 문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현실적으로 정치를 떼놓고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일본과 한국의 양국 국민들의 생각도 서로 다르다. 한국 국민들은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에 진정성 있는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일본 국민들은 한국인들과 한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반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역사적인 문제로 많은 갈등이 심화가 되고 있는 상황이고, 국가마다 역사해석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동일한 것은 어렵다. 따라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반일정서가 약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반일 정서가 강화되어 왔으며, 더 나아가 혐일의 단계에 다다르기도 한 것이다.[65]
그래도 일본문화는 지금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국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데, 특히 만화/애니메이션/게임/클래식 음악/인디 음악 등의 애호가(매니아) 층이 중심이 된 문화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게 되면 한국 내에서 영미권 문화 다음으로, 분야에 따라서는 영미 문화 컨텐츠 이상의 일본 문화 매니아 층이 존재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팬덤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66] 물론, 매니아 층이라도 역사수정주의 등 극우 냄새가 나는 작품은 대놓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깐다. 혐한 성향의 만화가 쿠메타 코지는 한국 매니아층에서도 욕을 바가지로 먹는 중이며, 루리웹 등에서는 지금도 극우와 관련된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신랄하게 까는 리뷰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일본문화를 개방하고 한국인들이 일본문화에 친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으로 반일감정은 더 거세지고 혐일에까지 다다라 한일관계는 오히려 퇴보했다는 시각도 많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발언이 일본에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으로 반일 카드는 한국 내 정치 세력이면 어느 진영이나 이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고, 중국의 부상과 위협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역내 한국과 일본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국내외에서 등장하고 있지만,[67] 지금도 한국 국민들 중 많은 수는 정치와 과거사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일본을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다.
2010년대의 한일갈등, 후쿠시마 원전 사태 논란, 방사능 논란, 욱일기 논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 초계기 갈등, 한일기본조약 청구권 해석 논란, 일본 상품 불매운동으로 양국은 민족주의나 역사적 관점 차이 문제로 인해서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한 루리웹/비판을 보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게 반일이 희석되었다고 해석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본문화를 알게 될수록 일본에 더욱 반일을 하게 된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구호도 2010년대부터 거세진 반일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현재 한국 내에서 일본의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 정도를 제외하면 많은 수의 한국 커뮤니티들은 대체로 일본에 부정적이고, 일본에 대해 비난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사이트들이 많기 때문에, 일본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칭찬조차 친일파라고 배척받으며 받아들이지 않는 강박적인 집단주의 분위기가 강하다.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국민정서가 높은편이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이 대부분 극단적 시각을 가지고 현재의 일본인에 대한 인종혐오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고 하는 혐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친 반일을 경계하고, 한국 내 혐일을 비판하는 소수의 의견조차 "너는 한국인 아니냐? 친일파 매국노냐?"라는 혹은 "너는 토착왜구냐?"와 같은 전체주의적/인종주의적인 비난을 하며 일본을 향한 공격적인 댓글과 혐오표현을 애국으로 여기고 있다.
국뽕 유튜버들도 일본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상당히 심하다고 할수 있다. 일본은 후진국이다, 일본은 망한다는 동영상을 게시하며 혐오의 확대재생산을 하고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혐일을 선동한다. 이는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한국이 곧 망할 국가라고 선동하는 혐한, 넷 우익의 행태와 닮았다.
아직도 일본에 대해서 역사문제로 적대감이 한국인들에게 뿌리깊기 때문에 최근의 불매운동이나 역사논쟁으로 더욱 과격한 반일운동으로 바뀌어 가고 있고, 양국 간 관계가 강대강 대치로 유지된다면 양국의 혐일 세력과 혐한 세력이 더욱더 힘을 얻으며 한일관계가 악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불어 한일 관계에는 언제나 미국이 사이에 끼어있는데, 이는 곧 한일 갈등이 양국의 반미 감정에 불을 붙일 수도 있는 사안이라는 의미라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여겨진다. [68]
7. 만약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았다면?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래도 만약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일단 북한 관련 자료(국가보안법 7조 위반[69] )나 음란물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0] 물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어떻게든 찾아볼 사람은 찾아봤겠지만 이것 역시 인터넷을 통한 편법 다운로드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확률이 높을 테니 정부가 일본 관련 아이피는 전부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 차단하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하면 이걸 뚫을 수 있는 일부 능력자들 외엔 지금까지도 일본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떨어졌을수도 있다. 또 여전히 방송사 애니는 현지화 범벅에 일본영화나 드라마의 국내 정식 개봉이나 TV 방영, 합작 등의 활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중국처럼 제한적 규제를 가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인터넷 등에서 그것도 요우쿠 등 동영상 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것들만 볼 수 있으며, 중일관계가 좋지 않게 흘러가면 일본 대중문화에 제재를 가하는 등 일종의 보복을 하기도 하는데, 적당히 풀어서 민심을 달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허용하는 것이다.[71] 이럴 경우 한국은 민주국가라는 특성상 보복성 제재는 가능성이 낮겠지만[72] 그래도 일본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상술했듯이 정부에서 일본과 관련된 사이트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 차단하면 일부 능력자들 외에는 지금처럼 많은 정보량을 습득할 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여파로 2000년대 후반에 초창기 시절 엔하위키를 지탱해준 한마디로 위키러 수를 늘려준 상당수 일본 문화 관련 문서들의 탄생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음에도 생각보단 파괴력이 약했고, 되려 일본에서 한류가 흥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굳이 차단하지 않아도 매니아 영역에서 일정 부분 지분을 확보하는 선이었을테지만 말이다.
참고로 80년대부턴 일본 문화 개방 이전이라도 일본 애니를 보는 것 자체를 막는 조치는 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 TV 안에서 애니를 트는 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부터는 일반인들도 인터넷으로 일본 애니를 어찌어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완전개방이 된 2005년 이전까지의 기간에는 반쪽짜리 개방이래도 TV로는 안되지만 인터넷으로 보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는 다들 알다시피 대다수 일본산 애니가 방영을 허용받다못해 한일 동시 방영도 하고 있지만 일부는 선정성 등으로 검열과 경고, 주의 조치를 받기도 한다.[73]
한편, 개방되지 않았더라면 일부 분야에는 혜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령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TV에서 방영하기 위해 한국어 더빙과 현지화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국 성우들의 활동량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론 측에선 어차피 인터넷 대중화로 불법 공유 등이 생겨 일본 애니를 어둠의 루트로 받아보는 사람들이 늘었을거라 큰 차이 없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하며,지금까지 있었던 일본 드라마 더빙이나[74] 아동용 특촬물 더빙도[75] 수입 금지로 인해 전부 없었던 일이 되므로 그만큼의 국내 성우 활동량은 확실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또한, 국내 성우의 활동량이 증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의 맹점은 모든 외국 영상물이 아니라 오직 일본의 영상물만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화극장의 영화 더빙이 줄어드는 등 일본 영상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영역에서도 더빙 경향은 줄어들었고, 만약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은 애초에 정식수입도, 방영도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더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76]